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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서양연극사 연구4-르네상스시기의 연극

서양 연극사 연구4-

-류 성-


 

르네상스 시대의 연극


1) 개괄


중세후반과 르네상스는 공존했다. 중세적 요소가 1500년까지 지배적이었지만, 르네상스도
1300년에 시작되었다. 중세의 몰락과 르네상스의 출현은 둘 다 부분적으로 중세식 봉건주의의 몰락, 도시의 성장, 군주의 권력 강화, 학문과 생활을 지배해 온 교회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되었고, 그리하여 중세문화를 잠식한 요소들은 르네상스 문화를 창조하는데 결정적이었다.

 '재생'이란 뜻을 가진 르네상스는 고전세계의 인문주의적 이상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하며, 인간성의 가치를 옹호하고 현세적 삶에 대환 관심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르네상스 운동과 자연히 그리스 로마의 고전작품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고전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초기에 대학을 중심으로 유행했고, 인쇄술이 개발되면서 널리 퍼졌다. 인문주의를 최초로 옹호했던 그리스 로마 세계의 연극은 동시대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 시기에 연극은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성경의 내용을 다루던 드라마는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축제를 중심으로 공연되었던 연극은 대중극장의 설립과 더불어 연중 공연되었고, 직업적인 작가, 연출가, 배우, 무대디자이너 등이 출현했으며, 상업적 시스템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비평과 이론분야가 활성화되어 신고전주의 이상이 확립되었다. 원근법이 개발되어 무대배경의 일대혁신이 일어났고, 실내공연이 많아지면서 조명기술도 발달했다.

 유럽 각국의 연극은 르네상와 더불어 소위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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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5년 경 보티첼리 그림 <비너스의 탄생>
 르네상스 시기 예술의 특성을 잘 드러내준다.

 

2) 이탈리아의 업적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2)되었고 이탈리아의 연극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학자와 예술가들은 유럽각지로 초빙되어 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예술을 선보였다. 유럽 각지의 작가, 무대 디자이너들은 이탈리아로 유학을 왔고, 이탈리아 극단들이 유럽 전역에 방문하여 공연했다.

 신고전주의적 이상을 확립하여 유럽 각국의 비평계와 극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고전주의에 대해서는 르네상스 연극 후반부에 따로 기술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 대한 연구에서 탄생된 오페라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극형식으로 발전했다. 초기에 궁정이나 학술원에 국한되었으나 연극보다 더 인기를 끌어 배네치아에 4개의 대중 오페라 극장이  운영되었다. 오페라에 인테르메쪼3)의 볼거리들이 결합되어 공연은 화려해졌다. 곧 오페라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고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아르테 극단은 18세기까지 유럽전역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즉흥연기4)와 유형적 인물이 기본특징이며, 비극적인 작품이나 멜로드라마적인 것도 있었으나 사랑과 음모, 변장, 동문서답식 문답놀이를 주로 하는 희극이 인기를 끌었다. 10명-15명으로 구성된 극단은 주주제로 조직되었고 봉급을 받는 젊은 배우들도 있었다. 궁정을 비롯한 실내무대에서도 공연했고 각지를 유랑하며 순회공연도 했다. 코메디아 델아르테 극단들은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각지에도 초청되었으며 각 나라의 연극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 로마 시기의 무대장치에 대한 연구에 새로 개발된 원근화법5)과 무대전환장치들이 결합되었다. 극장의 건축은 점차 프로시니엄 아치를 갖추게 되었고 무대의 깊이도 상당히 깊어졌다. 마술과 같은 환영을 창조한 이탈리아 무대배경과 장치는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이탈리아 무대디자이너들은 유럽 각국의 궁정으로 초빙되었다.

 이탈리아는 조명기술에서도 혁신을 이루었다. 양초와 오일램프를 이용했고 색상을 만들기도 했다. 수정원구, 금속조각 등을 이용하여 해와 달, 번개도 연출되었다. 실린더를 이용하여 광도를 높이거나 낮추는 방법도 개발되었다. 이론가들은 현대에 와서 주창된 것과 유사한 여러 조명 예술적 원칙도 만들어냈다.


