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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



-류 성-



***연극공부모임 2차 세미나 자료 중 일부 발췌

<가난한 연극>의 저자로 알려진 폴란드 출신의 연출가 그로토프스키는 몇 안 되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현대에 가장 영향력있는 연극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거의 없지만, 독특한 이론과 종래의 연극을 초월한 작업들은 동시대의 연극인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는데, 피터 브룩은 그로토프스키의 작업이 ‘오늘날의 세계를 위한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확신한다.’라고 극찬했다.


그는 많은 연극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평생을 탐구했다. 그의 탐구주제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연극이란 무엇인가? 둘째, 배우란 무엇인가? 셋째, 훈련이란 무엇인가? 그로토프스키는 이와같은 질문에 대해 세단계에 걸쳐 탐구한다.


첫번째 단계는 1959년부터 1970년까지 연극실험실에서의 시기이다.


모스크바에서 스타니슬랍스키로부터 연출수업을 받고 고국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1959년 연극실험실을 이끄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연극의 본질과 목적에 근거하여 배우와 관객의 관계, 배우의 훈련에 대한 탐구에 초점을 두고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른바 <가난한 연극>이란 개념을 탄생시킨다.


<가난한 연극>, 혹은 <가지지 않는 연극>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개념은 연극을 이루는  비본질적인 요소들-분장, 장치, 미술, 조명, 음향효과 등-을 제거하고 본질적인 요소-배우와 관객-들에 집중하는 연극이다. 그로토프스키는 배우와 관객의 관계에 대한 실험을 거듭하며 자신의 연극론적 토대와 배우훈련 메소드 등을 창조해낸다.


그러나 그로토프스키와 그의 극단은 종래의 연극과 공연에서는 관객이 극단적으로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연구에 몰두한다.


다음 단계는 1978년부터 1982년까지 <원천연극 혹은 초연극>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시기이다.


그는 연극실험실에서의 작업 중에 "지금 나는 관객이 수동적이고 공간이 고정되어 버린 문화의 어떤 형태들을 포기해 버렸다."고 말하며 종래의 연극과 공연이란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련의 시도를 하는데, 이 시도가 바로 <원천연극> 프로젝트이다. <원천연극> 프로젝트는 참가자들이 고행을 통해 인위적 문화에 의해 형성된 것을 제거하고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현재 나의 동료들과 나는 더 이상 공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서로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여러 날 지속되는 어떤 과정들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로토프스키가 진행한 작업은 '연극'이란 명칭이 붙기는 했지만  연극을 벗어난 일종의 행위-퍼포먼스-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며 참가자 자신의 변화와 깨달음을 위한 퍼포먼스다.


그로토프스키는 ‘해답은 공식화될 수 없고, 우리는 단지 모험에 충실할 뿐이다’라며 사실상 연극을 초월한 연극작업을 계속해서 진행해 나갔다. 마지막 단계는 이탈리아에 세워진 그로토프스키 작업센터를 거점으로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순회하며 강연과 워크샵을 지속하던 시기이다.


피터 브룩은 이 시기 그로토프스키의 작업에 대해 <운반수단으로서의 예술>이라고 불렀는데, 이 <운반수단으로서의 예술>이란 개념은 상당히 복잡하여 간단히 해설하기가 어려우므로 추후에 따로 고찰하기로 하되, 일반적인 공연과의 차이를 두 가지만 짚어보자.


첫째, 그로토프스키는 일반적인 공연은 스펙타클의 소재가 관객의 인식 속에 있지만 운반수단으로서의 예술은 그 소재지가 '악튀앙'속에 존재하는 예술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공연은 연기자 자신의 줄을 가지고 들어올리는 커다란 승강기이며 관객은 승강기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일반적인 공연은 관객의 존재가 필수적이지만 운반수단으로서의 예술에서는 관객의 존재가 무의미하며 대신 초대된 '증인'이 있게 된다. 실제로 그로토프스키의 마지막 작업들은 훈련이자 동시에 공연이었으며, 연극극단들과 연극연구자들만을 초대하여 진행되었다.


