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7차례에 걸쳐 연재한 것을 묶은 종합본입니다.
****목차****
1.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2. 대중속으로
3. 기층의 강화
4. 연구와 교육
5. 대중극에 대한 입장과 노력
6. 당시 진보연극운동의 극복과제
필자는 일제강점기의 연극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이긴 하지만 신파극, 신극, 프로극 등 당시의 연극지형이 등 뮤지컬, 순수 혹은 실험 연극, 진보적 연극 등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연극 지형과 매우 닮아있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비록 반세기가 넘은 당시의 경험이 어쩌면 오늘의 문예운동을 바라보는 의미 있는 눈을 제공해 줄 수도 있으며 나아가 문예운동의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당시의 연극지형과 오늘날의 연극지형이 닮았다고 해서 당시의 고민과 활동이 오늘날에 진보적인 문예운동을 만들어가는데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글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지만 당시의 고민과 활동에서 한계도 분명히 존재하는데다가 무엇보다 각기 시대에 걸맞는 문예운동의 조건이 있고 철학과 방법론이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이 글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오늘을 바라보는 안목을 넓히고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당시의 경험을 둘러보는 것뿐입니다. 이에 일제강점기의 연극을 살펴보고자 하며 그 중 소위 프로극으로 불리는 진보적 연극운동의 경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진보적 연극운동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느냐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상업극으로 비난받는 신파극이지만 그 중에도 일정한 진보성을 담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또한 만주와 동경 등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우리민족의 진보적 연극운동은 펼쳐졌습니다.
이들 모두를 고찰한다면 기준이 애매해지고 다루는 분야가 매우 방대해져 글이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기에 필자는 이번 글에서 진보적 연극운동을 국내에서 벌어진 연극운동으로 한정하고, 또 카프를 중심으로 놓고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는 첫째, 자료의 부족함과 필자의 얕은 지식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당시 국내의 진보적 연극 ‘활동’이 카프의 결성으로 비로소 실질적인 ‘운동’의 단계로 올라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프로극(프롤레타리아연극의 줄임말)으로 불리는 일련의 진보적 연극들이 대부분 카프와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주 주관적인 의견이 많이 개입된 글이 될 것 같다는 점도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1.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카프의 결성과 해산
카프(KAPF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의 약칭으로 1925년 8월에 결성된 진보적 문예운동단체로서 "우리는 단결로서 여명기에 있는 무산계급 문화의 수립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내걸었는데 여기에는 1922년 결성된 <염군사>라는 단체와 1923년 결성된 <파스큘라>라는 단체가 통합하고 여기에 진보적 문학예술운동을 지향하는 개별 예술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연합전선체적 성격의 조직인 카프가 결성되면서 문학, 영화, 연극, 음악, 미술 분야 등에서 진보적 문예운동이 전에 없이 활발히 전개됩니다. 카프 이전의 진보적 문예운동은 개별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분산적으로 진행되었기에 그 힘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카프의 결성과 함께 진보적 문예운동은 조직적이고, 목적의식적이며, 대중적으로 전개됨으로써 커다란 힘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강령의 첫머리에 있는 ‘단결’이라는 글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목표를 실현하는 방도를 다른 무엇도 아닌 “단결”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카프를 결성한 진보적 예술인들이 “단결”이란 과제를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카프를 결성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들도 있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프의 결성에서 아쉬운 것은 식민지적 모순의 해결, 즉 조국의 독립을 자기 목표로 설정하고 광범위한 진보적 예술인들을 망라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갈라져 서로 배척하던 당시 국내 진보운동의 한계와도 연관되는 것이겠지요.
만약 카프가 노농대중의 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진보적인 예술가 모두가 망라되는 조직으로 건설되었다면, 일제강점기 진보적 문예운동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고 상상해봅니다.
결성 이후 조직적으로 진보적 문예운동을 펼쳤던 카프는 1935년 말 해산되고 마는데 카프가 해산된 주요인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습니다. 애초부터 검열과 공연불허 등으로 탄압했던 일제는 1930년대에 이르러 카프의 진보적 문예운동이 활발해지고 반일성격이 뚜렷해져가자 2차에 걸친 대규모 검거사건을 일으키는 등 실로 폭압적인 탄압을 자행합니다.