3) 르네상스 시기의 드라마와 작가


 세네카, 테렌스, 플라우투스의 작품들이 널리 읽혔고, 곧이어 고전형식을 따른 비극과 희극이 쓰여졌다. 초기에는 라틴어로만 쓰여졌고 실제로 공연되지는 않았지만 얼마후 전문적인 작가들에 의해 자국어로 된 작품이 쓰여져 실제로 공연되기 시작했다. 학자와 비평가들은 신고전주의적 이상을 확립하고 극작의 규칙을 제시했다.

 이 시기 유럽 각국의 극작가들은 엄청난 수의 작품을 쏟아냈으며, 현재까지도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로뻬 데 베가, 세익스피어, 라신느, 코르네이유, 몰리에르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작가들이다.

 작품의 주제는 종교적 주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을 다루는 것으로 전환했다. 그렇지만 기독교와 고전의 가르침에 기초한 인간의 덕과 이상을 옹호했기 때문에 비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의, 예의, 관용, 성실, 충성, 용기, 타인에 대한 의무 등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금욕주의는 아니었으며 쾌락과 유혹에 약하며 실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의 성향을 인정했다.

 비극은 영웅비극6)과 역사비극, 가정비극 등이 유행했고, 희극은 당대의 풍속을 담아내거나, 감상주의적인 작품들이 유행했다. 장르 혼재적인 희비극도 인기를 끌었으며, 목가극7)도 유행했다.

 극을 팔고자 하는 작가는 극단의 주주들 앞에서 극을 낭독했다. 극을 구입하면 극은 극단의 소유가 되었다. 오래된 극을 개작하거나, 새로운 장면을 추가할 때도 보수를 받았다. 어떤 작가들은 해마다 3편의 작품을 쓴다는 등의 조건으로 전속계약을 맺기도 했으며, 극소수지만 봉급을 받는 작가들도 나타났다.

 보통 작가들은 자신들이 어떤 극단을 위해 극을 쓰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작품은 극단 규모와 각 배우들의 솜씨에 맞추어 썼다. 신작일 경우 리허설에 참가하여 대본을 분석해주거나 배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6) 르네상스 시기 배우와 연기

 
전문적이고 직업적이 되었지만, 배우들은 자기 대사가 적힌 대본 쪼가리를 나누어 받을 뿐이었고, 리허설은 몇 회 되지 않았다. 매일 공연 레퍼토리를 바꾸었기에, 배우들은 여러 배역을 동시에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일단 역할을 배우게 되면 그 역할을 소유하여 극단에 남아있는 동안은 계속 그 역을 연기했으며8), 24시간 전에만 예고하면 바로 공연에 임할 수 있어야 했다.

 대체로 배우들의 동선은 관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주인공은 무대 앞 중앙을 차지하고 조연은 그 주위에 서서 반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상대배우가 왼쪽으로 가면 자동으로 오른쪽으로 이동했고, 관객들에게 좀처럼 옆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사는 배우들끼리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향해 던졌고, 내내 서서 연기를 했지 의자에 앉거나 바닥에 눕는 일도 없었다. 관객이 박수를 치며 앵콜을 외치면, 죽었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관객에게 인사를 한 후 다시 죽는 연기를 해보였다.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배우였으므로 의상은 매우 중요한 시각적 요소였다. 종종 극자체를 위한 비용보다 여성 등장인물의 의상에 더 많은 비용이 들었을만큼 화려하고 비쌌다. 그러나 역사적 고증과는 무관했으며 당시 시대 의상을 그대로 입는 식이었다.

 극단은 배우들이 중심이 된 주주제로 조직되었고, 이들 외에도 봉급을 받는 배우들이 있었다. 주주들은 상당히 부유했지만, 봉급을 받는 배우들은 매우 열악했고, 봉급 전액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봉급을 받는 배우들은 조연을 연기했는데, 좋은 명성을 갖게 된 자는 지분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극소수였다.

 배우들에게는 행동규범이 있었고, 이에 따라 리허설에 늦거나, 공연에 늦거나, 술에 취해 공연하거나, 공연을 빼먹거나, 극단 기물을 탈취하는 행위들에 대한 벌금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배우들은 있었지만, 배우 자체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루이 13세는 "배우라는 직업이 사회에서 비난받거나 편견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포고했지만, 교회와 성직자들은 여전히 배우들은 부도덕한 존재라며 적대적이었고, 배우의 결혼과 장례에 대한 성례를 거부했다.


7) 공연 풍경

 
영국의 경우 극장의 소유권은 건물지분을 가진 극장주들에게 있었고, 극장주들은 극장을 대여했고 입장수입의 절반을 가져갔다. 극장주들은 기업가들이었다.

