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15전야제 작업후기
작업명 : 2012년 815 자주통일대회 전야제
역할 : 연출팀원
장소 : 여의도 물빛광장 특설무대
변명같은 작업후기
안타깝게도 2011년에 이어 2012년 815 전야제의 평가도 그리 좋지 않았다. 연출팀의 한 사람으로써 대중들에게, 그리고 무대를 꾸민 모두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나는 전적으로 연출팀의 실력문제, 그러니까 판을 잘 못 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815전야제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의 큰 행사들이 종종 별다른 감동없이 치뤄지고 있는 것은 연출력외의 문제도 있다는 방증이다.
책임회피처럼 보일지라도, 이번 작업후기는 불가피하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 작업과정 동안 고민했던 것도 이 문제였고, 그밖에 특기할만한게 없기 때문이다. 2012년 815 전야제 작업후기지만, 그것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며, 또한 이 후기는 나의 주관적 견해일뿐 연출팀 전원의 의견은 결코 아니다.
연출력보다 중요한 문제
진보진영의 크고 작은 행사를 몇 번 연출해본 짧은 경험으로 미루어 말하자면, 감동적인 행사가 되느냐 그저그런 행사가 되느냐는 행사판을 잘 짜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지 않았다. 대중의 의지가 결집되고 분출되면 판이야 보잘 것 없어도 감동적이 된다. 이 때 연출의 역할은 결집된 대중의 의지가 예술적으로 분출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대중의 의지가 결집되지 않을 때는 어떤 연출적 기술을 쓴다 하더라도 요란해질뿐 감동은 없다.
진보진영의 내적인 어려움-사상적 혼란, 상층조직의 분열, 기층조직의 약화 등-으로 인해 대중의 의지는 힘있게 결집되지 못하고, 그래서 행사를 코앞에 두고도 상과 기조는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다. 막판에 겨우 정리된 기조와 상은 앙꼬없는 찐빵같다. 예컨대 "단결"을 중심 기조로 잡았지만, 정작 단결의 내용은 정리되지 않는 식이다. 그것은 진실로 단결을 원하는 대중의 가슴에 파고들지 못하는 공허한 구호가 되기 십상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리들 서로간에 일치성이 낮아서 그런 것을.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연출팀이 할 수 있는 일은 여러가지 투쟁과제와 구호들을 이러저러한 형식으로 구성하는 일밖에 없다. 그것들은 핵이 없으므로 서로 엮이지 못한 채 단순 나열된 것처럼 보인다. 개중에는 몇몇 인상적인 아이디어들도 있기는 하지만 손에 쥔 모래처럼, 실빠진 구슬처럼 이내 흩어져 버리고 만다.
빈약한 콘텐츠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되는 전야제에서 공연, 영상 등의 콘텐츠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감동적인 공연 하나가 1년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꾸 빈약해진다. 게다가 같은 콘텐츠가 행사마다 자꾸 겹치고 반복된다. 통상 부문행사와 본행사를 통틀어 3-4개의 행사가 연속되는데 연설도 비슷비슷, 공연도 비슷비슷, 상영되는 영상도 비슷비슷하다. 콘텐츠가 겹치는 문제야 각 부문행사 연출팀이 연석회의만 가져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을테지만, 콘텐츠의 빈약함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은 못된다.
이명박 정부기간 내내 통일운동은 매우 어려워졌고 자연히 통일예술의 콘텐츠도 그 양이 극히 줄어버렸다. 예술가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통일작품을 열심히 창작하지 않는다. 해봐야 보급도 안 되고 공연할 기회도 없으니 이를 뭐라고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예전보다 줄었을 뿐 새롭게 창작되는 좋은 콘텐츠가 아주 없지는 않으며, 또 없으면 창작을 하도록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만약에 연출팀이 한 두어달 전부터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통일예술의 모범을 발굴하고 또 적극적으로 조직해낸다면 무대의 콘텐츠가 그렇게 빈약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이다. 현실은 이런 환상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고백하건대, 연출팀은 전국의 통일예술을 총화하거나 조직할 능력이 없고 그럴만한 여력도 없다. 누가 연출팀에 참가하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보예술운동은 오랜시간 각개전투하듯 흘러왔고 급기야 서로 소통하고 결집할 조직적 기반을 상실했다. 지인은 있지만 동지는 없고, 연락처는 있지만 망은 무너져 있다.