그로토프스키가 생각한 연극의 사명과 본질은 무엇인가?


20세기의 많은 철학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그로토프스키 또한 서구문명을 원초적인 인간성을 왜곡하는 실패한 문화라고 보았다. 실패한 문화에 기반한 기존의 연극 또한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배우와 관객이 원초적인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을 연극의 목적으로 보았다.


연극실험실시기의 작업으로부터 원천연극 프로젝트, 말년에 이루어진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업은 원초적인 인간성의 회복, 영적인 성장, 본능과 무의식에 대한 탐구에 초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그의 사고를 알 수 있는 몇 가지 언급을 살펴보자.


"현대인의 불행은 쾌락추구를 위해 행복추구를 포기했다는 사실에 있다."


"의식은 인간의 총체를 포용하지 못한다. 어떻게 간접적으로 무의식을 터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생에서 우리가 찾으려는 것은 고귀한 어떤 것이 아닌 근본적인 어떤 것이다."


"그(스타니슬랍스키)에게 연극은 목적이었다. 반면 나는 연극은 목적이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연극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존재에 대한 잘못된 관점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체연극에도 관심이 없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무대위의 곡예? 외침? 폭력? 나는 대사위주의 연극에도 신체연극에도 순간의 연극에도 관심이 없다. 현재 드러나고 있는 존재, 살아있는 존재에만 관심이 있을뿐이다."


원초적인 인간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그의 작업은 당연하게도 매우 제의적인 특성을 띄었다. 거의 모든  작업이 그러한 특성을 띄었으나 원천연극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시절의 작업을 잠깐 더 들여다보자. 


'참가자들을 한밤중에 각 개인별로 고립시키고 불을 빼앗은 뒤, 숲속에서 맨발로 뛰도록 했다. 한 코스에서는 땅에 파묻은 구덩이속에 들어가 눕고, 다른 참가자들이 그 위에 흙을 덮도록 했다. 또 다른 코스에서는 아침 해돋이 때 빵을 함께 굽도록 했다.'


"처음 며칠은 우리는 가사일만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도시생활의 습관이 서서히 사라진다. 우리는 다른 생활의 리듬에 자신들을 적응시킨다. 점차 우리는 서로에 대해 감각이 살아난다...."


원천연극 시절을 제외하더라도 그로토프스키의 많은 작업은 강한 제의적 특성을 띄거나 아예 제의인지 공연인지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다. 이러한 특성은 단순히 공연효과를 위한 수법의 차용 수준이 아니라 근본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전략이다. 


그가 제의적인 요소를 브레히트가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원했다면, 그로토프스키는 '관객의 내면과 심층을 불안케' 하는 것을 원했다고 볼 수 있으며 아르토적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기술한 연극의 목적에 근거하여, 그로토프스키는 배우와 관객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직접적이고 살아있는 영적 교감'을 연극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본질적이지 못한 것이며, 오히려 본질인 '배우와 관객의 직접적이고 살아있는 영적교감'을 방해한다고 간주했다. 따라서 그는 음악, 장치, 의상, 소도구, 배경, 조명, 분장 등을 제거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연극을 추구했다.


그로토프스키의 배우들은 단순히 극적 행동을 창조하는 극중 인물에 그치지 않고 영적교감을 실현하는 담당자이어야 했으며, '배우는 음성과 동작에 의해 의해 꿈과 현실과의 경계를 동요시키는 충동을 표현'할 수 있도록 수년에 걸쳐 독특하고 엄격한 메소드에 의해 훈련되어야 했다.


무대는 영적교감이 일어나는 장소로서 개혁되어야 했다. 그는 교감에 방해가 되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관객들을 홀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앉게 하여 배우와 관객이 뒤섞이도록 하는 등 여러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명은 최소화하거나 사용하지 않았으며, 각종 소도구와 장치들은 재현을 포기하고 테이블이 배가 되고 의자 등걸이가 감옥이 되는 식으로 상상력에 의해 취급되었다.


