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나의 예술론(2008-2011)
-드라마의 법칙은 대개 창작가들보다는 연구가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창작에 직접적 도움을 주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창작중인 작품의 검토를 위해 적용해 보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된다.
-기술적으로 잘 짜여진 작품들 중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작품도 있고, 기술적으로 엉망이지만 호평을 받는 작품들도 있다. 기술을 모르는 것 보다는 아는 것이 낫지만, 기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 이 명제는 대체로 작품의 주제를 강하게 드러내지 말고 은근하게 드러나도록 될수록 묻어두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작가의 사상이나 주제를 강하게,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비예술적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견해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일반적 원칙으로 보기는 어렵다.
-갈등은 싸움이며 의지의 대립이다. 갈등은 대부분의 드라마에 존재하지만 모든 드라마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갈등이 없는 드라마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갈등을 설정했고, 어떻게 해결했는가에 따라 작가의 세계관, 작품의 주제 등이 드러난다.
-연극의 사상성, 예술성은 더 높아져야 한다.
정보가 정치권력에 의해 차단되고 독점되었던 시절에 많은 진보적인 연극은 사회의 구조와 모순을 폭로하는 기능을 했다. 묻혀있거나 왜곡된 사실을 들추어 대중들에게 알려냄으로써 대중들을 각성시키고 그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려 했다. 연극은 세계의 모순을 폭로하고 진실을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을 두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개발과 발전으로 인해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대중들은 예전처럼 정보에서 소외되어 있지 않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된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며, 다양한 형태를 빌어 다시 재생산한다. 너무 많은 정보가 진실을 왜곡할지언정, 대중은 정보에 대해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차단되어 있지는 않다. 환경이 변화했고 대중의 능력도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곧 연극의 변화를 촉구한다. 바뀐 환경은 연극이 작품에서 다루는 소재 그 자체를 대중들에게 더 이상 충격적이거나 흥미로운 것으로 접근시키지 못하게 한다. 사실에 대한 폭로, 보고, 전달은 이미 예전과 같은 힘을 잃었다. 대중은 ‘그건 우리도 알고 있으며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고 반응한다. 대중은 사실이 아니라 심층의 진실에 접근하려 한다. 그러니 연극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 연극은 폭로자, 보고자, 전달자의 입장을 뛰어넘어야 한다. 연극은 이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은 모순의 폭로, 사실의 나열과 보고 등 표면적인 것을 전달해서는 자신의 사명을 다 할 수 없다. 대중이 알고 있는 사실의 내적인 것, 즉 심층적인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이제 연극은 누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다며 사실을 전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죽음에 담긴 내적인 의미, 즉 진실을 탐구하고 형상화해야 한다. 연극은 사실의 전달자가 아니라 진실의 안내자가 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바뀐 환경과 변화된 대중의 능력은 연극 예술가들에게 더 많은 실력을 요구한다. 예술가로 하여금 소재가 주는 무게에서 벗어나 주제와 내용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삶의 표면이 아니라 삶의 심층을 보라고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서 새로운 진실을 이끌어내라고 요구한다. 연극의 사상성, 예술성은 더 높아져야 한다.
-폭발은 관객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화산이 폭발하고 잠시 후 세계는 조용해진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와 같이 연극의 절정은 갈등의 폭발이다. 폭발 후 관객은 긴장을 해소하고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연극은 시작과 함께 폭발의 순간을 위해 하나하나 축적해간다. 그런데, 자주 잊어버리는 중요한 점이 있다. 폭발은 무대가 아니라 관객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많은 경우, 무대에서 폭발하려고 노력한다. 절정이라고 이름 붙인 바로 그 장면에서 절제보다 과잉을 쉽게 선택한다. 대본, 음악, 연기, 연출, 조명 등의 모든 요소들이 바로 그 장면에서 폭발하려고 사력을 다한다. 이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무대는 축적하는 곳이지 폭발하는 곳이 아니다. 폭발은 무대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관객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니까. 작품을 만들면서 ‘이 지점이 폭발하는 지점이야’라고 설정하고 폭발하는 그 순간을 형상화하는데 힘을 쏟는다. 그리고 관객의 마음에서는 아직 어떤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대에서 배우들이, 조명이, 음악이 자기도취에 휘말린 채 있는 힘껏 폭발해 버린다. 대부분 그 결과는 관객에게 ‘바로 여기가 폭발하는 순간입니다! 자, 폭발하세요!’라고 소리치는 셈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 순간, 관객은 작품의 세계에서 멀찌감치 도망가 버린다. 관객에게 그 순간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순간이며, 진실이 사라진 인위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며, 강제로 열어보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폭발의 순간으로 이르는 과정이 제대로, 정확히 축적되었다면 관객은 자신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폭발할 것이다. 배우가 울지 않아도 관객은 울고, 무대가 조용하더라도 관객의 심장은 격하게 고동칠 것이다. 정확히 축적되지 못했다면 무대에서 인위적으로 폭발하는 모든 것들은 과장과 거짓, 인위성으로 떨어지고 만다. 무대위의 배우는 우는 소리를 내며 눈물을 펑펑 흘리는데 관객은 그럴수록 몸을 뒤틀며 표정을 찡그리게 된다. 무대는 큰일이 난 듯 시끌벅적한데 관객은 그 시끄러운 소동을 관조한다. 폭발은 관객의 것이다. 관객의 것을 예술가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할 때, 예술은 관객을 소외시키고 감동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무엇보다 잘 축적하는데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어쩌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에게는 오직 축적 할 수 있는 권리가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권리를 충실히 잘 행사함으로써 관객의 권리까지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감은 지속적인 작업에 대한 보답이다.
예술가의 작업에서 영감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영감은 예술가의 열정을 끌어내어 창조에서 커다란 성과를 가져오게 도와준다. 예술가는 영감으로 창조를 시작하고, 영감의 힘에 의해 창조를 완성한다.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영감이란 창조의 시작과 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영감은 창조적 상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는 영감이라는 창조적 상태에 빠짐으로써 자신의 창조 작업에 분명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예술가는 정말 영감이 와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러한 창조적 상태에 어떻게 빠질 수 있을까? ‘영감의 순간에 빠져 작업을 하는 예술가’의 이미지가, 그 잘못된 이미지가 진정한 길을 찾기 어렵도록 만든다. 예술가의 창조작업 또한 분명한 노동이다. 노동에 의해서만 창조성이 발양될 토대를 갖출 수 있다.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예술적 상상력이 잉태되고 이것이 예술가로 하여금 창조적 상태에 빠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극작가는 글쓰기란 작업 자체가 몸에 붙어야 작가정신을 발휘할 토양을 갖추게 된다. 배우는 아직 감이 오지 않는다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몸을 움직이고 대사를 뱉아야 한다. 연출가는 아무런 토대도 없는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용을 쓸 것이 아니라 공부하고 분석하며 연구해서 연출적 상상력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창조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발견해 낸 씨앗이 예술가로 하여금 창조적 상태, 영감으로 이끌어 준다. 톨스토이는 매일 하루에 몇 시간씩 글을 쓰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와 같이 예술가의 육체와 의지는 작업이란 노동에 단련되고 익숙해져야 한다. 작업에 익숙해진 육체와 의지는 정신적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을 더 크게 열어놓는다. 작업에 단련되지 않은 예술가의 육체와 의지는 그 자체가 작업을 계속 방해할 것이다. 오직 영감의 덕택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을거다. 특히 그가 천재가 아니라면 불가능 할 것이다. 예술가는 영감이 올 때 작업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한다. 영감으로 창작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으로 영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 영감이란 예술가의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창작 작업에 대한 일종의 보답일지도 모른다.
-인내를 가지고 믿어주고, 지시하지 말고 지휘할 것. 누구의 작품이 아니라 모두의 작품이 되게 할 것. 작품보다 작업을, 성취보다 성장을 중시할 것.
-첫째, 이제부터 정말로 창조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자신이 창조하는 기쁨, 서로의 창조를 즐기는 기쁨을 많이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마음껏 연습하자. 둘째, 창조작업에서 연출자의 허락을 맡으려고 하지 말라. 연출자는 연기창조의 허가자가 아니라 조력자일 뿐이다. 작품이란 우리의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져야 하며 누구의 것이 아니라 지금 작업하는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셋째, 결과인 작품보다 과정인 작업을 더 예술적으로 만들자. 이것이 연출로서 제기하는 이번 작업의 가장 큰 목표.
-특기할 것. 동선을 긋느라 여러차례 장면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조금 지루했는데, 혹은 배우들이 자칫 지루해할까봐 걱정했는데, 어느 배우는 연습후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고 적었다. 왜 그랬을까? 첫째, 반복하는 동안 배우들은 사색하고 창조하고 있었으나 나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고 둘째, 배우들의 사색과 창조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나의 흐릿한 눈 탓이다. 현재 스코어. 지휘를 해야 할 내가 가장 느리다.
-그는 작품을 읽어낼 줄 안다. 물론 작품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 배우들은 많지만, 주체적 입장으로 읽어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그렇게 읽어낸다. 그 결과가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울 때도 있고, 불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연기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남다르다.
-누가 그랬다. 명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나지만 미문에서는 화장품 냄새가 난다고. 글을 쓸 때 이색적인 언어를 현란하게 꾸며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을 조심, 또 조심 해야한다. 다만 평범한 언어로 쓰인 쉬운 글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 수 있을 거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처럼.
-경험은 허황된 상상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 뿐만 아니니라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칫 경험에 사로잡혀 새로운 상상력을 잃어버릴 때도 있다. 경험은 상상의 가장 좋은 벗이 될 수도, 가장 나쁜 적이 될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분명히 깨닫게 된다. '변화'는 '불편함'이며 '흐름'인데 반해 '익숙'함은 '편함'이며 '고여있음'이라는 것을. 살면서 <변화>에 도전해야 함을 느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조건을 핑계로 미뤄두기도 했고, 변화한 척 자신을 속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 번도 스스로를 변화시키는데 용감하게 도전해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변화를 '요구'받는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좀 더 절실하게 다가오게 만드는 어렴풋하고도 아찔한 그런 느낌이 있다. 내 자신이 내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느낌. 어쩌면 내 자신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용감하게 도전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자신이 정녕 두려운 것은 변화의 실패가 아니라 도전의 과정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못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변화에 실패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두려운 일도 아니다. 도전을 포기하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다. 요즘 내가 내 스스로에게 강하게 요구한다. 성공과 실패 뭐 그런 것들이 아니라 도전 자체가 나 자신을 키우는 거라고. 용감하게 도전하라고. 나는 절실하게 소리치는 자신에게 조만간 답을 해줘야 한다.
-스타니슬랍스키는 현대 연극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예술가이며 그런만큼 그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 두 가지를 말해볼 수 있다. 첫째 스타니슬랍스키는 '연기'에 대해 전면적이고 과학적인 해명을 시도했다. 스타니슬랍스키 이전시기까지 연기는 과학적이고 전면적으로 해명되지 못한 분야였으며, 거의 선천적인 재능과 신비한 영감에 의한 것으로 믿어져 왔다. 그러나 스타니슬랍스키는 인간이 예술적 영감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는 예술의 창조에서 신비로운 영감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영감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언제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탐구했다. 의식적인 방법으로 무의식적인 창조세계에 도달하려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사고는 예술 창조에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가장 중요한 열쇠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자신과 당대배우들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하고, 성악, 무용 등의 인접예술에 대한 연구와 유물론적 미학, 자연과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의 도움에 의해 '연기'에 대해 과학적인 해명을 시도했다. 이후 그가 밝혀낸 것들에 대해 대해 반론도 많이 나왔지만 현대 연기예술의 근간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타니슬랍스키의 탐구에 의해 연기의 성과는 이제 더 이상 우연적이거나 선천적인 것, 신비한 것이 아니라 배우의 이성과 의지에 의해, 과학적인 방법론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는 이미 밝혀낸 것을 고집하거나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발견하려 평생에 걸쳐 투쟁했다. 그는 자신의 시스템이 세계적인 극찬을 받고 제자가 되고자하는 이들이 각국에서 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스템을 만국공통의 불변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나라와 자기 시대에 맞는 메소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리얼리즘 연극의 전통에 서있었지만 자신의 제자인 박탄코프가 자신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의 공연을 올렸을 때도 전폭적으로 인정했으며, 또한 자신과 전혀 다른 길을 가려는 제자 메이에르홀드의 실험을 원조하기 위해 연극연구소를 개설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기가 밝혀낸 이론들을 다시 허물어버리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배우들이 종종 혼란에 빠지기도 했을만큼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이 세운 이론을 스스로 부정하고 거듭 수정해나갔다. 그로토프스키가 '그(스타니슬랍스키)의 연구가 신체행동의 메소드에서 중단된 것은 배우라는 직업의 가장 위대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미래의 연구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듯이, 그는 권위를 점하고 그에 안주하려는 예술가가 아니라 연기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떠난 예술가였다.
-이분법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한 방법. 변증법도 이분법에서 나왔다. 예술은 삶의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라 했을 때, 크게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삶의 외형을 그대로 모사하는 태도를 재현주의라고 하고, 외형의 이면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는 비재현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작품들은 재현주의가 지배했다. 조각에서 드러나는 인체비례의 정확성을 보라. 중세 시대의 작품들은 그러한 재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르네상스시기부터 다시 재현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하여 사실주의로까지 발전되었다. 현대-20세기-는 비재현주의적인 실험이 성행했다. 재현적인 작품은 실제와 같은 환영을 창조함으로써 진실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비재현적인 작품은 실제에 의해 외곡되고 감추어진 이면을 드러냄으로써 진실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배우들은 자신이 참가하고 있는 작품의 지배적인 스타일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작업-연기-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고, 작품의 앙상블을 창조해내는데 일조할 수 있다.
-연기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도전은 얼마되지 않았다. 심리학, 생체역학, 정신분석학 등 과학의 도움에 의해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 연기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자면, 내면의 구축과 외적인 표현이다. 이 두부분은 배우들에게 두가지 스타일을 부여한다. 일군의 배우들은 내면의 구축을 중심에 두고 연기에 접근한다. 일군의 배우들은 서사적으로 연기에 접근한다. 내면적 연기는 배우가 배역의 내면을 깊이 파고듦으로서 진실한 인물형상을 창조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내면이 창조되면 자연스러운 외적표현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서구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연기술은 이러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 서사적 연기는 배우가 배역과 거리를 두고 관찰함으로써 발견해낸 본질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내면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효과적인 외적 표현에 더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다. 동양전통극의 연기술은 이러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실제로 딱 떨어지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좀 더 경향적일 뿐이다. 어쨌든 배우는 내면과 외적 표현간의 관계를 잘 알고 이를 응용시킬 줄 알아야 한다. 내면과 외적표현은 상호간에 영향을 미친다. 화가 나면 책상을 치고 삿대질을 하지만, 책상을 치고 삿대질을 하면 화나는 감정이 생성된다. 고대 그리스의 어느 배우는 특정장면에서 감정구축을 위해 아들의 뼈가 묻힌 봉분을 들고 나와 연기했다. 그는 전자의 접근법을 사용한 것이다. 노오와 경극의 배우는 우는 모양을 수없이 연습하는데, 그 과정에서 내면이 형성된다. 이는 후자의 접근법을 사용한 것이다. 실험. 슬픈 생각 따윈 하지 말고 5분간 흐느끼는 소리를 내게 했더니 나중에는 진짜 울어버린다. 슬픔의 이유와 원인, 정체도 모르지만 슬픔에 빠져 있게 된다. 웃음 치료도 그러한 것이다. 무엇이 더 옳은 접근법인지는 모른다. 중요하지도 않다. 전자부터 잡힌다면 전자부터 잡아라. 후자부터 잡힌다면 후자부터 잡아라. 전자로 접근하다가 막혔다면 내려두고 후자로 접근하라. 후자로 접근하다가 막혔다면 전자를 돌아보라.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연기를 하건, 외형적이고 제시적인 연기를 하건 어느 배우에게나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적인 창조적 상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면적 감정을 구축한다는 것이 아니다. 배우가 배역의 삶과 감정을 자신의 실제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되면 연기는 설득력이 있어지지만, 이것이 안 되면 연기는 억지스럽거나 불편해보인다. 이 상태를 러시아어로는 사마춥스투비에, 우리말로는 자감이라고 한다.
-연극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거름이 되어 씨앗을 꽃피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씨앗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작품을 분석하는 이유이다.
-특히 초급배우들이 기계적으로 열심히 연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시간이 없다고 나쁜 길을 알려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리고 열성적인 그들은 그 길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 연기의 기초로 삼는다.
-내적인 정당성을 확보했더라도, 그에 따른 외적 표현은 여러가지 일 수 있다. 가장 설득력있는 표현들 중에서, 가장 예술적인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배우는 예술가이며 연기는 관객을 위해서다.
-리딩을 왜 하는가? 빛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분석하기 위해 리딩을 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작품의 분석은, 실제 행동을 통해 분석하는 것이 좋다.
-철학을 말하기 위해 삶과 인물을 꾸며내는 것이 아니다. 인물과 삶을 통해 철학이 제 스스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배우의 인물분석과 연기접근도 마찬가지다.
-내적 진실과 강력한 외적 표현, 이 둘의 유기적 결합. 이것이 배우가 찾아야 할 모든 것이다.
-선한 인간에게서 독함이 드러날 때, 악한 인간에게서 선함이 드러날 때, 우울함에서 밝음을, 밝음에서 어두움을. 이것은 중요한 원칙이다. 인물은 입체적이어야 한다.
