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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류 성의 예술 편지-3 기술과 진실한 형상



<류 성의 예술편지-3> 

기술과 진실한 형상



-류 성-



오후의 하늘로 오르는 하얀 연기는 꼭 벗의 춤을 보는 듯 했네. 벗이 직접 추는 것을 보면 더 좋았겠지만 이는 부질없는 내 욕심이겠지. 하여튼 나는 오늘 벗을 닮은 연기만으로도 만족했다네.


5년 전 어느 그믐달이 뜬 밤, 벗과 나는 ‘7개의 스페인 무곡’이라는 술집에서 한참을 마셨는데, 벗도 그날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예술에 대해, 예술가의 삶에 대해, 서로의 작품에 대해 장장 5시간에 걸쳐 거칠게 토론하고 솔직하게 논쟁했네. 사실 나는 아직도 그날 벗과의 대화만큼 거칠고 솔직해본 적이 없네. 그래서 더욱 벗이 그리운 것이겠지.


막차 시간이 되어 마침내 벗과 나는 헤어졌네. 그런데 지하철을 타러가던 나는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네. 벗과의 대화에서 받은 감흥을 지하철 소음과 함께 흘려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게지. 나는 그믐달을 벗 삼아 한잔 더 하고 싶어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운동장으로 올라갔네.


나는 운동장 한 켠에서 홀로 춤을 추고 있는 벗을 보았다네. 그믐밤의 달빛을 받아 은은한 벗의 어깨선과 후욱 후욱 뿜어내는 숨소리, 그리고 온몸에서 뽀얗게 피어오르는 김이 너울거렸지. 그래, 벗의 춤은 아름다웠고, 고백하건대 나는 매혹되고 말았네.


사실 나는 벗이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루 몇 시간 이상 반드시 연습을 한다는 주변의 소문을 믿지 않았네만, 그믐날 달빛과 함께 춤을 추는 벗을 보고서야 그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네. 예술가의 재능은, 특히 기술이란 부분은 결국 노동에 의해 획득되고 숙련된다는 것을 자네는 그렇게 증명해주고 있었지. 


벗은 한참동안 그렇게 춤을 춘 후 노래를 흥얼거리며 운동장을 떠났고, 나는 아직도 너울너울 춤을 주는 벗의 환영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네. 그리고 두 달 전에 있었던 작품발표회를 떠올렸지. 


그때 자네와 나는 동시에 작품발표회를 올렸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우리는 젊은 치기를 핑계 삼아 아주 도발적인 내용과 형식의 작품, 소위 말하는 문제작을 올려보자고 약속했었고, 우린 각자 최선을 다해 작품을 준비했지. 그런데 발표회 이후 평가에서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네.


사람들은 벗의 작품에 담긴 메시지에 대해 양쪽으로 갈라져 매우 뜨겁게 논쟁했네. 그런데 나의 작품에 대해서는 메시지에 대한 평가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네. 벗도 인정했듯이 당시 내 작품이 벗의 작품보다 훨씬 문제성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일세. 아마도 벗은 그 논쟁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담은 메시지에 대한 별다른 평가가 없어 좌절하고 말았다네.


나는 그믐날 밤 벗이 춤추고 떠났던 운동장에서 그 이유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네. 나는 분명히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메시지를 담았지만, 공연을 보는 사람들의 인상에 남은 것은 내 기술적 부족함뿐이었네. 메시지는 들어갈 틈이 없었던 거야. 나는 창작과정에서 기술적 부족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의 문제성만 잘 전달되면 될 것이라고 여겼지. 그러나 이것은 철저한 오판이었네. 관객들은 기술적으로 부족한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게지.


게다가 나는 그때 기술적인 과욕까지 부렸네. 나는 부족하더라도 내가 가진 높이의 기술을 잘 구사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네. 만약 그랬다면 작품은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선물해 주었을 걸세. 내가 그토록 공을 들였던 작품의 메시지에 대해서 관객들은 토론할 수 있었을거야. 우스개 소리로 비유를 해보자면, 나는 짜장면 만들 정도의 기술을 소유했음에도 탕수육을 만드려고 덤벼들었던 거야. 관객들은 맛없는 탕수육보다 맛있는 짜장면에 훨씬 감동하는데 말일세.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는 묘한 부끄러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며 스탠드에서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네. 그리고 벗과 함께-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벗이 남겨둔 환영과 함께 춤을 추었네. 아마도 그 모습은 꼭 도깨비 같았을 걸세. 도깨비 같은 나와 함께 춤을 추는 벗의 환영은 ‘7개의 스페인 무곡’에서의 대화를 상기시켰네.


“예술가란 인간의 삶과 정신, 그리고 세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과학자이며 철학자야. 또한 분명한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높거나 특별한 기술을 가진 기술자란 사실이야. 그리하여 예술작품이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예술가의 철학이, 정서와 감정이, 상상력이 그리고 너무나 분명하게도 그의 기술이 반영된 무언가란 말이야. 그러므로 예술가에게 기술이란 매우 중요한 부분일세. 예술가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재능 중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예술가가 제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구현할 기술을 체득하고 있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벗이 지적해주었듯이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진 기술의 부족함 때문에 수많은 상상력을 폐기하거나 유보하거나, 또는 수정할 수밖에 없었지. 작품발표회 당시 내 창작과정 또한 그러했고.  벗은 이어서 내게 얘기했다네.


“사실 거의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기술적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자기 요구를 가지고 있고, 또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기술적 수준에 대해 좌절하고 있지. 사정이 이러한데, 예술가가 높은 기술을 획득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 것은 그야말로 우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예술가들이 이 우문에 대해 정확히 대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내가 생각하기에, 예술가는 보다 진실한 형상을 창조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해야 해. 예술가의 기술이 부족하면 작품의 진실성은 떨어지고 말아. 관객은 진실로부터 멀어진다구. 끔찍하지.”


그때 나는 크게 웃으며 벗의 말에 맞장구를 쳤지만 사실은 매우 뜨끔했네. 기술이란 측면에서 나는 분명히 경쟁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거든.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누구보다 잘 하고 싶다’ 또는 ‘이 정도 실력으로 어떻게 저들과 경쟁할 수 있겠어’ 등의 생각인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기술을 뽐내고 싶어하는 자기 과시적인 욕구와 직결되어 있을 뿐, 자네가 이야기했던 ‘진실한 형상의 창조’라는 목적과는 거리가 먼 대답이지. 


불어오는 겨울의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나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버렸고, 창백하고 파리한 새벽빛이 하늘에 스며들기 시작했네. 그리고 아쉽게도 벗의 환영은 사라져갔지. 그렇게 벗을 보낸 후 지쳐버린 나는 새벽 서리도 아랑곳없이 운동장 바닥에 드러누웠네. 그리고 자네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마치 연극배우가 대사를 내뱉는 것처럼 멋지게 읊어보았지. 


“예술가는 기술의 획득을 위한 노력에 대해 ‘기술적 곤란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술로부터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입장을 가져야 해. 해방을 위한 또 하나의 투쟁이지. 해방의 결과는 진실한 형상의 창조야.”


언제나 참다운 벗이 되어준 자네는 오늘 오후 마지막 춤을 추며 너울너울 하늘로 올라가 버렸네. 나는 이제 벗 대신 벗의 환영을 불러 올 수 밖에 없게 되었네. 잠깐 슬픈 생각이 들어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아무려면 또 어떤가. 5년 전 그믐달 밤처럼 내가 도깨비가 되면 그것도 괜찮을테지.


잘 가게. 벗.



<끝>  


  ***편지형식이지만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쓴 글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