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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종합-<리어왕> 읽기


<리어왕> 읽기

 
-류 성-

 

 

 

1 명작탄생의 비밀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컬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극예술이라고 칭송했다. 굳이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리어왕>이 세계명작의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세익스피어는 어떻게 이런 명작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은 세익스피어의 순수한 창작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리어왕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해 내려왔던 전설이며, 이는 여러 작가들에 의해 출간되기도 했다. 세익스피어는 <브리튼 왕 열전>, <연대기>, <리어왕과 그의 세 딸에 대한 진정한 연대기 사극>, <요정여왕> 등에서 이야기의 줄거리와 소재, 인물 등 거의 대부분을 빌려왔다. 리어왕의 두 번째 플롯인 글로스터와 그의 두 아들 이야기도 <아카디아>라는 산문집에 실려있는 이야기를 빌려와 변형시킨 것이다.

학자들은 세익스피어가 새뮤얼 하스넷의 <지독한 가톨릭교 사기선언>, 미셀 드 몽테뉴의 <수상록> 등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여기에 나오는 표현들을 다수 이용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탁월한 문체, 괴기하고 새로운 표현, 이로써 만들어내는 독특한 스타일 등도 어느 정도는 빌려온 것들이다.

사실, 리어왕 뿐만이 아니라 <맥베쓰>, <햄릿>, <오셀로> 등 세익스피어가 창작한 명작들은 모두 빌려온 이야기다. 맥베쓰는 11세기 스코틀랜드에 실재했던 인물로 앞서 언급한 <연대기>에 실려있는 이야기며, 덴마크 왕자 햄릿의 이야기도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12세기 즈음에 활자화되어 출간되었다. 오셀로는 <헤카토미시>라는 이야기 모음집에 있는 이야기를 빌려온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빌려온 이야기들에 변형을 가했을 뿐, 실제로 이야기 자체를 지어낸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변형을 가했다는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이미 존재하던 리어왕 이야기에 보다 심각한 문제들, , 사회구조와 지배체제에 대한 문제제기, 정의와 평등의 호소, -의 갈등과 같은 문제들을 심어놓는다. 이 문제들은 근대사회가 안고 있는 절실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들이다. 그래서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은 명작의 반열에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는데, 어떤 문제를 심어놓았는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규정된다는 점이다. 이는 곧 작가의 철학과 관련된다. 물론 세익스피어는 극작술도 훌륭했다. 그러나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에게는 사회와 인간에 대해 보다 깊은 차원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세익스피어가 절실하고 의의있는 문제들이 아니라 사사로운 문제들을 심어놓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리어왕 이야기를 단순히 극작술적인 차원에서나 이야기를 변형하고 재구성했다면? 세익스피어는 당대에 재주있는 작가 중 한 사람에 그쳤을 것이며,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은 그렇고 그런 가정멜로드라마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의 재능이란 기술과 철학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명작이란 개인의 창조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세익스피어가 <리어왕>을 쓸 때, 줄거리, 주요등장인물, 표현 등을 빌려왔다는 사실은, <리어왕>이란 명작이 오로지 세익스피어의 위대한 재능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축적이 토대가 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누구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또한, 만약 그의 시대에 중세의 몰락과 르네상스의 도래라는 일련의 사회적 조건들이 형성되지 못했다면 그가 리어왕 전설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었을까? 세익스피어가 근원적 문제들을 심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철학과 관점이기도 하겠지만, 근대의 사상적 조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에 대해 좀 더 부언하자. 원래 리어왕은 해피엔딩이었다. 결말에서 리어는 다시 왕위를 되찾고, 왕국의 질서는 회복된다. 그런데 세익스피어는 이를 뒤집어 놓는다. 왕위에서 쫒겨난 리어는 미치고 나서야 자기 왕국의 억압과 모순을 깨닫는다. 그리고 왕과 딸들, 왕의 충신들이 모두 죽는다. 왕의 권위는 파탄나고, 왕국의 질서는 해체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40년 후, 찰스1세가 의회에 의해 처형당하고, 왕국은 공화국으로 바뀐다. 이 사실은 <리어왕>에 내포된 사상과 당대 사회의 사상적 조류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다시 왕정복고 시대가 되자,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은 개작을 당한다. 각종 풍자들은 삭제되고, 리어는 다시 왕국을 되찾고, 충신들은 모두 살아남아 해피엔딩을 맞는다. 개작자인 테이트는 이야기에 부족한 개연성과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왕정복고되었기 때문이 틀림없다.