일제는 1931년에 제작된 <지하촌>이라는 영화를 불온영화로 규정하고 시나리오와 연출을 담당한 강호가 카프 소속이라는 구실로 카프작가들을 모조리 검거하는데 이것이 1차 검거입니다. 이후 1934년 카프 소속의 연극단체인 신건설(新建設)에서 제작한 ‘불온정치삐라’를 가진 학생이 전라북도 금산에서 검거되었다며 무려 80여명의 카프소속 예술인들을 검거하여 투옥하는데 이것이 2차 검거입니다.
검거된 예술인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으며 전향을 강요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위 ‘신건설 사건’이 일제경찰에 의해 만들어진 자작극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진보운동을 말살시키려는 제국주의의 교활함과 야만적 폭력성에 섬뜩함마저 느끼게 됩니다.
카프가 해산된 것은 외부적 요인인 일제의 폭압도 있었지만 카프 내부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2차 검거사건을 계기로 카프 내에서는 카프를 해산하자는 ‘해소파’와 이에 반대하는 ‘비해소파’로 분열되어 양자간에 심각한 대립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1935년 5월 10년에 걸쳐 진보적인 문예운동을 해왔던 카프는 해산됩니다.
‘해소파’가 옳았느냐 ‘비해소파’가 옳았느냐에 대해서 필자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카프가 내부에서 분열되어버림으로써 일제의 탄압을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카프의 내부분열은 1, 2차검거 이후에 불거진 것이 아니라 결성 이후부터 계속해서 진행되어왔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소위 '방향전환'을 계기로 시작된 카프 내부의 이론투쟁은 소속 예술인들끼리의 과도한 논쟁과 비난으로 비화되는 경향이 지속됩니다. 물론 이렇게 전개된 이론투쟁은 카프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논쟁은 매우 공격적이었으며 주도권 싸움의 모습까지 드러내며 분열의 양상을 띄었다는데 있습니다. 게다가 논쟁이 실천을 통해 대중적으로 검증되는 과정이 아니라 '지식인들끼리의 이론싸움'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2차에 걸친 일제의 대량검거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집행유예로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카프가 맥없이 해소되고 말았던 것은 카프 내부의 분열도 주요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만약 카프 내부의 논의가 실천을 중심에 두고 단결을 촉진하는 방향에서 진행되었다면 카프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논의와 논쟁이 내부의 분열로 연결되고 종국에는 카프가 무너지는 한 원인이 된 것을 보면 오늘날에도 생각되는 바가 많습니다. 이론투쟁과 비판은 진보운동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할때도 있지만 그 중심을 '단결'에 놓고 진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가 사무치게 다가옵니다.
2. 대중 속으로-이동식 소형극장
카프는 1927년 몇 가지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고 문예운동의 대중화를 핵심주제로 내세웁니다.
당시의 문예운동 대중화란 ‘노동자/농민 대중의 생활감정에 기초한 올바른 예술을 확립하고, 예술을 통하여 노농대중이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자기의 현재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며, 종국에는 그들이 자신의 예술을 창작하고 향수하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당시 카프가 내세운 문예운동의 대중화를 실현하는데 시와 소설 같은 문학보다 영화와 연극이 매우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는데, 여기에는 극예술이 가지는 집단성, 현장성, 직접성 등이 강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며 또한 당시 대중들의 문맹률이 높았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카프의 연출가이며 배우였던 김승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극은 공장과 농촌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한다. 노동자 농민과의 튼튼한 연계가 없이 우리의 연극운동은 자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우리 연극 앞에 가로놓인 온갖 난관도 오직 노동자 농민과의 튼튼한 연계를 가짐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1932년 7월 조선중앙일보-
나웅, 신고송 등 카프계열 연극인들은 '대중적 조직의 기초 위에서 활동을 전개해야 연극을 노동자, 농민에게 좀 더 접근시킬 수 있다'고 제기하면서 종래의 대극장 공연을 지양하고 기층 민중들에 밀착하기 위하여 기동성 있는 이동적 활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김승일, 추민, 탁진 등의 연극인들이 1931년 11월 최초의 이동극단인 이동식 <소형극장>을 창단하고 개성에서 창립공연을 올린 후 원산, 함흥 등을 순회하며 공연을 합니다.
