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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예술운동의 3대전환

예술운동의 3대 전환


-작성자 류 성-


전환1-자기 주도형 예술


 원칙적으로 창작, 공연 등은 예술가(단체) 자신의 계획과 의지에 의해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제약이 있다. 재정적 제약, 법제도적 제약, 세계관의 제약, 기술적 제약 등이다. 예술운동은 사회운동과 결합하여 제약을 극복해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이상해졌다. 아무리 좋은 방식도 근본을 잃어버리면 빈 껍데기만 부여잡고 있게 되고, 결국 화석화 되게 마련이다. 그 결과, 우리 예술가(단체)들은 <섭외 중심의 예술>을 하고 있다.


 현재 많은, 아니 너무 많은 예술가(단체)들이 요구 혹은 섭외 받아야 작업한다. 아니면 섭외받기 위해 작업하든지. 물론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주도성을 상실하고 수동적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문제다.


 수동적으로 전락하면 어떻게 되는가? 첫째 자신의 작업을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작업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둘째, 일정에 끌려가며 하루하루를 떼우는 생활습성에 포로가 되고 있다. 셋째, 심리적, 생활적인 안정감이 없어 연령이 높아질수록 활동에 어려움을 느낀다. 넷째, 주문사항에 맞춰 납품하듯 작업하므로 예술적 성취와 발전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다섯째, 시키지 않으면 일을 안 해도 되는 것이 당연시 된다. 급기야 시켜도 안 하게 된다. 여섯째, 자기 사색에 게을러져 멍청해진다. 결국 예술도 멍청해진다. 기타등등.


 열거하려면 너무 많다.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예술가로서의 나를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한 번뿐인 내 인생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다. 자기 주도적 예술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기 주도적 예술은 원칙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즉 자신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예술을 하는 것이다. “자기 주도적”은 섭외공연이냐 아니냐의 단순함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이것은 단체가 전망을 가지고 전진하는 문제이며, 구성원들이 주체적인 예술가로 거듭나는 문제이다. 


 단체는 중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중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이 있어야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예비할 수 있다. 구성원들도 그에 따라 역할을 찾고 자기 발전을 도모해 나갈 수 있다.


 목표과 계획은 구체적이고 선명해야 한다. 두루뭉술하면 포기되기 십상이다. 너무 당연하지만 세웠으면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규율과 기풍이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혁신론에서 더 이야기 될 것이다.


 공연사업은 핵심적인 징표다. 그러나 단체의 공연사업을 순식간에 자기주도형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환은 변신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러므로 전체 공연 사업에서 자기 주도형 사업의 비율을 높여내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예.... 


 섭외를 받아 하는 공연에서도 자기 주도성을 높여야 한다. 관성적으로 대충 떼우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져 의미를 잃는다.


 기획력을 높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영업이나 섭외관리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기획력은 <사업을 구상하는 능력>, <사업을 실현하는 능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차원의 기획력이 높아져야 자기 주도적인 예술로 전환할 수 있다.


 단체의 운영이나 기획력은 자기 주도적 예술로 전환하는데서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사고와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계획에 따라 꾸준히 작업해야 한다. 정기 공연 계획을 잡고 난 후 창작합숙을 들어가느니 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것이다. 작가가 일상적으로 써 낸 작품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배우는 공연을 위한 연습뿐만 아니라 평소에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훈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혼자서 작업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누가 연습을 시켜줘야만 연습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배우도 자신의 작업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연출가는 배우와 스텝들이 작업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작전을 잘 짜고 노력해야 한다. 연출가의 첫 번째 임무는 작업에서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어렵고 가장 보람 있는 일이다. 이 임무 때문에 연출가를 연극의 지도자라고 한다.


 모든 예술가가 마찬가지다. 자신의 세계관과 미학을 길러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누군가 보내준 행사 기조에 따라 대사를 잡아넣고 외우는 일만 하다가는 머저리가 되고 만다. 사람은 공부를 멀리하고 사색에 게으르면 누구나 꼭두각시 머저리가 되게 마련이다.


