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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배우와 연기-4 주견을 가지고 역할을 대해야 한다

배우와 연기 4

주견을 가지고 역할을 대해야 한다

-류 성-

배우는 자기 자신과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연기한다. 그러므로 흔히 배우들에게 '이해심이 많아야 한다', '열려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조언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렸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배우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열려있기도 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과 삶에 대한 자기 견해를 확고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그것은 배우에게도 강화되어야 할 부분이지 거세되어야 할 부분은 아니다. 이해란 자기 자신을 버린 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확고한 주견과 열린 마음은 서로 배치되는 성격의 것들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를 강화시켜 줄 수 있다. 주견에 대한 강조가 없이 열림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결국 배우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말 것이다. 주견이 없는 배우는 텍스트에 쓰여진 역할에 끌려다닐뿐 스스로 역할을 창조하지 못하게 된다.


아이는 자라면서 언젠가부터 "싫어!"라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신호이며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생성된 아이의 정체성은 외부세계와의 충돌과 수용을 반복하며 새로운 단계로 올라선다. 오히려 '싫어!'라고 말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문제가 있다. 주는대로, 이끄는대로 따르는 그 아이더러 어른들은 '순하다', '착하다'라고 칭찬할지도 모르지만, 실상 그 아이는 정체성이 생성되지  못하고 억눌려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아이의 육체는 정상적으로 성장하더라도 정신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누군가에게 끌려다니거나 휘둘리게 된다.


배우가 역할에 대해 작업한다는 것은, 역할을 깊이 이해하고 체험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역할을 대할 때, 그저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 그런 태도로는 역할을 이해할 수 없으며 창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확고한 자신의 주견을 가지고 역할을 대해야 한다. 그래야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이 역할에 대한 이해의 길을 열어준다.


배우는 역할의 심층을 이해하기 위해 배우는 무엇보다 텍스트에 드러난 역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주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야 '왜?'라는 의문을 강하게 가질 수 있다. 예컨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지?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 '왜 이렇게 거칠어? 뭐가 널 그렇게 독하게 만든거야?', '왜 하필 그런 식으로 얘기 니가 원하는게 대체 뭐야?' 와 같은 의문들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배우는 역할의 심층에 접근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이해심이 많다'고 평가 받는다. 누군가 그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는 절대로 '내 생각은 달라. 왜 그랬어?'라고 말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래, 그럴 수 있어. 이해해.'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누구와도 크게 부딪히는 일이 없다. 그는 정말 높은 이해심을 발휘하고 있는건가? 아니, 그는 처세술을 발휘하고 있다. 단지 부딪히지 않고,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적당히 맞춰줄 뿐이다. 사실 그는 아무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맡은 역할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배우들은 역할에 대한 작업을 너무 편하게 한다.  그들은 역할을 괴롭히지 않고 역할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는다. 서로 싸우지 않으며 사이좋게 지낸다. 역할의 대사를 대신 내뱉고 액션을 취해주며, 거기에 적절한 감정을 덧붙여 준다.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화난  척하며 소리치기, 슬픈 척하며 울먹이기, 즐거운 척하며 웃기 등이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그렇게 만들어진 연기는 역할의 심층을 드러낼 수 없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지고 매력도 없다. 무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표현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것들이 묻어나오지 않는다. 빙산의 일각인 감정만 전달할 뿐 수면 아래에 감추어진 거대한 것들은 암시되지 못한다.


좋은 배우들은 다르다. 그들은 텍스트에 쓰여진 역할의 말과 행동에 그저  끌려다니지 않는다.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주견을 가지고 접근한다. 수많은 질문을 제기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다툰다. 그럼으로써 역할의 심층에 가 닿고, 그렇게 찾아낸 것들을 기초로 역할을 창조한다. 그들의 연기에는 작가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드러난다.


2009년 7월 1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