그로토프스키가 생각한 연극의 목적에 비추어보자면, 연극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과정 자체가 연극작업이야 했다. 그는 '재현의 예술'을 포기하고 '과정'에 집중했다. 배우들은 작업과정에서 자신을 속박하는 온갖 장애물로부터 해방되어야 했고, 공연과정에 관객을 해방으로 이끌어야 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공연과 공연준비라는 분리된 개념을 거부하도록 하며, 나아가 창조와 훈련을 동일선상에 놓인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가난한 연극>시절에는 배우의 훈련을 자기해방에 이르는 과정으로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탐구했던 그로토프스키는 <원천연극> 시절에 공연이란 개념 자체를 해체했으며, <운반수단으로의 예술>시절에 접어들자 훈련과 공연의 경계마저 해체한다. 이러한 해체 작업의 근저에는 연극을 과정으로 인식하는 그의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연극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므로 그로토프스키가 상대로 하는 관객 또한 일반적인 관객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들의 관객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단지 관객이기만 하면 좋다는 식이 아니라 어느 특별한 관객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관객이란 특별한 정신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고, 연극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이다. 결과를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과정을 함께 느끼기 원하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단계의 탐구에 이르자 그는 관객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 대신 작업의 질이 작품의 수준에 이르게 하고 동시에 '타인에게는 불필요한',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증인을 초대한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초대된 예술가나전문가, 연극인들이었다. 이들은 관객은 아니었지만 관객과 같은 존재였다.


그로토프스키는 자신의 연극론에 근거하여 전통적인 배우의 훈련방법에 대해 거부했으며 매우 독특한 배우 훈련 메소드를 창조했다. 그는 ‘기량의 습득과 축적’,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배우훈련 메소드의 중심에 두지 않았다.


그는 배우와 관객이 '직접적이고 살아있는 영적 교감'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배우는 온전히 '자기를 폭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배우의 훈련이란, 공연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량이나 수단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어야하며, 오히려 자기 폭로를 막고 배우를 가두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있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훈련방법들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엄격한 기술에 의해 보장되는 진실성'을 중시하며 기술에 대해 매우 강조했다. 그는 배우훈련에 스타니슬랍스키의 방법들, 경극이나 가부키 등에서 구사되는 동양연극의 훈련기술들, 각종 요가 자세들 등을 차용했다.


그러나 이렇게 차용된 기술들은 표현수단을 축적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근본목적인 장애물의 제거에 사용되는 보조기술로 사용되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언급은 기술에 대한 그의 사고를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수행할만한 실력이 없다면 당신이 한 일이라는 것은 당지 엉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경스러운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하고, 여러분의 무기를 완성해야 하며, 신뢰성을 가져야 하고, 당신들의 적들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고도의 숙달을 통한 완성된 사건을 창조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반란 속에서 숙련된 실력을 마음껏 구사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진정으로 진실했다 하더라도 당신은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거기에 커다란 의미나 진설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다. 명철성, 구체성, 수행능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예술의 진정한 반란이란 지속적이고 숙련된것이지 결코 아마추어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시스템이나 수단이나 방법에 따라 훈련할 수 있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역량있고 능숙한 배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바로 그런 기술이나 아마추어의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아마추어는 엄밀성의 부족을 의미한다. 엄밀하다는 것은 착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솔직하지 않거나 분명한 어떤 행위를 한다고 스스로 상상할때에도 우리는 어색하고 모호한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표현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기술만은 반드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연습에 너무 잘 숙달되었다면 우리는 그 연습을 변경하거나 중단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어떻게라는 지식, 즉 기술을 위한 기술 연습에 매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술교육은 반드시 배우들의 자연적인 행동 가능성이 개방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 설령 그런 교육을 하더라도 기술에 치중하면 의식적인 연기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들에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을 경우에만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차라리 기술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정한 창조적 기술이란 통상적인 의미의 기술과는 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아마추어리즘과 플라스마상태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기술, 그리하여 기계적인 기술을 포기하는 인간의 기술이다. "