그리고 이에 공감한 지방의 많은 진보적 연극단체들은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을 자신의 활동방법으로 채택하여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메카폰>, <근대극장>, <곡예사>, <신예술좌>, <문화좌>, <명일극장>, <동북극장> 등이 이동식 소형극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활동한 극단들입니다.
그 중 명일극장의 사례를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평양에서 창단된 <명일극장>은 기존에 있었던 <마치극장>이 탄압으로 인해 공연조차 올리지 못하고 해산된 경험과 이동식 <소형극장>의 모범적 사례를 바탕으로 이동식 극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창단한 후 황해도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순회공연지를 탄광노동자 등 빈곤이 극심한 지역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이 일어나고 있는 곳을 택했습니다. 그 중 한 곳인 봉산탄광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에 경찰은 공연내용이 불온하다며 공연을 그 자리에서 중지시키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관람하던 노동자들이 격분하여 공연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고 무대에 뛰어올라가 경찰로부터 공연자들을 보호했습니다. 결국 경찰은 물러났고 공연은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평양 중심의 노동자들이 <극단지지 후원회>를 결성해 극단의 활동에 적극적인 도움과 노력을 주었다고 합니다.
<명일극장>의 사례뿐만 아니라 여러 이동식 소형극장들이 공연을 할 때 대중들은 스스로 관객들을 동원하고, 무대설치와 의상, 대소도구 등을 지원하는 등 대중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동식 소형극장의 활동이 노동자 농민 대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으며, 대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때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은 노동자/농민을 직접 찾아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므로 노농대중의 취향과 정서에 맞고 현실적 이해와 직접 관계있는 소재를 취급하였는데 풍자희극과 같은 양식이 많이 선호되었으며 기동성을 갖추기 위해 단막극을 주로 공연했습니다.
대표적인 레파토리의 하나였던 송영의 단막극 <호신술>은 어떠한 호신술로도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막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아 풍자적으로 그려낸 희극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상룡의 가족은 파업에 일어난 노동자들이 쳐들어올까봐 유명한 체육인을 초청해 자신뿐만 아니라 부친, 처, 아들딸들을 모조리 데려다 유도를 가르치는데 허리가 꼬부랑인 부친은 울며 겨자먹기로 흉내를 내다가 뒹굴고, 체육선생이 외아들을 바닥에 메치는 바람에 아들은 기절하여 난장판이 됩니다. 이런 와중에 노동자들이 사나운 기세로 몰려오자 김상룡의 가족들은 허둥대며 서로 자신만의 살 구실을 찾아 몸부림칩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단체들의 공연을 방해하기 위해 일제는 검열과 공연불허라는 탄압을 마구잡이로 구사하여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은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는 효과적인 방편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많은 극단들이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대중들의 지지와 지원을 획득하여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연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성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서울에 위치한 몇 개 극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연극운동에서 탈피하여 해주, 개성, 함흥, 대구, 마산, 통영 등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점은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이 진보적 연극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한계들을 극복하는데 일련의 성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동식 소형극장활동에 참가했던 연극인 추적양은 "책에서 읽은 노농대중들과 실제로 만난 노농대중들은 판이하게 달랐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즉 상업주의적 경향, 지식인적 취향, 비민중성, 이론적 편향과 실천적 성과의 부진 등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일련의 성과를 가져 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대중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문예운동의 대중화와 함께 자기 혁신도 일구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요.
3. 기층의 강화-소인극(素人劇) 운동
소인극은 비직업적, 비전문적인 연극을 말하는 것으로, 대중이 직접 창작과 향유의 주체가 되어 소속집단의 행사나 목적에 따라 공연하는 형태의 극으로써 지금으로 보자면 노동조합 연극패, 학생 연극 서클, 청년회 연극 동아리, 직장인 연극반 등의 연극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소인극은 연극예술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는 요구에 토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화합과 단결, 교양과 선전, 예술활동을 통한 정서적 발전 등이 목적이 되며, 기금마련 등을 위해 일회적으로 공연되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나 현장의 문제를 주제로 창작하는 경우 여러 측면에서 매우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카프의 연극인이었던 김승일은 "공장과 농촌에서 우리 연극 후비군이 다수 출현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장과 농촌에 우리 연극의 저수지로서의 연극서클을 많이 조직하여야 하며 이를 옳게 지도해야 한다.-1932년 7월 조선중앙일보-"라고 했는데 여기서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소인극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점기 진보적 연극인들은 문예운동의 대중화를 실현하는데서 노동자, 농민, 학생내에 연극서클을 강화해 소인극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이 소인극을 활성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것은 전문가들의 창작연행활동에 국한해서는 운동을 발전시킬 수 없으며 반드시 기층을 강화함으로써만 문예운동의 대중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관점이 바탕이 된 것입니다.
