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입은 비너스
1870년.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류 성-
1 기이한 사랑의 형식
남녀 주인공인 제베린과 반다는 학대-피학대라는 형식으로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변해가는 자신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학대와 피학대가 주는 쾌락에 더 깊이 중독되어 간다.
끔찍하고 기이한 사랑 이야기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작가 자허마조흐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의 부인은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온종일 모피를 입고 채찍을 휘둘러야 했다. 여주인공인 반다의 실제 모델은 파니 폰 피스트로라는 여인이다. 다음은 자허마조흐와 파니가 작성한 노예계약서의 일부분이다.
"...그녀의 종인 그레고르는 노예로서 여주인을 공손하게 받들어야 하며...그녀에게 사랑을 요구하거나 애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파니 폰 피스트로는 되도록 자주 모피를 입을 것을 약속한다. 특히 잔인한 행동을 할 때 그렇게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원인을 주로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찾는다. 제베린도 자신의 특이한 성적 취향이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는데, 이는 자허마조흐의 실제 경험이라고 한다.
발현의 정도와 양상이 다를 뿐, 가학과 피학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일반적 속성일지도 모른다. 매운 맛에 열광하는 것, 운동 중독증, '너무 예뻐서 깨물어주고 싶은' 생각 등이 그러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죄책감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자학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는 경우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도 가학-피학의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허마조흐는 경찰국장의 아들이고, 박사이며, 교수였다. 엄격한 가문에서 자라나 최고의 지성인으로 교육받은 그가 극단적인 감각주의를 추구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열자>에는 주나라 윤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윤씨는 낮에는 노예들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밤에 꿈을 꿀 때는 항상 노예가 된다. 반대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늙은 노예는 꿈속에서만큼은 임금이 되어 명령을 내린다. 꿈속에서 역할을 바꿈으로써 억압을 해소하는 것이다.
포르노그라피의 효시격인 소설로 알려졌지만, 채찍을 휘두를 뿐, 노골적인 성애 묘사 따위는 없다. 오히려 인물의 심리묘사가 탁월한데다 스토리 전개에서 긴장감도 있어 책을 놓기 힘들다. 게다가 사랑과 권력, 복종의 심리, 자연과 문명의 모순 등의 정치적, 철학적, 정신분석학적 사색을 자극한다. 때문에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여러 학문에서 중요한 텍스트로 사용되었고, 음악, 영화, 만화 등의 다른 예술장르로 퍼져 나갔다.
2 사랑에 유통기한은 있는가
제베린은 반다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만, 반다는 거절한다. 자신의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드는 남자라면 나는 그게 누구든 사랑하고 싶고, 또 나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누구든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요. 이게 추한 생각인가요?"
반다의 주장이 무책임하고 부도덕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녀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결혼이란 제도는 여자를 구속하기 위해 남자들이 만들어낸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이를 성스럽게 포장하기 위해 서약, 맹세, 성혼식 따위를 동원했는데, 이렇게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해보려는 시도는 결국 모두 실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이 애초에 남녀관계에 지속성 같은 것을 부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꽤 논리적인 주장 아닌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그녀의 주장을 과학적으로도 뒷받침해준다. 사랑이란 감정은 뇌와 호르몬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 지나면 호르몬의 영향력이 감소된다고 한다. 즉,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다.
반다의 주장은 버트런드 러셀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러셀은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 여성해방론자였다. 그는 나아가 결혼제도를 반대하고 자유연애를 옹호했다. 러셀에 의하면 사랑은 자유롭고 자발적일 때 성장하며 의무라고 생각할 때 의미를 잃는다. 따라서 법률로 옭아매는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법률과 도덕으로 엄격하게 옭아매려 하면 성매매가 성행할 뿐이다. 따라서 남녀간 자유연애만이 답이라는 것이다.
작품의 배경이 19세기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그녀의 주장은 급진주의적인 매력까지 느껴진다. 그렇다고 자유연애가 자연의 본성에 맞는 것이라는 논리는 동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자연과 자유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자유는 자연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혼제도와 자유연애 중 자연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의 본성은 자연적 본능을 포함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동물에게 사랑은 짝짓기 행위지만, 인간의 사랑은 책임, 의리, 수치, 애착, 동정과 연민 등을 포함된다. 인류학자인 헬렌 피셔는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가설을 반박하는 증거를 발견한다. 두뇌를 단층촬영하면 사랑에 사람들의 뇌에서 공통적으로 활성화 되는 영역을 볼 수 있다. 피셔는 25년째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한 부부를 대상으로 뇌의 이 부위를 관찰한 결과, 여전히 사랑이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3 지배와 피지배를 계약하다
반다는 제베린에게 계약을 제안한다. 1년간 부부처럼 지내면서 서로 확신을 줄 수 있을지 확인해보자는 것이다. 꿈처럼 행복한 시간들이 흐르지만 얼마 가지 못한다. 제베린이 불안에 떨기 때문이다. 그가 느끼는 불안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그 사람이 언젠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불안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불안은 인간의 생존과 문명의 발전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생존에 대한 불안이 없었다면 인간문명이 이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생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한 불안이 없었다면, 결혼이란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결혼이란 불안한 사랑을 극복하기 위한 약속 혹은 계약일지도 모른다.