 예술을 하지 않아도 좋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삶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환2. 현장 생산형 예술


 현장이란 <노동과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고단한 삶의 모습과 변혁적 열망이 공존하는 곳이다. 예술가들은 이곳을 창작의 보고이자, 예술작업의 종착지로 여기고 이에 따라 “현장으로!”라는 구호를 들고 들어갔다. 현장으로! 그것은 예술가들이 민중과 뒤엉켜 그들의 삶과 투쟁을 함께 한다는 의미였다.


 예술은 현장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했다. 대중은 예술을 통해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예술을 통해 자신의 변혁적 열망을 더 높이 고양할 수 있었다. 예술은 현장의 대중을 교양하고 조직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예술은 현장과 만남으로써 운동을 생산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고, 현장의 의미 또한 많이 변질되었다. 예술의 생산적 힘 또한 의심스러워졌다.  이제 예술가들에게 현장이란 집회 무대를 뜻하는 듯 하다. “현장 중심으로 열심히 공연하고 다닌다”는 말은 “집회 때 초청공연 많이 하고 다닌다”는 의미로 들린다.


 집회 공연 섭외를 받는다. 날짜와 시간을 협의한 후, 공연비를 흥정한다. 집회 내용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작품 또한 그다지 성의있게 준비하지 않는다. 이동하는 차안에서 우리는 대중을 만난다는 설레임이 없다. 공연 시작. 그리고 끝. 공연이 끝나자마자 짐을 싸서 올라온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는 오늘 만난 대중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난 게 아니다. 서로를 소비했을 뿐이다.


 물론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모든 예술가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쌍용이나 용산 같은 경우에 우리는 자기 일처럼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한다. 또 진정성 있게 현장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도 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일인양 달려가서 함께 뒤엉켜 울고 웃는 그들은 아름답다. 불행한 것은, 그러한 경험도, 그러한 예술가도 극히 소수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현장을 소비하고 있다.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생산적 힘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현장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둥, 간부들의 문화적 마인드를 바꿔야 된다는 둥 그런 얘기로 열변을 토해봐야 별로 의미가 없다. 그건 남 탓하는 거다. 남 탓을 자꾸 하면 자신은 더 무력해진다. 우리는 예술가들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야 한다.


 예술의 생산적 힘을 회복하는 것. 그것은 듣기는 좋지만 막막하다. 현장은 무너졌고, 예술과 현장이 생산적으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운동의 지형이 바뀐 탓에 과거 방식은 거의 의미가 없는 듯 보인다. 과거 방식을 고수하는 것 또한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꼴이다. 아니, 근원은 놓치고 껍데기만 붙들고 있었기에 어느새 현장 소비형 예술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닐까.


 아예 발상을 바꿔야 한다. 현장이 무너졌다면, 예술과 현장이 생산적으로 만나기 어렵다면,  예술이 현장을 생산하는 것이다. 과거에 예술이 현장으로 들어가 생산적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예술이 현장 자체를 생산해버리는 것이다. “현장으로!”라는 퇴색된 구호 대신 “현장을 생산하자!”라는 구호를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장=집회>라는 착각을 깨부숴야 한다. 그것은 현장의 일부분이다. 현장은 집회를 포함하지만 훨씬 더 크고 방대하다. 내가 사는 동네 또한 하나의 새로운 현장이 될 수 있다는 사고를 해야 한다. 현장이란 뭔가 마련되어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련되어 있든 마련되어 있지 않든 우리가 뜻을 세우고 들어가서 활동하면 그 곳이 바로 현장이 되는 것이다.


 거점을 중심으로 하는 예술활동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현재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이동형이다. 이런 활동방식은 기동성은 극대화될지 몰라도 휘발성이 강하므로 현장을 생산할 수 없다. 현장 생산이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아마도 극단의 경우 거점이란 결론적으로 극장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극장은 두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아트홀 소풍과 같은 지역 극장으로 지역민들이 대중이 된다. 둘째는 615극장 혹은 노동극장 같은 극장이다. 이 극장은 지속적으로 통일 혹은 노동이야기를 올리며 대중을 만난다. 물론 그 외에 더 많은 형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로의 상업극장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몇몇 극장처럼 대중과 괴리된 채 자기 작업에 빠져 있는 극장은 운동적인 가치가 없으므로 논외로 쳐도 좋을 것이다.