 

 

2 비극의 원인

 

세익스피어는 원래 해피엔딩이었던 리어왕 이야기를 완전한 비극으로 뒤집어 놓는다. 절대군주였던 리어는 순식간에 헐벗고 굶주린 채로 황야에 버려진다. 그는 주검이 된 코딜리어를 안고 울부짖다가 결국 죽는다. 리어뿐만은 아니다. 극중 주요등장인물 중 누구도 행복해지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파멸하여 죽음에 이른다. 살아남은 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조차 행복하지 않다. 올버니는 이 피투성이의 나라를 함께 지켜주시오(53)라고 부탁하지만, 에드거는 답을 못하고, 켄트는 내 주인이 부르십니다.(53)며 자살에 대한 암시를 한다. 살아남은 그들의 운명은 암울하다. 사악한 자들은 모두 죽었고, 전쟁에서도 승리했지만 왕국의 앞날은 예측불가능하다. 이런 비극은 왜 일어났을까? 그 함의는 무엇인가?

리어는 자신에 대한 딸의 사랑을 시험하려든다. 자식들의 사랑을 시험할 만큼 리어는 오만한 인물이다. 거너릴과 리건은 갖은 수사를 동원하여 아첨하지만, 코딜리어는 자식의 도리에 따른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11)라고 한다. 리어는 어리석게도 아첨에 속고 진실은 알아보지 못한다. 게다가 조폭하고 경솔하다. 분노한 리어는 막내딸에게 저주를 퍼붓고 홧김에 모든 재산과 모든 권력을 거너릴과 리건에게 줘버린다. 비극적 사건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오만함, 조폭함, 경솔함 등 리어의 성격, 혹은 성격적 결함은 이 비극의 출발점이다. 사실 거너릴과 리건이 자신의 아버지를 황야로 내몰았던 것은 그들의 악한 성격 탓도 있지만, 리어의 조폭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리건은 켄트가 쫓겨 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11)고 걱정하고, 거너릴은 당할까봐 내내 걱정하기보다 걱정스러운 해악을 제거(14)하려고 든다.

글로스터 일가의 비극도 성격에서 비롯된다. 글로스터가 쾌락을 탐했던 것은 비극의 근원을 제공한다. 글로스터는 켄트에게 에드먼드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녀석의 어미는 예뻤지요. 만드는 동안 즐거웠으니....(11)에드거의 대사도 의미심장하다. “신들은 공정하다. 우리가 탐닉하는 악덕을 이용하여 우리를 병들게 한다. 너를 잉태한 그 어둡고 사악한 장소가 아버지의 눈을 빼앗아 간 것이다.(53)게다가 그는 리어처럼 경솔하고 어리석다. 에드먼드의 계략에 빠진 글로스터는 그는 진위를 확인하기도 전에 에드거를 악당이라고 부르며 저주를 퍼붓는다. 에드거도 에드먼드의 농간에 순진하게 넘어간다. “잘 속는 아버지에 고결한 형님, 남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성격, 아무 의심이 없구나. 그들의 어리석은 정직함을 내 계략으로 편안하게 올라타는 거야.(12)라는 에드먼드의 대사는 글로스터와 에드거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거너릴과 리건, 에드먼드, 콘월 등 악()을 상징하는 인물들은 사악하고 탐욕스럽다. ()하다고 믿어지는 인물들도 이 비극적 사건에 책임이 있다. 코딜리어는 왕궁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인 왕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충신의 상징인 켄트도 과격하고 직설적이다. 켄트는 리어에게 내가 무례한 것은 리어가 미쳤기 때문입니다! 무슨 짓을 하십니까, 다 늙어서!...이 가증스러운 경솔함을 멈추(11)라고 소리친다. 그의 과격한 직언은 분노한 리어를 더 분노하게 만든다. 올버니는 신중해보이지만 우유부단하다. 그는 거너릴의 행동에 문제의식을 가지지만 상황을 지켜보자(14)며 문제의 해결을 뒤로 미룬다. 거너릴의 말을 빌자면 올버니는 당신은 위험천만한 온화함으로 분별력이 모자란다.(14)”.