사랑에서 불안감은 소유욕과 열등감에 기초한다. '우월한 그대'가 '열등한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안을 낳는다. 제베린에게 반다는 이상형의 여인이다. 게다가 자신은 사랑의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한 적이 있는 프로다. 반다는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문득문득 제베린이 아직 자신을 소유하지 못했음을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제베린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불안을 다스리지 못한 제베린은 그녀의 노예가 되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당신이 완전히,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요."
제베린은 사랑을 지배와 피지배관계로 파악한다. 사랑에 상호 평등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한쪽은 지배하고 한쪽은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제베린의 사고는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흔히 '연애에서 '밀당-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한다', '덜 사랑하는 쪽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 '넌 내 거야'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런 표현에는 연애를 지배-피지배 관계로 보는 관점이 뚜렷이 드러난다. 연인관계 뿐만 아니라 부부,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등 그 모든 사랑의 관계가 종종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나타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제 두 사람은 두 번째 계약-노예계약을 맺는다. 구두로 이루어진 첫 번째 계약과는 달리, 이번에는 서면으로 된 계약서를 작성한다. 작성된 계약서를 근거로 반다는 주인이 되고 제베린은 노예가 된다. 계약서 덕분에 반다는 정당하게 지배할 수 있고, 제베린도 정당하게(!) 복종할 수 있게 되었다. 소설 전반에 걸쳐 계약은 자주 언급된다. 두 사람은 계약서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확인하고 정당화한다.
중세와 봉건사회는 신성성과 신분제도로 지배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평등과 자유에 대한 민중의 염원은 봉건질서를 무너뜨리게 된다. 시민혁명과 함께 등장한 근대사회는 계약 개념을 절대적으로 확장시킨다. 이제 국가와 시민은 일종의 계약 관계로 되었다. 실제로 계약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간주하는 것이다. 상호 계약에 의해 지배와 복종을 정당화한다. 국가와 시민은 계약관계라는 개념은 현재와 같은 민주주의 제도로 이어졌다. 시민은 선거와 같은 수단을 통해 지배권력을 합법적으로 교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계약의 절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잔혹성도 정당화해주었다. 계약은 상호간의 자유의사에 기초하므로 표면적으로는 평등을 가장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많은 계약들이 불평등하게 맺어지지만, 한 번 맺어진 계약은 불평등을 법적으로 정당화한다. 예컨대 오늘날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노예계약과 다름없는 고용계약을 맺고 있다. 노예를 내리치던 채찍이 사라진 자리에 계약이 자리를 잡고 지배와 복종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들은 정말로 사랑했을까
자유주의 연애관을 가진 여인. 그 여인을 너무나 사랑하여 차라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남자. 순애보로 전개될 수도 있는 이야기는 끔찍하게 전개된다. 그들은 왜 그런 끔찍한 형식의 사랑을 하게 된 것일까? 그들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반다는 두려울 정도로 학대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부드럽게 애무하며 사랑을 속삭인다. 그리고 또 다시 학대한다. 이 패턴은 영리한 지배자들이 쓰는 통치술인데, 매우 효과적이며 착시효과마저 불러일으킨다. 학창시절, 이런 통치술을 쓴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진압한 계엄군들도 이런 방식을 썼다. 무자비한 진압을 해서 공포감을 심어 주고, 다음날 새벽 일찍 거리와 골목 청소를 했다. 얼마 후 계엄군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제베린은 반다가 학대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서로 작동원리가 다르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따르면, 새디스트는 공격 자체에 쾌감을 느끼지만 매저키즘은 피학대 자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에 의한 피학대에서 쾌감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학대받음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는데, 학대받지 못하는 것은 사랑을 확인 받지 못하는 것이므로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매저키스트는 사랑 때문에 학대를 원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경험, 자학적 습관, 사랑에 대한 관념 등 일련의 특성은 기이하지만 정상적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의 빨간 단추를 누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의식에 의해 적절하게 통제되던 무의식적 욕망이 작동되어 분출된다.
"당신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환상을 일깨워 주었어요. 내 마음속에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환상을 말입니다."
"어떤 환상이죠?"
"내가 사랑하고 숭배하는 한 여인의, 한 아름다운 여인의 노예가 되는 거죠."