그밖의 문제들
(1) 815 전야제의 성격과 질감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데 편의상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보자면 이렇다. 범민족대회와 같은 뜨거운 판을 만들어야 된다는 의견과 시민들도 거부감없이 참가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서로 부딪힌다. 거칠고 소박해도 기층에서 준비한 공연들로 채워야 한다는 의견과 검증되고 잘 준비된 공연을 선별해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서로 부딪힌다. 서로의 접점을 찾기는 어렵고, 결국엔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판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곧 현재 통일운동의 애매한 스탠스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연출팀의 역할은 애매해진다. 부문과 지역의 책임자들이 그 모든 논의를 정리할 때까지 연출팀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대체로 정리되고 나면 행사는 거의 며칠 남지 않는다.
(2) 예산도 곤혹스러운 문제다. 적은 예산이 문제가 아니다. 예산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행사를 만들면 된다. 문제는 행사준비 초기부터 예산을 특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추진본부에서는 연출팀에게 묻는다. 예산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사실 이처럼 부질없는 질문은 없다. 판은 주어진 예산에 맞게 만드는 것이니까. 하긴, 추진본부에서 일부러 예산을 특정하지 않을 리는 없다. 예산의 대부분은 추진본부에 참가하는 단체들의 분담금으로 구성되고, 단체들의 분담금은 또 참가자들의 회비로 구성된다. 목표치를 정할 수는 있으되 특정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예산이 정리되지 않으면 판도 정리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은 부족하므로 연출팀은 꾸역꾸역 행사안을 만들어내기는 한다. 겨우 특정한 예산은 준비기간 내내 요동친다. 아니 자꾸 줄어든다. 줄어들 때마다 연출팀은 몇 번씩 판을 새로 짜게 되는데, 대개는 너덜더덜해진다. 차라리 적은 예산이라도 일찍 확정되고 그 뒤에 변함이 없는 게 일을 하는데서는 훨씬 나을 것이다.
(3) 행사연출의 전문성을 높이는 문제는 해결되어야겠지만, 나는 행사연출을 책임지려는 사람이 극히 부족한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주체가 있어야 실력을 높일 생각도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가능한 피하고 싶은 것이 행사연출작업이며, 그것을 나의 본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출팀으로 결합하는 사람들은 대개 행사를 맡아본 몇 번의 경험이 있고, 815대회에 참가한 대중들을 어떻게든 책임지고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결의한다. 그러나 요동치는 예산, 정리되지 않는 상과 기조, 번복되는 결정, 턱없이 부족한 행사인력, 애정없는 평가 등에 치이면서 그나마 있던 마음조차 종종 상해 버린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다음부터는 연출팀 절대 안 해"라는 말을 내뱉곤 하는데, 농담반 진담반이 아니라 진담이 반이상이라고 봐야 한다.
좀 어려울뿐이다
부끄럽게도 이번 작업에서 나는 실무적이고 관성적으로 일했다. 연출을 하는게 아니라 진행을 했다. 그 때 내 마음속에는 냉소적인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이번에도 별달리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상황인식, 그리고 그로 인한 무기력함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5월에 터진 통합진보당 사태로 내 마음도 커다란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일 행사를 진행하면서 나의 좌절과 냉소는 조금씩 부서져갔다. 피토하듯 단결과 자주통일운동의 원칙을 호소하는 선생님들의 연설에 가슴이 아팠다. 실의에 빠져있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특히 힘을 받은 것은 단위행사였다. 무겁고 늘어졌던 본행사에 비해 몇몇 부문행사는 꽤 활력이 넘쳤다. 2011년에이어 2012년에도 진행된 통일무도회 행사는 가장 인상깊은 판이었다. 대중들은 신나게 춤추고 노래했고, 밤을 새워라도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위 행사의 판이 활기있다는 것은 대중의 마음과 의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래, 이 나라에서 진보운동이, 그리고 예술운동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어려운 상황들은 여전하지만 그에 짓눌리면 아무것도 못하는 법이다. 실력은 높여가면 되고, 차이는 좁혀가면 되고, 무너진 것은 새롭게 건설하면 된다.