 극장이 마련되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현장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대중을 구체적으로 만나야 한다. 장기성, 지속성에 구체성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다. 년 간 관객이 총 몇 명이나 들었는지, 점점 늘어나는지 줄어드는지, 열성적인 팬(?)은 몇 명이며 누구인지 수치화하고 통계화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단순히 수치화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화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거점을 중심으로 전환하게 된 예술가들은 새로운 고민에 빠질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전과는 달리 대중에 대한 고민을 구체적이고 깊이있게 할 수 밖에 없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존재했던 대중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리 지은 대오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게 된다면, 어느 누구에게는 즐거운 일일 수도 있고 또 어느 누구에게는 괴로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람있는 일이다.


 운동적 의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술의 발전에도 유익하다. 예술은, 특히 연극은 결국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의 삶을 다룬다. 예술이 다루는 인간, 그리고 삶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대중과 구체적으로 만날 때 얻을 수 있는 형상이다. 인터넷이 아니라 삶 속에서 획득하는 형상은 살아 움직인다.


 예술가에게도 발전할 수 기회를 제공한다. 생각해보자. 지금과 같은 활동방식에서는 관객의 반응은 단순하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공연에서 박수를 많이 받았느냐 덜 받았느냐로 자신의 예술을 평가할 수 있는가? 거기서 다음의 과제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러나 대중의 구체적인 평가를 들었을 때는 전혀 달라진다.


 현장 생산형 전환은 자기 주도형 전환과 유기적 관계에 있다. 단적으로 극장이라는 거점을 가지고 활동하게 되면 자기 주도형으로 전환하는데 유리하다.





전환3. 주체 성장형 예술


 흔히 “예술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일정한 믿음이 전제된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도 좋을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예술가들은 알고 있다. 과정이 좋지 않아도 결과는 좋게 보이도록 충분히 포장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라도 작품만 좋다면 만사  오케이인가? 그것이 예술운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운동은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운동의 주체들이 자꾸 자꾸 성장해야 한다. 예술운동도 마찬가지다. 예술운동의 주체인 예술가들이 자꾸 자꾸 성장해야 예술운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작품이야 잘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다. 공연이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그게 뭐 어떤가? 하지만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진짜 기준은 예술가들이 성장했느냐 아니냐다.


 처음엔 잘 나갔는데 몇 년 지나자 그만 주저앉는 단체들은 대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들의 예술은 창단 멤버들의 수준을 절대 못 벗어나는 것이다. 창단 멤버들은 뒤에 들어온 단원들의 성장에 충분히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야 한다. 공연 몇 번 성공하고 여기저기서 칭찬 좀 받았다고 단체가 성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다. 다음에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뒷심이 없으니 할 수가 없다.


 작품 좋고 공연 잘 한다고 여기저기서 칭찬은 자꾸 받는데, 정작 단원들은 자기가 소모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빨간 불이 켜졌다고 봐야 한다. 그 단체는 이제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 할 것이 아니라, 단원들의 성장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한다.


 작품보다 작업을, 결과보다 과정을, 공연의 성패보다 예술가의 성장을 중심에 놓고 사고해야 한다. 이는 다른 장르의 예술과는 달리 집단작업을 하는 극단에서는 특히 더 절실하다. 양자가 괴리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예술적으로도 성장해야 하지만 그의 세계관도 성장해야 한다. 세계관이 없는 예술은 기술에 불과하다. 어느 한 쪽으로만 편향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종합적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단체의 년간 계획이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교육 프로그램은 반드시 배치하고 운영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당장에 어렵다면 비정기적으로라도 진행해야 한다. 업무를 배분할 때도 실무적 차원에서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성장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특히 공연 준비 과정을 잘 만들어야 한다.


 성장은 누가 시켜주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자신의 성장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 기본이다. 아기들도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걷는다. 부모는 그저 도와줄 뿐이다. 자기 주도성을 가지지 못하면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주체 성장형은 자기 주도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한 현장 생산형으로의 전환은 주체 성장을 좀 더 용이하게 뒷받침해 줄 수 있다. 자기주도, 현장생산, 주체성장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마치 정삼각형처럼 서로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3대 전환은 각각 따로 혹은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전면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2010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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