-개성적 인물을 창조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입체적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 관통선을 찾으라. 역할의 분석은 추상적이지 않아야 한다. 분명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행동을 명확하게 정리해낼 수 있다면, 배우는 전망을 가지게 된다. 그는 어디에서 힘을 주고 빼야 할지 알 수 있다.
-배우는 역할에 대해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설득력 있는 연기의 기초가 된다.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작업의 분위기를 흐려서는 안 된다. 연출과 배우는 말로 서로를 설득할 것이 아니다. 특별한 언어가 필요하다. 직관적이고 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연기할까보다 어떻게 접근할까가 중요하다.
-설득력이 연기의 핵심이다. 연기의 설득력은 두가지가 좌우한다. 논리적이고 명료한가? 스스로 확신이 있는가?
-씨앗을 찾으라. 모든 것은 씨앗으로부터 자라나는 바, 씨앗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기발하거나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다. 씨앗과 연관되는 예술적 표현, 씨앗을 드러내는 예술적 표현, 이것만이 유용하다.
-최소한, 막이 오르기 전까지는 연출가의 눈과 판단이 가장 정확하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약속이며 규칙이다. 배우, 스텝은 연출가의 눈과 판단이 정확하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출가 스스로도 이 규칙을 지켜야 한다.
-연극을 공부하라. 실력을 과시하거나 검증받으려 들지말고, 오직 배우는 자세를 견지할 것.
-배우를 지배하는 연출은 잘못된 것이다. 의욕과잉, 지적과시, 성공에 대한 열망 등 연출가의 잘못된 욕망이 배우를 죽이고 궁극에는 작품마저 죽인다. 관객은 살아있는 배우를 보고 싶어한다.
-배우는 무대에 던져진다. 그는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배우를 긴장하게 만들어 자유로운 표현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그 중 많은 것들은 사실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예술을 창조하는데는 아무 방해도 되지 않는 것들이다. (물론, 드물지만 커다란 것도 있다.) 감추려고만 들것이 아니라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
-타인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면, 긍지와 자부심, 자신에 대한 존엄, 보람 등을 느낄 수 있다. 이 느낌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 어려움을 헤쳐갈 힘이 되어준다. 기억하라. 언제나 자기 자신과 약속하고, 그것을 반드시 지킬 것. 포기하지 말 것.
-충동, 혹은 욕구, 혹은 목적. 배우가 연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획득해야 할 것이다. 두번째는 행동이다. 목적에 맞는 행동을 수행하면 감정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인물의 성격은 그 후에 서서히 스며들듯 구축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을 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배우가 주체성과 창조성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만약 처음부터 인물의 개성을 구축하려들거나 감정을 연기하려고 들면, 배우의 사고는 틀에 갖히고 그의 연기는 단조롭고 메마른 것이 되고 만다.
-내가 연기한 인물이 관객들에게 실제 인물을 연상케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관객은 진실을 느꼈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 진실을 느꼈는가? 일부는 관찰과 상상력, 유추 등의 도움에 의한 것이다.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첫째, 설득력 있는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 생활의 진실과는 다른 의미로써, 무대의 진실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 인물의 사소한 괴벽 등이 아니라 보편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작가에게 커다란 행복이자 더 큰 추진력을 주는 원동력이다.
-예술은 삶을 반영하고, 삶은 예술에 영향을 받는다. 전자가 약화되고 후자만 강화될 때 삶은 위험해질 수 있다. 아마도 플라톤은 이를 우려했을 것이다.
-어떤 날은 연기를 잘했지만 어떤날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기복을 극복할 방법은 없는가? 불가능하다면, 위험을 줄일 방법이라도 있지 않을까?
-같은 날 연기를 보고 A는 크게 칭찬을 했지만 B는 어색하다고 했다. 그들은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고 같은 극단에서 십수년간 동고동락했기에 각자의 취향 문제로 취급하긴 어렵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배우로서, 공연을 대하는 나의 자세와 태도를 점검해야 한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댔다. 무절제했던 것이다. 윤리와 테크닉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사소한 생활속에서 근원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안목이다. 사소한 생활을 통해 근원적 문제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정기작품발표회. 당장에 기획, 제작 시스템을 갖추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면, 정기작품발표회를 꾸준히 함으로써 공연레퍼토리를 쌓아나가고, 이것이 기획/제작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아울러 배우들의 연기훈련에도 좋을 것. 발표회당 예산을 책정하고, 고정적인 발표회 장소를 물색하고, 발표회 참관자들을 정리할 것.
-연극교육 / 배우예술에 대한 이해 / 배우의 철학 / 주체적 접근 / 특성과 정도에 맞도록 교육
-연기할 때 자기말만 내뱉으면 안 된다. 연기할 때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1. 충동을 만들기 위해서다. 상대방의 망를 들어야 자기 대사를 하는데 필요한 충동을 만들 수 있다.
2. 집중을 위해서다. 상대를 향해 눈과 귀가 열려 있으면 주의집중에 용이하고 긴장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
3. 순간의 진실을 위해서다. 상대의 말을 듣고 반응해야 즉흥적이고 살아있는 리액션이 가능하며 말의 리듬과 뉘앙스도 살아난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배우의 연기는 어떻게 되는가.
1. 틀리지 않고 대사를 쳐야 한다는 부담감만 크게 작용하여 긴장상태에 빠진다. 호흡과 발성이 어색해지므로 대사는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다.
2. 연습 때 외운대로만 내뱉게 되어 순간의 진실이 파괴되고 기계적인 대사를 치고 만다. 상대와의 호흡과 리듬이 생성되지 못한다.
3. 충동없이 내뱉으므로 감정을 쥐어짜게 된다.
4.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자극이 오게 되면 쉽게 당황하고 결국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배우는 자기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일상에서는 자기 말을 듣지 않지만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자기말을 들어야 한다. 들으면서 말하고, 말하면서 들을 것. 역할로서의 나는 배우인 나에 의해 조절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공부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공부하는 태도, 둘째, 실천의 해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는 태도. 전자는 실천과 유리되는 단점을, 후자는 충분히 알지 못할 우려를 가지고 있다.
-기술자같은 배우들에게는 예술적 차원이 없다. 그들은 기술을 전시할 뿐, 예술적 표현의 선택을 고심하지 않는다. 무당같은 배우들은 어떤가? 사실 빙의란 불가능하다. 연기자는 연기하는 내내 자신을 버릴 수 없다. 사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물론 그들도 예술적 표현의 선택에 고심하지 않는다.
-좀 더 즐겨라. 연기를, 공연을. 행복함을 충분히 즐겨라.
-희곡으로 보는 연극사. 주요작품에 대한 소개와 사적 흐름을 관통하는 의미에 대해 해설.
-배우론. 배우예술의 특수성. 주체적 입장을 갖기 어려운 조건. 배우의 노력과 재능만이 구원해줄 것.
-호흡과 집중, 이완. 소리를 통해 캔버스 벽에 색칠하기.
-문장읽기. 내용파악, 전달의지. 거리와 규모 상황을 부여. 소리의 증폭. 긴장의 제거효과. 함께 동시에 말하기. 제스처와 이동의 허용 시점.
-소리의 왜곡없이 증폭시킬 것. 긴장을 제거할 것. 텍스트의 해석과 화자의 의지 중요.
-연기를 할 때,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세심하게 배려하라.
-인물은 입체적이어야 한다. 희곡에 쓰인 인물이 개성적이든, 전형적이든, 유형적이든 배우는 작업할 때 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해서 작업해야 한다. 인물을 입체적으로 창조할 때, 인물의 본질이 비로소 강하게 부각된다. 인물이 입체적일 때, 관객은 탄성을 지른다.
-특이한 버릇, 괴벽 등을 첨가한다고 개성적인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것을 잡아내고 그것을 단단한 기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기초가 없다면, 개성적 인물이 아니라 기형적 인물이 된다.
-말은 사고에 의해 생긴다. 대사를 치기가 어려운 이유는 남의 사고에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을 관찰하고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꼭두각시가 아니라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배우가 되어야 한다. 연기의 기술보다 배우의 철학과 관점이 중요하다.
-음향기기를 통한 소리의 증폭은 대단히 위험하다. 기기자체가 1차적 왜곡을 가져오고, 배우는 소리에 대한 주체적인 조절력을 상실하여 2차로 왜곡된다. 또 그것이 배우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육성만큼 좋은 소리는 없다. 음향기기를 써야 한다면, 육성에 가까운 소리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예술에는 세계가 비껴있다. 또한 작가 자신이 비껴있다. 세계를 자신에게 담아내면 시에 가깝고 자신을 세계 속에 위치지우면 산문에 가깝다.
-발견하고 창조하는 연습이 되게 할 방법은 무엇일까? 배우의 관점과 자세만이 문제일까?
-연출가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연출가의 역할은? 연극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집단이고, 그러므로 연극작업이란 집단작업이 된다. 그들에겐, 그 작업에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일일이 지시하고 개입하고, 명령하는 것은 지도자의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쁜 의미에서의 감독의 역할일 뿐이다. 지도자로서의 연출가는 빛을 던져주어야 한다. 암흑속에서 빛이 던져지면, 사람들은 그 빛을 향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빛을 향해 걸어간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사소한 실수도 있고, 미숙함도 있겠지만, 빛이 밝혀주는 길에서 벗어나는 법은 없다. 연출가란 그런 존재여야 한다. 그는 우주적으로 사고하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며, 근원적인 것을 탐구한다. 그리고 집단에게 빛을 던진다.
-연출가들은 지도자로서의 안목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소인배처럼 굴지 않아야 하고, 감독관으로 전락하지 말아야 한다. 훌륭한 연출가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빛을 던지고 그 빛은 사람들을 창조로 이끈다. 창조의 과정은 자주성을 해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고양시킨다. 배우들은 기초적인 기술의 한계에서 해방되도록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래야 연출가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자주적인 배우와 지도자다운 연출이 만날 때, 창조의 과정은 옳게 진행되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연극집단과 관객을 수직상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예술은 연출이 배우에게 의거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본성적인 것이다. 왜곡된 사회속에서 발생된 왜곡된 창조과정을 다시 되돌리는 것 뿐이다.
-자연은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예술은 그 법칙을 거스른다.
-시대의 축이 바뀌는 굉음을 듣고 있는가? 믿고 있는가? 나는 어떤 지향과 꿈을 갖고 살아가는가? 소시민적 꿈에 포로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예술에는 무엇이 반영되어 있는가?
-잡다하게 많은 터치는 소소한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해악이 더 크다. 첫째, 작품의 의미를 훼손할 수 있다. 둘째, 관객의 상상력과 여운을 해칠 수 있다. 굵직한 선을 확보하고 여기에 집중하라. 이에 복부되지 않는 것은 과감히 생략하라.
-오늘 공연. 무대에서 진실로 살아있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나의 무대공포증. 등장하기 직전부터 깊은 호흡이 불가능하고, 이 여파는 무대위에서도 일정시간 지속된다. 몸의 경직, 발성의 불안함, 짧은 호흡,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에 대한 관찰력 상실. 몇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적응을 하게 되지만, 첫 연기가 흔들린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떻게 극복할까?
-배우는 작품의 분석에 능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자신의 대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텍스트의 차원뿐만이 아니라 서브텍스트, 컨텍스트적 차원의 의미까지 알고 있어야 능숙하게, 실수없이, 왜곡없이, 그리고 자신있게 대사를 할 수 있다.
-오늘 공연에서 나는 뜻하지 않게, 그리고 가슴 아프게도 장사꾼 취급을 받았다. "이거 큰 행사에요!" 행사를 맡은 사람의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왜 서로의 진정성을 믿는 것이 어려울까? 설명해봐야 부질없어 포기했으나 마음은 편치않다.
-연극과 연기에 치우친 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총체적인 사색을 해야 한다.
-세월과 경험이 가져다주는 지혜와 지식은 놀랍다. 그러므로 어떤 어른이라도 그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가 어리고 멍청한 사람임을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그를 따르지 않더라도 그의 삶을 존경하고 그의 견해를 경청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소망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이 예술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술속에서 살았으면 한다.
2. 결과와 성과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져 과정과 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작업을 했으면 한다.
3. 다른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도적인 계획속에서 작업했으면 한다.
4. 현장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현장을 생산하는 예술을 했으면 한다.
5. 떠돌이가 아니라 극장이라는 예술가의 집에서 관객을 만났으면 한다.
6. 도전과 실험이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재미있는 일이 되었으면 한다.
7. 공연의 효과가 휘발성이 강한 것이 아니라 지속성이 강한 작업을 했으면 한다.
-일본의 아동극 <놀이는 즐겁다>에서 얻은 교훈. 아이디어는 소박하므로 더욱 빛났다. 배우들은 관객앞에서 오만함이 없었고 더없이 겸손했고 헌신적이었다. 화려하지 못했지만, 거의 모든 것이 소박했지만, 그들은 대중과 소통하는 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것이 모든 것이다. 연극이, 극단이, 극장이, 예술가들이 가져야할 모든 것을 그들이 보여주었다.
-스타일에 대하여. 예술에서 스타일의 문제는 중요하다. 단적으로, 스타일을 갖추지 못한다면 예술성을 논하기 어렵다. 유명한 예술작품들은 모두 자신의 뚜렷한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 스타일을 갖추지 못한 예술은 아마추어의 그것일 뿐이다. 연기의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연기의 스타일 문제는 다른 예술에 비해 복잡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집단적인 창조작업이라는 연극작업의 본질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연기의 스타일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본의 요구. 둘째, 연출적 구상. 셋째, 시대적 요구. 넷째, 배우의 연기접근방법.(다른 스타일은 다른 접근방법을 요구한다.)
-배우는 자신의 예술을 창조함에 있어서 스타일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모든 예술적 내용이 제각기의 스타일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스타일을 부여하기 위해, 배우는 스타일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 자매예술을 가까이 하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된다. 특히 시각적인 면에서, 미술작품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극의 스타일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것은 어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기보다는 스스로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스타일을 형성하는 요소들을 하나씩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텍스트에서 스타일은 비롯된다. 텍스트는 작가에 의해 부여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지만, 벗어날 수 없는 범주가 있기 마련이다. 텍스트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이란, 텍스트가 규정하는 범주내에서 행해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작업에 참가하는 예술가들은 텍스트가 내재하고 있는 스타일적 요구를 간파해낼 줄 알아야 한다.
둘째, 연출적 구상도 스타일에 영향을 미친다. 연출가는 연극작업을 총괄하는 지휘자로서 작품의 스타일을 부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 명확한 스타일을 제시하지 못하는 연출가는 창조작업을 어렵게 만든다. 예술가들은 제작기 작업하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빛을 내지 못한다. 그러나 연출가의 구상이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구상은 총체적이어야 하고 분명하고 튼튼한 토대위에 있어야 한다. 텍스트의 요구에 대한 간파,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재능, 그리고 시대적 요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고려가 없이 일방적으로 스타일을 부여하려 들었을 때, 작업은 창조적인 과정이 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참가하는 예술가들, 즉 디자이너와 배우들의 예술에서도 비롯된다.
넷째, 시대적 요구도 스타일에 영향을 미친다. 논리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역사는 시대가 스타일이 창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시대의 유행을 따른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예술은 시대를 선도해야 하지만, 시대를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실험이거나, 학문적 차원에서의 것이지, 관객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 (1) 용기 (2) 당당함 (3) 치열함 버릴 것. (1) 자존심. (2) 실체없는 두려움. (3) 과민함.
-대사는 음악이다. 말을 노래라고 생각하라. 운율을 느끼면서 말하라.
-연출이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상상과 실제의 차이다. 실제가 상상과 다르게 나타날때, 매우 당혹스럽다. 연출가는 이러한 괴리가 발생하는 책임을 남에게 미룰 수 없으며 온전히 홀로 져야 한다. 그러므로 연출가에게 가장 마지막에 제기되는 요소는 책임성이다.
-배우마다의 특징과 개선지점이 보이더라도, 성급하게 고쳐주려고 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수면 아래의 것을 보지 못했다면, 섣불리 예단하고 덤벼들지 말라. 무엇보다, 각 배우들의 장점을 아직 보지 못했다면.
-작업에서 초기 인식의 차이는 훗날 과정을 대단히 어렵게 만든다.
-예술가로서의 나는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말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용기가 없어 못하는 것인가?
-배우000은 심리적 긴장이 크다. 자신의 성장에 집중하도록, 경쟁에 빠지지 않도록 유도해줘야 한다. 000은 연기의 결과에 집중한다. 순간의 느낌에 집중하도록 안내해줘야 한다.
-시간은 훌륭한 예술가다. 충분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절대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호흡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깨가 올라가며, 발성이 깨진다. 후퇴하고 있다. 몸관리와 일상연습에 소홀한 탓.
-배우는 자신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말을 듣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배우는 들으면서 말하고 말하면서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첫째, 조절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다. 무대화술은 특별하다. 리듬과 템포가 있어야하고, 공명이 있어야 하고,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이는 화자, 즉 배우의 조절력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조절력은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되지만, 가장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을 관찰할 줄 아는 능력이다. 듣지 못하고는 조절이 불가능하다. 물론 들을 줄 안다고 조절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노래의 경우, 가수가 내려고 한 음과 실제로 나오는 음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듯이, 듣는 능력이 곧 조절력을 뜻하지는 않는다.
