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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4 기층의 강화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4

기층의 강화 - 소인극(素人劇) 운동



- 류 성 -


소인극은 비직업적, 비전문적인 연극을 말하는 것으로, 대중이 직접 창작과 향유의 주체가 되어 소속집단의 행사나 목적에 따라 공연하는 형태의 극으로써 지금으로 보자면 노동조합 연극패, 학생 연극 서클, 청년회 연극 동아리, 직장인 연극반 등의 연극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소인극은 연극예술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는 요구에 토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화합과 단결, 교양과 선전, 예술활동을 통한 정서적 발전 등이 목적이 되며, 기금마련 등을 위해 일회적으로 공연되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나 현장의 문제를 주제로 창작하는 경우 여러 측면에서 매우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카프의 연극인이었던 김승일은 "공장과 농촌에서 우리 연극 후비군이 다수 출현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장과 농촌에 우리 연극의 저수지로서의 연극서클을 많이 조직하여야 하며 이를 옳게 지도해야 한다.-1932년 7월 조선중앙일보-"라고 했는데 여기서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소인극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점기 진보적 연극인들은 문예운동의 대중화를 실현하는데서 노동자, 농민, 학생내에 연극서클을 강화해 소인극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이 소인극을 활성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것은 전문가들의 창작연행활동에 국한해서는 운동을 발전시킬 수 없으며 반드시 기층을 강화함으로써만 문예운동의 대중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관점이 바탕이 된 것입니다.

소인극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노동조합, 농민조합, 야학, 청년회 등에 연극 서클을 조직하거나 조직되도록 지원해주는 활동을 했습니다. 일례로 1932년 함흥에서 창단된 동북극장은 함흥, 흥남 노동자들에게 연극서클을 만들어주고 육성하는데에만 매달릴 정도로 여기에 힘을 쏟았는데, 그 결과 이 지역은 다른 어떤 곳보다 많은 노동자 연극서클이 활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연극서클들이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진보적 희곡을 창작하여 그 대본을 공급해주고, 공연이 있을때는 연출가, 무대장치가들을 파견하여 기술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것입니다. 보성전문 연극부의 공연사례를 보면 카프소속 연출가인 라웅, 김승일 등이 파견되어 연출, 무대장치, 효과 등 무대기술적인 제반사항들을 지도해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진보적인 연극이론을 교양교육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는 연극서클들에 진보적 연극인들이 직접 방문하는 방식, 연극단체들이 연극잡지와 신문등을 펴내어 서클들에 배포하는 방식, 연구생 모집 및 교육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소인극회를 개최하거나 교환공연 등을 조직하여 진행하는 등의 노력도 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소인극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특히 학생극에서 많은 성과를 낳았습니다. 1929년 광주학생의거로 인해 학생들의 진보적 의식과 활동이 분출했고 이에 따라서 진보적 연극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도 높아졌던 상황이었습니다.

<보성전문학교>, <세브란스 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이화여전>, <근화>, <여자이학강습소> 등 많은 학교에서 카프 연극인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를 맺으며 진보적 연극서클들이 새로 조직되거나 진보적인 경향을 띄어갔습니다. 소인극 운동은 중학교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었는데 그 중 <배재중학 연극부>의 활약은 대단하여 1935년에는 지방순회공연까지 계획할 정도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보성전문학교 연극부의 경우 카프 연극부의 연구생 수련 등에 참가한 학생들이 창단합니다. 카프 연극부는 연극부에 연극이론의 연구, 배우술의 습득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보전연극부>는 1백명에 달하는 부원들을 가질 정도로 성장을 합니다. 보전연극부가 1회 공연 준비할 때는 연출가 라웅이 파견되어 지원을 했고, 2회 공연을 할때는 김승일이 파견되어 지원을 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가장 실력있는 연극인들이기도 했습니다. 3회 공연은 1934년 11월에 있었는데 이 때는 소위 <신건설 사건>으로 카프 연극인들이 모두 투옥된 상황이라 학생들에 대한 아무런 지원이 없었음에도 학생들은 1, 2차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공연을 치뤄냈다고 합니다.

당시 학생 연극서클들은 소위 신극을 한다는 해외문학파들이 주도한 <극예술연구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해외문학파들의 영향력이 아주 강한 연극서클들에는 번역극 중에서도 진보성이 있는 레퍼토리를 선정하고, 무대와 연출, 연기 등에서 사실주의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소인극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카프가 해산된 이후에도 개별적으로 지속되었고, 이후 전문단체들이 진보적인 공연을 올려 대중들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도 노동자, 농민, 학생들속에 조직된 연극서클들은 소인극을 통해 진보적 활동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