배우와 연기-2
배우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방해하는 것들
-류 성-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배우는 연기의 주인이다. 배우는 연기에서 자신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구현되기란 매우 어렵다.
예술가를 둘러싼 제반 조건들은 예술가로 하여금 자기 작업의 주인이 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 중에는 경제적 문제, 작품에 대한 검열-자기검열을 포함한-, 창작구조, 기량 등과 같이 공통적인 것도 있고 각 예술의 장르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개별적인 것도 있다.
그러나 배우가 처한 조건은 좀 더 특수하며, 가해지는 압박은 보다 더 강력하다.
첫째, 배우는 선택된다.
다른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작업을 선택하고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는 누군가에 의해 캐스팅되어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캐스팅 되지 못한 배우의 작업은 연습일 뿐이다. 배우는 역할을 맡았을때 비로소 창조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배우를 선택하는 사람들-연출가, 기획자, 작가 등-은 작품의 흥행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배우의 성장을 책임지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떨어지기 쉽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그려낸 인물과 가장 유사한 외모, 목소리, 연기스타일 등을 가진 배우를 캐스팅하려 든다.
캐스팅된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창조적 해석에 도전하기보다는 자신을 선택한 이들이 미리 그려놓은 이미지에 맞추려 들기 쉽다. 배우들은 다음 작업의 기회를 얻어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인물에 대한 해석이 다르더라도 다음 작업의 기회를 얻기 위해 선택권을 지닌 자들의 요구에 쉽게 복종한다.
보다 민주적인 극단에서는 집단적인 토론을 통해 배역을 결정하기도 하고, 배우들이 자신이 맡고 싶은 배역을 연출가와 집단에게 피력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배우들은 일방적으로 선택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러한 조건으로 하여 배우는 의식 혹은 무의식중에 위축된다.
둘째, 연극작업의 관행이다.
연출가는 연습과정에서 배우의 연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연출가는 배우가 인물을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그러한 원칙이 잘 구현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연출가는 배우에게 무엇을 어떻게 연기하라고 '지시'하고 배우는 그 지시에 '복종'한다.
근대에서부터 시작된 연출가의 독재현상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많은 연출가들은 배우들을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는데 쓰일 하나의 수단으로 다룬다. 그들은 배우, 디자이너, 작가, 연출가 등 작업에 참가하는 모든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작품이 창조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작품의 처음과 끝이 자신의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배우와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그대로 따를 것을 요구한다.
실제 연습과정에 들어가보자. 연습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도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연습은 작품이란 결과물을 뽑아내기 위한 공정에 가깝다. 자연히 배우에게도 '연기의 결과'만 요구하기 십상이다. 배우의 탐구와 도전이라는 '연기의 과정'은 쉽게 거세되거나, 순전히 배우 개인의 몫으로 돌려지게 된다. 배우는 창조적 연기에 도전하고 고심하기보다는 차라리 정해진 공정에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데 신경쓴다.
라이센스 뮤지컬 등은 정말 심각하다. 블로킹과 제스쳐는 두말할 것도 없고, 특정한 타이밍에서 지어야 할 표정, 손을 들어올릴 때의 각도까지 정해져있고 배우는 이를 준수해야 한다. 배우가 자신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연기할 수 있는 여지는 아주 협소하다.
셋째, 배우 스스로의 문제이다.
예술가로서의 철학과 자존심이 있는 배우들은 불리한 객관적인 조건들을 극복해낸다. 그러나 철학과 자존심이 없는 배우들은 조건에 상관없이 연기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사색과 노력으로 역할을 창조해낸다는 사고를 하지 않는다. 연출가의 지시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이 배우의 임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움직인 결과를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을 연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 창조해냈다는 기쁨을 잘 모르며 관객의 박수를 받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말이다.
기술이 없는 배우도 연기의 주인이 되기 어렵다. 대본과 역할을 해석할 줄도 모르고, 연기의 기술도 모자란 배우들은 연습 때마다 연출가를 답답하게 만든다. 이에 못 견딘 연출가는 결국 무대로 뛰어들어 이것저것 지시하고, 그것도 모자랄때는 직접 시범까지 보이며 똑같이 따라하라고 요구한다. 배우는 이유도 모르면서 따라하려고 애쓴다. 똑같이 따라하기도 불가능하거니와 연기의 생생함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린다.
창조의 정신이 없는 배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새롭게 창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이 이미 해보았던 연기 패턴 중 적당한 것을 골라 쓴다. 대개 그것들은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거나, 스스로에게 익숙해져 있기에 안심이 된다. 보수적이고 안주하는 그들은 나쁜 의미에서의 프로-직업인-로서 작업한다.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라면, 배우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방해하는 많은 조건들은 제거되거나 변화되어야 한다. 오디션과 캐스팅이란 제도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연출가들은 배우의 가능성을 귀중히 여기고 '지시'할 것이 아니라 '지휘'해야 한다. 결과를 뽑아내기 위한 공정으로서의 작업이 아니라 과정과 성장에 초점을 둔 작업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들이 시작되고 완성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배우들이 변해야 한다. 배우가 변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시작되지 않으며, 설령 다른 누군가에 의해 시작된 변화라도 결국에는 물거품이 될 것이다.
2009년 6월 2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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