둘째, 충동을 생성시키기 위함이다. 일상에서는 사람은 항상 충동에 따라 말(행동)을 한다. 그러나 연극의 세계는 허구의 세계이고, 배우가 해야 할 대사(말)가 이미 정해져 있다. 따라서 충동에 따라 말을 하기가 어렵다. 충동이 약하거나 사라진채로 말(행동)을 하면 당연히 기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연기로 빠지게 되고, 경직현상이 일어난다. 배우의 연기는 살아있지 못하게 된다. 충동을 받을 수 있는 원천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상대배우의 행동(말)이다. 상대의 말(행동)에 충분히 집중하면 자신의 연기에 대한 강한 충동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는 자기 스스로 충동을 생성시킬 수도 있다. 바로 자신의 말(행동)으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예컨대, 두문장 이상으로 이루어진 대사나, 복합문장으로 구성된 대사, 또는 사고의 변화가 내재된 대사 등에서는 앞의 대사에 의한 충동을 가지고 뒤의 대사를 발화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말을 들을 줄 알면, 자신의 말을 충동의 원천으로 삼아 보다 강력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연기하는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절력을 크게 발휘해야 할 때, 충동을 필요로할 때는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말할 때도 의식적으로 들으면서 말하고, 말하면서 듣는 습관을 들인다면, 무대에서의 적응도 쉬울 것이다. 평소에 자신의 음성, 리듬, 템포, 뉘앙스 등에 주의를 기울이고, 조절력을 발휘하며 말하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 좋다.
-모호함은 풍부함이 아니다. 복잡함을 가장하여 비슷하게 보일 뿐이다. 모호함은 극적 세계에서 맞지 않다.
-자기주도적인 예술활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모두에게 필요한 원칙적인 문제일 것이다. 예술의 창작, 기획, 공연 등 전반 과정이 예술가 혹은 예술단체의 사고,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거의 그렇지 못하다. 예술가가 자신이 아닌 것(사람, 혹은 돈, 기타 등등)에 의존해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게도 한동안은 바쁠 수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내외적인 문제든, 트렌드의 분제든간에. 그 때 자기 주도성이 현저히 낮거나 상실한 예술가는 곤경에 처한다. 이미 관성화 되어 있고,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가 쉽지 않다.
-배우가 연기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목표와 행동이다. 인물을 해석한다는 것은 곧 인물의 목표를 분명히 정리해낸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행동은 행위가 아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위만이 행동이 될 수 있다.
-목표와 행동은 어떻게 다른가? 하나의 목표를 가지더라도 여러가지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가령 A가 B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자. A는 애원할 수도 있고, 협박을 할 수도 있고, 유혹할 수도 있다. 화술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사 한 줄이라도 적용될 수 있다. '어제밤에 뭐했니?'에서 목표는 어제밤에 했던 일을 알아내려는 것이라고 목표를 정리단다면, 텍스트 그대로, 이에 따라 화자는 여러가지 용도로 말할 수 있다. 친근하게 물어볼 수도 있고, 협박할 수도 있고, 몰아붙일 수도 있으며, 떠볼 수도 있다. 특히 화술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정리해내야 말의 리듬을 살리고 정확한 뉘앙스를 구사할 수 있다.
-행동을 정리해내지 못한다면, 배우는 집중이 불가능하고 연기가 뜨게 된다. 관객이 보기에 '연기하고 있네'에 빠지는 것이다. 행동은 분명할 수록 좋다. 이상한 현상이지만,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행동을 복잡하게 설명한다. 그건 사실 행동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모호한 행동은 극적 행동으로 부적합하다. 행동은 비교적 분명하지만 인물의 목표와 유리되거나, 진행중에 목표를 상실한 행동을 하게 될 때도 종종있다. 이 또한 극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목표와 행동을 정리해내는 것은 쉬운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예컨대, '배가 고픈데 밥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라는 대사를 단순하게 생각하면, '허기를 채우기 위해 부탁한다'라고 판단할 수 있지만, 이는 때에 따라 완전히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 화자는 정작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상대방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이 때, '밥이 없는데 어쩌지?'라고 했다면, 실제로 밥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나가달라'는 것일 수 있다.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의 서브텍스트는 확연히 갈라진다. 따라서 배우는 목표와 행동을 정리하는데서 신중해야 한다. 목표와 행동을 정리하는 것이 신중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남의 사고에 접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표가 구체적일수록 행동을 정리해내기 쉬워진다. 반대로 목표를 구체화시키지 못하면 배우는 논리적인 행동을 찾기 어려워진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배우는 필연적으로 말 자체에만 의존하게 된다. 다른 신체적인 행동을 찾을 수 없다. 장면은 심심하고 지루해진다. 말조차도 평이하거나 혼란스럽다.
-연기란 극중인물의 행동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본질이다.
-템포를 연구하고 적용한다면, 배우의 연기는 훨씬 다채로울 수 있다. 사람마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모든 행동은 각자 상이한 템포를 가지고 있다. 출근길의 템포와 퇴근길의 템포가 다르고, 자신있을 때와 주눅들 때의 템포 또한 다르다. 이를 연기에 적용하는 것이다. 같은 대사를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하며 말해보라. 누워서, 조깅하며, 청소하며, 벽에 기대어, 체조하며, 바닥을 뒹굴며, 다트를 던지며 등등. 신체적 행동에 따라 말의 템포가 변하며, 어조와 뉘앙스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역으로 어떠한 템포를 설정하고 이를 화술과 행동에 역으로 적용시킬 수도 있다. 막대기로 박자를 두드린다. 빠르게, 느리게, 중간템포로 등등 여러가지로 변화시킨다. 이제 각각의 다양한 템포를 대사에 적용시켜 발화한다. 제각각 독특한 느낌(여기에는 내러티브가 반드시 포함된다)을 줄 것이다. 템포보다는 조금 추상적이긴 하지만, 색깔, 온도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 어떤 색깔, 혹은 어떤 온도를 설정함에 따라 템포와 마찬가지로 각각 독특한 느낌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주의할 것은, 색깔이나 온도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연기소통의 기준으로 삼아 토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 열정적인 개인들은 다수 있지만 집단은 대체로 무기력하다. 이것이 우리 문예운동의 현실인가.
- 사운드 볼 게임 / 월요일 / 너지? 아니야. / 너나 잘해 / 연상게임. 순간적으로 반응하고 순간적으로 던져야 한다. 모든 것은 미리 계획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유도할 것. 템포를 점차 빠르게 하여 집중과 즉흥을 유도하고, 과감한 신체적 행동이 나올 수 있도록 하며, 숙련되면, 즉흥적인 대사를 하도록 유도한다. 단, 상대의 말을 되뇌고 던질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할 것.
-예술은 마음으로 시작하며 이성으로 작업하고 몸으로 마무리짓는다. 이 중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윤동주는 시를 쉽게 썼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쓰지 않았다.
-캐릭터, 즉 인물의 성격적 특성에 매몰되면, 단조로운 패턴의 연기에 갇혀버린다. 흔히 범하게 되는 오류로서, 연기를 캐릭터의 모습을 전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기란 사실 그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캐릭터란 행동을 통해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지, 전시하듯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가 집중해야 할 것은, 자신이 맡은 역인물의 목표와 행동을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정리해내고, 이를 진실하고 자유롭게 수행하는 것이다. 배우는 행동을 연기할 뿐이다.
-모호한 목표, 모호한 행동은 극적이지 않다. 목표와 행동은 선명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사소한 목표와 행동 또한 극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생활과 닮아 있더라도. 생활의 사소한, 사말적인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은 자연주의적 사고이지, 리얼리즘적 사고는 아니다. 리얼리즘은 의미있는 생활을 소재로 하며, 그 속에 담겨있는 비범한 진실을 부각한다.
- 필요없는 말은 하지 말 것이며 필요한 말은 정확하게 구사해야 한다.
-극적 목표는 강한 추진력을 동반해야 한다. 이루어지면 좋고, 안 이루어져도 좋은 목표는 목표라고 할 수 없다. 극적 목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행동을 한다. 추진력이 약한 목표는 그것이 아무리 구체적이고 흥미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배우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지 못하고, 머지 않아 극적 긴장을 와해시켜 극을 지루하고 재미없게 만들게 된다. 사실, 극적 인물 자체가 그렇다. 극적 인물은 적극적이다. 소극적인 성격의 인물조차 적극적이다. 만약 극적인물이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장애물과의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행동은 여러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은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인해 파생되는 것이다. 잠시 행동을 접을 수는 있지만, 목표를 접어서는 안 된다.
-행동은 논리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연기란 예술이기 때문이다. 행동은 비멈하고, 흥미로워야하며, 인상깊어야 한다. 사소하고 시시한 행동은 아무리 논리적이라도 주의를 끌지 못하고 결국 극의 본질을 드러내기 어렵게 만든다. 논리적이고 인상깊은 행동만이 예술로서의 가치가 있다.
-초급배우들의 특징. 1. 대사를 너무 자주 끊어 읽는다. 2. 문장을 시작부터 끝까지 줄줄 읽어내린다. 노련한 배우들은 사고의 단위에 따라 호흡을 사용한다. 미숙한 배우들은 필요없이 호흡을 자주 사용하거나, 사고단위가 아니라 문장부호에 얽매여 호흡을 사용한다. 문장부호는 읽기 편하게 하는 시각적 약속일뿐, 사고를 반영하지 않을 때가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사를 실수없이, 혹은 감정을 한 껏 넣어서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사가 필연성을 가지고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대사가 나올만한 개연성을, 내러티브를 창조해야 하고, 대사의 서브텍스트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배제된 채 대사를 쳐버리면, 아무리 맛깔나게 치려고 노력하든, 감정을 넣어서 읽으려고 노력하든, 아무 소용이 없으며 쓸데없이 멋만 부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주어진 정보를 최대한 수집할 것, 이에 기초하여 유추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것. 이 세가지 계단을 충실히 밟아 올라가야 한다.
-많은 정보들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전개하는 한번의 사색이 더 중요하고 가치있다.
-긴장
1. 신체적 긴장과 심리적 긴장은 상호 영향을 미친다.
2. 긴장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3. 긴장은 배우의 연기를 방해한다.
4. 긴장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긴장은 수시로 발생하고 곳곳으로 옮겨다닌다ㅑ.
5. 신체적 긴장에 비해 심리적 긴장을 극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6. 스트레칭, 요가, 명상법, 유산소 운동, 소리지르기 등은 긴장을 극복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7. 강한 집중력은 긴장을 극복하고 이완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8. 충분한 연습으로 자신감이 충만한 것은 커다란 도움이 된다. 과도한 자신감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9. 동료와 관객에 대한 신뢰는 커다란 도움이 된다.
10. 개인적인 이완작업과 집단적인 이완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 집단작업은 집단에 대한 신뢰감과 소속감을 키워 보다 능동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돕는다.
-중립자세(선 자세)를 취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정수리에서 천장까지 실이 수직으로 매달려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무용수들은 힘을 주어 어깨를 아래로 잡아당겨 내린다. 그들은 평소에도 항상 어깨를 당겨 내리는 것을 습관화하는데, 이는 목에서 어깨로 흐르는 라인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무용수들은 육체를 통한 조형성을 극대화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신체 자체의 아름다운 조형성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배우들의 경우 그와같은 육체적 조형미가 필수는 아니며, 내적 충동을 솔직하고 즉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배우는 힘을 주어 어깨를 내려서는 안 된다. 호흡과 이완을 통해 어깨가 자연스럽게 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말과 글을 할때는그 내용을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다.
-실제적인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배우들로 하여금 창조적인 상태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기초가 되므로 워밍업은 귀찮지만 필수적인 일이다. 워밍업을 위한 좋은 훈련 방법들은 많이 있지만 절대적인 방법도 없으며, 배우, 혹은 집단의 특성, 공연의 양식 등에 따라 다른 방법들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워밍업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 훈련방법을 짜고 시행해야 한다.
1. 심리적, 육체적 이완상태를 유도.
2. 집단성의 획득.
3. 공연의 양식적 요구에 대한 적응.
-워밍업 방법들.
-심리, 신체, 발성, 활력, 집중, 근력, 공명
-목, 어깨, 얼굴 근육 풀어주기.-경직인 많은 곳.이다.
-근력운동-복근과 등근육, 다리근육을 중심으로
-골반과 허리 풀어주기-몸의 중심이다.
-체조-스트레칭보다 수축운동의 반복으로 각부분의 활력을 배가.
-줄인형 훈련-중립자세, 상체의 이완, 직립상태에 대한 자각.
-가부좌 명상 호흡-집중. 정서적 안정. 호흡법 훈련
-하, 허, 히, 상상과 호흡만을 통한 최고음 내기, 비성-공명기관의 개발.
-사운드 볼 게임
-소리 내뱉기. 걷기, 뛰기, 도약, 누워서 등.-비워내고 토해낼 것.
-거리에 따라 말하기. 소리를 던져라. 표적을 향해.
-노래, 자기소개, 오늘 있었던 일 말하기. 칭찬하기. 자기 단점을 고백하기.
-크게 또는 작게 소리내어 울기, 웃기
-허리 숙이고 제자리 달리기. 느리게, 점차 빠르게. 눕기.
-발차기. 외발 뛰기. 복싱스텝. 잽이 걸음. 마루 구르면서 걷기. 큰 걸음. 잰걸음.
-음악에 따라 춤추기.
-얼음땅 놀이.
-즉흥적으로 사물 표현하기
-뒤로 넘어지기
-거울놀이
-덤블링, 도약, 기어다니기
-거울보고 다양한 표정만들기
-배우는 주어진 상황을 구체화하고, 가능한 명료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럴수록 배우는 진실을 느낄 수 있다. 주어진 상황과 목표, 행동은 서로 연관되고 규제한다. 이 사이에는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한다. 또한 명료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예술가가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요소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사상의 발전, 둘째, 예술기량의 발전, 셋째, 물질생활적 보장. 이는 조직적으로 접근해서 풀어야 한다.
-연기는 타당하고 예술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연기는 행동이다. 배우의 작업이란 행동을 찾아내고 구현하는 것이다. 행동은 먼저 논리적이고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주어진 상황에 비추어 정당해야 하고, 인물의 성격에도 맞아야 한다. 무엇보다 연극의 초목표, 관통선을 구축하는데 복무해야 한다. 만약 배우의 행동이 타당하지 못하면, 연극은 혼란스러워진다. 게다가 배우 스스로도 내적인 진실성을 느낄 수 없게 되므로 자신있는 연기를 하지 못한다. 배우는 작업 과정에서 논리적이고 타당한 행동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행동은 비범하고 흥미로운 것이어야 한다. 연극은 삶에 기초하지만 삶을 그대로 무대위에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일상의 진실과 무대의 진실은 다른 것이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무대위에 펼쳐놓는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지루한가. 배우의 행동은 논리적이고도 비범한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논리적이라도 평범할 뿐, 예술적 가치가 없다면 무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비범하고 인상깊은 행동은 관객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배우의 영감을 자극한다.
-자기본위주의에서 벗어나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사고할 것. 그래야 정당한 길을 찾을 수 있다.
-공무원노조 가수가 있고 보건의료노조 가수가 있다. 그들은 노동자이자 예술가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도 많고, 글 잘 쓰는 사람도 많다. 그들이 현장과 집회에서 주인공이 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유명한 가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동료가 나올 때 관객은 보다 신선하고 강력한 집단적 체험을 나눈다. 이러한 사례는 앞으로도 강화되어야 하며, 강화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다시, 전문예술인들은 어떤 전망을 그릴 것인가?
-긴장 1무대공포증 2적응장애 3의욕과잉 4근육경직...
-관객의 반응에 도취되는 것은 나쁘다. 자신의 선택과 판단, 재능을 정당화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공을 자신에게 돌리지 말라.
-배우는 작가가 써놓은 것을 실물화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는 작가가 써놓은 것을 기초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예술가다.
-음악극에서 춤의 결함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춤은 꼭 필요한 때에만 사용해야하며 남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결함되는 춤은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 적용되어야 한다. 첫째, 드라마를 내포해야 한다. 춤을 추는 동안에도 드라마는 전개되어야 한다. 춤 또한 극적 행동이어야 한다.
둘째, 캐릭터를 해치면 안 된다. 어떤 공연 안무자에게 말했다. “노인에게도 젊은 사람과 같은 안무를 시키면 어쩌자는 거냐? 지금 배우들은 자신의 역할을 잊고 그저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것은 극적 환상을 파괴한다."
셋째, 노래를 도와주어야 한다. 춤 동작들이 배우의 노래연기를 도와주기는 커녕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구체적인 춤동작들이 마치 춤꾼들의 그것처럼 짜여지곤 한다. 이럴 경우, 배우는 연기의 힘을 잃고 관객들도 불편해한다.
위와 같은 원칙들이 적용되지 않는 춤을 결합하는 것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된다. 극적 행동의 차원으로 짜여지지 못한 안무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춤을 추는 동안 극은 멈춰있다. 캐릭터를 벗어난 안무는 생뚱맞기 짝이 없으며 무대의 진실을 파괴한다. 노래를 도와주지 못하는 안무는 배우의 연기를 방해한다. 춤자체가 보인다면 안무는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다. 배우의 연기가 보일 때 안무는 성공한 것이다.
- 글을 읽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지만 쓰는데는 한참 걸린다. 그러므로 모든 글을 소중히 읽으라.
-주체를 세우고 자신을 낮추라.