소인극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노동조합, 농민조합, 야학, 청년회 등에 연극 서클을 조직하거나 조직되도록 지원해주는 활동을 했습니다. 일례로 1932년 함흥에서 창단된 동북극장은 함흥, 흥남 노동자들에게 연극서클을 만들어주고 육성하는데에만 매달릴 정도로 여기에 힘을 쏟았는데, 그 결과 이 지역은 다른 어떤 곳보다 많은 노동자 연극서클이 활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연극서클들이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진보적 희곡을 창작하여 그 대본을 공급해주고, 공연이 있을때는 연출가, 무대장치가들을 파견하여 기술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것입니다. 보성전문 연극부의 공연사례를 보면 카프소속 연출가인 라웅, 김승일 등이 파견되어 연출, 무대장치, 효과 등 무대기술적인 제반사항들을 지도해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진보적인 연극이론을 교양교육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는 연극서클들에 진보적 연극인들이 직접 방문하는 방식, 연극단체들이 연극잡지와 신문등을 펴내어 서클들에 배포하는 방식, 연구생 모집 및 교육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소인극회를 개최하거나 교환공연 등을 조직하여 진행하는 등의 노력도 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소인극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특히 학생극에서 많은 성과를 낳았습니다. 1929년 광주학생의거로 인해 학생들의 진보적 의식과 활동이 분출했고 이에 따라서 진보적 연극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도 높아졌던 상황이었습니다.
<보성전문학교>, <세브란스 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이화여전>, <근화>, <여자이학강습소> 등 많은 학교에서 카프 연극인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를 맺으며 진보적 연극서클들이 새로 조직되거나 진보적인 경향을 띄어갔습니다. 소인극 운동은 중학교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었는데 그 중 <배재중학 연극부>의 활약은 대단하여 1935년에는 지방순회공연까지 계획할 정도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보성전문학교 연극부의 경우 카프 연극부의 연구생 수련 등에 참가한 학생들이 창단합니다. 카프 연극부는 연극부에 연극이론의 연구, 배우술의 습득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보전연극부>는 1백명에 달하는 부원들을 가질 정도로 성장을 합니다. 보전연극부가 1회 공연 준비할 때는 연출가 라웅이 파견되어 지원을 했고, 2회 공연을 할때는 김승일이 파견되어 지원을 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가장 실력있는 연극인들이기도 했습니다. 3회 공연은 1934년 11월에 있었는데 이 때는 소위 <신건설 사건>으로 카프 연극인들이 모두 투옥된 상황이라 학생들에 대한 아무런 지원이 없었음에도 학생들은 1, 2차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공연을 치뤄냈다고 합니다.
당시 학생 연극서클들은 소위 신극을 한다는 해외문학파들이 주도한 <극예술연구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해외문학파들의 영향력이 아주 강한 연극서클들에는 번역극 중에서도 진보성이 있는 레퍼토리를 선정하고, 무대와 연출, 연기 등에서 사실주의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소인극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카프가 해산된 이후에도 개별적으로 지속되었고, 이후 전문단체들이 진보적인 공연을 올려 대중들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도 노동자, 농민, 학생들속에 조직된 연극서클들은 소인극을 통해 진보적 활동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4. 연구와 교육-연극지, 연구생
카프의 직속극단인 신건설의 창립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연극운동이 확대강화와 공연의 쟁취. 둘째, 연극인들이 사상예술적 훈련. 셋째, 새로운 연구생들의 양성.
둘째와 셋째 목표로 유추해 볼때 당시 진보적 연극단체와 연극인들은 사상예술적인 훈련과 후비군을 양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는 연극지를 발간하고 배포하는 것이고, 둘째는 극단에서 연구생들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신건설은 <극장>이라는 연극지를 발간하여 예술훈련에 도움이 될 각종 자료, 연극교육방법 등에 대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카프 연극부는 <연극운동>을 간행하여 논문을 싣고, 연극 소식 등을 전했습니다. 소형극장은 <전선>을 발간하여 이동극단활동의 경험을 이론화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소인극 활동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들도 실었습니다.
