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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종합-3대전환, 극단의 혁신, 극장


-작성자 류 성-

1. 3대 전환



전환1-자기 주도형 예술


 원칙적으로 창작, 공연 등은 예술가(단체) 자신의 계획과 의지에 의해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제약이 있다. 재정적 제약, 법제도적 제약, 세계관의 제약, 기술적 제약 등이다. 예술운동은 사회운동과 결합하여 제약을 극복해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이상해졌다. 아무리 좋은 방식도 근본을 잃어버리면 빈 껍데기만 부여잡고 있게 되고, 결국 화석화 되게 마련이다. 그 결과, 우리 예술가(단체)들은 <섭외 중심의 예술>을 하고 있다.

 현재 많은, 아니 너무 많은 예술가(단체)들이 요구 혹은 섭외 받아야 작업한다. 아니면 섭외받기 위해 작업하든지. 물론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주도성을 상실하고 수동적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문제다.

 수동적으로 전락하면 어떻게 되는가? 첫째 자신의 작업을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작업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둘째, 일정에 끌려가며 하루하루를 떼우는 생활습성에 포로가 되고 있다. 셋째, 심리적, 생활적인 안정감이 없어 연령이 높아질수록 활동에 어려움을 느낀다. 넷째, 주문사항에 맞춰 납품하듯 작업하므로 예술적 성취와 발전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다섯째, 시키지 않으면 일을 안 해도 되는 것이 당연시 된다. 급기야 시켜도 안 하게 된다. 여섯째, 자기 사색에 게을러져 멍청해진다. 결국 예술도 멍청해진다. 기타등등.

 열거하려면 너무 많다.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예술가로서의 나를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한 번뿐인 내 인생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다. 자기 주도적 예술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기 주도적 예술은 원칙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즉 자신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예술을 하는 것이다. “자기 주도적”은 섭외공연이냐 아니냐의 단순함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이것은 단체가 전망을 가지고 전진하는 문제이며, 구성원들이 주체적인 예술가로 거듭나는 문제이다. 

 단체는 중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중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이 있어야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예비할 수 있다. 구성원들도 그에 따라 역할을 찾고 자기 발전을 도모해 나갈 수 있다.

 목표과 계획은 구체적이고 선명해야 한다. 두루뭉술하면 포기되기 십상이다. 너무 당연하지만 세웠으면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규율과 기풍이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혁신론에서 더 이야기 될 것이다.

 공연사업은 핵심적인 징표다. 그러나 단체의 공연사업을 순식간에 자기주도형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환은 변신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러므로 전체 공연 사업에서 자기 주도형 사업의 비율을 높여내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예.... 

 섭외를 받아 하는 공연에서도 자기 주도성을 높여야 한다. 관성적으로 대충 떼우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져 의미를 잃는다.

 기획력을 높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영업이나 섭외관리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기획력은 <사업을 구상하는 능력>, <사업을 실현하는 능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차원의 기획력이 높아져야 자기 주도적인 예술로 전환할 수 있다.

 단체의 운영이나 기획력은 자기 주도적 예술로 전환하는데서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사고와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계획에 따라 꾸준히 작업해야 한다. 정기 공연 계획을 잡고 난 후 창작합숙을 들어가느니 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것이다. 작가가 일상적으로 써 낸 작품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배우는 공연을 위한 연습뿐만 아니라 평소에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훈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혼자서 작업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누가 연습을 시켜줘야만 연습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배우도 자신의 작업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연출가는 배우와 스텝들이 작업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작전을 잘 짜고 노력해야 한다. 연출가의 첫 번째 임무는 작업에서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어렵고 가장 보람 있는 일이다. 이 임무 때문에 연출가를 연극의 지도자라고 한다.

 모든 예술가가 마찬가지다. 자신의 세계관과 미학을 길러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누군가 보내준 행사 기조에 따라 대사를 잡아넣고 외우는 일만 하다가는 머저리가 되고 만다. 사람은 공부를 멀리하고 사색에 게으르면 누구나 꼭두각시 머저리가 되게 마련이다. 예술을 하지 않아도 좋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삶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환2. 현장 생산형 예술


 현장이란 <노동과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고단한 삶의 모습과 변혁적 열망이 공존하는 곳이다. 예술가들은 이곳을 창작의 보고이자, 예술작업의 종착지로 여기고 이에 따라 “현장으로!”라는 구호를 들고 들어갔다. 현장으로! 그것은 예술가들이 민중과 뒤엉켜 그들의 삶과 투쟁을 함께 한다는 의미였다.