그로토프스키는 배우가 훈련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탐구의 과정이므로 보편적인 배우제조법은 존재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발성훈련이나 신체훈련 등의 연습에서 원칙은 ‘각자 자기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연습들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토프스키의 배우훈련은 하나의 메소드로 전체가 길들여지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의 고독한 탐구과정으로 되었다. 물론 그 과정은 무언가를 습득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로토프스키는 특히 호흡과 발성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훈련에 대한 그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통계적인 표준호흡을 실행할 수 없는 개인도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삶의 현상들처럼 호흡법도 다양화 시킬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표준호흡만 강조한다면 젊은 배우들은 자신에게 부적합한 호흡법을 익혀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수 밖에 없고, 바로 그 순간부터 호흡과 관련된 모든 어려움이 발생하기 시작한다...어떤 행동에 완전히 몰입한 배우에게는 간섭하지 않는 편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만약 배우가 활동하면서 호흡하기를 어려워하지 않고 공기를 충분히 흡입하고 있다면, 설령 모든 이론이 그가 호흡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제시하더라도, 그에게 간섭하면 안 된다...발성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성기관을 염려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연극학교의 학생들에게 적용해야할 훈련은 발성기관에 무관심한 훈련이다."


그는 또한 배우의 기술과 재능이 윤리를 지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배우에게 세속적 종교의 사제로서 나르시즘에 빠져 기술을 대중에게 팔아넘기는 수준의 '궁정배우'가


아니라 자기의 재능과 자아를 제물로서 희생하는 '성스러운 배우'로서의 태도를 요구했다. 그러한 성스러운 배우는 기술을 동반한 진실성을 갖추었으며 재능의 윤리적 실천을 행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예술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자 윤리였다. 이러한 태도에 기반하여 훈련 과정을 통해 배우는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를 회복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배우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관객과의 살아있는 교감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로토프스키는 애초에 배우훈련과 연출수업을 받았지만 연극실험실 시절부터 전통적 개념의 연출가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로토프스키에게 배우의 훈련이란 기술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영적인 성장을 이루는 과정이다.


그것은 획일적인 방법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아주 개인적인 탐구과정이다. 그러므로  종래의 연출가, 연출법의 개념은 그로토프스키와 인연이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지시사항을 전달하거나 배우를 자신의 뜻에 맞게 훈련시키는 연출가가 아니라 자신을 배우들에게 스스로 나아갈 길을 발견하고 개척하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이자 함께 길을 찾아가는 동지로 위치 지웠다.


그는 자신의 관심은 '타인이 스스로 실천할 수 있도록 타인을 도울 가능성에 있다'며  배우들에게 끊임없이 어려운 과제를 던지며 배우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끝까지 탐구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배우에게 지적인 설명을 해주거나 배우 앞에서 시범을 보여주기보다는 침묵과 눈짓, 각별한 관심과 경청하는 태도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암시했다. 배우들에게 그로토프스키는 지시하는 연출가가 아니라 자신의 폭로를 경청하고 열린 태도로 함께 하는 안내자이자 조언자요, 또한 과정을 함께 하며 연극을 연구하는 동지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언급은 배우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그의 사고를 잘 보여준다.