당시 연극지들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담았다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국내외의 진보적인 연극이론들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예술이론을 보급하고 연구했습니다.
2. 각 극단들의 활동상황과 공연 체험 등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3. 각종 논문들이 발표되었습니다. <조선 프로레타리아 연극운동의 임무와 방침>, <연극운동의 새로운 전개> 등과 같은 것이 그 예입니다.
4. 기층 연극 서클들의 활동과 지도에 필요한 자료들이 실렸습니다. <소인극 무대장치법>, <소인극 분장법>, <거짓말 도매상 연출법>등이 그 예로 볼 수 있겠습니다.
발간된 연극잡지들은 자기 극단 단원들, 다른 연극 단체들, 연구생, 기층 연극 서클 들에 배포되었는데 이는 당시에 매우 유용한 교육 자료로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발간한 연극잡지들은 탄압에 의해 몇 번 내지 못했고 개성 <대중극장>의 경우처럼 출간도 못해보고 금지되기 일쑤였습니다.
연구생 모집 및 교육 사업은 대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례로 <중앙불교전문학교>의 <북악회>라는 연극서클은 <신건설>에서 진행한 연구생 과정을 거친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극장>등의 잡지를 보면 1932년에서 33년에 걸쳐 모집된 연구생들에게 서울 시내 연건동 회관에서 강습회를 시켰으며 연구생 과정을 거친 학생들 중 일부를 단원으로 선발하고, 대개는 학교, 공장,나 농촌의 연극 서클에 들어가 연극지도를 담당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단순히 극단 단원이나 배우를 수급하기 위한 차원으로 연구생을 모집하고 교육 한 것이 아니라, 기층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 주체를 마련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자료의 부족함으로 인해 연구생 과정이 어떠한 목적과 커리큘럼으로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문예지의 발간 및 배포, 연구생 모집 및 교육 사업 등은 이동식 소형극장활동, 소인극의 활성화와 함께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이 문예운동을 대중화하기 위해 전개했던 다양한 노력의 한축을 이루는 사업이었습니다.
5. 대중극에 대한 입장과 노력
카프계열의 진보적인 연극인들이 해외문학파가 주도하던 소위 신극에 대한 태도는 비판적이었습니다. 해외문학파가 주도하던 소위 <신극>이 사실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데서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들이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서구 번역극에 몰두하는 점, 소시민적이고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 등에 대해 비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신파극을 비롯한 대중극에 대해서는 그 상업주의적 속성에 대해 지적했으나 비판의 강도는 해외문학파가 주도하던 신극에 비해 훨씬 약했으며 오히려 유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카프 소속의 연극인들이 여러 대중극 단체들에서 작가, 연출가 등으로 활약했으며, 대중극의 특징인 막간극에 등장하는 노래와 만담 등을 이동식 소형극장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또, 카프해산 이후 많은 카프 연극인들이 대중극 연극인들과 함께 중간극을 표방한 단체를 만들기도 하고, 대중극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대중극에 대한 태도가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중극에 좋은 영향을 주어 진보적인 연극으로 변화시켜 내려고 노력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극단 아랑의 예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극단 아랑은 대중극의 본산지였던 동양극장에서 탈퇴한 황철, 박영신, 김두찬 등에 의해 만들어진 극단으로 초창기에는 흥행성이 짙은 상업극만을 주로 상연하다가 1942년에 이르러 비로소 진보적 연극인들의 영향을 받아 <화전지대> 등의 네 개의 진보적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비록 일제 경찰들에 의해 공연이 상연금지 당했지만 극단 아랑은 진보적 연극인들과의 연계를 끊지 않고 지속적으로 많은 작품과 연출을 맡겼다고 합니다.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을 변화시켜내려는 노력은 일제의 폭압으로 인해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합니다만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고 보여집니다.