 예술은 현장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했다. 대중은 예술을 통해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예술을 통해 자신의 변혁적 열망을 더 높이 고양할 수 있었다. 예술은 현장의 대중을 교양하고 조직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예술은 현장과 만남으로써 운동을 생산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고, 현장의 의미 또한 많이 변질되었다. 예술의 생산적 힘 또한 의심스러워졌다.  이제 예술가들에게 현장이란 집회 무대를 뜻하는 듯 하다. “현장 중심으로 열심히 공연하고 다닌다”는 말은 “집회 때 초청공연 많이 하고 다닌다”는 의미로 들린다.

 집회 공연 섭외를 받는다. 날짜와 시간을 협의한 후, 공연비를 흥정한다. 집회 내용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작품 또한 그다지 성의있게 준비하지 않는다. 이동하는 차안에서 우리는 대중을 만난다는 설레임이 없다. 공연 시작. 그리고 끝. 공연이 끝나자마자 짐을 싸서 올라온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는 오늘 만난 대중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난 게 아니다. 서로를 소비했을 뿐이다.

 물론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모든 예술가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쌍용이나 용산 같은 경우에 우리는 자기 일처럼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한다. 또 진정성 있게 현장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도 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일인양 달려가서 함께 뒤엉켜 울고 웃는 그들은 아름답다. 불행한 것은, 그러한 경험도, 그러한 예술가도 극히 소수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현장을 소비하고 있다.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생산적 힘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현장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둥, 간부들의 문화적 마인드를 바꿔야 된다는 둥 그런 얘기로 열변을 토해봐야 별로 의미가 없다. 그건 남 탓하는 거다. 남 탓을 자꾸 하면 자신은 더 무력해진다. 우리는 예술가들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야 한다.

 예술의 생산적 힘을 회복하는 것. 그것은 듣기는 좋지만 막막하다. 현장은 무너졌고, 예술과 현장이 생산적으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운동의 지형이 바뀐 탓에 과거 방식은 거의 의미가 없는 듯 보인다. 과거 방식을 고수하는 것 또한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꼴이다. 아니, 근원은 놓치고 껍데기만 붙들고 있었기에 어느새 현장 소비형 예술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닐까.

 아예 발상을 바꿔야 한다. 현장이 무너졌다면, 예술과 현장이 생산적으로 만나기 어렵다면,  예술이 현장을 생산하는 것이다. 과거에 예술이 현장으로 들어가 생산적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예술이 현장 자체를 생산해버리는 것이다. “현장으로!”라는 퇴색된 구호 대신 “현장을 생산하자!”라는 구호를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장=집회>라는 착각을 깨부숴야 한다. 그것은 현장의 일부분이다. 현장은 집회를 포함하지만 훨씬 더 크고 방대하다. 내가 사는 동네 또한 하나의 새로운 현장이 될 수 있다는 사고를 해야 한다. 현장이란 뭔가 마련되어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련되어 있든 마련되어 있지 않든 우리가 뜻을 세우고 들어가서 활동하면 그 곳이 바로 현장이 되는 것이다.

 거점을 중심으로 하는 예술활동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현재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이동형이다. 이런 활동방식은 기동성은 극대화될지 몰라도 휘발성이 강하므로 현장을 생산할 수 없다. 현장 생산이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아마도 극단의 경우 거점이란 결론적으로 극장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극장은 두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아트홀 소풍과 같은 지역 극장으로 지역민들이 대중이 된다. 둘째는 615극장 혹은 노동극장 같은 극장이다. 이 극장은 지속적으로 통일 혹은 노동이야기를 올리며 대중을 만난다. 물론 그 외에 더 많은 형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로의 상업극장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몇몇 극장처럼 대중과 괴리된 채 자기 작업에 빠져 있는 극장은 운동적인 가치가 없으므로 논외로 쳐도 좋을 것이다.