-캐릭터에 갇히는 현상이 있다. 연기는 입체적이어야 한다. 원래 사람은 어느 한 면이 아니라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입체성이 잘 표현될때 연기는 흥미로워진다. 그런데 배우들은 종종 어떤 캐릭터를 표현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그 캐릭터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소심한 인물이라고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소심하게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물은 실제로도 없고 극중 인물로도 적합하지 않다. 사실 좋은 대본에는 인물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기 마련인데, 캐릭터에 갇히면 단조로운 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연기의 다이나믹함, 역동성을 잃어버린다. 사실 작가들도 캐릭터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배우 스스로 캐릭터의 입체성을 살려야 한다. 불가능하지 않다. 문제는 어떻게 연기에 접근하느냐에 달렸다. 처음부터 어떤 캐릭터를 설정하고 이를 전시하려는 식으로 연습하는 것이 제일 위험하다. 반면 배우 자신으로부터 역할에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게 접근하면 인물의 역동성을 발견하기 쉽다. 캐릭터를 부여하고 스타일을 입히는 등의 작업은 후반의 작업이다.
-1. 역할이란? 극중인물과 나의 교집합. 토대는 나.
2. 예술적 행동이란? 타당함과 비범함의 교집합. 토대는 타당함.
3. 연기접은은? 즉흥과 연구의 교집합. 토대는 즉흥.
4. 창조적 상태? 몰입과 거리두기의 교집합. 토대는 거리두기.
5. 연극작업? 집단작업과 개인작업의 교집합. 토대는 집단작업
-연습을 운영하기 전에 다음을 점검하라.
1. 시작시간과 끝나는 시간을 정확히 할 것.
2. 연습목표를 구체화할 것.
3. 개인별, 집단별 과제를 명확히 할 것.
4. 몸과 마음의 준비를 유도할 것.
5. 연습의 방법론을 마련할 것.
6. 놀고 있는 사람이 없도록 할 것.
-작품준비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밤을 새고, 일상을 희생시키며, 전력투구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준비해서는 안된다. 예술가는 작업을 본분으로 한다. 그런 형태는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이다. 전력투구하면 많은 것들을 희생시킨다. 공연이 끝난 후, 그것들을 복구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상적이고, 지속적이며, 자연스럽게 작업해야 한다. 예술을 위해 생활을 희생시키지 말라.
-사람들의 집중력도 한계가 있다. 작업은 최대 6시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좋다. 단, 그 시간동안은 집중력을 최대로 발휘하라.
-감정이 아니라 플롯을 연기하라. 각 행동의 목표를 정확히 달성하고 관통선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행동의 목표중 하나라도 놓쳤을 때, 감정조차 달아나버린다. 억지로 잡을 수도 있지만, 이는 거짓연기다. 더 심각한 것은 작품의 의미가 훼손된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행동의 목표들을 하나하나 달성하는 것, 이것이 배우연기의 진실성을 확보하도록 안내해준다.
-무대위에서 편안함을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획득해야 한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일상에서도 편안해보였다고 한다. 말도, 걸음도, 사소한 행위도. 아주 오랜 세월동안 고통스럽게 노력한 결과라고 했다.
-호흡을 사용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 사고가 바뀔 때, 특별히 심하게 강조해야 할 때, 예술적인 필요에 의해.
-연출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과 연출이 보이는 시범을 따라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만약 연출이 시범을 보인다면, 그 의도를 캐치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식으로 창조해야 한다. 외적인 흉내를 내려고 들지말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맞지 않다. 그러니 자꾸 어색하고 서투르다. 누군가의 흉내를 똑같이 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그랬다치더라도 그건 정말 재미 없는 일이다.
-공연예술의 본질 중 하나는 관객과의 상호작용이다. 무대위에서 관객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관객과 함께 생성되는 공연의 호흡, 템포, 리듬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객석에 위치한 자기 자신이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무의식적 영감이 작용하려면 의식의 힘을 빌려야 한다. 1 작품을 파악하라. 2 주어진 상황, 환경에 집중하라. 3 모든 장면을 잘 봐야 한다. 특히 자신이 출연하지 않는 장면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장면을 더 잘 할 수 있다. 4 현장에서는 사전에 꼼꼼하게 체크하라. 특히 반드시 객석에 앉아서 무대를 바라보며 상상을 하라.
-말은 고동치며 흘러가야 한다. 끊김없이 유창하면서도, 고저장단과 강약이 살아있어야 한다.
-첫 호흡을 주의하라. 시작했으면 반호흡을 사용해 지속하라. 마지막에 이르렀다고, 절대로, 호흡을 완전히 풀지마라! 지속적으로 호흡을 머금고 있어야 한다.
-초보자들은 첫소리낼 때 너무 많은 호흡을 사용한다. 그리고 곧바로 음정이 플랫된다.
-대사칠 때 분위기, 느낌, 정서 등은 잘 전달되는데, 말자체가 전달 안 될 때가 많다. 전자가 강화될 수록 후자가 후퇴한다. 전자를 잘 전달하는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연기란 정서가 오고가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말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서브텍스트는 텍스트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외국어로 하는 공연을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배우들의 감정, 느낌, 분위기, 정서 등이 오고 가는 것은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모르니 결국 문제 아닌가? 전자가 강화될수록 후자를 더욱 신경써야 한다. 격한 감정을 표현하다보면 몸이 경직되고 조절력이 떨어지기 쉽다. 격한 감정이 나올 때 일 수록 오히려 이완할 줄 알아야 한다.
-대본을 받아들자마자 느낌, 감정, 정서를 중심으로 파악하며 이를 곧바로 성급하게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냥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래도 감정과 정서 등의 싹은 올라온다. 말이 제대로 되어야 꽃을 틔울 준비가 된 것이다. 감정을 연습하지 말라. 감정은 반복되는 순간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자칫하면 감정을 탐닉하는 습관에 빠지게 된다. 그건 자신을 위해서 연기하는 것이며 나쁜 짓이다. 연극은 관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선방향을 정하고 외우는 식으로 연습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발화의 대상을 정확히 정리하라. 상대배역인가? 자기 자신인가? 관객인가? 이에 따라 말의 뉘앙스도 달라지고, 시선도 자연스러움을 찾기 쉬워진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결과가 나오는 내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는 물어뜯어야 하고, 고양이는 할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가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천성이 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루에 몇시간씩 고통스럽게 글을 써야 한다. 마침내 쉽고도 아름다운 버릇이 될 때까지, 나는 고통스럽게 글을 써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사색하고 평가하라. 첫째, 작업에 임한 태도. 둘째, 성장의 내용.
-사람은 누구나 아는만큼 표현한다. 특히 예술은 예술가의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억지로 머리를 채우고, 결과를 맞추려고 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머리에서 심장까지 도달해야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적 행동의 요소들. 1.타당성. 주어진 상황, 인물의 성격 등에 비추어 타당하고 논리적일 것. 2. 비범함. 평범함은 극을 지루하게 만든다. 인상 깊은 행동만이 극적 가치가 있다. 3. 충동. 기계적인 연기를 피하는 제1원칙. 충동을 가진 행동이 자연스럽고 생동하다. 4. 목표. 목표가 없는 행동은 단순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행동은 목적이 있다. 5. 의지. 목표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없는 행동은 에너지가 없다. 강력한 의지에 기초한 행동이 극적 에너지를 창출한다.
-언젠가 년간 공연 횟수를 따져보니 거의 3, 4일에 한 번꼴로 공연을 했었다. 전국 각지를 떠돌았고 수많은 관객을 만났다. 그런데 공허감이 파고 들었다. 하지만 그 땐 그 공허감의 정체가 뭔지 잘 몰랐다. 공허감을 끌어안은 채 다시 1년이 지나갈 무렵에야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추상적인 관객은 나의 연극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박수와 웃음, 환호의 크기로 나의 예술을 단순하게 평가받는 것은 날이 갈수록 공허했다. 그건 그 순간에 잠깐의 흥분을 가져다 줄 뿐 공허감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었다. 동네 이웃 중에 나의 팬이 있었으면 했고, 매일 지나치는 시장의 아줌마가 내 작품의 비평가가 되었으면 했다. 공연이 끝나면 박수를 받고, 사진 한 장 찍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조명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무대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제발 연극쟁이들끼리만 어울려 술마시러 다니지 말았으면 했고, 삶과 거리를 둔 예술이 아니라 삶과 뒤엉킨 연극이 그리웠다. 인터넷, 관념, 여기에 드라마의 테크닉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나오는 드라마 말고, 생활 속에서 획득한 “리얼”한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 연극의 이상은 변방의 어느 동네 소극장에 있다는 것을.
-발가벗은 듯 솔직한 그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부끄러웠다. 저렇게 발가벗을 용기가 없어 덕지덕지 꾸며대고, 의도를 몰래 숨겨두고, 뭔가 있는 척하고, 기술적으로 포장하기 바쁜 나의 비겁한 예술이 부끄러웠다.
-이 작품은 기존에 작업한 작품들과는 달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소위 말하는 ‘극적인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래도 굳이 ‘극적인 사건’을 찾자면, 옆집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것 밖에 없다. 사실 요즘 도시에서 옆집에 가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 흔하지 않은 일, 그러니까 극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다. 둘째, 못된 사람이 없다. 극중 인물들은 모두 뭔가 결핍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 위기와 절정 그리고 극적인 해결 등은 이 작품과 거리가 멀다. 그저 결핍되어 있는 인물들이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의 결핍을 채워간다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도 있겠다. 셋째, 여러 차례의 공연경험을 통해 확인된 바,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각자의 시선과 재미를 가지고 관람한다. 극중 인물들의 연령대가 다양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실제로 동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이고, 자신의 동네 사람 누군가가 떠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보다 ‘리얼’한 이야기가 주는 힘이라고 할까.
-처음 얼마간은 동네탐사를 할 때마다 꼬박꼬박 카메라를 챙겼다. 사진을 찍고, 글을 올렸다. 얼마 후, 그것이 정말 쓸모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나는 시각예술가도 아니고, 기록자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가? 전혀 예술적이지도, 전혀 기록적이지도 않은 그 사진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굳이 사진을 찍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보고서 때문이었다. 단지 레지던스 보고를 위한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는 행위라는 점을 깨닫는 순간, 나는 사진 찍기를 포기해버렸다. 생색내기를 포기하는 대신 동백거리의 풍경과 삶을 즐기기로 했다. 그저 거리를 거닐고, 골목을 산책했다. 걸을 때만 보이는 풍경이 있었고, 자전거를 타야만 보이는 풍경도 있었고, 자동차에서만 보이는 풍경도 있었다.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짜장면집을 가고, 아트센터 구경을 했고, 낙엽 떨어지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예술가의 눈으로 일상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흥미롭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백거리가 낯설고 어색한 곳이었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동백거리 골목은 영등포 역사 뒷켠의 어느 주택가 골목 혹은 안산 구도심의 어느 주택가 골목과 별다른 차이를 갖지 못했다. 사실 산업화와 함께 획일화된 도시의 골목은 어느 곳이든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공간적 풍경뿐만이 아니라 삶의 풍경 또한 그러하다. 출근길 덕분에 분주한 아침, 늙은이와 아이들이 간혹 눈에 띄는 지루한 오후, 소녀들의 재잘거림으로 떠들썩한 저녁. 노란 가로등 불빛과 드문 인적의 새벽.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게다가 삶 자체를 완전히 끌어안지 못하는 타자의 시선으로는 굳이 그 속으로 침습해 들어가야 할 이유를 느낄 수 없었다.
작가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로막는 족쇄로 작용했다. 좀 더 다른 상상력을 가지고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했어야 했다. 주민 연극 강좌를 열거나 동네놀이터 순회공연을 하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 백운역, 동암역에서 갑자기 출몰하는 거리극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굳이 공연의 형태가 아니라도 좋다. 통유리로 개방된 빈 점포에서 연기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래, 나는 동백거리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고 있을 게 아니라 동백거리 어느 곳에서 뭔가 연극작업을 했어야 했다. 만약, 극단 전체, 혹은 연극인 3-5명이 팀을 이루어 참가한다면, 그리고 6개월 혹은 1년 이상의 프로젝트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운영된다면, 전혀 다른 방식의 작업이 가능하다. 거주기간 동안 대본 1-2편 써내는 것보다 훨씬 바쁘고 힘든 작업이겠지만, 예술가들과 지역주민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배우는 자신이 원하지 않을 때도 연기를 해야 한다. 화가라면, 그날 기분이 울적하거나, 흥이 안 난다거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날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배우는 다르다. 약속한 시간에 연습을 해야 하고, 시작종이 울리면 무대로 올라가서 연기라는 예술을 해야 한다. 그는 우울해서 미칠 것 같은 날에도 무대에 올라가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물론 가수나 무용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수나 무용수는 반주가 도와주기라도 한다. 그들은 음악에라도 의지할 수 있지만 배우는 그렇지 않다. 믿을 건 자기 자신과 상대 밖에 없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정말 미워하는 상대와 함께 무대에 올라가 사랑을 속삭여야 하는 것이 배우다. 또, 사람들은 배우가 무대에서 박수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배우들은 지적받는 사람이다. 배우처럼 지적을 많이 받는 직업이 또 있을까? 화려한 무대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행복감? 그것이 얼마나 자주, 또 쉽게 두려움으로 변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기술자 같은 배우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좋은 목소리, 적당한 끼, 신체적 조건 등을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관객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 그만일 뿐, 작품의 의미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 등은 안중에 없거나 그다지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무당같은 배우들도 있다. 그들은 빙의현상처럼 잠시 자신의 몸을 빌려줄 뿐이다. 무대위에서 열정에 찬 연기를 해 보이더라도 정작 무대밖의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배우들은 무대밖에서 관객들에게 실망을 준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어린 시절, 어느 배우의 연기에 감동을 받았고, 그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배우는 만취해서 추태를 부렸고 결국 스타니슬랍스키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 또한 자신이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안중에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배우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신의 예술에 대해 좀 더 존엄있게 대하고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어야 하고, 예술가로서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예술이 그러하듯 참된 연극은 인간을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고양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배우에게 있다. 관객의 정신은 배우를 통해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동한다. 그것도 점진적으로가 아니라 비약적으로 이동한다. 그로토프스키의 연극론을 빌어 말하자면, 배우는 관객을 수직상승시키는 승강기다.
-호흡은 에너지다. 일상에서 흉식호흡을 사용하는 이유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흉식호흡은 빠르고 얕으며 그래서 에너지가 약하다. 그래도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물론 큰 에너지를 써야 할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복식호흡으로 전환한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 화를 내며 소리지를 때 등등. 무대에서는 항상 커다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일단 말 자체가 일상과는 달라 문장이 길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또 일상어와는 달리 크고, 정확하고, 힘이 넘쳐야 한다.
-코로 들이마시면 입으로 들이마실 때보다 느리지만 깊은 호흡이 가능하다. 들이마신 호흡은 어디로 갈까? 배? 아니다. 배로 호흡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느낌이 그럴 뿐. 팽창된 횡경막으로 인해 장기가 바깥으로 밀려나 복부가 팽창하는 것이다. 횡경막을 잡아주면서 호흡을 내뱉는다. 그러면 복부는 단단함을 유지한다. 내뱉자마자 복부가 흐느적거리며 풀리는 것은 잘 못하고 있는 거다. 잡아주면서 길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내뱉는다. 누워서 호흡하거나 선채로 상체를 구부려 숨을 쉬어보면 느낌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특히 늑골과 등, 배의 옆과 뒤쪽이 팽창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앞배가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그러면 자꾸 자기가 힘을 주어 배를 부풀렸다 오무렸다 하게 된다. 이것은 습관이 되어야 하고 버릇이 되어야 한다. 습관을 붙이기 위해 평소에 생각날 때마다 의식적으로 복식호흡을 연습해야 한다. 실제로 연기할 때는 의식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누워본다.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숨을 쉰다. 호흡이 몸에 붙었으면 자기 몸에서 긴장된 부위를 찾아 본다. 눈을 감고 주의를 집중하면 긴장된 부분이 느껴진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의지만으로 긴장을 제거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몸을 살짝 움직여서 풀어버린다. 그런데 긴장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풀면 또 이동한다. 자꾸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이 연체동물이 아닌 이상 몸의 모든 긴장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훈련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지각이다.
-누워있는 상태로 상상한다. 따뜻한 모래사장. 물이 차츰 차오른다. 발끝에서 발목,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 배꼽 등등. 물이 차츰차츰 차올라 몸을 서서히 감싼다. 느껴보고, 상상한다. 마음의 눈으로. 마음의 감각으로. 귓볼을, 뺨을. 끝까지 차오른다. 계속 누워있는 상태. 상상의 막대기로 몸을 찌른다. 주의를 집중시켜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하고 감각을 열어야 한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감각으로 느껴본다. 엄지 발가락을 톡톡톡. 무릎을 톡톡톡. 지긋이 누른다. 단전을 누른다. 톡톡톡. 지긋이 누른다. 마지막으로 정수리를.
-앉아서 가부좌, 혹은 반가부좌를 한다.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면 허리가 곧게 선다. 척추가 제자리를 잡고 몸의 장기가 펴진다. 깊은 호흡을 하기 좋은 상태가 된다. 이 상태에서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한다. 하나 둘 셋 코로 들이 마시고 하나 둘 잠깐 참았다가 하나둘셋넷다섯 길게 내뱉는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모든 주의를 호흡에만 집중한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사람의 두뇌는 계속 생각하게 되어 있으니까. 생각이 들어오면 붙잡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면 된다. 대신 호흡에만 집중한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개 어느 순간이 되면 호흡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한 동안 시간이 흐르면, 그대로 호흡을 유지한 채, 아- 하는 소리를 발사한다. 가슴공명을 느끼면서 발사한다. 하나 둘 셋. 발사. 한 번 더. 이번에는 좀 더 크게. 발사. 이 훈련은 명상과도 비슷한데, 이러한 훈련을 하는 이유는 이완을 유도하는데 있다.
