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 연기 15 눈은 내면의 창이다
정신세계와 정서, 즉 내면이 어떤 상태를 가지면 그것은 눈을 통해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눈을 일컬어 마음의 창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눈을 통해 드러나는 내면은 말과 행동보다 덜 구체적이지만, 대신에 그와 비교할 수 없이 깊고 풍부한 느낌을 준다. 백마디 천마디 말이 오고가는 것 보다 눈빛 하나가 더 큰 울림과 더 많은 내용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신의 목소리와 신체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눈을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눈으로 연기하라는 말이 있듯이 배우에게 눈은 무엇보다 강력한 연기도구가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눈은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연기도구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의 목소리와 신체 각 부분은 근육을 움직임으로써 인위적인 변형을 가할 수 있고, 이런 변형을 적절히 이용하면 역할의 내면을 어느 정도 외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눈은 전혀 그럴 수가 없다. 만약 배우가 내면의 진실 없이 그저 눈으로 뭔가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진다면, 그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거나 깜빡거리면서 그 불순한 의도만을 곧장 드러내고 만다.
눈은 배우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창일 뿐, 어떤 인위적인 변형이나 통제가 불가능한 도구다. 때문에 배우는 눈을 사용해 외적인 표현을 하려고 들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 내면의 진실을 획득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획득한 내면의 진실은 다시금 눈을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눈이라는 강력한 연기도구를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기본은 제대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에서 제대로 서고 걷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처럼, 배우가 제대로 보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시선을 그저 어느 자리에 두거나 또는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시키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시선처리에 불과하며 아무런 쓸모가 없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대상을 정확히 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고, 의식을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보아야 배우의 내면에 무언가 발생하고, 그렇게 발생된 무언가가 눈을 통해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제대로 본다면 배우는 스스로 주어진 상황을 믿을 수 있게 되고, 이 믿음은 곧 관객의 믿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연극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관객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배우의 눈을 통해 보기 때문이다. 상대배우와의 정서적 교류에서 상호간의 진실성을 획득하는 기본적인 방법도 제대로 보는 것이고, 배우가 무대 위에서의 긴장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제대로 보는 것이다. 또한 제대로 보아야 연극적 행동을 하는데 필요한 강한 충동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대로 보는 것만 해도 연기의 90%는 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배우는 눈을 제대로 떠야 한다. 정신세계가 활발하게 작용할수록 사람은 눈을 뜨게 마련이다. 내면이 즉각적으로 눈을 통해 드러나듯, 배우가 상황에 집중하면 눈이 제일 먼저 반응한다. 그의 눈동자는 생기가 넘치고 형형한 빛마저 뿜어져 나온다. 졸리기라도 한 듯 맥없이 풀려있는 눈, 쉴새없이 왔다갔다하며 흔들리는 눈, 필요없이 자꾸 깜빡깜빡거리는 눈은 무대 위에 선 배우의 눈이라고 할 수 없다.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찬 무대에서 그런 눈만큼 나약하고 보기 싫은 것도 없거니와, 그런 눈은 배우가 충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초급배우들은 종종 역할의 내면에 정서적으로 도취되어 눈을 감는다. 예컨대 큰 슬픔에 겨워 울며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을 때, 대개 금방 눈을 감아버린다. 더 크게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인데, 이는 잘못된 선택이다. 눈이 감기는 그 순간, 관객의 몰입은 차단당하고, 배우 자신의 내면적 진실도 파괴된다. 그는 표현자체에 매달려 감정을 쥐어짜게 된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눈물이 치솟을수록 차라리 눈을 뜬 채 울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더 과감하고 진실하게 연기할 수 있고, 관객은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아니라 역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웠던 전옥의 연기비결은 눈을 뜨고 우는 것이었다.
2013년 1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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