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슬 개인전 ‘첫눈에 반한 산토리니’ 리뷰
-부평 아트센터.
-류 성-
1. 실물을 보지 못한 축복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저 또한 여행에 대한 막연한 갈망만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직업이 연극이라 전국 곳곳 안 다녀 본 곳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공연장과 숙소에 대한 기억만 그득하지요. 부끄럽게도, ‘산토리니’라는 곳은 지명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김이슬 작가의 그림을 통해, 그것도 핸드폰에 저장된 작은 사진을 통해 처음 만난 곳입니다.
산토리니에 대한 일반적 묘사는 이러하더군요. 블루와 화이트의 강한 대비가 주는 이국적 낭만, 자연의 풍광과 인공미가 빚어내는 아름다움 기타 등등.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그림에서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혀. 김이슬의 그림으로 처음 만난 산토리니는 기묘한 아름다움이었고 신비함이었습니다.
어쩌면 실물을 먼저 알지 못한 축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에 찾아본 산토리니 풍경 사진들은 그런 신비함을 주지 못했거든요. 아무렇게나 사진기를 들이대도 작품이 된다는 곳이지만, 내겐 여러 여행 잡지책에 실려 있는, 디지털 기술로 보정된 온갖 이국적 사진들이 주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였습니다.
반면에 김이슬의 산토리니는 퍽이나 인상 깊은 것이었고 강렬한 끌림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자연이 가르쳐 주는 대로 거스를 수 없었고, 모방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실물을 모사하는 차원의 재현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자연과 같이 그려보고 싶었다’는데 방점이 찍히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2. 비잔틴적 신비함
과감하게 사용된 색채와 여백, 변형된 원근감과 다시점을 사용해 재구성된 공간,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동양적인 스타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주는 이 주는 신비함. 김이슬의 그림을 처음으로 본 날, 나는 자꾸만 비잔틴을 떠올렸습니다. 그런 인상은 오래되고 세세한 분석을 통해 얻는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순간적이며 총체적으로 받는 무엇이라 설명하긴 힘듭니다.
비잔틴은 천년이 넘는 제국의 역사를 지녔지만 유럽사의 비주류로 분류되어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미지의 세계인 동시에 신비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시기적으로 고대와 중세의 사이에 존재했고, 지리와 역사적인 영향으로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이 섞여 있었지요. 그들의 문화예술에는 기독교적인 요소와 이교적인 요소(기독교의 입장에서)가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왜 하필 그녀의 작품에서 비잔틴적인 신비감을 떠올렸을까요. 의문은 의외로 간단하게 풀렸습니다. 도록의 마지막에 적힌 프로필이 해답을 주었지요. 성당을 다니는 김이슬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했더군요. 그런 그녀가 고대 세계의 풍광을 간직한 그리스 마을을 그려낸 것입니다.
신비로움은 경계가 허물어져 서로 뒤섞이는 곳에서 곧잘 나타납니다. 하지만 강제로 병합되거나 서로 주체를 상실한 채 뒤섞이는 혼돈과는 구별되지요. 주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때에만 탄생하는 세계입니다. 아, 그녀는 행운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 강렬하고 과감한 색
그녀의 산토리니에서 무엇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색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봐도 좋아할만큼 예쁘고 아기자기한 맛도 넘칩니다. 그런데 내게 두드러지는 것은 강렬함, 과감함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습니다. 창작자가 대상에 압도되면 이런 느낌은 나오지 않습니다. 연극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뚜렷하고 인상 깊은 연기를 본 듯합니다.
얕은 경험으로 비춰보면 이런 느낌은 아이들과 같은 순수함이 있거나 혹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단단한 배우들에게서만 나옵니다. 김이슬의 색에는 그런 종류의 순수함과 자신감이 있습니니다. 고도로 치밀하게 계산하거나 이럴까 저럴까 오래 갈등한 흔적은 없어 보이고, 즉흥적이고 자신있게 선택한 색인 듯 느껴집니다.