앞서 살펴본 극단 아랑의 경우를 비롯해 고협, 태양, 중앙무대 등의 극단들도 진보적 연극인들의 영향을 받아 상업극적 속성에서 벗어나 진보성이 있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많은 대중극 연극인들이 진보적 연극운동에 뛰어든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노력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위와 같이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 연극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진보적 연극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그들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작가 송 영, 이기영 등은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극작가였으며, 라 웅, 안영일 등도 뛰어난 연출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며, 김선영, 심 영 등은 동양극장에서 올린 공연의 주인공 역할을 도맡을 정도로 인기배우였고, 최승일은 유명한 연극 평론가였습니다.
당시 대중극 연극인들은 스스로가 ‘프로’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는데 만약 진보적 연극인들이 실력이 그들에 못 미치는 아마추어적 수준이었다면 이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 수도 없었고 별다른 영향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카프가 해산된 이후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 단체로 들어가거나, 또는 대중극 연극인들과 함께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한 것을 두고 이들이 탄압에 못 이겨 '변절했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1940년대에 대중극 단체들은 친일적 내용의 작품으로 연협경연에 참가했으며 이 작품들 중에는 카프계열의 연극인들이 쓴 작품들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연극협회에 배속되지 않을 경우 공연을 할 자격을 주지 않았고, 연협경연에 참가시킨 작품들에 대해 친일내용으로 고칠 것을 강요해 이에 불응할 경우 불온사상을 담고 있다며 처벌했기에 당시 연극인들은 연협경연에 울며 겨자먹기로 참가했다가 감시가 소홀한 지방에 나가서는 본래의 작품대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때 이들 모두에게 '변절했다'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단순하고 섣부른 평가일 수 있으며, 하기에 필자는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에 좋은 영향을 주어 진보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자는 당시 일부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 단체에 들어간 것을 가장 옳은 길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카프 해산 이후 대중극 단체에 들어가 영향을 주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기층 연극서클에 들어간 활동한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동만주의 조선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여기에서는 가치평가를 떠나서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에 대해 유연한 입장과 태도를 가졌고 나아가서 그들과의 사업에 노력하게 된 이유에 국한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당시 몇몇 조직된 진보적 연극인들만의 힘만으로는 진보적 연극운동의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하며 그것은 보다 많은 연극인들이 진보적 연극의 창작과 공연에 참가할 때 비로소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중극이 비록 상업주의적 속성이 가지기는 했으나 그에 속한 연극인들의 직업이자 생계수단이었을 뿐, 그들의 작품과 공연을 진보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내며 함께 가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데서 이들에 대해 보다 유연한 입장과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기에는 당시 대중극이 진보적인 연극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가능성이란 당시 대중극이 상업주의적 속성으로 인해 남녀 간의 애정문제, 가정비극 등을 주로 다루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당시 시대 및 사회 현실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대 최고 인기작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작품의 경우 주인공 홍도의 운명을 통해 당시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일정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리랑 고개>라는 작품의 경우 남자주인공 길룡이와 그 부친이 일본인에게 빚 대신 농토를 빼앗기고 정든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향하는 이야기가 그 줄거리인데 비록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결합시키고 비탄과 체념의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지만 우리 민중들이 당면해 있는 생생한 현실을 소재로 삼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라의 달>같은 작품은 내용이 불온하다하여 전단원이 구속되는 사태를 빚기도 했고, <개화전야>라는 작품의 경우도 조선을 억압하는 일제에 대한 저항과 친일파에 대한 단죄를 빗대어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당대 시대와 사회 현실을 일정하게라도 반영한 것은 비록 일제의 탄압과 극장의 상업주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의식을 담은 작품을 올리려고 했던 대중극 연극인들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며, 또한 당대 민중들의 삶과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서는 민중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어 결국 흥행에 성공할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당시 대중극이 가지는 이러한 특성은 좋은 영향을 받으면 진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대중극이 상업주의적 속성은 있었지만 당대 사회현실과 조선민중의 삶을 일정하게라도 반영하는데 비해 사실주의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단지 연기스타일과 무대장치를 비롯한 기술적인데 치중하였을 뿐 번역극에 몰두하여 당대 사회현실과 조선민중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신극에 대해서는 그리 유연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1930년대 후반부터 신극 연극인들이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어용화되는 길을 걸었던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가지고 일련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또한 당시 대중극이 가진 뛰어난 실력도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대중극 연극인들은 상업주의적 속성과 일본에서 유입된 신파극의 잔재 등으로 비판받기 일쑤였지만 극작술, 연출, 연기술, 미술 등 모든 방면에서 기술적으로 매우 뛰어난 실력을 가진 ‘프로페셔널’ 연극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극장을 온통 웃음바다로도 만들고 눈물바다로도 만들었지요.
