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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류 성의 예술편지-5 '예술적'이라는 편견

 

<류 성의 예술편지-5>

‘예술적’이라는 편견




-류 성-




이틀 전 공연으로 인한 피로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 같네. 그 날 비를 많이 맞았던 탓인지 감기기운도 사라지지 않는군. 아마 연출을 맡았던 자네는 나보다 더 하겠지. 그래도 빨리 몸을 추슬러야겠네. 이번 공연에서 가장 고생한 사람들은 작가인 나와 연출인 자네가 아니라 무대에 선 배우들이 아니었는가. 그러니 고생한 배우들이 쉬는 동안 우리는 조금 더 빨리 움직여 다음 마당을 준비해 놓자구. 미리 멍석을 깔아두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역할이니까.


자네에게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은 그럴만한 사연이 있네. 그 공연의 주인공을 맡았던 정 선생님께서 어젯밤에 나를 찾아오셨어. 소주 몇 병과 과메기 몇 마리를 사들고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나는 老배우의 갑작스런 방문에 조금 당황스러웠다네. 그래, 당황스러웠던 건 늦은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어.


그 날 무대에 선 선생님은 공연의 마지막 즈음에서 대본에 있는 대사가 아니라 전혀 다른 대사를 치셨어. 그것도 아주 노골적이고 선동적인 대사를 거칠게 뱉어 버리셨어. 그 때 객석 한 켠에서 공연을 지켜보던 나는 매우 불쾌했네. 아니 화가 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테지. 나는 반사적으로 자네에게 달려가 따졌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래, 이미 대본은 내 손을 떠났고 연출인 자네가 뜻대로 고칠 수는 있다. 그래도 그렇지. 대사 한마디가 작품 전체의 예술성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걸 자네도 잘 알 텐데, 저렇게 노골적이고 생경한 대사로 바꿔치면 어쩌자는 거냐? 작가인 나에게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내가 화가 났던 것은 자네가 나와 상의 없이 임의로 대사를 바꿨기 때문이 아니라네. 예술적 동지로 철썩 같이 믿었던 자네가 너무나도 비예술적인 선택을 했기 때문이었네. 그러나 이미 대사는 배우의 입을 떠났고, 자네의 설명을 들어볼 필요도 없었던 거지. 그러니 나는 그렇게 내 이야기만 퍼붓고 그만 돌아서 버렸네. 공연을 마친 후 간단하게 정리하는 자리에서 조금 쌀쌀하고 어색한 바람이 불었네. 물론 내리는 비도 한 몫 했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자네에게 뿜어내던 냉랭한 기운 때문이었지.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절친했던 나와 자네의 사이가 어색해진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어 심경이 복잡하던 중 나를 찾아왔다고 말씀하셨네. 나는 선생님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신 말씀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어. 따지고 보면 선생님은 미리 약속된 대로 대사를 친 배우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선생님께 조심스레 그 연유를 여쭈어보았고, 조금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네.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그 대사를 연출가인 오 선생은 아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나 또한 그 대사가 참 예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지요. 오 선생은 연습을 할 때 내가 그 대사를 되도록 절제하며 나직이 읊조리듯 해달라고 주문했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내가 대사를 아주 격렬하게 내뱉은 것은, 그것도 류 작가가 쓴 대사가 아니라 전혀 다른 대사를 친 것은 오 선생의 의도가 아니라 나의 즉흥적인 연기였습니다. 오 선생이 아니라 내가 그랬습니다. 그러니 오 선생에 대한 오해를 풀어요. 자, 이 늙은 배우가 주는 술 한잔 받으시오. 그리고 작가와 연출가의 뜻에 벗어난 채 제 멋대로 지껄여버린 이 못난 배우 또한 용서해주오.”


오해를 한 내가 부끄럽기도 했거니와 老배우의 진지한 사과에 나는 갑자기 몸둘 바를 모르게 되었네. 이러지 마시라고 거듭 이야기했지만, 결국은 선생님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고 말았지. 선생님은 이제야 마음이 좀 풀린다며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으셨네. 그리고 두어번 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나는 계속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네. 수많은 경험을 가진 老배우가 왜 대본에 있지도 않은 대사를, 그렇게 비예술적인 대사를 하셨을까? 더군다나 선생님은 언제나 ‘연극은 약속의 예술’임을 강조하셨던 분인데 도대체 왜? 감기기운 때문에 취기가 빨리 오른 나는 외람되게도 여쭈어보고 말았다네. 


