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성의 예술 편지-1>
예술가의 감정
-류 성-
그 날도 나는 버드나무길 네거리에서 눈을 감고 당신을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겨울의 것이지만 나는 당신을 떠올리며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살짝 감은 눈꺼풀 위로 햇살을 느꼈을 때,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나를 스쳐갔습니다.
나는 요즈음 아이들을 볼 때면 너무나 사랑스러운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지어 울고 소리치고 떼를 쓰는 아이들마저 사랑스럽습니다. 가끔 스케치북에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전에는 아이들에 대해 이런 감정을 잘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나의 작품에 아이들이 등장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빠가 되었으니까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자 이내 당신의 속삭임이 들려왔습니다.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해요. 당신이 예술가라면.”
나는 당신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감정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감정이란 무엇일까 고민해보았습니다. 언제나 고마웠던 당신은 그날 밤에도 나의 사색을 이끌어주었습니다.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예술가에게는 이성적인 사유도 필요하고, 창조적인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감정이 동반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3년 전이 었을 겁니다. 예술가는 과학자와 같이 작품에 접근해야 한다고 강변하던 나에게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는 뉴튼의 이성과 상상력이 느껴지지만 나는 그의 감정과 정서를 느낄 수 없어요.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때, 나는 그의 날카로운 이성과 위대한 상상력, 그리고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 있죠.”
나는 그때 부끄러웠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술가가 대상을 선택할 때, 감정을 결여한 채 순수하게 이성적 판단만으로 대상을 선택하지 않으며 강렬한 정서적 이끌림을 가지고 선택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택한 대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또한 냉정한 상태에서 형상화 작업을 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동정하며 작업을 진행했으니까요. 그리하여 예술작품에는 필연적으로 예술가의 감정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술가라면 보다 분명하고 열렬한 감정을 가질수록 좋을 거에요.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도 강렬한 슬픔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있어요”
몇 년이 흐른 후 나는 당신의 말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창작을 어려워했던 여러 이유들 중 하나는 생활 속에서 창작적 충동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나의 눈길이 향하는 것에 대해 감동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할 줄 알아야 나는 예술가로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또한 내가 점차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에 대해, 특히 단순해져가는 것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원래 감정이란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데, 세상 돌아가는 게 여유가 없고 팍팍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며, 하지만 예술가는 감정이 메말라서는, 더구나 단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기쁨과 슬픔뿐만 아니라 서글픈 웃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애증도 알아야 하며, 흥분은 두려움과 쉽게 결합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했지요.
네. 맞습니다. 단순한 감정을 가진 내가 풍부한 형상을 창조해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날 밤, 나는 당신과의 추억을 벗 삼아 사색의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을 무렵, 당신이 감정을 일컬어 '사상의 산물'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사상에 따라 그에 맞는 감정과 정서를 가지게 됩니다. 같은 생활현상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분노를 느끼고, 어떤 사람은 슬픔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모호하며, 어떤 사람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사람들마다 사상에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술가들이 어떤 생활현상에 마주쳤을 때, 사상적 입장이 보다 뚜렷한 예술가라면 보다 분명한 감정을 가지겠지만, 그 생활현상에 대해 사상적 입장이 없는 예술가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술가의 사상적 입장이 모호하다면 그가 느끼는 감정도 흐릿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상’이란 ‘지식’과는 다르다는 것도 이제야 이해할 듯합니다. 지식이 사상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작용을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식을 습득했다고 그것이 곧 사상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습득한 지식이 생활 속에서 실천과 경험 등을 통해 체화되고 육화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사상이 될 수 있겠지요.
내가 아이들에게 전에 없는 감정을 느끼고, 창작적 충동을 받기까지 하는 것도 그제서야 분명히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나는 아이들이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지식이 사상으로, 또 한차원 더 공고화되어 나는 전에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겠지요.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공부와 토론, 논쟁에만 몰두하던 어리석은 나에게 당신은 간곡히 충고해 주었습니다.
“생활을 관조적으로 대하지 말고 예술가다운 진지함을 가지고 대하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때라야 비로소 당신의 사상과 감정은 진실하게 발전할 수 있을거에요. 그리고 당신의 예술도 빛을 낼 수 있을 거에요.”
참 느린 나는 이제야 그 속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작품은 왜 당신처럼 아름답지 못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
***편지글 형식이지만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썼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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