모든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서로 치차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비극적 결말을 향해 굴러간다. 비극의 원인은 그들의 성격에 있다. 세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도 유사하게 해석할 수 있다. <맥베쓰>의 경우, 맥베쓰와 그의 부인이 가진 야심을 비극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오셀로>의 경우, 이아고의 악마적 성격과 오셀로의 질투심이 비극의 원인으로 된다. 성격, 혹은 성격적 결함이 비극의 원인이라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연극이 현실세계의 거울이라고 할 때, 비극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비극적 사건들에 대한 탐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극에는 인간은 왜 고통을 겪어야 하며, 참혹하고 비참한 사건들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사고가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세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인간의 성격이 원인라고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당대사회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함의를 좀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다른 시대와의 비교가 필요하다.

고대사회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오이디푸스왕>은 비극의 원인을 신이 내린 운명에서 찾고 있다. 신은 그에게 저주스러운 운명을 던져 주었고, 오이디푸스는 그 운명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신은 인간에게 참혹하고 비참한 운명을 지워주었고, 그것이 결국 비극적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고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자신들의 운명이 그렇고, 팔자가 그렇고,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사회가 생각했던 신은 인간과 비슷했다. 신들은 변덕스럽고, 실수도 하고, 나쁜 짓도 일삼는다. 하지만 중세를 거치며 신은 유일하고 완전해진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은 원죄를 저질렀고, 이로 인해 현실의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대와는 달리 고통스러운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생겼다. 유일신을 믿고 회개하여 천국을 가는 것이다.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근대사회의 세계관은 이전 시대와 현격한 차이를 가지게 된다. 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인간중심의 관점과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인간사회의 고통과 비극적 사건은 피할 수 없는 운명, 혹은 원죄 등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리어왕>에 나오는 에드먼드의 대사는 당대의 사고를 반영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나쁜 운명에 처할 때, 그것이 대개는 우리 자신의 탓이건만, 해나 달, 별의 탓으로 돌리다니....신의 강요에 의해 사악해지기라도 한다는 듯 말이야.(12)이전 사회에 비해 대단히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비극의 근원은 정확히 밝히지 못했다.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비극의 근원을 사회적 차원에서 찾고, 그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관점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가능해진다. 역사는 그렇게 진보를 향해 전진한다.

 

 

3 사회변혁의 가능성

 