"그 대가로 당신을 학대할 수 있는 그런 여자를 말이죠."
반다는 내 말을 가로막으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래요. 내 몸을 묶은 다음 내게 채찍질을 하고 발길질까지 해대는 그런 여자죠. 그러면서 정작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여자죠."
"그리고 당신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켜 당신을 미칠 지경으로 만들고 당신이 그 운 좋은 연적과 맞서게 한 다음, 당신을 연적의 야수 같은 손에 내 맡겨 버리는 그런 간이 큰 여자겠죠. 안 그런가요? 마지막 장면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반다를 쳐다 보았다.
"당신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그래요. 우리 여자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거든요. 조심하세요. 혹시 당신이 이상형을 찾아냈을 때 그 여자가 당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잔인하게 나올지도 모르니."
"내 이상형을 이미 발견한 것 같아 두렵군요."
나는 그렇게 소리치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녀의 품에 파묻었다.
아마도 두 사람의 무의식은 처음 조우했을 때부터 서로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사람이라는 것을. 노예, 학대등과 같은 잔인함과 극단적인 부분을 제거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랑에 빠진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용어로는 의존적 대상선택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결핍 혹은 욕망을 채워 줄 이성을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이냐는 객관적이지 않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고 충분하냐 부족하냐를 따지는 기준도 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제베린은 비너스라는 이미지를 사랑했다. 돌로 된 비너스 상에 입을 맞추었고, 거울을 보는 비너스 그림을 보며 기뻐했다. 데릴라에게 죽어가는 삼손이 되고 싶었고, 유딧에게 목이 잘리는 홀로페르네스를 부러워했다. 제베린은 실재하는 반다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 속에 창조된 이미지를 사랑한 것이며, 자신의 욕망을 사랑한 것은 아닐까.
반다의 사랑은 어떠할까? 사실 반다는 제베린의 사랑을 받아준 것뿐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그녀의 원칙에 따랐던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 이상형인 그리스 남자가 나타나자 반다는 즉시 그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의 원칙을 따랐고 욕망에 솔직했을 뿐이다.
5 사랑은 평등할 수 있을까
<모피를 입은 비너스> 액자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초반부와 결말부는 각각 액자의 외곽에 위치한다. 초반부의 화자인 "나"의 꿈에 나타난 여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 원칙은 수천년의 경험에 근거한 거에요."
그 녀는 흰 손가락으로 검은 모피를 만지작 거리면서 조롱 조로 대꾸했다.
"여성이 복종하는 태도를 보일 수록 남성은 그만큼 빨리 정신을 차리고 여성을 지배하려고 들지요. 반면에 여성이 잔인하고 불충하고 게다가 남성을 학대하고 모욕적으로 가지고 놀며 동정같은 것을 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여 남성에게 사랑을 받고 또 숭배를 받을 수 있어요. 어느 시대나 늘 그래 왔어요. 헬레네와 데릴라 시대부터 예카테리나 여제와 롤라 몬테즈에 이르기까지."
여신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남성에게 여성이란 욕망의 대상이므로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거나 숭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잘 이용하면 지배자의 위치에 올라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부, 반다와 헤어져 일반적인 생활로 돌아온 제베린은 화자인 "나"에게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얘기해준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뭐죠?"
"그 교훈은 말이오, 여자란 자연이 창조해 낸 바대로 그리고 현재 남자들이 키우는 바대로 남자의 적이라는 것이지요. 여자는 남자의 노예나 폭군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동료가 될 수는 없어요. 여자가 남자의 동료가 되려면 권리면에서 남자와 동등하고 또 교육과 일을 통해 남자와 동등해져야 해요. 지금으로서는 망치냐 모루냐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밖에는 없어요."
제베린의 이야기를 정리하자. 여자에게도 교육과 노동을 비롯한 법적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해야 한다. 사회에서 이것이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남녀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로 될 수밖에 없다. 사회가 평등해야 남녀관계도 평등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초반부와 결말부를 근거로 자허마조흐의 원래 의도가 근대 사회의 모순을 탐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결말부는 검열이나 사회의 비난 등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일 뿐, 진정성 있게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작가의 진의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 작품이 사랑에 존재하는 권력의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신의 이야기처럼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형식의 사랑이 수 천년을 이어왔다. 그렇다면 지배관계를 걷어 내고 상호간 평등을 이루는 사랑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제베린의 깨달음처럼 남녀에 대한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진다면 사랑도 평등해질 것인가? 자신있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 사회의 모든 불평등의 기원이 소유에 있다고 보았다. 이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사랑을 소유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제거하지 않는 한 평등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평등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루소의 언급을 새겨볼 만하다.
지배하려고 애쓰지 않는 자를 지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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