-이완은 스트레칭과는 다르다. 이완은 릴랙스다. 무대에 서는 배우는 긴장하게 마련이고 이 긴장을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호흡이 깊고 안정적이 되면, 정서가 편안해진다. 편안해진 정서는 몸의 긴장을 제거하고 이완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무술하는 사람들도 심호흡을 하여 호흡을 안정시킨 후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을 시작한다. 호흡이 정서를 안정시키고 나면, 몸은 두뇌가 시키는대로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일 준비를 갖춘다.
-배우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말이다. 몸연극, 비언어극 등이 있지만 실험적인 것일뿐, 그래도 연극에서 말을 빼놓을 수 없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말은 전달하기 위해 한다. 말은 두 가지를 종합적으로 전달하는데 그 중 하나가 표면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가 내면을 전달하는 것이다. 가령, 그 애 참 이쁘더라라는 말이 있다면, 표면적인 내용은 글자 그대로 그 애 참 이쁘더라지만, 화자의 상태, 주어진 상황 등에 따라 내면은 다를 수 있다. 예쁘긴 뭐가 예뻐. 역시 니 수준이 그렇지 뭐. 라는 식이다. 전자를 텍스트, 후자를 서브텍스트라고 하자. 배우는 이 두 가지를 다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종종 말이 안 들리는 배우들이 있다. 말이 안 들리는 이유를 몇 가지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리 크기가 약한 경우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의 공연이 소극장에서 이루어지거나, 중극장 규모만 되어도 와이어리스를 착용한다. 때문에 소리크기가 문제되는 경우는 드물다. 단, 발성이 좋으면 표현력이 풍부해지고, 음향기기를 사용하더라도 덜 왜곡된 소리를 만들기 좋은 것은 사실이므로 배우들은 발성 훈련을 잘 해두면 좋다. 그런데, 소리 크기 자체를 키우려는 노력은 별로 좋지 않다. 무리하게 피치만 올리려고 하면 긴장을 일으켜 오히려 소리가 작아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듣기도 싫다. 차라리 에너지가 넘치는 소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는게 좋다.
둘째, 발음이 안 좋은 것이다. 실제로 혀가 짧다든지, 치아상태 등 구강구조의 문제로 발음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드물고 오히려 평소습관에 따른 영향이 많다. 일상생활에서 일부러 발음을 똑똑히 하지 않아도 대개 무리없이 의사전달이 된다. 그래서 잘못된 발음이 습관화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부분의 잘못된 발음은 말을 할 때 신경을 쓰면 고칠 수 있다. 말을 할 때 그냥 내뱉는 것이 아니라 자기 귀로 들으면서 내뱉는 습관만 들여만 해도 많이 고쳐진다.
셋째, 공명이 안 되는 소리다. 같은 음량이라도 공명이 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귀에 잘 들어온다. 음향기계에서 리버브를 넣을 때와 넣지 않을 때 음량 차이가 나는 듯 들린다. 목욕탕에서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노래를 불러도 더 잘 부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소리가 더 크고 귀에 잘 들어온다. 공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건조하게 내뱉는 소리가 아니라 공명을 이용한 소리를 내야 한다. 특히 가슴공명을 잘 쓰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공명이 되지 않고 나오는 건조한 소리는 아무리 크고 또렷하더라도 관객의 정서에 침투하기는 힘들다.
넷째, 호흡이 짧거나 불안정한 것이다. 대사는 실생활에서 쓰는 말과는 다르다. 대사는 인물과 상황에 대한 정보도 주어야 하고, 인물의 성격도 드러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수식어가 많고 문장 길이 자체가 길다. 호흡이 짧거나 안정되지 못하면 대사를 치기가 힘들고, 배우는 애를 쓰며 쥐어짜게 된다. 관객들에게는 대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쥐어짜고 있는 배우의 상태가 먼저 들어오고 결국 그것이 내용전달을 방해한다. 그게 아니면 자꾸 엉뚱한 데서 끊어 읽는다. 호흡이 짧으면 자연히 긴장하게 마련이고, 그러니 엉뚱한 곳에서 숨을 쉬게 되는 거다.
다섯째, 제일 중요한 것으로, 대사가 배우 자신의 것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말이 아닌 남의 말을 해야 하는 것이 배우이며, 그래서 말을 하기가 어렵다. 대사를 외우고 유창하게 말하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남의 말을 자신의 말이 되도록, 즉, 대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서다. 배우는 인물의 대사에서 텍스트 자체의 의미뿐만 아니라 서브텍스트의 의미까지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 무슨 목적을 가지고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부족하여 연습은 기계적이 되기 일쑤다. 대사를 외우기 바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내뱉는다. 결국 말의 뉘앙스도, 강조점도 살리기 어렵다. 남의 사고로 이루어진 남의 말을, 더구나 남들 앞에서 보여줘야 하므로 긴장이 발생하여 발성, 발음, 호흡 등의 문제가 생긴다. 앞서 지적한 여러가지 문제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직 자기 말이 되지 못해서 생긴다. 자신의 것으로 소화된 후 뱉어내는 말은 자연스럽고, 알아듣기 쉽고, 유창하며, 힘이 있다.
-책을 한권씩 가져와 한 문단 혹은 3-5개의 문장을 골라본다. 단, 감정을 배제하고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좋다. 그러므로 신문기사 혹은 사회과학서적 등이 좋다. 목적은 텍스트의 전달에 관한 연습이다. 소설, 시, 수필 등 문학작품들은 읽는 중에 내면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감정표현을 유도하므로 배제시키는 것이다. 묵독을 하며 내용파악을 한다. 그러나 끊어읽기, 찍어읽기, 올림과 내림 등의 표시는 하지 않는다. 표시에 얽매여 내용파악에 대한 주의가 사라지고 기계적으로 읽게 된다. 그런 것들은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말을 하면, 대개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려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용을 이해했으면, 이제 소리내어 읽어본다.
-남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입장 자체가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이 긴장으로 인해 왜곡된 소리를 만들어 낸다. 긴장을 제거하고 자연스러운 소리를 내야 한다. 또 다른 경우는, 소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멋있고 매력있는 목소리를 만들려고 꾸미는 것이다. 강한 꾸밈이 필요한 시절이 있었고, 그 때는 어떤 특정한 음색을 선호 또는 강요하거나, 대사를 치는 룰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다. 요즘 선호하는 목소리는 자연스러운 소리다. 자연스러운 소리는 각자의 개성이 충분히 담겨 있고 듣기에 편안하다. 맞는 목소리와 틀린 목소리는 없다. 그저 각자의 소리가 있을 뿐이다.
-자신이 알고 하는 말과 모르고 남대신 하는 말은 완전히 다르다. 남의 말을 대신 하면, 강조점이 없어지거나 부정확해지고, 말의 선율, 리듬과 템포 등이 사라진다. 듣는 재미도 없고, 내용도 전달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수없이 반복연습하여 기계적으로 맞출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뉘앙스의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첫째, 자기 목소리를 왜곡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소리를 낸다. 자신이 편하게 소리낼 수 있는 음역대를 찾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음역대를 벗어나면 긴장이 발생하고 왜곡이 일어나기 쉬우니까. 둘째, 무엇을 전달할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끊어읽기, 찍어읽기 등이 자연스럽게 살아난다. 이것만 되어도 화술의 반 이상은 된 거다.
-어느 공연에서 몇몇은 나의 연기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며 극찬을 했는데, 또다른 몇몇은 나의 연기가 영 어색하고 못하더라고 했다. 도대체 누가 옳은 것일까? 제 스스로는 그날 연기를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날 연기를 잘 한 것인가 못한 것일까? 또 이런 경우도 있다. 나는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은 영 별로라고 할 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 즉 나는 영 못한 것 같은데 사람들은 오늘 연기 정말 좋았다고 할 때도 있다. 내가 연기를 잘 했는지 못했는지 스스로도 모를 때 조차도 많다. 이렇듯 배우의 예술은 객관성을 확보하기가 좀처럼 어렵다. 배우예술은 좀 특수한 예술이다. 첫째, 표현의 주체와 표현 수단이 동일합니다. 화가는 캔버스, 붓, 페인트, 기타 재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예술을 창조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바이올린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창조한다. 그런데 배우는 배우 자신이 표현 수단이 된다. 둘째, 연기는 순간적인 예술이다. 배우는 순간적으로 창조해야 하고, 그렇게 창조해낸 예술-연기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할 뿐 이내 사라져 버린다. 작가나 화가의 예술과는 달리 배우의 예술은 관객의 기억 속에만 남을 뿐 사라져버리고 만다. 작가나 화가는 자기의 작품을 다시 재검토한다. 주체 스스로 결과물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배우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 주체와 수단이 동일하고, 순간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는 스스로 자기 예술의 객관성을 확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배우는 종종 주체성을 잃고 피동에 빠진다. 피동에 빠진 예술가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가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배우는 연출가 혹은 선배연기자가 시키는대로 할 수도 있고, 시범을 보여준대로 따라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 배우는 꼭두각시일 뿐 예술가로서의 배우는 아니다.
-배우예술 자체의 특수성외에도, 배우를 피동적이고 비주체적으로 만드는 요인들이 더 있다. 먼저 배우는 고용된다는 점이다. 배우는 캐스팅 되지 않으면 자신의 예술을 창조할 기회가 없는 예술가다. 고용되어야 하는 사회계급적 처지에 있는 배우는 자신을 고용할 사람들에게 예술적으로도 복종하기 쉽다. 또 20세기부터 시작된 연출가의 독재현상도 한 요인이다. 배우를 연출가의 예술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요소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배우가 창조하는 영역은 협소해졌고, 연기에 대한 연출가의 명령은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연극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일제시대에 이른바 '신극'이 시작되었는데, 그 주체들은 대개 일본에서 직간접적으로 연극을 경험한 유학생들이었다. 국내로 돌아온 그들은 극단을 꾸리고 대개 연출가가 되었고, 연기자들(그들은 처음으로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었다)에게 직접 연기를 가르쳤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신극역사가 애초부터 배우는 연출가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배우예술이라는 고유의 영역이 자리잡기 힘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연기는 배우의 예술이라고 여기는 관점 자체가 약한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연기란 언제든지 연출가가 개입하거나 뜯어고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많은 연출가나 선배연기자는 쉽게 지적하거나 시범을 보인다. 그들은 배우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창조할 수 있도록 참을성 있게 도와주지 않는다. 쉽게 지적하고, 꾸짖고, 그래도 안 될 경우 대신 시범을 보인다. 그것도 멋드러지게. 그리고 배우는 그것을 그대로 따라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배우는 파괴되고 만다. 지적을 하고 시범을 보이는 사람은 신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실상 지적받는 사람은 자존심이 상하고 위축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예술에 용감해지지 못하고 지적받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시범을 보이는 것은 더 나쁘다고 본다. 연기는 배우 자신의 내면과 외면이, 내적 정당성과 외적 표현이 통일될 때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시범을 따라하는 것은 외면만이, 외적표현만을 형식적으로 흉내내고 있을 뿐 내적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은 꼭두각시처럼, 앵무새처럼 따라할 뿐이다. 지적과 시범 속에서 성장한 배우는 어떻게 될까? 당장 코앞에 둔 공연을 만들 때, 지적과 시범이 어느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배우의 모자란 기술을 감출 수도 있고, 그래서 관객의 좋은 반응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성장한 배우는 장래에 상상력이 빈약하고, 유연성도 취약해진다. 게다가, 지적이나 시범을 보이는 사람의 객관성을 믿을 수 있을까? 그들의 지적은 예술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들의 시범이 예술적으로 더 나은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잘못된 지적이거나, 잘못된 시범일 가능성은? 무엇이 더 예술적인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모든 지적이나 시범이 무용하고 유해롭다는 것이 아니다. 유용한 때도 있고, 반드시 필요한 경우도 있다. 지금 강조하는 것은 결국 연기라는 예술이 배우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볼 때 배우도 성장할 수 있다. 아무리 배우가 어리고 경험이 얕다고 해도, 남의 예술에 함부로 끼어들어서 제 입맛대로 난도질 하는 것은 틀려먹은 짓이다. 동시에 연기가 자신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기의 힘과 지혜로 창조하려는 노력은 않고, 남에게 쉽게 의존하는 배우도 결코 예술가라고 말할 수 없다. 배우 또한 예술가라면, 배우작업의 본질도 창조에 있다.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와 환호를 받는 게 배우의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연기가 배우의 고유한 예술이라는 관점이 확실히 서야 한다. 또한 연기교육방법도, 연습과정도 배우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고무하도록 혁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배우가 예술가다운 자존심과 철학을 가지고, 스스로의 능력을 높여야 한다. 자존심도, 능력도 없는 사람은 결국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작품분석도 제대로 못하는 배우에게 어떻게 안심하고 전적으로 맡길 수 있을까? 초보적인 기술조차 모자란 배우에게 예술의 창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는가? 게다가 시간마저 촉박하다면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다. 많은 배우들이 독재적인 연출가들에게 분노하지만, 많은 연출가들은 무능하고 노력하지 않는 배우들에게 분노한다.
-날숨을 한계까지 내뱉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약간의 호흡을 남겨 두어야 한다. 숨이 전부 다 빠져나가버리면 몸이 긴장하고 사고가 멈춘다. 약간의 호흡을 머금어야 한다. 이 훈련은 폐활량을 늘이기 위한 훈련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들숨이 들어오고, 자연스럽게 날숨이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이 스스로 들어왔다가 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긴장을 제거하고 안정을 취할 수 있다. 날숨을 쉴 때, 한 숨을 쉬 듯 한 번에 호흡이 빠져나가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잘 못된 것이다. 고르게 나가도록 해야 한다. 호흡이 고르게 나가기 위해서는 복부의 지지가 필요하다. 들숨을 쉬고 잠깐 멈출 때, 그 순간 복부는 단단해진다. 날숨을 쉴 때 이 단단함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즉, 지지되어야 한다. 이 상태가 되어야 호흡을 고르게 내뱉기 용이하다. 몸 내부에서 보자면, 횡경막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 느낌은 매우 중요하다. 앞 배를 의식적으로 수축시키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호흡을 잘 못하는 거다. 호흡을 깊이 하면 횡경막이 팽창하여 장기를 밀어내고 따라서 복부전체가 부풀어오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앞 배를 수축시키는 사람들은 복부전체가 아니라 앞 배만 왔다갔다 한다. 복부전체가, 옆과 뒤가 함께 부풀어올라야 한다.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이 아니다. 호흡이 스스로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호흡이 스스로 들어왔다 스스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뿐이다.
-목소리 왜곡이 없고, 발음도 좋고 끊어읽기, 띄어읽기 등도 정확하다. 그런데 전달하려는 의지가 약하다. 그러니 말의 힘이 없는 것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면 말에 힘이 생긴다. 소리는 자연스러우나 에너지가 빠지면 안 된다. 배우의 소리는 자연스럽고 극적 에너지가 넘쳐야 한다. 소리에 에너지가 없다면 자연히 연기는 맥이 없고, 결국 극은 활기를 잃어버린. 쓸데없이 멋을 부리거나 과장하는 소리는 듣기에 거북하지만, 에너지 없는 소리는 지루함과 하품을 유발한다. 극은 진실해야 하지만 시시하거나 사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극이다. 자연스럽고 에너지가 넘치는 소리. 이것이 배우가 추구해야 하는 소리다.
-소리를 키우려고 애를 썼는데 오히려 소리가 작아진다. 당연하다. 목소리의 크기만 억지로 높이려고 하면 대개 이런 상태에 빠진다. 에너지가 넘치는 소리란 단지 소리크기만 높은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소리크기만 높이려고 하면 방금 이야기한 상태에 쉽게 빠져버린다. 30명 정도 규모의 강의실. 마음의 눈으로 상상해본다. 그리고 소리를 낸다. 이번에는 50명 정도 규모. 이번에는 100명 정도 규모. 이번에는 여러사람이 각자 동시에 자기 문장을 읽어본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니 긴장이 좀 제거될 것이고, 주변이 소란스러우니 자동적으로 소리의 에너지도 더 많이 생길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말하라는 것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면 말의 에너지도 약해진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나의 전달 의지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억지로 목소리의 피치를 높이려고 애를 쓰지 말고, 의지를 강하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내용을 놓치는 순간, 의지도 약화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는 각자 동시에 움직이며 읽어본다. 걷는다. 계속 걸으면서 하라는 것은 아니고 필요하다면 멈춘다. 강조하기 위해서여도 좋고, 맺기 위해서도 좋다. 어떤 움직임이든 충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좋다. 미리 계획하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용의 전달이다. 내용을 놓지지 말고, 전달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번에는 제스쳐를 써도 좋고, 표정을 써도 좋다. 마찬가지로 계획하지 말고 충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표정과 제스쳐를 사용한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만약 미리 계획하거나, 억지로 몸을 쓰려고 하다간 또 내용을 놓치게 될 거다. 절대로 내용을 놓치면 안 된다. 내용을 전달하려고 말을 하는 것이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내용을 놓치는 순간, 의지도 약화되고, 말의 리듬도 파괴된다. 결국 에너지도 없고, 알아듣기 힘든 말이 된다. 전달하려는 의지를 더 강화하고 지속한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반복할 때마다 뭔가 트이는 느낌이 올 것이다. 그걸 기억하고 몸에 붙여야 한다.
-자신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자신의 평가는 어떠한지.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관찰 할 수 있어야 한다. 연기자의 상태가 그런 것이다. 역할을 연기하는 자기가 있고, 또 그것을 관찰하고 조절하는 또 하나의 자기가 있는 상태. 그것이 연기자의 상태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을 관찰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연기자의 주체성도 생긴다.