 극장이 마련되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현장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대중을 구체적으로 만나야 한다. 장기성, 지속성에 구체성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다. 년 간 관객이 총 몇 명이나 들었는지, 점점 늘어나는지 줄어드는지, 열성적인 팬(?)은 몇 명이며 누구인지 수치화하고 통계화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단순히 수치화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화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거점을 중심으로 전환하게 된 예술가들은 새로운 고민에 빠질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전과는 달리 대중에 대한 고민을 구체적이고 깊이있게 할 수 밖에 없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존재했던 대중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리 지은 대오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게 된다면, 어느 누구에게는 즐거운 일일 수도 있고 또 어느 누구에게는 괴로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람있는 일이다.

 운동적 의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술의 발전에도 유익하다. 예술은, 특히 연극은 결국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의 삶을 다룬다. 예술이 다루는 인간, 그리고 삶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대중과 구체적으로 만날 때 얻을 수 있는 형상이다. 인터넷이 아니라 삶 속에서 획득하는 형상은 살아 움직인다.

 예술가에게도 발전할 수 기회를 제공한다. 생각해보자. 지금과 같은 활동방식에서는 관객의 반응은 단순하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공연에서 박수를 많이 받았느냐 덜 받았느냐로 자신의 예술을 평가할 수 있는가? 거기서 다음의 과제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러나 대중의 구체적인 평가를 들었을 때는 전혀 달라진다.

 현장 생산형 전환은 자기 주도형 전환과 유기적 관계에 있다. 단적으로 극장이라는 거점을 가지고 활동하게 되면 자기 주도형으로 전환하는데 유리하다.  



전환3. 주체 성장형 예술


 흔히 “예술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일정한 믿음이 전제된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도 좋을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예술가들은 알고 있다. 과정이 좋지 않아도 결과는 좋게 보이도록 충분히 포장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라도 작품만 좋다면 만사  오케이인가? 그것이 예술운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운동은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운동의 주체들이 자꾸 자꾸 성장해야 한다. 예술운동도 마찬가지다. 예술운동의 주체인 예술가들이 자꾸 자꾸 성장해야 예술운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작품이야 잘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다. 공연이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그게 뭐 어떤가? 하지만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진짜 기준은 예술가들이 성장했느냐 아니냐다.

 처음엔 잘 나갔는데 몇 년 지나자 그만 주저앉는 단체들은 대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들의 예술은 창단 멤버들의 수준을 절대 못 벗어나는 것이다. 창단 멤버들은 뒤에 들어온 단원들의 성장에 충분히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야 한다. 공연 몇 번 성공하고 여기저기서 칭찬 좀 받았다고 단체가 성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다. 다음에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뒷심이 없으니 할 수가 없다.

 작품 좋고 공연 잘 한다고 여기저기서 칭찬은 자꾸 받는데, 정작 단원들은 자기가 소모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빨간 불이 켜졌다고 봐야 한다. 그 단체는 이제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 할 것이 아니라, 단원들의 성장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한다.

 작품보다 작업을, 결과보다 과정을, 공연의 성패보다 예술가의 성장을 중심에 놓고 사고해야 한다. 이는 다른 장르의 예술과는 달리 집단작업을 하는 극단에서는 특히 더 절실하다. 양자가 괴리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예술적으로도 성장해야 하지만 그의 세계관도 성장해야 한다. 세계관이 없는 예술은 기술에 불과하다. 어느 한 쪽으로만 편향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종합적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단체의 년간 계획이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교육 프로그램은 반드시 배치하고 운영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당장에 어렵다면 비정기적으로라도 진행해야 한다. 업무를 배분할 때도 실무적 차원에서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성장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특히 공연 준비 과정을 잘 만들어야 한다.

 성장은 누가 시켜주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자신의 성장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 기본이다. 아기들도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걷는다. 부모는 그저 도와줄 뿐이다. 자기 주도성을 가지지 못하면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주체 성장형은 자기 주도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한 현장 생산형으로의 전환은 주체 성장을 좀 더 용이하게 뒷받침해 줄 수 있다. 자기주도, 현장생산, 주체성장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마치 정삼각형처럼 서로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3대 전환은 각각 따로 혹은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전면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2. 혁신


1. 극단은 연극을 위해 존재한다.