당시 카프소속 단체였던 신건설은 신인배우들의 연기지도를 위해 당대 최고의 대중극 여자배우였던 석금성을 초빙하여 연기지도를 맡기기도 했고, 신건설이 공연을 올릴 때 배우진영이 모자라자 대중극 단체인 신무대의 배우들이 지원하여 공연을 올렸다는 기록 등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이 대중극이 쌓아온 뛰어난 실력을 인정하고 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동활동에 사용되는 각본은 즉흥적으로 현실적 사건을 취급해도 좋을 것이며 연극에만 한정하지 말고 만담, 노래 등의 연예에도 손을 댈 것이다-신고송”라고 언급하고 있는 등 당시 진보적 연극의 대중화 방안을 적극 모색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대중극 양식으로부터 많은 힌트를 얻고 그 유용성에 각별히 주목하여 작품에 활용한 것도 주목해볼만 합니다.
6. 당시 진보연극운동의 극복과제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에서 진보적인 연극운동을 펼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공연의 허가를 받기가 어려웠고, 다행히 공연을 올렸더라도 그 즉시 공연중지 당하거나 아예 극단자체를 해산 당해야 했으며, 검거와 구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 맞서 진보적 연극인들은 이동식 소형극장 등과 같은 활동방식을 구사했고, 극단이 해산당하면 그 즉시 다른 극단을 건설하여 활동을 이어가는 등 오뚝이 같이 진보적 연극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의 노선에 대한 가치평가를 차치한다면 그들의 활동은 실로 눈물겨운 투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은 매우 힘겹고 어려운 싸움을 전개했으며 이 자체로도 높이 평가를 해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극복해야할 몇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 과제들을 성과적으로 극복했다면 진보적 연극운동은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진보적 연극운동이 극복해야 할 과제의 하나는 재정적 문제를 타개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유층이나 언론, 기업들의 후원을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가난과 착취에 핍박받는 노동자 농민들에게 비싼 공연관람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탄압에 열을 올리던 일제당국이 지원해 줄 리는 만무했습니다.
재정적 어려움은 극단의 존속에도 관계되지만 그에 앞서 공연을 올리느냐 못 올리느냐가 걸려 있는 문제이므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공연을 올리지 못한다면 진보적 연극이 아무 소용이 없을테니까요.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은 대중화를 실현하는 유력한 방도로 제출되었지만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고려된 측면도 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의 후원회, 극장 지지회, 유지권 발행 등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공연 시에 관객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드라마리그’제도(1929년 일본의 ‘좌익극장’에서 시도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극단 소속 단원들이 공연을 올릴때마다 각자 분담금을 차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가지 시도와 노력은 이렇다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재정적 어려움은 진보적 연극운동의 발전을 끊임없이 가로막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탄압을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과 소인극 활성화 등을 통해 진보적 연극을 계속해나간 것도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탄압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극단이 탄압을 받아 해산당하면 그 즉시 다른 극단을 조직하는 전술을 사용하였습니다. 평양의 경우 <마치극장>이 해산당하자 곧 <명일극장>이 조직되었고, <명일극장>이 해산되자 <신세기>가 출현했으며 <신세기가>해산당하자 <신예술좌>가 창단되었습니다. 일단 작품을 검열에서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다가 실제 공연 시에는 검열에 제출한 대본과 다른 식으로 공연하기도 했고 이마저도 불가능 할 때에는 연출적인 기술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부각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필자는 아무래도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습니다. 무산계급의 해방을 기치로 들고 나온 카프에 대해 제국주의 일본이 치밀하게 감시하고 가혹한 탄압을 전개할 것은 너무나 명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자기 정체와 목적을 명칭과 강령 등에 명시하고 신문과 잡지 등에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는 필자가 보기에 실천적이기보다 선언적이라고 보이며,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조급성과 자기도취적인 사고 그리고 뒤에서 살펴볼 좌경적 경향과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오히려 명칭과 강령은 합법성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해두고 실제 공연활동과 작품은 진보적으로 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불개미극단>은 이름이 주는 강한 집단성과 전투적 어감이 일제 경찰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이로 인해 첫 공연도 올리지 못하고 강제해산 되어 버렸는데 반해 <낭만좌>는 프롤레타리아 연극이라는 말을 구태여 쓰는 것이 그들의 활동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신극을 표방하고 나왔는데 이들의 실제 공연작품은 진보적인 내용의 작품들이었던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좌경적 편향이었습니다.