-A는 자꾸 자연스러운 소리를 잃어버린다. 자기 특유의 쪼가 수시로 나온다. 항상 신경을 써야 한다. B와 C는 자꾸 긴장상태에 빠진다. B는 위축되어 있어 보인다. 시험을 치는 것이 아니다. 정답도 없고 오답도 없다. 그저 자신의 느낌을 관찰하고 평가하면 된다. C는 급해서 자꾸만 실수를 한다. 의욕과잉처럼 보이는데, 이것도 사실 긴장의 한 형태다. 솔직하고 진실하면 된다.
-배우는 자기 자신이 악기다. 연주자가 악기를 아끼듯이 자신을 아끼고 배려해야 한다. 어느 연주자가 자기 악기를 함부로 대하며 연주하겠는가? 배우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특히 연기에 접근하는데서 무턱대고 해치우듯 덤벼들지 않아야 한다. 배우는 목소리가 커야 한다며 일단 무조건 큰 소리로 말하는 것, 내용 파악도 부실한데 표현만 자꾸 하려고 드는 것, 껍질을 깨야 한다,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며 창피스런 짓거리를 하는 것 등은 너무 폭력적이다. 배우는 차근차근 세심하게 연기에 접근해야 한다. 절대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예술이 창조되는 일은 드물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원시시대. 어느 날 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호랑이를 잡은 사냥꾼 두 명이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무용담을 이야기해 준다. 한 명은 아예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 쓰고 호랑이 흉내를 낸다. 그 두 사냥꾼의 이야기가 실감날 수록 사람들은 숨을 졸이며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고, 마치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듯, 또는 자신이 그 상황속에 있는 듯한 체험을 한다. 마지막에 호랑이를 잡는 장면에 이르면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 이들이 배우다. 그 이후로 작가도 생겼고, 연출가도 생겼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두 사냥꾼의 후예, 즉 배우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들은 여전히 이야기꾼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듯,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관객의 흥미와 감동은 결국 이야기를 들려주는 배우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대본에 쓰여진 글자를 단지 음성으로 전환시켜 내뱉기만 하는 배우들이 있다. 그들은 좋은 이야기마저 지루하게 만든다. 그들은 대개 기술도 모자라지만, 무엇보다 자기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을 모른다. 표피적 의미만을 알고 있을 뿐, 심층을 볼 줄 모른다. 부분에 천착할 뿐,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할 줄 모른다. 좋은 배우들은 다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주인이 된다.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전달해야 할 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설득력 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가 넘친다. 그들은 작가나 연출가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창조하여 사람들을 놀래킨다.
-편하게 누운 상태에서 ^형태로 무릎을 접는다. 일자로 누우면 허리부위가 바닥에서 뜨지만, 이 상태를 취하면 바닥과 허리가 밀착되기 좋은 상태가 된다. 이 상태에서 호흡한다. 복부전체가 부풀어 오르면, 자연히 지면과 맞닿은 허리부분에 느낌이 올 것이다. 또는 동물처럼 엎드린 채로 숨을 쉬어 본다. 하복부, 단전의 느낌에 주의를 집중해본다. 이곳이 몸의 중심이다. 이곳으로 호흡이 모여들고 이곳에서 빠져나간다.
-훈련은 그냥 하지 말고 목적을 인지하면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적으로 훈련하게 되고, 훈련의 성과도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날숨은 고르게 나가야 한다. 날숨이 고르게 나가려면 횡경막이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날숨시에 복부가 단단한 상태를 유지해야 고르게 내뱉을 수 있다. 횡경막이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면, 바람 빠지듯 한 번에 숨이 빠져나간다. 한 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호흡은 정서를 안정시키기는 커녕 무겁게 만든다. 들숨을 확 들이키는 것도 잘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날숨을 너무 끝까지 내뱉었기 때문에, 즉, 호흡이 바닥났기 때문에 급하게 들이마시는 것이다. 이런 호흡도 정서를 안정시키지 못한다. 호흡을 다 내보낸 몸이 생명의 위기를 느끼므로 정서가 불안해진다. 날숨을 모두 내뱉는 것이 아니라 머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들숨이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들숨과 날숨 모두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나가야 한다.
-마음에 드는 색깔을 고르고 소리를 발사한다. 고개를 들고. 입은 자연스럽게 벌려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 하는 소리를 발사. 낮은 음으로 발사. 의식을 집중하여 가슴의 진동을 느껴 본다. 세 번 정도 반복. 다음은 고개를 바로 세우고 허- 하는 소리를 발사. 중간음으로 발사하면서 연구개의 진동을 느껴야 한다. 다시 세 번 정도 반복. 다음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히-하는 소리를 발사. 높은 음으로 발사하면서 경구개로부터 치아에 이르는 곳의 진동을 느껴본다. 바닥에 얇은 선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더 좋을 것. 다시 세 번을 반복. 방금 소리를 낸 것은 공명기관을 사용하는 훈련을 한 것. 각각 가슴공명, 구강공명, 치아공명.
-줄인형 훈련. 자신을 인형으로 생각한다. 다리는 어깨넓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벌려 서고, 몸을 바로 세운다. 정수리에 줄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팔꿈치, 손목, 손가락에 줄이 달려 있다. 팔꿈치를 먼저 들어올린다. 천장에서 줄을 당기므로 팔꿈치가 끌려올라간다는 느낌으로. 이 때 다른 부분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끝까지 당긴다. 다음은 손목에 달려 있는 줄을 당긴다. 마찬가지로 다른 부분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다음은 손가락 끝에 달려 있는 줄을 당긴다. 한껏 당긴 상태. 갑자기 손가락 줄을 끊는다. 손가락이 툭하며 떨어진다. 다음은 손목의 줄을 끊어버린다. 손목이 툭하며 떨어진다. 다음은 팔꿈치의 줄도 끊어 버린다. 팔꿈치도 툭 떨어진다. 이 훈련을 진행하는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줄을 당길 때 다른 근육들이 움직이지 않아야 하며 줄에 매달린 부분만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 툭하며 떨어지는 그 때의 감각이다. 다시 한 번 해본다. 양팔을 동시에 진행한다. 한 번 더.
-목뼈와 척추뼈를 하나씩 빼고 끼워본다. 물론 실제로 뼈가 빠지거나 끼워지는 것은 아니며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것 뿐이다. 먼저 바로 선 자세를 취한다. 목뼈와 척추뼈의 줄기를 상상한다. 목뼈를 맨 위에서부터 하나씩 뺀다. 덜컥하는 느낌과 함께 고개가 약간 떨어진다. 또 하나를 뺀다. 하나씩 맨 위에서부터 차례로 뺀다. 진행할 때 주의할 것은 두 가지다. 맨 위에서부터 하나씩 빼는 것과, 척추가 곧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고개는 완전히 떨어져 있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젠 척추뼈도 하나씩 뺀다 마찬가지로 위에서부터 하나씩 뺀다. 하나씩 뺄 때마다 점차 상체가 아래를 향해 떨어진다. 횟수는 신경쓰지 말고 덜컥하는 느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위에서부터 조금씩 무너지는 것이지 허리를 구부리는 것이 아니다. 덜컥. 덜컥. 몸이 아래를 향해 무너져갈 때 다리도 자연스럽게 조금 굽히는 것이 좋다. 다리를 꼿꼿이 펴려고 하다가는 쓸데없이 힘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맨위에서부터 하나씩 빼는 것과 이미 축 늘어진 목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꼬리뼈에 줄이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상체를 천천히 흔들어본다. 척추와 목뼈를 모두 제거했으므로 상체는 완전히 축 늘어져 있는 상태.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흔들흔들거린다. 이젠 아래로부터 뼈를 하나씩 끼워서 몸을 세운다. 마찬가지로 덜컥하며 끼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올라와야지 중간에서 몸을 올리면 안 된다. 척추뼈를 다 세웠다. 그 동안 목뼈는 여전히 축 늘어져 있어야 한다. 이젠 목뼈를 하나씩 끼워서 올린다. 덜컥. 덜컥. 다 세우면 몸은 직립 상태가 되었고 쓸데없이 들어간 힘이 다 빠진 상태가 된다. 구부리고 세울 때,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다. 덜컥. 덜컥. 하는 느낌이 나면서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되어야 한다. 앞서 진행한 두 가지 훈련을 몇차례 하고 나면 목과 척추, 어깨, 팔, 기타 상체에 들어간 쓸데없는 힘과 경직이 제거되고 이완된 상태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발성이나 공명 등의 훈련도 이 상태를 만든 후 하면 좋다.
-복식호흡을 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호흡의 운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다. 소리는 호흡을 원천으로 한다. 흉식호흡은 얕게 들어와서 금방 빠져 나가버린다. 들어온 호흡을 지지할 수 가 없어 훅 하고 빠져나가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을 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무대 위에서 대사를 하기에는 어렵다. 첫째, 숨이 얕아 에너지 넘치는 소리를 만들 수가 없고, 둘째, 운용하기 어려워 강조와 억양, 리듬과 템포 등을 살려서 말하기 어렵다. 즉, 무대에는 부적합하다. 그러나 복식호흡을 통해 깊이 들어온 호흡은 지지할 수가 있다. 들숨을 통해 팽창된 횡격막을 날숨 시에도 유지시키는 것이다. 즉 날숨시에 다시 올라오려는 횡경막을 눌러주는 것이다. 숨을 고르고 길게 내쉬려면 이렇게 횡경막이 작용을 해주어야 가능하다. 물론 횡경막은 사람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므로 횡경막 자체를 내리 누를 수는 없다. 대신에 횡경막 주변의 근육들-배와 등의 근육-을 이용하여 잡아줄 수는 있다. 그렇게 호흡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은 운용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를 이용해 에너지가 넘치는 소리를 만들기에 좋다. 호흡지지를 위해 복식호흡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대본이나 책을 꺼내들고 소리내어 읽어본다. 중간에 호흡을 하지 말고 한 호흡으로 끝까지 읽는다. 호흡이 다 빠져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계속 읽는 것이다. 최대한 길게 읽으려고 일부러 작은 소리로 읽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의미가 없다. 이 훈련은 발화 중에 몸의 상태를 느끼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누가 얼마나 길게 읽을 수 있는지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소리로 읽으면 몸의 상태를 느끼기 어렵다.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읽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평상시와 같은 속도로, 혹은 차라리 느리게 읽으라. 띄어 읽기는 자연스럽게 한다. 대신 띄어읽을 때 도둑숨을 쉬지는 말아야 한다. 도둑숨은 배우가 잘 활용해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지금은 배제한다. 지금은 무엇보다 이 훈련을 통해 배와 등의 근육이 작용하는 것을 느껴야 한다. 몇 차례 더 해본다. 일부러 들숨을 길고 오래 들이마시는 것은 소용없다. 폐활량을 늘리자거나, 누가 오래 읽을 수 있나 경쟁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들숨을 들이쉬고, 들이쉬었으면 강력하게 지지한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크고 강하게 읽어본다. 배와 등의 근육이 작용하는 것을 느껴본다. 무대 위에서 발화 중인 배우의 상태는 이러해야 한다. 발화와 함께 순간적으로 이 상태가 만들어져야 한다. 무대 위에서 항상 복식호흡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을 할 때는 바로 복식호흡으로 전환하고 배와 등의 근육을 이용해 횡경막을 작용시켜야 한다. 즉 호흡을 지지해야 한다. 긴 대사건 짧은 대사건 상관이 없다. 길이가 긴 대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짧은 대사라 하더라도 이런 상태에서 발화를 해야 에너지가 넘치는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말의 운율을 살리는 것도 가능하다.
-모든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것이지만, 배우는 아는 것도 많고 사색도 깊어야 한다. 좋은 배우들은 책을 항상 가까이 하며 다방면적인 지식과 간접적 경험들을 축적한다. 사색을 즐겨하며 인간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다. 똑똑한 배우는 피곤하기만 할 뿐, 쓸모없다고 여기는 편견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다. 인간과 세상을 보는 안목 자체가 낮다면, 그가 만들어 내는 예술도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사람은 아는 만큼 표현할 수 있다. 게다가 지성과 감성은 결코 반비례하지 않으며 지성은 감성을 풍부화시켜준다. 배우는 작품을 책임지는 제1선에 있는 예술가다. 배우야말로 극작가보다, 연출가보다, 그 누구보다 막중한 책임을 가진다. 그래서 관객은 배우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피아노 연주는 피아노를 다루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화가는 붓놀림을 익혀야 한다. 그러므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어느 정도의 기술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연기는 이상하다. 뭔가 익히지도 않았지만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런가? 노래도 마찬가지다. 레슨을 받은 적도 없지만 잘 부르는 사람이 있다. 말하자면 타고난. 왜 그런가? 그의 몸 자체가 악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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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론은 창조작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론가가 훌륭한 창작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예술가는 창조작업에서 오직 자신의 창조성을 무기로 작업해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론은 반드시 도움이 된다. 작업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므로 다방면적이고 깊이있는 예술이론의 학습은 꼭 필요하다. 단, 목적과 효용이 어디에 있는지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창조작업의 관점이랄까? 객관의 포로가 되지도 말며, 주관의 늪에 빠져 들지도 말아야 한다. 객관과 주관의 통합. 주체.
-연기를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연기의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주체적 관점을 획득할 때, 연기가 성장한다.
-예술이 일상이 되었으면, 작업하는 것이, 무대에 서 있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이 되었으면.
-“창작기량을 향상시킨답시고 문장론이나 수사학이라든가 문예이론서적 따위를 일부러 읽은 적은 없다. 정평이 난 고전을 읽음으로써 시작의 도움 같은 것을 얻곤 한다. 그리고 나는 표현능력, 기발한 발상법, 완벽한 형식 따위가 문학작품을 생산해내는 기본적인 요인이라든가 시적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내는 유일한 길은 위대한 삶이다...김남주 평전 중 234p
-“나는 시라는 것을 내가 헤쳐가야 할 길을 위한 무기 이외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다면 내 시에서 소위 서정성을 빼버리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썼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내가 제거하려고 했던 서정성은 소시민적 서정성, 자유주의적 서정성, 봉건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고리타분한 무당굿이라든가, 판소리 가락에 묻어나오는 골계적, 해학적, 한적 서정성이었습니다....김남주 평전 중 240p
-진보적 연극운동의 한계
1. 연극운동론이 없다. 사상, 이론, 방법, 정책, 노선이 없다.
2. 조직이 없다. 연극운동을 떠밀고 갈 추동력이 없다.
3. 진보적 연기론, 연출론 등 우리식 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미약하며, 실천과 괴리되어 있다.
4. 작품의 보급과 유동이 제한적이고 소극적이다. 어설프게 제도권 흉내를 내는데 머물거나, 진보연극의 보급 유통에서의 전형, 모범이 미약하다.
5. 기록과 축적이 없어 역사화 되지 못한다. 있더라도 단위내에서 그치므로 전체를 조망하기 어렵다.
-진보적 연극운동의 과제
1. 연구하고 공부하는 기운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모임을 통해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3.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빨리 해내는 것이 좋다. 대본집의 경우가 그렇다.
4. 모범, 사례들이 공유되고, 정형화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 단합, 소통, 연대의식이 자라나야 한다. 단위본위주의에서 벗어나 전체를 조망하도록.
-작품 000은, 자연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작가들의 자기치유, 실력향상 등에 도움은 되겠지만,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주의적 예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창조는 직관과 영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논리적 사고는 여전히 준요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직관과 영감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적 상상력은 논리적 사고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창조적 상상력에 의해 깨달았지만,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가 필요했다. 극작, 연기도 마찬가지다. 직관과 영감에 의지해 창조작업을 하되, 그것은 다시 논리적 사고에 의해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둘은 순차적 작업도 아니다. 상호교차하며, 시너지를 일으키는 작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직관과 영감이란 것조차도 학습되고 전파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노리적 해설, 논증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사회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논리적 사고 대신, 형상적 사유가 발달하는 사회에서는 전혀 다를 수 있다. 현재는 불교의 禪 개념 등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만. 어쨌거나 나는 현대에 살고 있고, 창조와 지식을 전파하고 공유하는 매개로서의 논리적 사고는 여전히 유력한 것이다.
셋째, 스타니 슬랍스키가 말했듯, 영감은 이성적 노력에 의해서 불러들일 수 있다.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은, 양질 전화가 본질이 아닐까.
-우리 모두의 과제
1. 공연 사업의 활성화
2. 자기 주도성을 높일 것
3. 교육, 훈련 프로그램의 도입 및 지속
4. 중장기 전망에 대한 사색, 도출
5. 모범, 성과의 공유. 일반화. 전파. 자기 적용
-정기성, 지속성을 가지는 사업이 될 수 있도록 할 것. 그러려면 첫째, 가치와 명분이 분명하고, 실익이 있는 내용으로 짜여져야 할 것이다. 둘째, 또한 책임있게 역할을 수행할 주체가 마련되어야 하고, 셋째, 날짜, 시간, 장소, 재정 등, 실무적 문제들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며, 넷째, 완강함이 필요하다. 부침이 있더라도 들뜨거나 흔들리는 법이 없어야 한다.
-연극동아리가 지속적으로 운영되려면, 대본확보와 연습커리큘럼이 관건이다. 단막극을 연습커리큘럼으로 삼는 것이 적합할 것. 또한 10-20분가량의 꽁트를 레파토리화하고, 3개 정도를 묶어서 정기공연으로 올리는 것. 대본의 경우, 직접 쓸 수 있도록. 생활속 에피소드, 수필 등을 수집하고 축적한 후, 이를 즉흥극 작업, 대본 작업을 통해 극화시킬 것. 상반기 동안 자생력을 갖추도록 도움을 줄 것.