 극단은 운영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연극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예술이기 때 이다. 그러므로 극단에는 삶의 경험, 생활태도, 가치관, 심지어 예술관까지 각기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예술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극단을 운영한다. 연극을 하기 위해서.

 극단은 본성상 결사체가 아니라 대중단체이며 예술단체이다. 이는 누구 한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자주적 의사에 따라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중단체의 생리도 그렇지만, 연극은 집단예술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연극예술은 연극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주체성과 창조성은 서로 비례하는 것이다.

 극단이 일반적인 회사 혹은 공무원 조직처럼 상하관계에 의해, 상명하복으로 운영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렇게 운영되는 곳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지는 예술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들을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바에야 공연 기획사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단체 운영에 책임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본심과는 상관없이 독재에 빠지기 쉽다. 그들은 자신이 행사할 권리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책임이 더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려운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속도 많이 썩고 남모르게 애태울 일도 많다. 만약 구성원들이 주체적이지 못하다면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독재적 운영보다 더 나쁜 것은 구성원들의 의존적 태도다. 의존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작업할 줄도 모르고, 시키는대로 따르기만 한다. 극단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자신을 구경꾼, 훈수꾼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뒷담화를 자주 까지만 풀기 위한 노력에는 게으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아주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어 단체의 독재적 운영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상호 불신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의 구성원들은 언제나 조직적 관점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과 배치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를 감수하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연극이란 예술을 하기 위해서 극단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동존이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 맞춰가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때로는 충돌할지언정 서로간의 간극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자꾸 채워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정말 복잡하고 어려우며 커다란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흔히 예술이 사람을 변화발전시킨다고 말한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들끼리도 변화발전해야 한다. 그래야 더 높은 예술을 창조해나갈 수 있다. 그러나 문고리는 한 번에 열어버릴 수 있지만 사람의 변화발전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법이다. 

 토론은 열려있고 의견은 모아가되 결정은 책임자가 해야 한다. 책임자의 권위가 없는 단체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모든 토론과 운영이 백가쟁명식으로 되어서는 곤란하며 쓸데없는 감정문제까지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일단 결정이 난 것에 대해서는 따르는 것이 기풍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주장과 다른 결정이 나왔다고 근태를 하는 것은 나쁜 짓이다. 그렇다고 결정사항을 무조건 따르기만 강요하는 것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결정된 사항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서로 이끌어주고 노력해야 한다.

 예술은 지시와 복종으로는 절대로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예술가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기반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여기에 연극은 집단 예술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진다. 진정한 연극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하는 속에서 창조된다.


2. 연극에 규칙은 없지만 극단에 규칙은 있다.


 연극을 창조하는데서 규칙이란 불편한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비평가들이 드라마의 법칙이니 하는 이런저런 규칙들을 만들어 냈고 이로써 예술가들을 속박하려 들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위대한 연극은 규칙을 무시하거나 깨부수며 탄생했다. 그러나 연극에 규칙은 없지만 극단에 규칙은 필요하다.

 먼저 규칙에 대한 관점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 극단에 규칙이 왜 필요한가? 구성원들을 속박하고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가? 물론 그런 규칙을 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규칙은 사람들을 귀찮게 만들뿐이며 더군다나 예술을 창조하는데 아무런 힘이 없다. 극단에 규칙이 필요한 이유는 상호 신뢰를 높이고 창조적 활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 규칙은 필요하다.

 규칙은 강제성이 있는 것이다. 강제성이 없는 규칙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므로 있으나마나하다. 잘 지킬 때는 상이 있고, 지키지 못했을 때는 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적인 것과 무법천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예술작업은, 특히 연극작업은 상호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을 지키는 속에서 원활하게 진행된다. 규칙에 강제성이 부여되는 것은 창조적인 상태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규칙은 구성원들의 토론에 의해 도출되고 합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발적인 준수를 위한 기초이다. 또한 규칙은 선명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규칙의 이행과 불이행을 누가 보아도 판단할 수 있을만큼 명백해야 한다. 때에 따라, 사람에 따라 고무줄처럼 적용되는 규칙은 오히려 상호신뢰를 해치고 극단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또한 규칙은 최소한의 것이어야 한다. 불필요하게 많은 규칙도 오히려 해가 된다. 예술단체의 규칙은 예술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규칙을 어겼을 땐 누가 지적하기 전에 스스로 고백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누구나 부족한 점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으며 나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동료들에게 허심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잘못을 대충 넘기려 드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규칙을 어긴 동료에 대해서는 도와주어야 한다. 동료가 자신의 부족함과 실수를 깨닫고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규칙을 앞세워 사람을 심판하고 공격하는 것은 가장 비겁한 짓이다. 규칙은 상호신뢰를 높이고 작업의 활력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쥐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공격하는가 아니면 돕기 위해서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안다.