작업명 : 2012년 815 자주통일대회 전야제
역할 : 연출팀원
장소 : 여의도 물빛광장 특설무대
변명같은 작업후기
안타깝게도 2011년에 이어 2012년 815 전야제의 평가도 그리 좋지 않았다. 연출팀의 한 사람으로써 대중들에게, 그리고 무대를 꾸민 모두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나는 전적으로 연출팀의 실력문제, 그러니까 판을 잘 못 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815전야제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의 큰 행사들이 종종 별다른 감동없이 치뤄지고 있는 것은 연출력외의 문제도 있다는 방증이다.
책임회피처럼 보일지라도, 이번 작업후기는 불가피하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 작업과정 동안 고민했던 것도 이 문제였고, 그밖에 특기할만한게 없기 때문이다. 2012년 815 전야제 작업후기지만, 그것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며, 또한 이 후기는 나의 주관적 견해일뿐 연출팀 전원의 의견은 결코 아니다.
연출력보다 중요한 문제
진보진영의 크고 작은 행사를 몇 번 연출해본 짧은 경험으로 미루어 말하자면, 감동적인 행사가 되느냐 그저그런 행사가 되느냐는 행사판을 잘 짜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지 않았다. 대중의 의지가 결집되고 분출되면 판이야 보잘 것 없어도 감동적이 된다. 이 때 연출의 역할은 결집된 대중의 의지가 예술적으로 분출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대중의 의지가 결집되지 않을 때는 어떤 연출적 기술을 쓴다 하더라도 요란해질뿐 감동은 없다.
진보진영의 내적인 어려움-사상적 혼란, 상층조직의 분열, 기층조직의 약화 등-으로 인해 대중의 의지는 힘있게 결집되지 못하고, 그래서 행사를 코앞에 두고도 상과 기조는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다. 막판에 겨우 정리된 기조와 상은 앙꼬없는 찐빵같다. 예컨대 "단결"을 중심 기조로 잡았지만, 정작 단결의 내용은 정리되지 않는 식이다. 그것은 진실로 단결을 원하는 대중의 가슴에 파고들지 못하는 공허한 구호가 되기 십상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리들 서로간에 일치성이 낮아서 그런 것을.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연출팀이 할 수 있는 일은 여러가지 투쟁과제와 구호들을 이러저러한 형식으로 구성하는 일밖에 없다. 그것들은 핵이 없으므로 서로 엮이지 못한 채 단순 나열된 것처럼 보인다. 개중에는 몇몇 인상적인 아이디어들도 있기는 하지만 손에 쥔 모래처럼, 실빠진 구슬처럼 이내 흩어져 버리고 만다.
빈약한 콘텐츠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되는 전야제에서 공연, 영상 등의 콘텐츠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감동적인 공연 하나가 1년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꾸 빈약해진다. 게다가 같은 콘텐츠가 행사마다 자꾸 겹치고 반복된다. 통상 부문행사와 본행사를 통틀어 3-4개의 행사가 연속되는데 연설도 비슷비슷, 공연도 비슷비슷, 상영되는 영상도 비슷비슷하다. 콘텐츠가 겹치는 문제야 각 부문행사 연출팀이 연석회의만 가져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을테지만, 콘텐츠의 빈약함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은 못된다.
이명박 정부기간 내내 통일운동은 매우 어려워졌고 자연히 통일예술의 콘텐츠도 그 양이 극히 줄어버렸다. 예술가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통일작품을 열심히 창작하지 않는다. 해봐야 보급도 안 되고 공연할 기회도 없으니 이를 뭐라고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예전보다 줄었을 뿐 새롭게 창작되는 좋은 콘텐츠가 아주 없지는 않으며, 또 없으면 창작을 하도록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만약에 연출팀이 한 두어달 전부터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통일예술의 모범을 발굴하고 또 적극적으로 조직해낸다면 무대의 콘텐츠가 그렇게 빈약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이다. 현실은 이런 환상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고백하건대, 연출팀은 전국의 통일예술을 총화하거나 조직할 능력이 없고 그럴만한 여력도 없다. 누가 연출팀에 참가하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보예술운동은 오랜시간 각개전투하듯 흘러왔고 급기야 서로 소통하고 결집할 조직적 기반을 상실했다. 지인은 있지만 동지는 없고, 연락처는 있지만 망은 무너져 있다.
