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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6 대중극에 대한 입장과 노력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6


대중극에 대한 입장과 노력



- 류 성 -



카프계열의 진보적인 연극인들이 해외문학파가 주도하던 소위 신극에 대한 태도는 비판적이었습니다. 해외문학파가 주도하던 소위 <신극>이 사실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데서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들이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서구 번역극에 몰두하는 점, 소시민적이고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 등에 대해 비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신파극을 비롯한 대중극에 대해서는 그 상업주의적 속성에 대해 지적했으나 비판의 강도는 해외문학파가 주도하던 신극에 비해 훨씬 약했으며 오히려 유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카프 소속의 연극인들이 여러 대중극 단체들에서 작가, 연출가 등으로 활약했으며, 대중극의 특징인 막간극에 등장하는 노래와 만담 등을 이동식 소형극장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또, 카프해산 이후 많은 카프 연극인들이 대중극 연극인들과 함께 중간극을 표방한 단체를 만들기도 하고, 대중극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대중극에 대한 태도가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중극에 좋은 영향을 주어 진보적인 연극으로 변화시켜 내려고 노력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극단 아랑의 예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극단 아랑은 대중극의 본산지였던 동양극장에서 탈퇴한 황철, 박영신, 김두찬 등에 의해 만들어진 극단으로 초창기에는 흥행성이 짙은 상업극만을 주로 상연하다가 1942년에 이르러 비로소 진보적 연극인들의 영향을 받아 <화전지대> 등의 네 개의 진보적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비록 일제 경찰들에 의해 공연이 상연금지 당했지만 극단 아랑은 진보적 연극인들과의 연계를 끊지 않고 지속적으로 많은 작품과 연출을 맡겼다고 합니다.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을 변화시켜내려는 노력은 일제의 폭압으로 인해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합니다만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고 보여집니다.

앞서 살펴본 극단 아랑의 경우를 비롯해 고협, 태양, 중앙무대 등의 극단들도 진보적 연극인들의 영향을 받아 상업극적 속성에서 벗어나 진보성이 있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많은 대중극 연극인들이 진보적 연극운동에 뛰어든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노력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위와 같이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 연극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진보적 연극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그들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작가 송 영, 이기영 등은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극작가였으며, 라 웅, 안영일 등도 뛰어난 연출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며, 김선영, 심 영 등은 동양극장에서 올린 공연의 주인공 역할을 도맡을 정도로 인기배우였고, 최승일은 유명한 연극 평론가였습니다.

당시 대중극 연극인들은 스스로가 ‘프로’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는데 만약 진보적 연극인들이 실력이 그들에 못 미치는 아마추어적 수준이었다면 이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 수도 없었고 별다른 영향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카프가 해산된 이후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 단체로 들어가거나, 또는 대중극 연극인들과 함께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한 것을 두고 이들이 탄압에 못 이겨 '변절했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1940년대에 대중극 단체들은 친일적 내용의 작품으로 연협경연에 참가했으며 이 작품들 중에는 카프계열의 연극인들이 쓴 작품들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연극협회에 배속되지 않을 경우 공연을 할 자격을 주지 않았고, 연협경연에 참가시킨 작품들에 대해 친일내용으로 고칠 것을 강요해 이에 불응할 경우 불온사상을 담고 있다며 처벌했기에 당시 연극인들은 연협경연에 울며 겨자먹기로 참가했다가 감시가 소홀한 지방에 나가서는 본래의 작품대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때 이들 모두에게 '변절했다'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단순하고 섣부른 평가일 수 있으며, 하기에 필자는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에 좋은 영향을 주어 진보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자는 당시 일부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 단체에 들어간 것을 가장 옳은 길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카프 해산 이후 대중극 단체에 들어가 영향을 주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기층 연극서클에 들어간 활동한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동만주의 조선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여기에서는 가치평가를 떠나서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에 대해 유연한 입장과 태도를 가졌고 나아가서 그들과의 사업에 노력하게 된 이유에 국한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당시 몇몇 조직된 진보적 연극인들만의 힘만으로는 진보적 연극운동의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하며 그것은 보다 많은 연극인들이 진보적 연극의 창작과 공연에 참가할 때 비로소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중극이 비록 상업주의적 속성이 가지기는 했으나 그에 속한 연극인들의 직업이자 생계수단이었을 뿐, 그들의 작품과 공연을 진보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내며 함께 가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데서 이들에 대해 보다 유연한 입장과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기에는 당시 대중극이 진보적인 연극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가능성이란 당시 대중극이 상업주의적 속성으로 인해 남녀 간의 애정문제, 가정비극 등을 주로 다루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당시 시대 및 사회 현실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대 최고 인기작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작품의 경우 주인공 홍도의 운명을 통해 당시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일정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리랑 고개>라는 작품의 경우 남자주인공 길룡이와 그 부친이 일본인에게 빚 대신 농토를 빼앗기고 정든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향하는 이야기가 그 줄거리인데 비록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결합시키고 비탄과 체념의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지만 우리 민중들이 당면해 있는 생생한 현실을 소재로 삼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라의 달>같은 작품은 내용이 불온하다하여 전단원이 구속되는 사태를 빚기도 했고, <개화전야>라는 작품의 경우도 조선을 억압하는 일제에 대한 저항과 친일파에 대한 단죄를 빗대어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당대 시대와 사회 현실을 일정하게라도 반영한 것은 비록 일제의 탄압과 극장의 상업주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의식을 담은 작품을 올리려고 했던 대중극 연극인들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며, 또한 당대 민중들의 삶과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서는 민중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어 결국 흥행에 성공할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당시 대중극이 가지는 이러한 특성은 좋은 영향을 받으면 진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대중극이 상업주의적 속성은 있었지만 당대 사회현실과 조선민중의 삶을 일정하게라도 반영하는데 비해 사실주의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단지 연기스타일과 무대장치를 비롯한 기술적인데 치중하였을 뿐 번역극에 몰두하여 당대 사회현실과 조선민중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신극에 대해서는 그리 유연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1930년대 후반부터 신극 연극인들이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어용화되는 길을 걸었던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가지고 일련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또한 당시 대중극이 가진 뛰어난 실력도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대중극 연극인들은 상업주의적 속성과 일본에서 유입된 신파극의 잔재 등으로 비판받기 일쑤였지만 극작술, 연출, 연기술, 미술 등 모든 방면에서 기술적으로 매우 뛰어난 실력을 가진 ‘프로페셔널’ 연극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극장을 온통 웃음바다로도 만들고 눈물바다로도 만들었지요.


당시 카프소속 단체였던 신건설은 신인배우들의 연기지도를 위해 당대 최고의 대중극 여자배우였던 석금성을 초빙하여 연기지도를 맡기기도 했고, 신건설이 공연을 올릴 때 배우진영이 모자라자 대중극 단체인 신무대의 배우들이 지원하여 공연을 올렸다는 기록 등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이 쌓아온 뛰어난 실력을 인정하고 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동활동에 사용되는 각본은 즉흥적으로 현실적 사건을 취급해도 좋을 것이며 연극에만 한정하지 말고 만담, 노래 등의 연예에도 손을 댈 것이다-신고송”라고 언급하고 있는 등 당시 진보적 연극의 대중화 방안을 적극 모색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대중극 양식으로부터 많은 힌트를 얻고 그 유용성에 각별히 주목하여 작품에 활용한 것도 주목해볼만 합니다.  



<일제강점기 진보적 연극운동의 경험-7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