리어는 헐벗고 굶주리는 신세가 되어 폭풍우 쏟아지는 광야를 헤메인다. 폭풍우 속에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천둥이여, 둥근 세상을 내리쳐 평평하게 만들어라! 자연의 형상을 깨부수고, 배은망덕한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모든 종자들을 없애버려라!(32)" 거너릴과 리건에 대한 복수심이 인간세상 전체에 대한 것으로 확장된 것이다. 분노가 극에 달한 리어는 "내 머리가 돌기 시작한다."고 말하고, 그 순간부터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다. "아이야, 이리 오너라. 너는 어떠냐? 추우냐? 나도 춥다...나는 네가 가여워 죽겠다.(34)" 이제 리어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다. 그의 왕국에는 부와 향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머리를 누일 집도 없이 굶주린 뱃가죽으로, 그리고 구멍 뚫린 넝마를 걸친 채로 이토록 험악한 시절(34)"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리어 자신이 그 왕국을 지배하던 군주였으므로, 그는 자기반성에 이른다. ", 그동안 내가 이것에 대해 너무 소홀했구나!(34)" 지배자로서의 가책을 느낀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영화를 누리는 자"들에게 말한다. "불쌍한 자들이 느끼는 비통함을 깨달으라. 넘쳐나는 것들을 그들에게 나눠주어라. 그리하여 하느님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라.(34)" 지배자 리어가 깨달은 사회의 진실이란 '불평등'이었다. 미쳐서야 깨달은 리어처럼, 글로스터 또한 장님이 되어서야 진실을 본다. 리어처럼 광야에 내쫓긴 신세가 된 글로스터는 거지 톰을 동정하며 지갑을 건넨다. 한 때 백작으로서 부와 영화를 누리던 글로스터는 "재물로 넘쳐나고 욕정을 탐닉하는 인간은 하늘의 뜻을 농락하고, 자신이 못 느끼는 탓에 보려고 하지 않았다(41)"고 고백하며, 곧 이어 "공평한 분배로 지나친 것을 무효로 만들어 모두가 충분히 누리게(41)" 해달라고 기도한다.

리어의 깨달음은 광기의 증폭과 함께 사회적 차원을 향해 나아간다. "저기 재판관이 천한 도둑을 야단치는 것을 보라. 그런데 두 사람이 자리를 바꾸면 누가 재판관이고 누가 도둑놈이냐?...누더기 옷 사이로 보이는 죄는 크게 보이지만 법복이나 모피외투는 모든 죄를 감춰준다. 죄에 황금칠을 하면 정의의 창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부러진다.(46)" 마치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곧 이어 리어는 "아무도 죄 짓지 않았다.(46)"고 선언한다. 불평등이 제도화 되어 있는 세상이며, 사회체제가 본질적으로 잘 못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를 누리는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어떤 일도 서슴치 않는다. 글로스터를 죽이려는 콘월의 대사를 보자.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 그 자를 사형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겠다. 사람들이 비난은 하겠지만, 감히 어쩌지는 못 할 거다.(37)" 간단하게 '사회적 룰'을 무시하는 콘월의 대사는 끔찍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부당한 행위를 제제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개한테도 복종(46)"하는 수밖에 없다.

리어왕이 취한 이야기 구조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중세적 사고를 반영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지배층이 이러저러한 고난을 겪으며 각성한 후, 원래 자리로 돌아와 선정(善政)을 펼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고, 백성들은 선정에 의해 행복해진다. 이와 같은 이야기 구조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사회변혁의 힘은 지배층의 각성에 있다. 둘째, 사실상의 지배질서는 더욱 공고화된다.

세익스피어는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취했지만 중세적 사고에서 탈피한다. 세익스피어가 설정한 리어와 글로스터의 운명은 중세 이야기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진다. 한때 지배자였던 리어와 글로스터는 뼈저린 자기반성까지 했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이러한 결말은 지배자들의 일부가 도덕적으로 개선된다고 해서 불평등한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해준다. 지배층의 각성으로도 불가능한 이 불평등한 사회의 변혁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힘은 누구에게 있는가?