"나는 제자를 얻기 보다는 일종의 전우를 얻기 위해 배우지망생들을 받아들인다. 그들이 비록 나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은 나로부터 영향을 받고, 나는 그들의 본성에 의하여 자극받는 그런 동맹군을 얻고 싶은 것이다. 다른 관계 즉 단지 나의 이름으로 배우들을 길들이는 정복자가 되거나 나의 이름만을 추종하는 애호가로서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


다음은 그로토프스키의 언급들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바칠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오늘 새롭게 발견한 것을 내일은 뛰어넘어야 한다. 발견한 것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배우들도 고정된 작업방법을 연구하고 발견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런 작업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습은 단순히 공연의 준비가 아니고 배우에게 자신에 대해, 자신의 능력에 대해, 그리고 한계를 극복하는 가능성에 대한 발견의 장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 미학은 그 자신과 그의 나라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미학을 다른 장소에 옮겨 심는다면 그것은 곧바로 상투적인 판박이가 되고 말 것이고, 탄생의 순간에 이미 죽어버리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이상적인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결과물이 타인들의 그것과 다를 수 있음을 명심하고 준비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타인들의 결과물이 자기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기술은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숨기고 가리는) 장막같은 기능을 할 수 있다."


"나는 그(스타니슬라프스키)를 깊이 존경한다. 첫째 이유는, 과거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려는 그의 자동적 개혁성에 있다. 둘째 이유는 그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연극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했다는데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추구했던 것은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스타니슬랍스키)는 이전의 단계에서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이른바 정서적 기억을 추구했다. 그는 다양한 감정을 기억하려는 의지는 결국 동일한 감정을 되살릴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정이 의지에 귀속된다는 믿음은 그의 오신이었다."


"신체행동은 인간행동의 요소였고, 실제로도 신체의 기초적인 행동이지만, 타인에게 반응한다는 사실과 연결된 개념이었다. 몸안에 있는 모든 힘은 타인을 향하거나 자신을 향한다. 듣기, 바라보기, 물체를 들고 행동하기, 기댈 지점 찾기, 이 모든 것은 신체행동이다."


"우리는 연습하고 훈련하면서 자신의 솔직함을 표현하는 행위를 기피하는 완전히 거짓된 만족을 맛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많은 시간동안 혹사시킬 수도 있다."


"우선 자기의 고유한 경험이 타인의 것으로 향할 수 있도록 경험을 해방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런 해방을 이를테면 이른바 '소리의 기술'이라는 영역에서 실현할 수 있다."


"명확성과 자발성 사이의 모순은 유기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본연의 극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것들이 교차되면 우리는 완전해진다. 명확성은 의식의 영역에서, 자발성은 본능의 영역에서 비롯된다."


"배우는 자신의 고유한 삶에 의거해야 하고, 정서적 기억이라는 영역에 의존하거나 '만약'이라는 방법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배우는 몸-기억으로 자신을 돌이켜봐야 한다. 그것은 몸에 관한 기억이 아닌 몸자체의 기억이자 몸-삶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겪지 않은 경험들, 아직은 기다리고 있는 경험들로 자신을 돌이키기보다는 자신에게 진정 중요했던 경험들로 돌아가야 한다."


"지적인 공식, 사상들, 슬로건 뒤로 자신들을 숨길 방법만 찾는 사람, 즉 매순간 최고로 세련된 말만 하려는 사람은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언제나 인정받기 위한 것이고, 언제나 남들처럼 행동하기 위해서 어떤 지점에만 머물면서 미온적인 것에만 만족한다면 우리는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배우들에게 필요한 호흡법은 한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배우들은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셔야 한다. 하지만 연극학교에서 교육자들이 학생들에게 적용하는 규칙은 바로 정 반대의 규칙이다. 교육자들은 날숨을 절약하고 길게 쉬는 법만 가르친다."


"나는 창조자가 작업에 몰두할때는 모든 문제를 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확신한다."


"목소리는 공연과정에 작용하지 않는다. 목소리는 배우의 연기과정에 작용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다른 것들과 결합함으로써 증폭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른바 브레히트이론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공연을 관람하는 이들은 참을 수 없는 지겨움과 싸워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이론에 충실하지 않은 공연일수록 매우 개인적이고 과감하게 고정관념을 뒤집는 효과를 발휘했다."


