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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배우와 연기 11 - 말은 가슴에 닿아야 한다

배우와 연기 11   말은 가슴에 닿아야 한다


-류 성-


연극은 생활을 기초로 하지만 생활 그 자체는 아니다. 생활 그 자체를 그대로 떼놓아 무대에 올려놓는다면 소란스럽거나 지루할 뿐이다. 생활의 형상은 예술적 가공을 거친 후라야 비로소 예술적 형상으로 탄생하게 된다. 무대 화술에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된다. 무대화술은 일상의 말에 기초하지만 또한 그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무대화술은 무엇보다 일상의 말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무대에 서게 되면 몸과 마음이 긴장하게 된다. 배우마다 긴장의 정도와 양태는 다양한데, 얼어붙어서 입도 뻥끗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꾸 말을 더듬는 사람도 있고, 또는 몹시 흥분하여 과잉되는 사람도 있다. A라는 배우는 무대에만 서면 자기도 모르게 말이 느려지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또한 긴장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말하기가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무대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수한 법칙 때문이다. 꾸미지 말고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라고 해서 정말로 일상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만약 배우가 일상의 말을 그대로 무대에서 사용한다면, 관객은 오히려 그 말을 부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배우의 화술은 무대에서 자연스럽고 실감나게 느껴지는 말이다. 


배우가 발음과 발성, 공명기관의 활용, 성조의 사용, 호흡의 운용, 장음과 단음의 구분, 찍어 읽기, 끊어 읽기, 흘려 치기, 리듬과 템포 등 화술의 기술을 연구하고 훈련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말을 멋드러지게 꾸며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대라는 특수한 공간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고 실감나게 말을 구사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목적에서 하는 것이다.

무대 화술은 자연스럽고 실감나면서도 또한 비범하고 인상 깊은 것이어야 한다.  배우의 말은 깊이가 있고, 정서가 흐르며, 강렬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에게 강한 정서적 울림을 줄 수 있다. 똑같은 대사라도 화술이 좋은 배우가 말하면 관객의 귀가 아니라 가슴에 닿는다. 반면에 어떤 배우들의 말은 귀에서 쟁쟁거리기만 할 뿐이다. 그런 화술은 좋은 연극조차 진부하게 만들고 관객은 지루해진다.

그렇다고 일부러 말의 자연스러움을 왜곡하며 꾸며대는 것은 정말 곤란하다. 그것은 생활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연극을 망친다. 배우 A는 매번 캐릭터를 만든답시고 이상한 억양을 만들고 목소리를 변조시키는 따위에 몰두했다. 여러 차례 지적했으나 좋아지는 건 그 때일 뿐, 잘 고쳐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꾸며내는 것을 연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의 부자연스러운 말투만 들었을 뿐, 정작 그의 말은 듣지 못했고, 그래서 종종 드라마는 사라져 버렸다. 또한 그가 그토록 보여주고 싶어했던 캐릭터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대에서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상깊은 말을 구사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자연스러우면 식상해지기 쉽고, 반대로 인상 깊으려는 노력은 자연스러움을 해치기 쉽다. 그러나 두 요소의 통일이 이루어지면 실로 대단한 효과를 발휘한다. 자연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렬한 인상을 주게 되고, 비범하기 때문에 더 실감이 나게 된다. 예술적인 화술이란 바로 이런 화술이다.

몇몇 특수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연극은 말을 기본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며 그만큼 배우의 화술에 의지하는 부분이 크다. 배우의 말을 통해 드라마가 전개되고, 정보가 전달되며, 감정정서가 표현되고, 장면의 분위기와 연극의 스타일이 창조된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연극에서는 배우의 화술이 연극을 망치거나 살려놓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끝>


2012년 4월 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