변혁의 힘이 각성된 민중에게 있다는 사고는 비교적 최근에 발생했다. 세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에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리어왕>에 나오는 민중들은 그저 헐벗고, 굶주리며, 불쌍한 존재이자 누군가 구원해주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지배자들은 왕권을 놓고 국제적인 전쟁을 벌이고, 민중은 지배자들의 싸움에 동원되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희생자다. 극의 말미에서 비로소 기존의 체제-리어의 왕국-는 파멸에 이르지만, 그것은 지배층들이 분열하여 서로를 죽인 결과일 뿐, 민중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리어왕>에서 풍겨나오는 짙은 허무주의적 경향은 변혁적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세익스피어가 <리어왕>에 심어놓은 정치적 주제는 시대를 초월한 변혁적 선동성을 가지고 있다. "공평한 분배로 모두가 충분히 누리게 하소서"라는 리어와 글로스터의 기도는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4 갈등의 해석

 

리건, 거너릴, 에드먼드는 리어, 글로스터가 늙고 노쇠하며, 어리석고, 고집스러우며, 판단력이 떨어진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재산과 권력을 자신들에게 이양해야 한다. “자식이 충분히 성숙하고 아버지가 노쇠하였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보호를 받고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마땅(12)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거너릴과 리건은 권력을 여전히 휘두르려(13)하기 때문에 리어를 견제한다.

반대로, 리어와 글로스터의 입장에서 젊은이들이란 경솔하고 탐욕스럽고 사악하다. 그러므로 젊은이들 중 늙은 자신을 보호해주고 부양할 자, 충직하고 순리를 따르는(21), “인간 본연의 의무에 대해, 부모 자식의 인연에 대해, 예의범절의 중요성과 감사하는 마음에 대해(24)따르는 자를 골라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리어와 글로스터는 현명하지 못하여 실패한다. 그 대가로 새끼를 키웠더니 새끼에게 자기 머리통을 뜯겨 먹히는(14)신세로 전락한다.

문학예술작품이 인간과 삶의 반영이듯, 작품 속의 갈등을 현실세계의 갈등에 비추어 해석해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가정적 차원이다. 독선과 아집, 호령을 일삼는 리어의 모습은 가부장제하의 어느 가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자식에게 버림받고 광야를 헤매는 리어와 글로스터의 모습은 골방에서 죽어가는 독거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가정적 차원을 넘어 좀 더 확장시키면 세대 간의 문제, 즉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의 갈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젊은이들과 늙은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대개의 젊은이들은 늙은이들을 고리타분하고 답답하다고 여기고, 대개의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이 경솔하고 예의를 모른다고 여긴다.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확장시킬 수 있다. 편의상 구세력과 신세력간의 갈등이라고 부르자. 이 때, 갈등의 대상인 재산과 권력은 체제질서로 치환할 수 있다. 구세력은 기존의 체제질서와 가치를 고수하려 한다. 기존 체제의 지배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신세력은 기존의 체제질서와 가치를 개혁하거나 아예 전복하여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려 한다. 기존체제의 지배권에서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익스피어 당시 영국은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왕정체제였다. 그러나 얼마 후 왕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의회가 지배하는 공화국 체제로 바뀌게 된다. 추론하자면, 세익스피어는 왕정을 지키려는 세력과 왕정에 불만을 느끼고 전복하려는 세력 간의 치열한 갈등이 벌어지는 시기에 살고 있었으며 당대 사회의 정치적 갈등이 리어왕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시 세익스피어의 세계관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보수적 가치관을 지녔을 것이다. 충과 효라는 가치를 지향하는 인물들이 선한 인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충과 효가 그 자체로 보수적 가치인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 인물들이 절대군주 리어의 왕권회복을 위해 투쟁한다는 점이다. 둘째, 보수적이지만 기존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리어와 글로스터가 황야에서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기존체제의 몰락을 막을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리어의 왕권을 회복하는 일이 실패하는 것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넷째, 다음에 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왕국의 결말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론일 뿐이다. 작품세계의 갈등이 현실세계의 갈등의 반영이라면, 갈등의 조성과 해결방식에 작가의 세계관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5 에드먼드와 홍길동

 

서양의 세익스피어는 1564년에 태어나 1616년에 죽었다. 동양의 허균은 1569년에 태어나 1618년에 죽었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각각 에드먼드와 홍길동이라는 서자라는 형상을 내세워 적서차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서양과 동양이라는 거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어왕><홍길동전>에 적서차별의 문제가 다루어졌다는 것은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신분제도의 모순이 격화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기에 들어서는 하나의 징표임을 말해준다.