 규칙이 만능은 아니다. 규칙보다 중요한 것은 동료들 간에 형 노릇, 아우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형이면 형답게 굴어야 한다. 동생들한테 부끄럽지 않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 동생이 잘 못 나가면 형답게 따끔하게 지적도 해주어야 하고, 손 잡고 격려도 해주어야 한다. 동생도 동생답게 굴어야 한다. 궂은 일이 있으면 먼저 나서야하고, 형의 조언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형과 동생이 서로 헐뜯고 싸우는 집안도 볼장 다 본 집안이지만 서로 무시하는 집안도 잘 되긴 어렵다.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짓이다.



3. 예술가란 작업을 지속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예술가란 멋진 예술작품을 창조한 사람, 즉 어떤 결과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예술가란 오히려 지속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사람, 즉 과정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로 살기가 어려운 까닭은 작품의 창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이유들이 예술가의 지속적인 작업을 방해한다. 예술가는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며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예술가가 작업을 지속하며 끊임없이 발전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 그의 예술기량이 끊임없이 높아져야 한다. 둘째, 그의 세계관이 끊임없이 높아져야 한다. 셋째, 최소한의 물질생활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예술가의 지속적인 작업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된다. 예술가들은 활동을 하면서 이 세 가지 문제에 항상 주목을 돌려야 한다.

 예술가와 예술단체는 자신의 예술적 기량과 세계관을 발전시킬 계획과 방법론이 있어야 한다. 재교육과 일상적 훈련이 없으면 예술가는 결국 자신을 소모하는 길로 빠지게 되기 마련이다. 예술기량과 세계관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편향에 빠지지 말고 서로 종합적으로 발전시켜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조직성을 띄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내키는대로 배우고 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 어느 극단은 구성원들이 각자 개인취향에 따라 누구는 발레를, 누구는 아크로바틱을, 누구는 탈춤을 배우러 다녔다. 그러다보니 일정이 안 맞아 일을 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몇 달 동안 배운 것들이 그들의 연극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공부를 하든, 훈련을 하든 집단에 필요한 것을 찾고 함께 높여 나가야 한다.

 단체로 하는 공부나 훈련에만 기대서는 높아지기 어렵다. 혼자서도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조직성을 띄어야 한다. 배워서 남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남 주기 위해 배워야 하고 그렇게 배운 것들은 남을 주기 위해 애써야 한다. 집단을 위해 필요한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은 집단의 재산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집단을 위해서만 필요한 관점은 아니며 자신의 성장에도 유리하다.

 물질생활적 보장 또한 중요한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풀지 못해 결국 예술을 포기하고 떠나거나, 개인적인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다. 우리는 예술을 위해서 이 문제에 충분히 관심을 돌리고 풀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예술을 지속하기 위해 물질생활적 문제를 풀려는 것이다. 게다가 세상이 바뀌기 전에는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물질 생활적 문제를 푸는 것 또한 조직성을 띄어야 함은 물론이다.



