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르게 살자-역할의 내면화
- 류 성 -
<바르게 살자>는 기발한 상황의 설정, 엉뚱하지만 대개 선한 인물들, 연극적인 플롯, 맛깔나는 대사 등 '장진'표 영화의 미덕을 잘 살린 영화입니다. 의심할바 없이 장진 감독의 작품이겠거니 했는데 알고보니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긴 했지만 직접 메가폰을 잡은 건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놀랐습니다.
웰컴투 동막골을 연출했던 박광현 감독과는 달리 라희찬 감독은 자신의 상상과 느낌보다는 시나리오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에 충실한다는 것은 얼핏 쉬운 작업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도 합니다. 기본기가 충실하지 않은 연출은 대개 실패하고 말지요.
첫 데뷔 연출작 치고는 매우 안정된 연출력을 보여주는 점까지 고려해본다면 기본기가 탄탄하고 실력있는 감독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다음 영화에서는 자신의 상상과 느낌을 보여 줄 수도 있겠지요.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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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던 중 <엑스페리먼트>라는 독일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느낌도, 스토리도 전혀 다른 영화인데 왜 <엑스페리먼트>가 떠올랐을까요? 이유는 스텐포드 모의감옥 실험 때문입니다.
스텐포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짐바도는 실험에 응한 20여명의 피실험자들에게 간수역할과 죄수역할로 나눈 후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죄수로 선정된 이들은 며칠 후 경찰에 의해 정식으로 연행되고, 실제와 같은 취조를 받고, 모의감옥에 수감됩니다. 간수로 선정된 이들은 감옥으로 출근하여 매일 8시간씩 간수업무를 본 후 퇴근하여 일상생활을 합니다.
연극처럼 각자 역할을 나누고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의, 즉 가짜이며 연극일 뿐입니다.
그런데, 며칠이 흐르자 모의는 모의가 아니게 됩니다. 간수역할을 맡은 피실험자들은 거만한 태도로 죄수역할을 맡은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모욕을 주는 등 실제 간수와 같은 행동을 취합니다. 죄수역할을 맡은 피실험자들은 실제 죄수들처럼 수동적이고 우울하며 불안해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실험 2일만에 죄수 몇명은 우울증, 발작 등의 증세를 보여 정신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에 빠지게 되어 10명중 5명을 석방(실험중단)시킵니다. 그리고 6일만에 전면중단되어 버립니다.
매우 무시무시한 결과를 보여준 이 스텐포드 모의 감옥 실험은 환경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 권력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간의 공격적이고 악한 본성 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간수든, 죄수든 피실험자들이 자기 역할을 내면화한 점이며 이것은 연기예술과도 통한다는 점입니다.
'모의'인줄 분명히 알지만 '실제'로 느끼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연기예술도 똑같습니다. 가짜인줄 분명히 알면서도 실제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인 척'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실제가 아님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연기예술의 비밀입니다.
영화 <바르게 살자>는 이러한 '역할의 내면화'에 기반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정도만을 비롯해 은행에 있는 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역할의 내면화'에 빠져듭니다. 즉, '몰입'하는 것이지요. 몰입한 사람들은 실제와 같은 행동을 자발적으로, 또한 즉흥적으로 취하게 됩니다. 실신, 포박과 같은 딱지나 입으로 쏘는 총이 실제와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연극적 약속들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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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하다보면 집중이 흐트러져 몰입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탁월한 배우들은 자신의 연기력으로 주변 배우들의 집중력까지 유지시켜 줍니다. 영화에서 정도만은 이런 탁월한 배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속에서 모의상태에서 빠져나오려는 몇몇 인물들이 있고 이들에 의해 모의훈련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매사에 진지하고 충실한 대배우 정도만의 행동-연기-에 의해 금방 몰입상태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영화 <바르게 살자>는 매우 유쾌하고 즐거운 영화입니다. 그리고 심리학적 문제, 연기예술적인 문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매우 독특하고 흥미로운 영화이기도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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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엑스페리먼트는 독일영화로 스텐포드 모의감옥 실험을 소재로 한 독일영화입니다. 스릴러 장르로 분류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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