에드먼드는 그런데 왜 나는 왜 관습의 병폐 안에서 내 것을 강탈하는 까다로운 국법을 참아야 한단 말인가? 그저 형보다 열 두 달이나 열 네 달 늦게 났다는 이유만으로? , 서자라서? 그래서 비천해서? 신체는 탄탄하고 정신은 신사처럼 관대한 내 모습은 정실 자식에 견줄만큼 참되지 않던가? 그런데 왜 우리를 천하다고 낙인찍는가? 서출이라고? 천하고 천하다?(12)라고 한탄한다. 홍길동 또한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공자와 맹자를 본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병법이라도 익혀 대장인을 허리춤에 비스듬히 차고 동서로 정벌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이름을 만대에 빛내는 것이 장부의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외롭고,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지경이라,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한탄한다.

두 사람 모두 한탄에 그치지 않는다.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신분제도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자연이여, 그대는 나의 여신. 나는 그대의 법칙만을 따르겠다.(12)는 에드먼드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차별을 두는 신분제도가 자연적 근거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인위적인 제도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생겨날 때부터 오직 사람이 귀하게 태어났으나 소인에게는 이런 귀함이 없사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지요?”라는 길동의 말 또한 같은 의미로써 이들은 자신을 옭아맨 관습과 제도를 부정한다. 신분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중세적 사고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다. 에드먼드는 형을 모함하여 쫓겨나도록 만들어 적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어 아버지 글로스터를 몰락시켜 그의 재산과 권력을 차지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너릴, 리건과 정을 통함으로써 이후에는 왕의 자리까지 오르려고 한다. 그러나 홍길동은 의적이 되어 조정에 맞서는 투쟁을 벌이고, 훗날에는 조선을 떠나 율도국이라는 이상국가를 세운다. 차별받던 에드먼드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싸우다가 결국 죽게 되지만, 홍길동은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렇듯 세익스피어와 허균은 공통적으로 서자라는 형상을 통해 신분제도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해결방식은 전혀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인물형상을 비교해 보면 세익스피어의 에드먼드에 비해 허균의 홍길동이 훨씬 혁명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그래서일까, <리어왕>은 한 때 개작을 당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홍길동전>은 아예 금서가 되어 300년간 출간되지 못했다. 두 작가의 인생행로도 비교해 볼 만한데, 세익스피어는 왕실극단의 작가로 평생을 살았지만, 허균은 역적이 되어 처형되고 만다. 두 사람은 정치적 성향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에드먼드와 홍길동 형상의 차이를 단지 작가 개인의 정치적 성향의 차이에 의한 것으로만 본다면 더 깊은 함의를 추적해 볼 수 없게 된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설은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의 차이다. 서양이 개인주의를 기본 가치관으로 삼고 발전시켜 온데 반해, 동양은 집단주의를 기본적 가치관으로 삼고 발전시켜 왔다. 서양의 서사가 적대적 갈등이 첨예한 조성과 어느 한쪽이 파멸함으로써 산출하는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한 것은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반면에, 동양의 서사가 비적대적 갈등이 주를 이루고 결말에서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집단주의적 가치관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이 에드먼드와 홍길동 두 인물형상의 차이에는 서양과 동양의 가치관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에드먼드의 형상과 관련한 또 하나의 추론도 가능하다. “목적에만 부합한다면 무엇이든 정당화 될 수 있어.(12)라는 에드먼드의 대사는 당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마키아벨리즘을 연상시킨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인 <군주론>에서 무자비할 정도로 현실적인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당대의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다. 마키아벨리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충성, 진실, 애정 같은 관계에 기초한 사회질서와 체계를 부정했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런 견해를 사악하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오셀로>에 등장하는 악인 이아고의 성격 또한 에드먼드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세익스피어는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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