그밖의 문제들
(1) 815 전야제의 성격과 질감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데 편의상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보자면 이렇다. 범민족대회와 같은 뜨거운 판을 만들어야 된다는 의견과 시민들도 거부감없이 참가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서로 부딪힌다. 거칠고 소박해도 기층에서 준비한 공연들로 채워야 한다는 의견과 검증되고 잘 준비된 공연을 선별해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서로 부딪힌다. 서로의 접점을 찾기는 어렵고, 결국엔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판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곧 현재 통일운동의 애매한 스탠스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연출팀의 역할은 애매해진다. 부문과 지역의 책임자들이 그 모든 논의를 정리할 때까지 연출팀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대체로 정리되고 나면 행사는 거의 며칠 남지 않는다.
(2) 예산도 곤혹스러운 문제다. 적은 예산이 문제가 아니다. 예산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행사를 만들면 된다. 문제는 행사준비 초기부터 예산을 특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추진본부에서는 연출팀에게 묻는다. 예산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사실 이처럼 부질없는 질문은 없다. 판은 주어진 예산에 맞게 만드는 것이니까. 하긴, 추진본부에서 일부러 예산을 특정하지 않을 리는 없다. 예산의 대부분은 추진본부에 참가하는 단체들의 분담금으로 구성되고, 단체들의 분담금은 또 참가자들의 회비로 구성된다. 목표치를 정할 수는 있으되 특정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예산이 정리되지 않으면 판도 정리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은 부족하므로 연출팀은 꾸역꾸역 행사안을 만들어내기는 한다. 겨우 특정한 예산은 준비기간 내내 요동친다. 아니 자꾸 줄어든다. 줄어들 때마다 연출팀은 몇 번씩 판을 새로 짜게 되는데, 대개는 너덜더덜해진다. 차라리 적은 예산이라도 일찍 확정되고 그 뒤에 변함이 없는 게 일을 하는데서는 훨씬 나을 것이다.
(3) 행사연출의 전문성을 높이는 문제는 해결되어야겠지만, 나는 행사연출을 책임지려는 사람이 극히 부족한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주체가 있어야 실력을 높일 생각도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가능한 피하고 싶은 것이 행사연출작업이며, 그것을 나의 본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출팀으로 결합하는 사람들은 대개 행사를 맡아본 몇 번의 경험이 있고, 815대회에 참가한 대중들을 어떻게든 책임지고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결의한다. 그러나 요동치는 예산, 정리되지 않는 상과 기조, 번복되는 결정, 턱없이 부족한 행사인력, 애정없는 평가 등에 치이면서 그나마 있던 마음조차 종종 상해 버린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다음부터는 연출팀 절대 안 해"라는 말을 내뱉곤 하는데, 농담반 진담반이 아니라 진담이 반이상이라고 봐야 한다.
좀 어려울뿐이다
부끄럽게도 이번 작업에서 나는 실무적이고 관성적으로 일했다. 연출을 하는게 아니라 진행을 했다. 그 때 내 마음속에는 냉소적인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이번에도 별달리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상황인식, 그리고 그로 인한 무기력함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5월에 터진 통합진보당 사태로 내 마음도 커다란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일 행사를 진행하면서 나의 좌절과 냉소는 조금씩 부서져갔다. 피토하듯 단결과 자주통일운동의 원칙을 호소하는 선생님들의 연설에 가슴이 아팠다. 실의에 빠져있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특히 힘을 받은 것은 단위행사였다. 무겁고 늘어졌던 본행사에 비해 몇몇 부문행사는 꽤 활력이 넘쳤다. 2011년에이어 2012년에도 진행된 통일무도회 행사는 가장 인상깊은 판이었다. 대중들은 신나게 춤추고 노래했고, 밤을 새워라도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위 행사의 판이 활기있다는 것은 대중의 마음과 의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래, 이 나라에서 진보운동이, 그리고 예술운동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어려운 상황들은 여전하지만 그에 짓눌리면 아무것도 못하는 법이다. 실력은 높여가면 되고, 차이는 좁혀가면 되고, 무너진 것은 새롭게 건설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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