카프 내에서 진행되었던 이른바 <동반자 작가>에 대한 논쟁을 살펴봅시다. 동반자 작가라는 말은 트로츠키가 혁명적 예술가는 아니지만 혁명의 예술적 동반자라는 뜻으로 처음 쓴 말인데 극좌적인 라프(RAPP)는 <동반자인가 반프롤레타리아 작가인가>라는 글을 통해 이들을 종파로 몰아갔고 종국에는 동반자 작가라는 말이 반혁명과 같은 뜻으로 쓰일 지경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카프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작품활동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지향을 보이는 작가들을 동반자 작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카프내에서도 라프의 논리를 그대로 끌어와 동반자작가를 종파로 몰아가는 좌경적 편향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카프 연극인이었던 김유영은 <이동식 소형극장 공연을 앞두고>라는 글에서 “이데올로기에 밝지 않은 회색극인을 절대 합류시킬 수 없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상적으로 철저히 무장되지 못한 연극인들고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는 발언이며 이 또한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내에 존재했던 좌경적 편향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급기야 연출가 나 웅은 1934년에 이르러 “조직 이외의 프로레타리아적 동반자의 희곡 및 상연을 그 작자와 상연자의 종파적 지위, 소속한 계통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상연이 반동적 단체에 이용된다는 것만을 생각해왔고 그 희곡과 상연이 연극발전의 임의의 단계에서, 계급투쟁의 임의의 단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졌는가를 규명하지 않고 묵살적 태도에 임하는 폐단이 없지 않았다”라고 털어놓게 됩니다.
카프의 좌경적 경향은 조선의 현실에 천착하여 진보적 운동을 펼쳐가지 못하는 비주체적인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어쩌면 카프 결성 초기부터 예정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시 조선은 식민지적 성격과 봉건적 성격이 혼재된 사회였고, 특히 식민지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선차적인 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카프는 이미 혁명에 성공한 소련과 식민지가 아닌 일본, 독일 등의 공산주의 운동이론을 그대로 끌어와 적용시키려 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좌경적 경향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좌경적 경향은 진보적 문예운동 주체의 폭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었 많은 진보적인 예술인들을 망라하지 못하고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었는데 카프가 해산될 때까지도 쉽게 극복되지 못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이 극복해야할 과제는 인텔리적 관념성을 버리고 대중 중심의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운동은 인텔리들이 시작할 수도 있고 일정기간동안 주도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대중들이 주인입니다. 예술작품은 대중의 삶과 지향을 진실하게 반영하고, 대중의 정서와 질감으로 표현해야 대중의 열렬한 공감도 일으킬 수 있고 대중이 주인으로 나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가들이 대중 중심의 관점을 획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추적양이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한 글에 “책에서 읽은 대중들과 실제로 만난 대중들은 판이하게 달랐다”라고 언급하는데서도 볼 수 있듯이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 소인극 활동 등은 인텔리적 관념성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시 카프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예술인들은 이를 성과적으로 극복하지는 못했다고 보입니다. 물론 당시의 진보적 작품들이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어 대중의 호응을 받았고,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에 반해 감동이 없는 연설조의 대사가 많은 점, 인물형상에서 구체성이 떨어지고 도식적이고 판에 박힌 인물형상이 많은 점 등도 내외적으로 계속해서 지적되었던 문제입니다. 이는 결국 예술인들이 현실과 대중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관념적으로 창작했을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또, 독일에서 만들어진 슈프레히콜 형식을 도입하여 적극적으로 사용했는데 이 형식은 독일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진보적 연극의 수법이었으나 당시 우리민중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아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또한 당시의 연극인들이 대중에 천착하기보다는 다른 나라의 경험과 이론에 천착하는 등 대중적 관점과 주체적 사고를 온전히 획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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