-배우와 연출가의 의견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A라는 배우는 전혀 마찰이 없다. 그는 연출의 의견에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B라는 배우는 주견이 강해 종종 마찰을 일으킨다. 그런데, 사실 그는 연출의 의견을 숙고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고집을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C라는 배우는 의견을 피력하지만, 결국 연출의 의견을 따른다. 그런데 불만스럽게, 툴툴대고, 뒷소리를 한다. 배우는 집단의 작업을 위해 헌신적으로 임해야 한다. 무엇보다, 연출만큼 전체 작품들에 대해 사색하고 책임지려는 입장을 가져야 한다. 단지 자신이 맡은 배역과 연기 자체에 머물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의 일부이며 그러므로 전체에 대한 사색 속에서, 그 기초위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생각의 탄생. 좀 더 일찍 읽었어야 하는 책. 빌려주기 싫은 책.
-나는 나의 예술을 기술을 이용해 포장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예술은 결코 나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기술은 화장과 같을 뿐이다. 때로 그것은 과도한 나머지 추악해 보이기도 한다. 투명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포장을 걷어버리고, 나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할 것. 또한 나의 사상을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 다른 길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신기루일 것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사상은 그렇게 내려가야 한다. 머릿속의 지식이 심장의 거센 고동으로 내려갔다 하더라도, 아직 사상으로 된 것은 아니다. 발이 움직일 때라야 비로소 사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거리는 얼마나 멀고, 또 얼마나 가까운가?
-실천 속에서 해답을 얻는다는 말은 놀라운 진리다. 과학과 논리가 충분히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숱한 경험 속에서 체득되는 삶의 진리라 할 수 있다. 몸으로 생각하기!
-000의 연기는 에너지가 넘친다, 연극적이다. 이런 평이 주를 이루는데, 나는 말하자면 취향이 다른 듯 하다. 불필요한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듯 느껴지고, 과잉되어 보이며,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연극 연기는 그렇게 밖에 출로를 찾을 수 없는 것인가? 무대에서 에너지의 과잉으로 꽉 들어차있을 때, 나는 사색이 마비된다. 빈틈없이 꽉 짜여져 긴박하게 돌아갈 때, 나의 사고는 멈춰 버린다.
-연기전략의 부재라고 할까. 000는 초중반에 보여주었던 것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안과 광기는 갈수록 심심해 보였다.
-연출의도는 잘 구현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가장 큰 문제는, 초반의 성애 장면이다. 성적 욕망은 그들이 가진 야망의 표현으로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000의 현대적인 가치는 이중성에 있다. 자신의 충성심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야심을 주체못하는. 현대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점잔을 빼면서도 욕망을 부리는.
-예술에서 보편성 획득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계급, 계층, 직업,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감동을 창조할 때, 예술은 진정한 자기 가치를 획득한다. 그러나 예술에서 보편성이란 오히려 구체적일 때 획득된다.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며 구체성을 삭제한다면, 오히려 보편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란 과학의 신비요, 원리다. 덧붙이자면, 관객, 즉 대중에 대한 믿음 또한 중요하다. 대중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다. 타인의 삶을 경청하고, 자신을 비추어보고, 공감할 수 있다. 특히, 예술을 대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려고 극장에 오는 것이다. 은행노동자 이야기라고 해서 금속 노동자가 공감할 수 없을까봐 걱정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소재를 잡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풀어냈느냐, 무엇이 심어져 있느냐가 문제다.
-포장하지 말자. 언제나 진실하자.
-최선을 다해 땀흘려 일하자. 필요한만큼만 가지자. 조금 일하고 필요이상으로 취하는 것은 죄악이다. 신자유주의를 내면화 하는 것을 경계하자.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다. 사실, 노동과 돈은 대가로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와,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며, 사회는 구성원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그러므로 일한 만큼 가져가는 것은 착취사회에서는 진보적인 생각이지만, 착취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후진적인 생각일 것이다.
-연극 작업에서 몇가지 문제. 작품-작업의 결과-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작업-과정-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의 연극작업에서 구현되어야 할 원칙, 방법론은 무엇인가?
1. 집단작업의 본질을 구현해야 한다. 집단적인 힘과 지혜는 연출가의 독재보다 위대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 대한 연구, 실천적 경험은 부족하다.
2. 배우들끼리의 작업. 배우들끼리의 작업은 기본중의 기본이다.
3. 리딩-블로킹-디테일이라는 단계는 적절한가? 만약, 그렇다면 각 단계의 목표는 무엇이고, 예술가들은 각기 단계에서 어떤 목표와 윤리를 가지고 임해야 하는가? 아니라면, 어떤 단계가 있는가?
4. 신체훈련은 과연 유효한가? 공연양식과 관련없이 행해지는 신체훈련은 체력단련에 지나지 않는다. 공연양식적 요구에 따른 신체훈련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문제.
5. 작품분석의 방법론은 무엇인가? 분석의 목표는? 아마도 작품의 본질, 주제를 이해하고, 이에 공감함으로써 집단의 창조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또는 주체적 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일상에서는 연기를 하고, 무대에서만 진실한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기 위해 가면을 쓰는 것이다.
-관객은, 배우를 보기 위해 극장에 온다. 플롯은 널려 있고, 미술도 널려있다. 배우가 아니라면, 극장에 올 이유가 별로 없다. 또한 관객은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를 통해 감동받는다. “치열한 투쟁을 하는 인간의 형상”은 작품 속에도 있지만, 무대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이 관객을 고양시킨다. 배우는 연기 기술자가 아니라, 스스로 투쟁하는 인간전형, 투사이자 전사이다.
-좋아서 하는 연극보다, 사회적 보람을 느끼는 연극을 하자. 대중에게 인정받기보다, 대중을 위한 연극을 하자.
-비록 나의 예술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나의 예술에 세상의 전형을 담아내려고 노력할 것. 변화하는 시대를 담아내기 위해 분투할 것. 시대를 선도하지 못할지라도, 시대의 선두에 있는 인간들의 삶과 투쟁을 그릴 것.
-끌어내주면 잘하는 배우는 보통 실력이다. 끌어내 주어도 안 되는 배우는 낮은 실력이다. 스스로 끌어내는 배우는 고수다.
-정체성. 오랜 세월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파괴되거나, 변형된다면 이름이 같아도, 형태가 같아도 전혀 다른 것이 된다. 1. 창작, 연행집단. 2. 사회의 진보에 복무. 3. 코미디. 이 세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하나의 본질을 이룬다. 단원들은 모두 공히 위의 세가지를 염두에 두고,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사업은 위의 세기지에 입각해서 검토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예술의 기능. 인식교양적 기능 / 심미적 기능 / 오락적 기능.
인식교양적 기능. 예술은 객관세계 속에서 발견한 진실을 담아내는 것. 그러므로 인식교양적 기능을 가지게 됨. 통상, 교훈, 지식의 전달이라고 표현하기도 함. 작품의 풍격과 가치를 규정하는 첫 번째 요인으로 작용. 주제 사상적 측면. 사상성과 직접 관련됨. 예술가의 세계관이 결정적 작용. 진실을 발견하고 구분하는 눈. 안목. 사회적 의의성이 커다란 것일수록 높은 가치를 지님. 사회적 의의성-인간은 개인적 존재가 아닌 사회적 존재. 절대화 할 경우, 예술의 본성을 해치고 설교로 전락.
심미적 기능. 심미. 미와 추를 구분함. 부각함. 감정과 정서의 고양. 사상에 의해 규정됨. 사실주의는 미와 추를 모두 그려낸다. 미는 미로, 추는 추로. 형식, 예술적 완성도 등의 측면. 예술성과 직접 관련. 예술성이 높아야 심미적 기능이 높아짐. 인식교양적 기능과 상호작용. 절대화할 경우, 예술지상주의, 형식주의로 전락함. 관념적 경향. 예술의 본성에도 맞지 않고, 예술의 사회적 역할도 할 수 없음. 높은 사상성은 높은 예술성에 의해 빛을 발한다. 높은 예술성은 높은 사상성에 근원을 둔다. 이로써 예술은 사회발전과 인간발전의 무기가 된다.
오락적 기능. 쾌락적 기능과 유사. 대중성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 카타르시스 이론을 근거로 삼음. 관객의 반응 그 자체에만 집중한 편협한 견해. 반응은 내용과 형식에 대한 것. 허상이라고 볼 수 있음. 쾌감, 오락, 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 아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 감정정서의 고양이 주는 쾌감. 인식교양과 심미기능의 조화에 의해 구현되는 것. 폐해. 말초적으로 자극하는 기술 횡행. 반응 그 자체를 노리는 기술 횡행. 예술의 사회적 역할 무시. 인간 발전을 저해.
-극작 과정을 단순하게 공정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소재구하기 2. 종자, 전제, 초목표, 관통선, 의미, 메시지, 주제. 3. 이야기 줄거리 만들기. 4. 구성하기. 5. 대사쓰기. 6. 퇴고. 굳이 기술이 적용되는 부분을 찾자면 3-6까지다. 물론 그 과정조차 기술이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있으므로 어느정도는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문제는 1-2의 과정이다. 여기에는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없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좋은 예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는 흔히, 자질, 안목, 관점, 발상 등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이 작용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천부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1-2의 과정이야말로 예술창조의 출발이며 핵심이고, 여기서 작용하는 능력는 가르치고 배울 수 없는 것들이기에, 예술적 능력은 타고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듯 할 수는 없지만, 우회하는 길은 있다. 관찰력, 상상력, 사고력 등은 발전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다. 직접 경험을 간접경험으로 보충할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기술에 관한 책과 이론은 넘치도록 많지만, 자질, 안목, 관점, 발상을 길러주는 책과 이론, 방법론은 너무나 부족하다. 생각의 탄생은 중대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점에서 소중한 책이다.
-기술보다 소양을 쌓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기술에 매달린다.
-분석. 텍스트를 분할하는 것은 유용한 도구다. 분할하면 구조가 드러나고, 이를 통해 배우는 연기의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전체적인 구조가 드러나면, 배우는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연기할지 실마리를 잡아낼 수 있고, 이를 연결하여 전략을 세울 수 있다.
분할을 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오래되고 흔한 방법은 프렌치 씬이라고 불리는 방법으로 인물의 등퇴장을 기준으로 한다. 등장과 퇴장에 따라 극의 변화가 발생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매우 객관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맹점도 있는데, 그 전제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행동의 변화를 기준으로 나누는 방법도 있고, 심리변화를 기준으로 나눌 수도 있고, 분위기의 변화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다. 객관성은 떨어진다.
먼저 크게 분할하고, 좀 더 작게, 좀 더 작게 분할해 들어간다. 분할한 각 장면에 적절한 표현을 적어 둘 수 있다. 형용사를 적을 수도 있고 색깔을 표시할 수도 있다. 길고 지루한 서술형 표현보다는 직관적이고 간명한 표현을 쓰는 것이 유익하다. 직관적이고 간명한 표현을 쓰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비본질적인 것이 제거되고 본질적인 것을 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술형보다 영감을 자극하기 좋다. 게다가 서술형은 전략을 세우기 어렵게 만든다. 직관적이고 간명한 표현들로만 순서대로 모아보면 전략을 효과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분할을 하는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통일성, 관통선, 초목표를 상실하지 않는 것이다. 분할을 통해 연기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통일성, 관통선, 초목표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이라야 의미가 있다. 분석작업 후에는 반드시 재구성 작업을 통해 관통선을 구축해야 한다. 분석작업의 최종 목표는 각 장면의 연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관통선을 구축하는데까지 나가야 한다.
-연기 접근법은 다양하다. 원칙적인 것들도 있으나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배우의 특성에 따라 다르고, 텍스트의 특성에 따라 다르고, 연출의 특성에 따라 다르고, 공연제작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문제는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접근법도 도구들이다. 배우는 여러 가지 도구들을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하며, 상황과 필요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나는 일면 모순적인 교육을 한다. 계산된 연기를 피하고 순간적, 측발적인 연기를 강조하지만, 반대로 분석작업을 통해 전략을 세울 것을 요구한다.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모순적인 것은 아니다. 두가지 방식은 결국은 배우를 통해 통합된다. 즉흥작업과 연구작업, 의외성과 개연성. 모순의 통합. 변증법이 연기가 창조되는 과정을 지배한다.
-명료하라, 분명하라는 요구는 정확히 얘기하면 본질적인 것을 부각하고 비본질적인 것을 제거하라는 말이다. 이는 관객을 위해서고, 사실주의의 원칙이기도 하다. 여백으로 가득한 동양화를 떠올려보자. 모호하고 복잡한 것은 본질을 걷어쥐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질을 걷어지면, 단하나의 문장, 혹은 단 하나의 단어 등으로 간명하게 표현 가능해진다.
-르네상스. 중세의 몰락.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이동. 신고전주의. 질서, 이상화. 사실. 도덕성. 박진성. 본질. 유형화하는 경향. 낭만주의. 개성. 불합리. 열정. 개성. 실제를 미화, 왜곡하는 경향. 혁명운동 영향. 레미제라블. 진보적인 것만은 아님. 나폴레옹을 찬양. 허무주의. 욕정 등. 불건전한 경향도. 사실주의. 미와 추. 미는 미로, 추는 추로, 왜곡 반대. 주관이 아니라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 본질과 개성의 통일. 전형.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적 병폐 만연. 비판적 사실주의. 자연주의와는 달리 사회구조적 모순을 밝히고 비판적 입장에서 묘사. 감찰관. 보이체크 등. 자연주의. 다윈의 진화론 영향. 유전학적 요인 강조. 환경적 요인 강조. 인간은 유전과 환경에 의해 결정.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전망의 제시. 고리끼. 어머니.
-강의요약. 예술은 삶을 반영한다. 또한 예술은 삶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삶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이것이 근본적 문제. 어떤 삶 : 인간 전형, 생활전형. 어떻게? 진실. 어떤 영향을 어떻게 미치는가? 내용, 크기. 전자가 강화되고 후자가 약화되면 예술은 존재의 의미가 흐려진다. 열심히 반영하지만 영향력 그 자체가 없다. 반영의 내용과 형식이 잘 못 되었거나, 사회구조적 문제거나. 전자가 약화되고 후자만 강화될 때, 삶은 위험해진다. 예술이 삶을 반영하지 못한다. 관념, 추상. 진실의 외면. 왜곡된 진실.
-연기 워크샵 개요. 1. 목표와 행동. 2. 몰입하기와 서사하기. 3. 캐릭터-가면, 동물. 4. 중립가면으로 표정의 제거. 몸연기의 극대화. 인간의 일반적, 보편적 속성 탐구. 표현. 5. 낭송훈련. 시낭송. 순간의 감정 극대화. 공명, 발음, 발성 훈련. 드라마틱한 구성. 구성력. 극적 구성력 강화.
-소외효과. 소격효과. 낯설게 하기.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 특히 사실주의는 현실을 생동한 모습 그대로 그려낼 것을 요구. 그런데 평범한 현실은 재미가 없다? 예술은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 뉴튼, 사과는 땅으로 떨어진다. 유레카! 욕조의 물이 넘치는 것. 부피 개념. 당연하게,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생활을 전혀 새롭게 깨닫는 것, 다르게 보여주는 것이 예술. 이것이 브레히트 서사극의 목표. 거리두기는 유용한 전략의 하나. 나와 역할. 배우의 연기에서도 적용가능. 중요한 것은 본질, 진실의 부각. 전형의 창조.
-사회에 대한 분석, 철학. 그 자체를 형상화하지 말 것. 예술은 삶과 인간을 형상. 분석과 철학은 그 바탕이지, 그 자체가 아니다. 필연적으로 도식에 빠지게 된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비본질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본질을 부각하는 섬세함을 가져야 한다.
-남을 다치게 하는 열정, 재능, 신념. 진정한 열정은 주변의 심장을 달구고, 진정한 재능은 주변을 기쁘게 하며, 진정한 신념은 주변을 믿고 따르게 할 뿐이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 공로가 있어야 한다. 신뢰가 있어야 한다.
-시간, 공간, 플롯을 압축하는 것은 불편한 만큼 강력한 극을 만들 수 있다.
-글쓰기, 읽기, 사색하기. 매일매일 빼놓지 말 것.. 하루이틀 손 놓으면 뇌가 더디게 돌아간다. 반대로,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 뇌의 근육을 늘려라.
-사고하는 방법, 생각하는 법, 접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직관과 돈오의 창조적 힘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알아야 한다. 대개 무시하고 있거나, 과정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워크샵의 주요목표는 연기력의 향상이다. 이것이 전제지만 1. 가장 주안점을 둘 것은 배우의 주체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상관점의 확립, 이론적 지식, 기술의 습득 등 모든 것이 여기에 맞춰져야 한다. 2. 연기의 방법론을 세우는 것이다. 실제적인 방법론을 개발하고, 워크샵을 통해 검증하고, 체계적인 이론화까지 시도해야 한다. 방법론의 개발, 검증, 이론화 모두 1의 전제하에 있어야 한다. 3. 전문화를 경계하고 종합적, 전면적, 통섭적인 워크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철학, 과학, 역사 등과 연계시키고, 연극사, 극작, 연출, 예술론과 결부해야. 4. 팀별 처지와 조건, 전망과 스타일 등을 고려해야 한다. 공통적용할 것과 개별적용 할 것을 구분하고 준비해야.