"전설이 되어버린 아르토의 잔혹연극의 주제는 이제 그 의미가 퇴색된 갖은 학대나 고문만 난무하는 싸구려 외설연극으로 변질되어 끝내 진부해져 버렸다...이른바 아방가르드 연극으로 불리는 가련한 공연들은 대개가 무의미한 잔혹행위만 남발한 나머지 미숙하고 착잡하기만 하여 어린애들에게도 공포감을 주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런 공연을 보면서 우리는 기량부족, 인습, 안이함, 피상적 외침밖에 확인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관객을 거북하게 만들 수 있어도 감동시키지는 못한다."


"아르토의 역설은 자기 주장을 실제로 실현하거나 자기의 진정한 내면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수단이 전혀 없다는데 있다. 그는 단지 비전과 메타포만 남겼다."


"자발성과 규율성은 서로를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시킨다. 자연스러운 충동에 대한 지배를 강조한 스타니슬랍스키나 역할구축에 전적인 우선권을 부여한 브레히트도 이런 교훈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선조들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나의 기초이고 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미래주의자들의 잘못은, 단지 기계들의 사회속에서 기계의 이미지들을 창조했다는 데 있다. 기계들이 군림했을 때 살아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


"예술은 심오한 반란이다. 상투적인 예술가들은 반란에 대해 말만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란 그것을 실행한다."


"내가 노래를 시작하고 당신 또한 노래를 시작한다면 이것이 불협화음에 이르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내가 노래할때 나는 당신의 노래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뜻이며, 나의 멜로디를 매우 섬세하게 당신의 멜로디와 화합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4주나 5주의 연습은 연기의 실제적인 총보를 준비하기에는 너무나 짧고, 오직 즉흥을 통하여 생동감을 잡아내려고 애쓰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다."


"연극극단은 공연산업에 그 자리를 내어주면서 사라진다. 오디션을 통해 배우를 뽑고, 몇주동안의 연습을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은 나무는 심지 않고 숲을 베어버리는 것과 같다. 배우는 예술적이고 개인적인 발견인 어떤 것을 찾아내는 가능성을 박탈당한다."


"이미 사용할 줄 아는 것, 그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것을 이용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성이란 모르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극단이 필요한가. 연극집단의 작업에서, 역할의 한 형태에서 다른 어떤 것으로 이행하는 배우를 위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오랜 기간동안 연속적인 작품을 통해 연속성을 추구해야 한다. 배우는 연구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숲을 베지 않으면서도 창조력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찾지 않았다. 다른 것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는 진지하고 체계적이었다. 여기서 바로 페니실린이 나타났던 것이다. 연습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강렬하고 성실하게 연구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찾는 것을 바로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모든 작업의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을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공연을 위한 연습과 정확하게 말해서 공연을 위한 것이 아닌, 오히려 배우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연습한다."


"일반적으로 연극에선 관객의 인식속에 나타나야만 되는 시각에 대해 작업한다. 만약 관객의 인식속에 공연의 모든 요소들이 완성되고 완벽하게 자리잡는다면(몽타주), 결국 하나의 관점, 하나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공연은 무대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관객의 인식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발표로서의 예술의 특수성이다. 예술의 다른 극단에서 운반수단으로서의 예술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관객의 인식속에서 존재하는 몽타주를 찾으려는 것이 아닌 행동하는 예술가, 즉 악튀앙의 몽타주를 창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발표로서의 예술(공연)과 운반수단으로서의 예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공연에서 몽타주의 소재지는 바로 관객의 인식에 들어있다. 운반수단으로서의 예술속에 존재하는 몽타주의 소재지는 행동하는 예술가, 즉 악튀앙 속에 존재한다."


"관객의 인식 속에 몽타주를 만드는 것은 배우의 의무가 아니라 연출자의 의무이다. 오히려 배우는 자신이 창조력의 근원을 잃지 않으려 한다면 관객의 종속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관객의 인식 속에서 몽타주를 만드는 것은 연출가의 임무이고 그것은 그의 직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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