 3. 극장


 연극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극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수천년에 이르는 연극의 역사가 증명해주듯 극장이 없어도 연극은 가능하다. 오히려 극장은 사회적인 의미와 역할에서 필수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등의 유럽에서 극장을 일컬어 ‘시민의 학교’라고 불렀던 것은 극장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와 역할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극장에서 집단적인 예술체험을 하는 것은 사람의 사상과 정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이에 따라 극장을 ‘학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비록 전시성이긴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가 극장 혹은 예술회관 등을 의무적으로 건립하거나 지원하는 것은 극장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한 때, 진보적인 연극인들은 극장을 혐오하기도 했다. 컴컴한 극장에 갇혀 세상도 모르고 자위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극장은 부유한 사람들의 사교장 혹은 여대생의 고급취미생활 정도 의미밖에 못 가졌고, 연극인들도 민중의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작품들을 공연하며 자기 도취에 빠져들었다. 하기에 당시에 제기된 극장을 박차고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은 선진적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극단이 극장을 박차고 나가기는 쉽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과거에 비해 극장은 많아졌으나 의미가 거의 없다. 관에서 세운 극장들은 거대한 시설, 그에 따른 엄청난 관리비를 소모하지만 정작 운영비는 턱없이 적은 액수다. 전시효과에 지나지 않으므로 효율성이 거의 없다. 대다수의 민간극장들은 부동산 임대업의 일환일 뿐이다. 용산전자상가처럼 대학로에 몰려들어 상업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극단은 대관료에 밀려 자유롭고 창조적인 예술작업을 할 수 없다.

 대중들의 피해를 언급하자. 관객개발이란 이름하에 작품은 획일화되어 관객의 예술체험은 편식경향에 빠져버린다. 무엇보다 공연 관람을 위해 극장에 가는 것은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우스개 소리지만 대학로의 관객은 딱 두 종류 밖에 없다고 한다. 연극 매니아거나 처음 연극 보러 온 사람이거나.

 그러나 새로운 움직임도 있다. 비교적 최근에 시작된 흐름이지만, 지역극장, 동네극장, 마을 극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지역극장은 사회운동상으로도, 예술운동상으로도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사회운동 단체들도 지역사회와의 결합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진보적인 예술가들 중에서도 지역을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멀지 않은 시기에, 지역극장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운동과 예술운동이 혼연일체가 되어 발전하는 사례도 속출할 것이다.

 물론 극장이 사회적인 의미와 역할만 있는 것은 아니며 극단에게도 유의미하다. “우리는 전국의 축제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퀄리티를 높이려면 극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극장을 세웠다.”라는 00극단 대표의 이야기도 그러하거니와 만약 극단이 자기주도형, 현장생산형, 주체성장형으로 전환하고자 한다면, 극장은 보다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줄 수 있다.

 현재와 같은 환경에서는 극장을 만드는데 극단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극장은 극단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소유로 되어야 한다. 극장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와 역할에서도 그러하며, 극장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많은 극장들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극단이 극장을 자기의 소유로 여기면서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극장들은 사회의 지지와 엄호를 받지 못하므로 발전할 수 없고 만약 쓰러질 위기에 처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건설할 때부터 지역시민사회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동했던 소풍의 사례는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일단 건설되고 나면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 학교, 심지어 관공서 등과도 적극적으로 관계해야 한다. 지역 인사들과 함께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지역의 문화예술단체, 예술동아리 등에게도 개방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극장이 아니어야 한다.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의논도 하고, 지역에서 공연사업도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극장이 만들어진다는 입소문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해야 한다. 연습실을 간단하게 개조해 소박하나마 작은 공연을 정기적으로 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오는 일이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가족들이 산책을 가는 듯 쉽고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극장의 위치가 커다란 작용을 하는데 가능한 주거 밀집 지역에 위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람료의 책정도 중요하다. 극장의 탄생과 존재 뿐만 아니라 언제 무슨 공연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홍보도 해야 한다.

 극장을 운영하는데 기획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양질의 예술작품을 확보하고 좋은 예술사업들을 구상하여 그것이 지역대중과 효과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극장에서 필요한 기획력이다. 극장은 대관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자체의 기획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운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프로그램의 질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칫 여기에 매몰되어 지역사회의 인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극장은 무엇보다 대중들에게 가깝고 소중한 무엇이어야 한다.

 극장은 극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극장이 극단의 사정과 계획에 따라 종속적으로 운영된다면 극장은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잃어버린다. 극단에도 좋지 않다. 극장을 운영하느라 극단의 본질적 임무인 창작과 공연을 등한시하게 된다. 극단은 극장을 모태로 삼아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써야 하며, 그 작품을 들고 먼 여행을 떠날 수도 있어야 한다.


2010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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