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 읽기 3 - 사회변혁의 가능성
-류 성-
리어는 헐벗고 굶주리는 신세가 되어 폭풍우 쏟아지는 광야를 헤메인다. 폭풍우 속에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천둥이여, 둥근 세상을 내리쳐 평평하게 만들어라! 자연의 형상을 깨부수고, 배은망덕한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모든 종자들을 없애버려라!" 거너릴과 리건에 대한 복수심이 인간세상 전체에 대한 것으로 확장된 것이다.
분노가 극에 달한 리어는 "내 머리가 돌기 시작한다."고 말하고, 그 순간부터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다. "아이야, 이리 오너라. 너는 어떠냐? 추우냐? 나도 춥다...나는 네가 가여워 죽겠다." 이제 리어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다. 그의 왕국에는 부와 향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머리를 누일 집도 없이 굶주린 뱃가죽으로, 그리고 구멍 뚫린 넝마를 걸친 채로 이토록 험악한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리어 자신이 그 왕국을 지배하던 군주였으므로, 그는 자기 반성에 이른다. "오, 그동안 내가 이것에 대해 너무 소홀했구나!" 지배자로서의 가책을 느낀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영화를 누리는 자"들에게 말한다. "불쌍한 자들이 느끼는 비통함을 깨달으라. 넘쳐나는 것들을 그들에게 나눠주어라. 그리하여 하느님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라." 지배자 리어가 깨달은 사회의 진실이란 '불평등'이었다.
미쳐서야 깨달은 리어처럼, 글로스터 또한 장님이 되어서야 진실을 본다. 리어처럼 광야에 내쫓긴 신세가 된 글로스터는 거지 톰(에드거)을 동정하며 지갑을 건넨다. 한 때 백작으로서 부와 영화를 누리던 글로스터는 "재물로 넘쳐나고 욕정을 탐닉하는 인간은 하늘의 뜻을 농락하고, 자신이 못 느끼는 탓에 보려고 하지 않았"다며 고백하며, 곧 이어 "공평한 분배로 지나친 것을 무효로 만들어 모두가 충분히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리어의 깨달음은 광기의 증폭과 함께 사회적 차원을 향해 나아간다. "저기 재판관이 천한 도둑을 야단치는 것을 보라. 그런데 두 사람이 자리를 바꾸면 누가 재판관이고 누가 도둑놈이냐?...누더기 옷 사이로 보이는 죄는 크게 보이지만 법복이나 모피외투는 모든 죄를 감춰준다. 죄에 황금칠을 하면 정의의 창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부러진다." 마치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곧 이어 리어는 "아무도 죄 짓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불평등이 제도화 되어 있는 세상이며, 사회체제가 본질적으로 잘 못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를 누리는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어떤 일도 서슴치 않는다. 글로스터를 잡아죽이려는 콘월의 대사를 보자.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 그 자를 사형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겠다. 사람들이 비난은 하겠지만, 감히 어쩌지는 못할거다." 간단하게 '사회적 룰'을 무시하는 콘월의 대사는 끔찍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부당한 행위를 제제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개한테도 복종"하는 수 밖에 없다.
리어왕이 취한 이야기 구조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중세적 사고를 반영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지배층이 이러저러한 고난을 겪으며 각성한 후, 원래 자리로 돌아와 선정(善政)을 펼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고, 백성들은 선정에 의해 행복해진다. 이와 같은 이야기 구조는 두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사회변혁의 힘은 지배층의 각성에 있다. 둘째, 사실상의 지배질서는 더욱 공고화된다.
세익스피어는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취했지만 중세적 사고에서 탈피한다. 세익스피어가 설정한 리어와 글로스터의 운명은 중세 이야기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진다. 한때 지배자였던 리어와 글로스터는 뼈저린 자기 반성까지 했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이러한 결말은 지배자들의 일부가 도덕적으로 개선된다고 해서 불평등한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해준다. 지배층의 각성으로도 불가능한 이 불평등한 사회의 변혁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힘은 누구에게 있는가?
변혁의 힘이 각성된 민중에게 있다는 사고는 비교적 최근에 발생했다. 세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에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리어왕>에 나오는 민중들은 그저 헐벗고, 굶주리며, 불쌍한 존재이자 누군가 구원해주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지배자들은 왕권을 놓고 국제적인 전쟁을 벌이고, 민중은 지배자들의 싸움에 동원되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희생자다. 극의 말미에서 비로소 기존의 체제-리어의 왕국-는 파멸에 이르지만, 그것은 지배층들이 분열하여 서로를 죽인 결과일 뿐, 민중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리어왕>에서 풍겨나오는 짙은 허무주의적 경향은 변혁적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세익스피어가 <리어왕>에 심어놓은 정치적 주제는 시대를 초월한 변혁적 선동성을 가지고 있다. "공평한 분배로 모두가 충분히 누리게 하소서"라는 리어와 글로스터의 기도는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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