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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블로킹 작업

블로킹 작업


-류 성-


사실, 마이닝겐 이전에는 블로킹이란 개념이 없었다. 당시의 무대 관습은 배우들이 주인공의 뒤쪽에서 병풍을 치고, 주인공은 중앙의 연기구역에서 마음 내키는대로 움직였다. 조화와 통일성이라는 예술적 가치의 대두와 함께 등장한 연출가들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 블로킹 작업은 연출가의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되었다. 블로킹은 연출가의 연출의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의 작업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연기구역을 정해주고, 동선을 그어주었다. 디테일의 수준은 작품마다 다른데, 어떤 경우에는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라는 지시 이외에도 대사의 어느 부분에서 움직이고, 어떤 제스쳐를 사용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배우들은 내가 지시해준 영역에서 연습을 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블로킹 작업은 배우가 연기의 주인이 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을 느꼈다. 배우는 인형이 되어 버렸다. 반면, 배우가 역할의 삶에 스며들어 스스로 찾아낸 움직임에서 강한 감동을 느끼는 경험도 수차례 겪게 되었다. 그 때의 행동은 자연스럽고 진실했다. 나는 블로킹 작업에서 연출의 역할은 동선을 그어주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숙달되도록 연습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우 스스로 움직임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물론 배우 스스로 찾아낸 움직임이 미학적으로 덜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다. 인물들의 움직임이 충돌을 일으키거나 혼란을 야기할 때도 많다. 그래서 움직임을 정리하는 최종적인 권한은 여전히 연출가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블로킹 작업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배우가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블로킹을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앉아서 하는 연습이 끝나고 서자마자 연기구역 정해주고, 움직임을 지시해 줄 것이 아니라 배우 스스로가 찾아낼 수 있도록 하는 기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관객방향을 정하지 말고 연습을 진행하는 것은 상당히 효과적이다. 무대문법을 의식하고 스스로의 내적 요구를 거세시키며 보여주기 위한 연기에 빠져드는 경향을 일정하게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 움직이고 싶을 때 움직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어느 부분에서 움직이라는 따위의 지시사항을 미리 주지 않고, 배우 스스로 움직임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적인 요구가 있을 때 그 요구를 용감하게 따르라고 격려해줘야 한다. 동시에 억지로 움직이지 말라고도 강조해야 한다. 많은 배우들이 가만있기 힘들어 한다. 뭔가 해야 하고 보여주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억지스럽고 과장된 움직임을 끌어낸다. 그러한 강박을 제거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반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자리 잡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몸의 방향을 취하는데서 무대적인 혹은 연극적인 약속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며,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취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3/4을 개방하는 식의 방향을 취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대화를 할 땐 실제로 대화하는 것처럼 상대를 보게 하고, 등이 보여도 상관없으며 직선으로 이동해도 상관없으니 실제와 같이 움직일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렇게 배우들이 스스로 찾아낸 움직임 거칠고, 예술적이지 않거나 때로는 충돌을 일으키는 등 일정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단계는 배우들이 인물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점이 중요하며, 따라서 당장에 문제가 있더라도 성급히 고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역할과 관련없는 움직임이 나오는 것에 대해 자주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규칙 하에 여러 차례 연습하면서 자연스럽고 정당한 움직임을 찾을 수 있게 되면 그때서야 연출은 관객방향도 설정하고 배우들의 움직임을 정리해줘야 한다. 연출가는 배우들이 찾아낸 움직임을 그대로 적용하거나, 조정하거나, 전혀 새로운 동선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배우들은 역할의 삶과 어울리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움직임을 이미 어느 정도 찾았으므로 창조적으로 적응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방식이 미학적으로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았다. 연출가 혼자서 그려낸 블로킹에 철저하게 따르는 방식의 비예술적인 작업이 얼마나 예술적인 결과를 가져올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연출가도 인간일 뿐 연출가라고 초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두의 창조성이 발휘되어 만들어지는 블로킹이 훨씬 아름답다고 나는 믿는다.


2008년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