 허가된 극단9)만이 허가된 시즌에만 공연을 올릴 수 있었으며 공식 애도기간, 흑사병 등의 전염병이 우려될 때, 전쟁 때는 극장 문을 닫았다. 축제와 상관없이 공연이 행해졌으므로 극단은 공연홍보를 위해 애써야 했고 관객유치를 위해 애써야 했다. 포스터가 붙거나, 전단을 뿌리거나, 행진을 했으며 신문광고도 나왔다.

 초기에는 오후 중반에 공연을 시작했으나 차츰 뒤로 바뀌어 5-6시에 시작했으며 3시간에서 5시간까지 공연했다. 공연프로그램은 본극과 짧은 소극으로 구성되거나 2-3개의 공연이 이어질 수도 있었고, 음악, 노래, 춤, 곡예 등의 프로그램으로만 짜여질 수도 있었다.

 공연 중 이동은 흔했고 공연 내내 음식과 음료 판매도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경우, 많은 관객이 검을 차고 있었으며 피트석에서의 싸움도 흔했다. 스페인의 경우에는 관객들이 배우들에게 과일을 던지거나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배우들도 관객의 반응에 기분이 나빠지면 공연을 멈춰버리기도 했다. 이 시대 관극모습은 오늘날의 스포츠 행사의 관람풍경과 비슷했다.

 물론 극장에서의 공연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극장이 아닌 장터, 행진, 의식 등에서 공연들도 여전히 존재했다.


8) 신고전주의적 이상


 그리스 로마 고전의 부활로 인해 이탈리아 비평가들은 신고전주의적 이상을 주장했다10).    신고전주의의 기본적 요구는 박진성이다. 이 개념은 배우의 연기가 관객의 경험·지식에 비추어 받아들여질 수 있거나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진성은 다시 사실성, 도덕성, 보편성이라는 하위개념으로 나뉜다.

 사실성이란 극작가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주제를 사건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고전주의 극에선 환상이나 초자연적 사건은 신화, 역사 혹은 성경에서 나온 이야기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면 다루어지지 않았고, 다루어질 경우에도 가능한 최소화되었다. 독백이나 코러스도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이유로 다루기를 꺼렸다. 전투, 군중장면, 폭력, 죽음 또한 무대에서는 설득력 있게 재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대 밖에서 일어나게 했다.

 도덕성은 인생을 사실적으로 모방하는 것 외에도 이상적인 도덕적 귀감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고 공명정대한 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그의 힘과 정의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정의에 명백히 어긋나게 보이는 사건은 사실이더라도 극의 주제에 부적합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극은 도덕과 정의와 분리될 수 없는 궁극적인 진실을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보편성은 혼란스러운 외면적 세부사항에서 진실을 찾기보다는 모든 현상에 공통되는 특질안에서 표준적인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진실은 현상에 대해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극작의 몇 가지 법칙들이 제기되었다. 희극과 비극이 순수한 극의 형식이며 다른 형식은 혼합되었기에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희극과 비극은 다음과 같은 규범을 지켜야 했다. 희극은 중류, 혹은 하층 계급이 등장하고 가정사나 개인적 용무에 기초하며 행복한 결말로 끝나고 일상회화를 모방했다. 비극은 주인공이 지배계급 출신이고 역사나 신화에 근거하며 불행한 결말로 끝나고 고결하고 시적이어야 했다.

 인물창조에서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본성이 아니라 인간본성의 영원한 양상들에 관해 써야 했고, 이를 위해 나이, 계급, 성, 직업, 성향에 따라 범주화된 특질이 기술되었다.11)

 연극의 기능 중 특히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였는데 희극은 피해야할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조롱함으로써, 비극은 실수나 그릇된 행동의 무서운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교육적 목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행동, 시간, 3일치의 법칙도 형성되었다. 극은 단일 플롯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24시간 혹은 그 이하의 시간 내에 사건이 발생해야 하고, 장소는 한 곳에서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정규극은 반드시 5막을 가져야 한다는 법칙도 채택되었다.