“공연을 하던 중 나는 관객들로부터 무언가 강력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배우들은 가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관객들이 내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배우인 나를 통해 하고 싶은 ‘그들의 말’이 들렸던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류 작가의 대사처럼 은유적이거나, 암시적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노골적이고, 직설적이고, 또 격렬했습니다. 나는 마지막 장면의 등장을 기다리며 잠시 생각했습니다. 연극은 분명히 약속의 예술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현장의 예술이고, 관객이 완성시키는 예술이다. 불이 켜지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현장의 열기에, 관객이 내게 보내는 텔레파시에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는 ‘관객의 텔레파시’를 느낄 수 있는 예민한 감각에도 놀랐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에 그만 충격을 받고 말았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그 동안 메시지를 될수록 억제하고 암시하는 방법이 예술적인 것이며,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밝히는 것은 서투른 예술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내가 예술적으로 존경하는 老배우가, 그것도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니 내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런 내 생각을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네. 잠시 생각하던 선생님은 다시 술을 한잔 권하시며 말씀하셨어.


“그러니까, 류 작가가 썼던 대사는 아주 예술적이었고, 내가 했던 대사는 아주 선동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짧은 생각으로는 이 둘을 대치시키는 것이 과연 옳을까 싶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만약 선동이 관객의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면 그 선동은 비예술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관객의 반응을 끌어냈다면, 그것도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면 그 선동은 아주 예술적인 것입니다. 관객의 반응, 공감 등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예술성, 예술적인 표현. 나는 아직도 그런 것들을 믿지 못합니다.”


나는 老배우의 이야기에 절대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었네. 그날 공연에서 선생님이 토해낸 그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그렇게 ‘비예술적’인 대사에 관객들은 어마어마한 환호를 보내주었으니까. 그리고 자네와 나를 예술의 길로 뛰어들게 해준 작품이 생각났어. 그래, 그건 아주 ‘비예술적’인 예술이었는데 우리는 그만 커다란 감동을 받아버렸지. 그날 밤, 老배우가 건네주는 술 한 잔과 말 한마디에 나의 ‘예술적 편견’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네. 신기한 건 그 편견이 조각 날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한 쾌감이었어.


“류 작가. 나는 배우로서, 또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 아무리 예술적인 표현방법을 썼더라도 관객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그것은 가짜다. 비예술적이라도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짜 예술적인 것이다. 나는 진짜 예술가,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런데, 그거 참 쉽지 않더군요. 뭐랄까, 관객을 스승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오만하단 말입니다. 어이쿠, 이거 쓸데없는 소릴 많이 하는 거 보니 내가 좀 취했나 보오. 이제 그만 일어서야 겠습니다.”

 

가로등 불빛을 벗 삼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老배우의, 아니 커다란 大배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네. 이 시대에 저런 배우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흔치 않은 일인지, 또 그 배우와 함께 작업 할 수 있는 자네와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전화가 왔네. 나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어.


“아, 혹시 벌써 잠든 건 아니겠지요? 허허허. 내가 빼먹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무례하게 전화를 했습니다. 나는 류 작가의 작품을 아주 좋아합니다. 또, 오 선생의 연출 스타일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두 사람이 보여주는 열정이고, 가끔은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러운 두 사람의 우정입니다. 나는 두 사람이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 작품에 나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바랄게 없지요. 언제든 좋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멍석을 깔아놓고 나를 불러 주시오. 그러면 그 멍석에서 있는 힘껏 놀아보지요. 내 단단히 약속합니다.”


이제 편지의 목적을 말해도 좋을 듯하네. 오해해서 사과한다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하네. 그보다도 당장 내일 선생님을 한번 찾아뵙도록 하는 게 어떻겠는가. 잠깐 쌀쌀하고 어색한 바람이 불었을지언정 변함없는 우리의 우정을 보여 드리자구. 그리고 선생님께서 하신 그 약속, 반드시 지키시라고 몇 번이고 확인을 받아두세.



<끝>



  ***편지형식이지만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쓴 글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