-주체가 될 때 성과가 높다. 주체가 되려면, 무엇보다 목적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목적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창조적인 방법론도 세울 수 있다. 훈련, 연습, 학습, 사업 등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중간에 목적을 상실하는 경우도 흔하므로 수시로 점검되어야 한다. 목적을 상실하면 관성에 빠지거나, 꼭두각시가 된다. 가르칠 때도 목적에 대해 수시로 인식시키고 강조해야 한다.
-1. 강연. 사실주의의 진실 개념. 2. 연기훈련. 관찰과 집중. 3. 극작수업. 검토, 돌려읽기. 소리내어. 숙제. 인물 부각하기. 성격화하기. 새로운 장면 추가. 분량을 늘리기. 4. 장면. 에너지의 고양.
-배우는 관객에게 극의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또한 배우는 관객에게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열정, 투지, 정신력, 육체, 헌신, 신념 등이 배우 그 자체에서 흘러나올 때, 그것이 관객의 가슴에 가닿을 때 연기란 위대한 예술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로토프스키가 말한 승강기라는 개념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깊은 뜻을 간명하게 표현할 것. 창작, 연출, 연기, 강의, 연구, 사업, 대화 등, 모든 부분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틀을 깨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 기존의 것이 자유로운 창조를 구속한다. 무엇을 강화하고 무엇을 혁신할 것인지 판단하고 찾아내기란 어렵다. 연극에서 대본이란, 정말로 보조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아니, 그렇게 여겨야하는 것 아닐까?
-강의할 때, 객관성의 유혹을 경계하자. 나는 학자, 연구자가 아니라 실천가이며 나의 신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강연은 공연이며, 강연하는 나는 배우다. 자기 신념도 없는 배우가 어떤 연기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또한 강연은 지식의 전달뿐만이 아니라 정서적 감화력도 함께 주게 마련이다. 감동적인 강연을 해야지, 메마르고 건조한 강연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술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며, 사회적 보람을 찾고 있다. 감사하자. 그리고 나의 역할, 나의 소명을 찾자.
-다른 강연에 비해 예술강연은 객관성, 설득력을 획득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의 삶과 정신에 관한 것이므로 수치화, 통계화한 자료를 제시할 수도 없으며, 그것은 총체화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작품이 아니라 집단의 작품이 되게 하라. 집단의 작품에서 관객의 작품이 되게 하라. 나아가 시대의 작품이 되게 하라. 그러기 위해 나를 버리고 주체가 되라.
-사람의 성격, 재능, 사상 등에 대해 쉽게 판단하거나 유형화시키려 들어서는 안 된다. 열 길 물속보다 알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다. 몇 차례 본 것으로 판단하면 편견을 가지게 된다. 편견의 힘은 너무 강력해서 사실조차 외곡해서 보여준다. 다른 것을 분류하고 같은 것을 묶는 것은 유용한 사고방식이지만,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에는 무용지물이 된다.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를 보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때라야 비로소 내 사람이 된다.
-어쩌면 내겐, 극단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샌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생각은, 소유욕, 혹은 답답함, 원풀이 등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연극운동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것인가? 전자였든, 후자였든 두렵고 동시에 매력적인 일이다.
-소외효과. 거리두기. 낯설게 하기. 이것은 예술의 기본원리로서 대상-인간, 삶-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브레히트가 이론화했으나, 브레히트가 발명한 것은 아니며, 예술의 오래되고 기본적인 원리이다. 사실주의에서 전형이라는 개념, 연기에서 인상깊은 행동이라는 개념 등과 같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문장은 이 원리의 구현과 효과에 대해 정확시 설명해준다. 사랑한다는 것은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 문제는 예술가가 대상을 새롭게, 다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깊게 들여다 보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성’을 견지하는 것이다. 남의 시선과 사고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목과 실천적 노력으로 재발견해 낸 것만이 가치있는 것이 된다.
-전형이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 “특별하고 희한한 것”도 아니며, 오직 “본질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보편성과 개성을 동시에 획득한다.
-두 작품 이상을 쓰고 있으라. 하나가 막히면, 다른 하나를 쓰면 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작업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것은 방해가 될 때가 많다. 그렇다고 상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본인 스스로의 깨달음과 본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강압하고, 몰아붙이고, 창피를 주는 방법은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무너뜨린다.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상대를 곤란에 빠뜨릴 뿐이다. 강압으로 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특히 사람에 관한 일은.
-불철저함. 모순에 빠져들기. 비겁함. 오락가락. 이것들은 인간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매력이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매력이 없다. 흔들림을 극복하는데서 인간의 위대함이 발견된다. 흔들리고 아파하자. 부끄러울 것 없다. 나는 인간이다.
-드라큘라의 서사방식은 콜라쥬적이다. 각각 인물들의 일기, 편지, 비망록 등의 형식들로 서사된다.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점도 있고, 논리적 비약도 있지만 꽤 독특하고 효과적인 방식이다. 특히, 짬날 때마다 작품을 쓰기에는 좋다. 그런데, 드라큘라, 지킬앤하이드, 프랑켄슈타인 등의 작품들이 동시대에 출현한 이유는 뭘까?
-000은 현장과 엄청난 친화력을 기반으로 하는 노래를 한다. 가사, 몸짓, 무대매너. 그 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그러하다.
-000. 소탈하고 겸손한 모습에서 문득문득 베어나오는 열정. 그렇게 발휘되는 열정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그에 비해 나는 과시하고, 포장하며, 거만하다. 그것은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고, 그저 혼자만 불태우는 열정, 아니 자기도취일 뿐이다.
-한 인간의 어깨 위에는 사회와, 역사의 모순과 질곡이 얹혀져 있다. 이를 형상으로 밝혀 내는 것이 예술가의 할 일이다.
-지도자가 아닌 연출가는 기술자, 장사꾼, 중개업자, 마름, 독재자 밖에 되지 못한다.
-자기 분야밖에 모르는 “전문가”는 협업을 할 수 없다. 전문성은 총체성에 기반할 때라야 비로소 빛을 낼 수 있다.
-의사라는 인물을 상상에서만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취재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결코 상상력이 닿을 수 없었을 것. 상상은 실제라는 나무 위에서 날개를 편다.
-예술은 투쟁하는 인간을 그리는 것이다. 운명에 맞서거나, 신과 맞서거나, 어떤 힘, 사회구조와 제도에 맞서거나, 편견에 맞서거나. 그것들과 투쟁하는 인간을 다룬다. 인간속에 내재된 위대성이 발현되는 그 순간이야 말로 극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플롯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며, 무대에 선 배우의 존재로도 드러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감동을 일으킨다.
-창작과 연습, 공연과정에서 샘솟는 열정. 불길. 눈물이 소시민적인 그것이 아니길. 개인주의, 이기주의, 공명심 등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그것으로 오염되지 않기를. 만약 그렇다고 할지라도 빨리 깨닫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최소한 내 경우에는 풍자, 비판, 폭로는 창작적 희열을 그리 크게 주지 못한다. 또한, 슬픔, 애잔함 등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성이 발휘되는 그 순간-그것은 꼭 엄청난 사건에 결연하게 맞서는 그런 것만은 아니며,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순간을 포함한다-에 커다란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보면, 내 이야기는 실제 사례나, 인물에 뿌리를 더 깊이 박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픽션을 가하는 것에도 원칙과 기준을 세울 수 있을 듯 하다. 극적 재미를 위해 픽션을 가할 때, 나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자책과 부담을 느낀다. 그러나, 본질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운동이란,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머무르는 운동은 쉽게 변질되고 결국 파탄에 이른다. 학습과 토론, 자기검토, 상호비판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는 경험주의, 보신주의, 이기주의 등이 파고든다. 건강했던 사람도 나중에는 수치를 모르게 된다.
-생계 걱정이 없다면, 노동의 댓가를 착취당하지 않는다면, 공평한 분배로 모두가 충분히 누릴 수 있다면, 하이에나처럼 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가장 가치있는 것은 사회적 명예와 보람이 될 것이고, 사람들은 위대함을 발휘할 것이다. 곳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수많은 위인들이 탄생할 것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것이 프리미엄이 되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진보를 프리미엄으로 이용하려 드는 것은 저열하고 비겁하다. 진보는 진보일 뿐, 프리미엄도 아니고, 차별화 전략 같은 것도 아니고, 괜찮은 포장도 아니며, 예술적 게으름의 방패막이도 아니다. 메피스토의 주인공 핸드릭 회프겐을 기억하라.
-연극이란 무엇인가? 연극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근본적 질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몇 번째 다시 돌아왔지만, 여전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평생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범위를 축소시키는 위험을 감수하고, 질문을 새롭게 하자. 나는 어떤 연극을 원하는가? 할 수 있는 것, 자신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연극을 원하는가?
-연극은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드러내고자 해서는 안 된다. 멋있게 보이려고, 잘 하는 척 하려고, 칭찬을 받으려고 등등을 위해 웃기고 울리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웃기고 울리기 위해 오히려 “나”를 버려야 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객을 위한 연극을 하라.
-사소한 목적으로 연극을 만들지 말자. 연극을 만들 때, 고상한 이상과, 역사와 사회에 대한 소명, 진실함을 갖추자. 그것이야말로 수단으로서의 연극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혹시 너무 이상주의적인 생각인가? 그런 이상없이 살면 인생과 연극은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뱃사공조차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 낮은 일을 하고, 드러나지 않으려고 하라. 혹시 그것은 너무 현실적이지 못한 생각인가? 전태일은 이렇게 되물었다. “그렇다고 내가 왜 현실과 한 패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000, 000, 000. 세 작품 모두 인간과 삶을 그려낸다. 000은 착취-피착취, 지배자-피지배자 관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본질과 전형을 그리고 있지는 못하다. 000은 극히 자연주의적인 작품이다. 유전, 환경, 이로써 반복되는 운명에 무기력한 인간상을 그려낸다. 그것도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000은 수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지만, 주제사상의 깊이는 얕다. 세작품 모두 공통적인 것은 “인간문제의 깊이”에 관한 것이다.
-하청받듯 작업하는 예술활동은 반드시, 분명히, 결단코 혁신되어야 한다. 대안을 실현해갈 때, 혁신은 검증되고 속도가 붙는다. 한탄은 접어두고, 길을 찾아 나서라.
-배우의 텍스트 해석은 머릿속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 몸의 실연이 필요하다. 분석과 해석, 상상을 위한 몸의 실연과정에서는 마구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서사적 관점을 가지고, 슬렁슬렁 해야 한다. 그래야 사고가 가능하다. 단, 슬렁슬렁은 몸에 붙기 쉽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연극이 아무리 변화하더라도 연기에 있어서 내적 진실성, 자감을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배우예술의 본질적 속성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진실로 느끼지 못한다면 연기란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내적 진실성, 자감은 공감을 말한다. 인간은 타인의 정신세계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로써 예술의 창조와 감상이 가능한 것이다.
-대단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은 많다. 가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천재들이 세상에 널리고 널려 이젠 천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그러니 천재적 예술가는 별로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그러나 혁명적 예술가들은 시대를 초월한 특별함을 가진다. 천재적 예술가는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하지만, 혁명적 예술가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스텦들의 평가가 오히려 배우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객관적, 과학적이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배우로 하여금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될 수록 말을 삼가하고, 추상적인 평가는 하지말고, 구체적이고 실속있는 조치를 취할 것.
-유명한 작가들 중 몇몇은 사실은 지독히도 책을 읽지 않는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훌륭한 삶을 산 사람치고 독서광이 아닌 사람이 없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일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다.
-우린 왜 "진짜"가 아니라 "진짜 같은 "에 열광하는가?
-연기의 전제는 자신감이다. 잘하고 못하고 해석의 좋고 나쁘고는 둘째문제다. 대사와 행동 모두가 스스로에게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연기하기 전에는 갈등하고 번민하더라도 연기하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있게 해내야 한다. 무대는 자신없는 연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실수한 건 아닌가. 협력연출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많이 개입해서 연출의 역할을 뺏은 것은 아닌가. 배우들의 근원적 문제를 풀어주는 게 아니라 장면 만들기에만 급급했던 것은 아닌가. 시간이 부족하다고 몰아붙이기만 한 것은 아닌가. 내 지도력 부족은 무시하고 내심 연기력 부족만 답답해 했던 것은 아닌가. 큰 방향만 냅다 지르고 구체적인 실현까지 책임지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혁신하려 들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것은 아닌가.
-이상과 현실은 다르고 상상과 실재가 다르고 구상과 구현이 다르고 글과 말은 다르고 대본과 연극이 다르다. 때로는 간극이 너무 커서 두렵기조차하다. 지금이 바로 그 때. 시간도 부족하지만 투지를 발휘하기엔 당장 너무 지쳐있다. 그래도 힘내라. 날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연출. 끌어내기.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 진실성과 기술, 정서와 호흡, 리듬과 템포, 적극성과 창발성. 모든 배우들이 스스로 끌어낼 줄 알고 자동적으로 조화를 이룬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옳은 지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배우들을 탓하지 말고 부족한 지도력을 반성하라.
-연기창조작업에서 반대할 것. 평범한 해석과 표현. 진부한 해석과 표현. 모호한 해석과 표현. 소극적인 해석과 표현. 과잉된 해석과 표현. 내용을 떠난 형식. 형식을 갖추지 못한 내용. 기술 없는 진정성. 진정성 없는 기술. 기계적이고 무의미한 반복연습. 늘어지고 지루한 연습.
-대본은 열쇠이자 구속이다. 대본은 핵심을 파악하는 열쇠로만 사용해야 한다. 비밀은 거리두기에 있다. 거리두기에 실패할 경우 구속되고 만다.
-거의 항상 그렇듯 좀 더 밀어부쳐야 한다. 대본을 쓰거나 장면을 만들 때, 이렇게 하면 되겠다 싶을 때 거기서 멈추면 안된다. 그 때, 대개는 골조에 살을 얼기설기 입힌 것에 불과하다. 조금만 찬찬히 또 냉정하게 검토해보면-가장 좋은 방법은 전후장면들까지 이어서 실연해보는 것이다- 대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관객과 배우의 정서가 무르익기도 전에 서둘러 끝내고 있다는 것을. 강풀의 모범 헬로우 고스트의 모범을 기억하라.
-동네극장의 또다른 의미와 역할. 정당과 전선, 생활과 정치가 만날 수 있는 곳. 그것이 상층이나 중앙 혹은 큰 규모의 지역이 아닌 소규모의 지역에서. 각자 정당은 다르지만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만나고 교류하고 교감할 수 있는 공간. 그들뿐만 아니라 중도층까지도 쉽게 인입할 수 있는 품이 넓은 곳. 광장이 없는 대한민국의 도시마을에서 광장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곳. 극장.
-소위 몰입이란 양날의 칼이다. 몰입의 기술은 긴장을 제거하고 진실성을 강화할 수 있다. 반면 몰입의 기술은 관객을 소외시키고 폐쇄적으로 만들 수 있다.
-피해야 할 작업을 하고 있다. 시간에 쫓기며 작업하기. 내 신념과 타협하며 작업하기. 스트레스와 피로 속에서 작업하기. 기존의 것을 변형 재탕 편집하기.
-짧은 작업기간이라고 배우의 발전을 무시할 수는 없다. 동시에 A부터 Z까지 염두에 둘 수도 없다. 아무리 아쉬워도 배우의 현재 수준을 기초로 하고 또한 반드시 발전시켜야 할 부분을 찍어내고 이에 집중하라. 물론 배우는 전체 연기에서 놓아도 되는 부분은 하나도 없겠지만 연출가는 성과를 내야하는 곳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짚어주어야 한다.
-000이 남들과 다른 점. 기교가 진정성을 위해 숨어서 역할한다. 다른 이들은 기교 자체를 과시한다.
-내 작품의 이야기 구조는 이렇다. 먼저 실제로 있었거나 있을법한 형상, 그것도 전형적인 형상을 다룬다. 마지막은 실제로 있거나 있을 수도 있지만 보편적이지 않은 형상 그러니까 있었으면 하는 형상을 다룬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에게는 현실성이 떨어지고 이상주의적이며 교과서적이고 심지어 유치해 보일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이고 싶지 않다. 작품을 냉정한 현실주의자의 비위에 맞춰 쓰고 싶지는 않다. 작품에 대한 나의 관점이 그렇다. 현실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본과 부가 바뀌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혹할만한 제안이라도. 그러니 고사해야 한다. 문제는 현재 내가 본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과학적, 인문학적 연극. 연극적인 것은 홀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과학에 기초해야한다. 철학과 인문학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 연극은 오락이자 동시에 탐구이며 토론이기 때문이다.
-000를 작가로 만든 것들. 불운했던 어린 시절, 독학, 생물학의 전공, 건강의 악화, 실직, 배타적 열중, 문학과 역사의 탐독, 수없는 수정과 퇴고작업, 경험의 반영, 과학의 접목, 예술지상주의의 거부, 사회정치적 실천. 그리고 당대의 역사.
-슬픔을 연기하는 법. 슬픔에 머물러 있으려 하면 저급하고 인물을 왜곡한다. 그건 슬픔이란 감정에 탐닉하고 있는 자의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고 슬프진 않다. 슬픈 상황에서 슬픔을 극복하려고, 탈출하려고, 전환하려고 투쟁해야 한다. 그 투쟁이 그의 슬픔을 감동적으로 만들어준다.
-작업에서 각자의 몫은 이렇다. 관객과 연행자들이 공감하고 소통할수 있는 "화제"를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다. 작가가 제시한 화제를 놓고 관객과 배우가 잘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연출의 몫이다. 관객과 만난 그 자리에서 직접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이 배우의 몫이다.
-창조작업에서 극적환경은 너무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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