 신고전주의적 이상에 따른 법칙들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수용되었고, 극이 이 법칙에서 멀리 벗어날수록 열등하다고 간주되었다. 신고전주의적 이상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으로 퍼져 18세기 후반까지 비평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에 맞게 쓰여진 연극은 실제로 대다수 관객의 호응을 받지 못했으며 학자들과 비평가들에게만 중요했다. 게다가 그리스 로마 고전의 관습과도 상당히 달랐다. 많은 작가들이 이 법칙을 준수하려고 했으나 또 그만큼 많은 작가들은 법칙에서 종종 벗어나거나, 의식적으로 거부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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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로뻬 데 베가


1)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연극이 악마가 사용하는 수단이며 악을 조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이나 다른 유용한 일을 못하게 한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또 한쪽에서는 도덕을 가르치고 덕행으로 유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반박했다. 중세적 사고와 르네상스적 사고의 충돌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작용했다. 콘스탄티노플이 몰락할 때,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 극의 원고를 가지고 이탈리아로 왔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 부를 성취했고, 비잔틴, 이슬람, 아시아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쉬웠다.


3)막간 오락의 일종인 인테르메쪼는 이탈리아의 궁정 오락에서 비롯되었는데 희극과 결합되었다. 정규극 5막의 앞과 뒤, 막과 막 사이에 공연되었으므로 보통 6편이 공연되었다. 인테르메쪼는 본극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곧 본극보다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 본극에 비해 인테르메쪼는 음악과 춤, 특수효과 등 볼거리가 많았다. 인테르메쪼는 오페라의 막간에도 사용되다가 점차 오페라로 흡수되었고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졌다.


4)시나리오에는 대강의 줄거리와 장면의 구분, 등퇴장의 표시 등만 적혀 있었다. 배우들은 임기응변에 능해야 했고 상대배우의 연기에 집중해야 했다.


5)원근법과 프로시니엄 무대와 관련은 깊다. 원근법에 의해 그려진 배경그림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액자와 같은  틀이 필요했으며, 또한 객석이 무대전방에서 직선으로 놓아야 했다. 여기에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사고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중세와는 달리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하나의 고정된 지점에서 보일 수 있는 사물만을 묘사하고자 했다. 중세예술에서는 다수의 장소가 동시에 펼쳐졌지만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연속적으로 표현했다.


6)영웅비극의 줄거리는 대개 다음과 같다. 이상적 영웅과 아름다운 여주인공의 사랑이 가족 혹은 조국을 파멸시키거나 불행하게 하는 사건으로 빠져들게 한다.


7)사튀로스 극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이는 목가극은 양치기와 요정이 있는 목가적인 사회가 배경이며 주요 주제는 사랑이었다. 주요내용은 주인공이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8)데이비드 개릭의 경우 96개의 배역을 외우고 있었으며, 환갑이 될 때까지 햄릿역을 맡았다. 어느 여배우는 은퇴할 때까지 줄리엣이었다. 배역이란 공연 때마다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번 맡은 배역은 평생 소유하는 개념이었다.


9)허가받지 못한 극단들은 허가증을 위조하는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공연을 했다. 허가를 독점하기 위한 극단끼리의 음모와 경쟁도 치열했다.


10)신고전주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었다


11)그 결과 신고전주의 극의 인물은 유형적이 되었고, 유형의 인물이 자신에게 맞는 행동을 하면 행복해졌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졌다.


12)종종 3일치의 법칙이 그리스시대부터 성립된 것이라고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동의 통일이 이상적이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시간의 통일과 장소의 통일은 16세기에 성립된 것이다. 시간의 통일과 장소의 통일이 주장된 것은 사실성의 요구 때문일 것이다.


13) 로뻬 데 베가는 ‘나는 천한 조류에 나 자신을 낱겼다. 때문에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나를 무지하다 했다. 내가 쓴 483편 중 6편을 제외한 모든 극은 예술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내가 쓴 것을 옹호한다.’, 배티스타 구아리니는 "현실에서는 희극과 비극이 섞여 있는데, 어째서 예술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라고 신고전주의의 법칙에 대해 반박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코르네이유가 쓴 <르 시드>는 신고전주의 법칙을 많은 부분을 준수했지만 그만큼 크게 어긋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비평가들은 비난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프랑스 학술원은 이에 대한 판결을 내렸고, 결론은 신고전주의 법칙에 더욱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프랑스 학술원 판결의 내용 중 일부분이다. ‘학식을 갖춘 자와 전문가들을 즐겁게 하지 않는 한 대중을 즐겁게 했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극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규적으로 구성된 극이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면, 이것은 법칙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재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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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몰리에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