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연구 1 - 탄생과 토착화
-류 성-
일본에서 유입되어 일제강점기 최고의 대중예술로 자리매김했던 신파극은 해방과 함께 사실상 소멸되었으나 ‘신파’ 혹은 ‘신파적’이라는 용어는 대체로 전근대적, 도식성, 저속한 것 등의 의미를 담아 오늘날에도 자주 쓰이고 있다. 유입된 지 100년이 되었고, 청산의 대상이기도 했으며, 그렇게 욕을 먹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신파극의 부활을 내건 공연들도 나오고 신파극의 재평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1. 신파극의 탄생
신파극은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유입된 서구의 멜로드라마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연극이다. 서구 근대극의 기법을 수용한 연극이 등장하면서 일본극계는 가부키, 노오 등의 일본전통연극을 구파라고 칭하고, 반면에 새로운 연극이라는 의미에서 신파라고 부른 것이다.
신파극은 주제 면에서 원래 정치적인 색깔이 강했다. 당시 재야세력이라 할 수 있는 민권파 청년들이 정치적, 시사적 주제를 담아 민중계몽과 선전의 목적으로 신파극을 공연했었다. 말하자면 반정부적 성격의 정치 선전극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제국주의화하는 과정에서 이에 편승하여 군사극으로 변하고, 이어 탐정극, 가정비극 등으로 변해가며 마침내 오락물로 전락하고 만다.
정치극으로 출발한 신파극이 오락물로 전락한 것도 아이러니 하지만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도 아이러니하다. <가부키>에 대항하여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을 담아 <신파>라고 부르며 출발했지만 <가부키>의 연기틀의 연속선상을 벗어나지 못한 연기양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가부키>와 똑같지는 않지만 <가부키>에서 비롯된 기교적이고 과장스러운 연기와 독특한 발성 및 화술을 답습하여 대단히 기교적이고 양식적인 연기술을 형성한 것이다.
2. 강제로 이식된 일본 신파극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면서 각종규제를 만들어 전통문화를 탄압하고 자기문화를 이식하는데 주력했다. 일제는 일본연극을 가르치고, 일본연극을 모방한 연극을 공연할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하는데까지 이르자 우리 전통예술인들은 무대를 떠나 지방을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제는 전통예술을 말살하는 한편 일본전용극장들을 여러 곳에 세우고 일본신파극단을 불러들여 연일 신파극을 공연한다. 당시 직수입된 일본신파극의 공연내용은 주로 일본의 군사적 승리 선전하는 군사극, 엽기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는 탐정극, 체념과 비애와 같은 일본적 정서를 주는 가정비극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의 공연들은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현실에 눈멀게 하고, 독립의지를 약화시키는 영향을 주었다.
사실 이렇게 유입된 신파극은 우리 민족의 감정과 정서에 맞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그다지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과 서구의 것에 경도된 사람들, 일본에 의해 통제를 받았던 언론들 등이 신파극을 마치 새롭고 발전된 극예술인 양 떠들어 댔다.
3. 신파극의 토착화 과정
일본 신파극의 직수입단계를 거친 후 1910년대에 혁신단, 문수성, 유일단 등 국내 신파극단들이 출현하여 공연활동을 한다. 당시 국내 신파극 공연은 대체로 일본 작품을 번안, 각색하여 올렸고, 번안과 각색을 하여 우리나라 상황으로 설정하고 우리나라 말로 연기를 했지만 무대장치와 배경은 일본의 모습을 재현했고, 일본 신파극의 발성과 화술, 연기표현을 그대로 모방했다.
주목할만한 점은 일본신파극의 궤적과 매우 비슷한 길을 밟았다는 것이다. 일본신파극을 모방하여 출현한 국내신파극단들은 신파극을 사회의 개혁과 민중계몽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일본의 작품을 번안, 각색해서 올리다보니 애초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락물만 올리게 된다.
당시 관객들은 여전히 신파극에 그다지 큰 호응을 보내지 않았던 듯 하다. 당시 신파극단들의 연극제작수준이 매우 조잡하고 낮은데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민중들이 아무리 국내신파극단이지만 일본냄새가 물씬 풍기는 극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경향은 대체로 1920년대도 지속된다. 신파극에 지식인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기법이 세련되어지는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일본신파극의 모방과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일본적 정서를 복제한 작품들이 계속 공연되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면서 신파극은 커다란 변화를 하게 된다. 1920년대부터 극예술협회 등이 중심이 된 서구 사실주의 연극과의 경쟁 및 교류, 당대 사회를 반영하고 일본적 색채를 벗어내려는 연극인들의 노력 등이 결합되면서 신파극은 토착화하기 시작한다.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1930년대의 신파극은 종래의 과장된 신파조의 연기와 일본식의 무대를 지양하고 서구적 사실주의기법을 수용한다. 또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시대적 배경과 우리나라의 사회상을 일정하게 반영한 창작극이 나오는 등의 변화가 생긴다. 물론 상업주의적 속성으로 인해 주제와 내용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특히 동양극장이 개관된 이후부터는 연출과 연기, 무대미술 등에 있어서 기법 상으로는 사실주의극과 신파극과의 경계가 모호할만큼 신파극은 세련된 연극으로 변모한다. 일본 신파극이 한국적 신파극으로 변신을 해내면서 신파극은 마침내 대중극으로서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신파연구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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