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연구-2 신파연기
- 류 성 -
<신파>연구-1에서 살펴보았듯이 1930년대 들어 일본적 신파극은 내용, 기법 등에서 일련의 변화를 일으키며 한국적 신파극으로 변신함으로써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며 토착화한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일제의 강력한 문화통치정책에 의해 신파극의 주체들은 국민연극이라는 친일연극을 수행하면서 정치적인 선전과 목적을 위한 연극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해방과 더불어 점차 소멸하고 만다.
신파극은 사라졌으나 신파적인 요소는 영화, 드라마 등에 편입되어 일정기간 잔존하게 된다. 요즈음 '신파'라고 칭할 때는 이렇게 잔존한 '신파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 이 신파적인 요소들은 구체적으로 과장스러운 연기, 비극적인 인물의 설정, 감상주의적인 스토리, 과잉된 정서, 저속한 상업주의 등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중 신파적 요소의 대표격인 신파 연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신파연기의 근원
신파극의 연기술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근원을 통해 구축되었다.
첫째, 신파극 연기술이 <가부키>연기술을 토대로 한 것이다. <가부키>의 연기술은 고도로 양식화된 기교적인 연기술이다. 쉽게 말해 배역의 성별, 신분, 나이 등에 따라 우는 방법, 웃는 방법, 말하는 법, 걸음걸이, 몸짓 등이 정해져 있는 연기라고 볼 수 있다. 화술은 일본말의 억양에 시적이고 음악적인 효과가 결합된 것이다. 이러한 <가부키>식 연기술을 답습하면서 일본적 신파극 연기술이 구축되었고, 초기 우리나라 신파극 주체들이 그대로 모방을 했다.
둘째, 신파극이 '스타시스템'의 연극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 '스타시스템'의 요체는 주연배우의 연기에 의해 공연의 성패가 결정되는 연극이다. 주연배우들은 매우 긴 분량의 독백을 마치 시를 낭송하듯 읊는 연기를 많이 했고, 자연히 행동과 화술에서 인위적인 기교를 부려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멋있게 부각시키려고 했다. 이것이 '신파적 연기'를 만들어낸 또 하나의 근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당시의 극장조건과 관극문화도 영향을 주었다. 음향학적으로 설계되지 못한 실내극장과 떠들썩한 분위기의 관객들을 휘어잡기 위해서 배우들은 있는 힘을 다해 대사를 외치고 커다란 동작표현으로 눈과 귀를 집중시켜야 했던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신파조 대사의 대표적인 어미인 '~했음니~!"는 사실 배우들이 대사를 치다가 힘이 달려 끝까지 말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는데, 이 후배 배우들이 멋으로 알고 따라하면서 굳어져버렸다고 한다.
2. 신파연기의 특징
신파극의 대사는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 연극처럼 생활적이고 압축적인 대사보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낭송체의 독백이 많았다. 자연히 배우의 화술은 이에 맞게 사실성보다는 시적 운율감을 비롯한 음악적 성격을 살리는 방향으로 구축되었는데 이는 낭만주의적 연기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화술은 사실성은 떨어지지만 감상적인 극의 내용과 결합되면서 대단한 정서적 감화력을 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또한 ‘구찌다데’식의 즉흥적인 성격이 강했다. ‘구찌다데’식이란 정해진 극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배우들이 줄거리를 공유하고 즉흥적으로 연기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조화를 이루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분을 멋드러지게 하는데 집중되었다. 신파극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극본이 창작되고, 연출가가 자리 잡히면서 꾸찌다데식의 즉흥성은 점차 사라져가지만 연기제일주의 경향은 그대로 남습니다.
과잉된 정서를 유지하는 것도 주요한 특징이다. 비극적 상황에 놓인 여주인공의 애상과 슬픔, 그리고 희생으로 대표되는 신파극은 관객의 정서를 고양하여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데 주력했고 따라서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과잉된 정서를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는 신파극 연기술은 서구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적 연극과의 경쟁 및 교류를 통해 세련되어 가지만 본질적으로는 내면중심의 사실적 연기가 아니라 기교중심의 양식적 연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종래 신파극의 특징에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 연기술이 결합되면서 한국적 신파연기 나름의 양식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신파연기는 신파극의 소멸과 함께 사실주의 연기술이 완전히 뿌리내리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현재 '신파적 연기'라고 부를 때는 원래의 신파극 연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으로 꾸민 듯한 연기"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3. '신파 연기'비판의 허와 실
일본에서 이식된 연극이며 상업적인 속성을 짙게 가졌던 만큼 신파극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인위적인 기교와 멋을 부리는 신파연기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비판의 근저에는 서구적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 연기술이 오직 정당한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좀 다른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도 있을 듯 하다. 신파극 연기술은 토착화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 낭만주의적인 것과 사실주의적인 것,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등이 뒤섞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연출가 이윤택은 토착화된 한국적 신파연기의 화술이 가지는 음악성에 주목하면서 "고도의 미학성과 전문성을 갖춘 연기양식이고, 이 화술체계가 우리 연극이 이어받아야 할 귀중한 연극적 자산"이라고 평가 한 바 있다
신파극 연기술은 토착화 과정에서 대단히 높은 정서적 감화력을 가지는 연기술로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중들의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던 배우들의 대부분이 신파극 출신 배우들이었다는 것은 신파의 상업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대중적 감화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가부키>식 연기술은 청산되어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서구의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 연기술을 절대화 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부한 고저장단을 살리고 우리민족 특유의 음악성을 결합시킨 화술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신파연기를 연구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요즘처럼 과장스럽고 기교적인 연기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확한 발음과 훈련되지 않은 발성, 말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화술 등 무대에 맞지 않는 무기교의 화술이 더 문제가 되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신파극 연기술뿐만 아니라 북한연극의 화술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흔히 북한연극의 화술을 촌스럽고 신파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북한도 사실주의를 확립하고 신파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을 했던 것을 보면 이를 그저 신파극의 잔재라고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마도 현재 남한의 배우들과는 많이 다른 북한배우들의 억양과 음조 등이 그런 인상을 주는 듯 하다.
황 철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당대 배우들이 북한연극 연기술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 일제의 잔재청산에 남한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던 점, 사실주의를 확립하고 일체의 형식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노력한 점, 연극을 발전시키는데서 통속성을 중시한 점, 민족적 형식을 계승발전한 주체적인 연극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 점 등이 종합되어 현재 북한연극의 연기술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유민영 교수는 북한의 연극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수용,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철두철미 연구, 토착화시켰기 때문에 무대예술의 기본이 대단히 탄탄하다.", " 극술의 수준과 민족적 정체성 등 에서는 북한연극이 앞선다고 볼 수 있다."라는 언급을 하고 있는데 곱씹어 볼만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요컨대 우리가 '신파연기'라고 주저 없이 딱지를 붙이는 것들 중에는 분명 일본 신파극의 잔재를 비롯해 낡고 뒤떨어져 버려야 할 것도 있겠지만 반면에 되살려야 할 것도 있고 받아들여 발전시켜야 할 것도 섞여 있으니 옥석을 가리기 위한 연구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파연구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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