산토리니를 비추는 자연의 빛은 인공적 풍경과 어우러져 다양한 색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색은 그녀의 내면을 거쳐 주관적인 색채로 거듭났습니다. 그것은 재해석한 색이지만 실물이 가진 색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지요. 그래서일까 강렬한 색을 과감하게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조화롭고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굵은 선과 강렬한 색이 꽉 들어찬 듯 보이는 건 역설적으로 여백의 효과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여백은 동양화적인, 또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여백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때론 무심한 듯 때론 일부러 비워 놓은 듯한데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것조차 채워져 있다고 할까요. 그것은 색과 더불어 강한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4. 이상한 원근법과 전지적 시점
나는 그녀의 그림들에서 평면적인 인상과 입체적인 인상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것은 2차원적이면서 동시에 3차원적이기도 하여 그야말로 묘한 공간감을 자아내더군요. 원근법을 적용했다고도, 무시했다고도 하기 어려우니 단어를 특정하기 어려웠던 나는 결국 그녀에게 ‘이상한 원근법’이라는 참 이상한 표현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원근법은 이상한 시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통상 ‘다시점’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이 표현의 정확함을 인정하면서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분명히 다시점을 사용해 공간을 재구성하지만 그 재구성된 공간조차 아주 자유롭게 압축하거나 혹은 펼쳐 놓습니다.
아주 먼 거리에서 한 눈에 조망한 듯 보이는 풍경이지만, 좁은 인간의 시야로 한 번에 들어오는 풍경은 결코 아닙니다. 카메라 렌즈 같은 기계적 도움을 제외하면, 오직 내면의 눈과 상상의 힘을 빌어 멀리 높이 날아올라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이며, 인간의 눈을 초월해야 하는 세계입니다.
멀리 높이 날아올랐음에도 아주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더군요. 특히 사람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저 높은 하늘에서 전체를 관장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듯한. 이런 측면에서 나는 차라리 ‘전지적 시점’이란 표현이 더 가깝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5. 그것조차 자연의 일부였다
전시회에서 그림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나는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산토리니에는 사람, 즉 관광객의 존재를 애써 숨기지 않았더군요. 물론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풍경이야 그리 새로울 것 없지요. 하지만 지금 얘기하는 건 그냥 사람이 아니라 ‘관광객’입니다.
본성적으로 타지인의 입장을 가진 예술가들은 현지에 집착하게 됩니다. 현지의 실상, 본질 등 말입니다. 현지에 대한 집착은 섞여 들어간 타지의 요소를 솎아내는 식으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현지가 아닌 것-관광객은 가장 대표적인 경우지요-은 생략해버리기 쉽습니다. 현지인을 그리거나, 아예 사람을 그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런데 김이슬의 산토리니에는 관광객들이 꼬박꼬박 들어가 있습니다. 게다가 누가 봐도 관광객들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행 가방을 들고, 사진을 찍고, 비키니를 입은 채 일광욕을 즐기거나, 웨딩촬영을 하고. 타지에서 온 관광객들을 현지의 자연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그것도 필수적이고 자연스러운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집착없이 쿨하다고 해야 할까요, 인풋과 아웃풋의 과정이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 대목에 이르니 작가의 성격마저 궁금해지더군요. 하긴 관광명소인 산토리니의 풍경에서 일부러 관광객을 빼놓는다는 건 왜곡이지요. 그래요,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정말로 자연이 가르쳐 주는 대로 거스르지 않은 것입니다.
6. 글을 마치며
언젠가 김이슬 작가가 드로잉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손도 빠르고 쉴 새 없이 드로잉을 하는데,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더군요. 게다가 그걸 너무 즐거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천상 작가인 듯 해 부러웠습니다.
그녀의 또 다른 작업이 기다려지면서도 묘한 질투도 느낍니다. 그녀의 산토리니에 담겨있는 신비로움, 과감함, 자유로움, 솔직함, 즉흥성, 자신감 등은 예술가로서의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것들이거든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장르가 다르다는 점이군요. 그러니 맘 놓고 응원해도 되겠습니다. 건승하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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