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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3 대중속으로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3

대중 속으로-이동식 소형극장


- 류 성 -


카프는 1927년 몇 가지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고 문예운동의 대중화를 핵심주제로 내세웁니다.


당시의 문예운동 대중화란 ‘노동자/농민 대중의 생활감정에 기초한 올바른 예술을 확립하고, 예술을 통하여 노농대중이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자기의 현재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며, 종국에는 그들이 자신의 예술을 창작하고 향수하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당시 카프가 내세운 문예운동의 대중화를 실현하는데 시와 소설 같은 문학보다 영화와 연극이 매우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는데, 여기에는 극예술이 가지는 집단성, 현장성, 직접성 등이 강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며 또한 당시 대중들의 문맹률이 높았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카프의 연출가이며 배우였던 김승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극은 공장과 농촌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한다. 노동자 농민과의 튼튼한 연계가 없이 우리의 연극운동은 자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우리 연극 앞에 가로놓인 온갖 난관도 오직 노동자 농민과의 튼튼한 연계를 가지므로써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1932년 7월 조선중앙일보-

나웅, 신고송 등 카프계열 연극인들은 '대중적 조직의 기초 위에서 활동을 전개해야 연극을 노동자, 농민에게 좀 더 접근시킬 수 있다'고 제기하면서 종래의 대극장 공연을 지양하고 기층 민중들에 밀착하기 위하여 기동성 있는 이동적 활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김승일, 추민, 탁진 등의 연극인들이 1931년 11월 최초의 이동극단인 이동식 <소형극장>을 창단하고 개성에서 창립공연을 올린 후 원산, 함흥 등을 순회하며 공연을 합니다. 

그리고 이에 공감한 지방의 많은 진보적 연극단체들은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을 자신의 활동방법으로 채택하여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메카폰>, <근대극장>, <곡예사>, <신예술좌>, <문화좌>, <명일극장>, <동북극장> 등이 이동식 소형극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활동한 극단들입니다.


그 중 명일극장의 사례를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평양에서 창단된 <명일극장>은 기존에 있었던 <마치극장>이 탄압으로 인해 공연조차 올리지 못하고 해산된 경험과 이동식 <소형극장>의 모범적 사례를 바탕으로 이동식 극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창단한 후 황해도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순회공연지를 탄광노동자 등 빈곤이 극심한 지역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이 일어나고 있는 곳을 택했습니다. 그 중 한 곳인 봉산탄광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에 경찰은 공연내용이 불온하다며 공연을 그 자리에서 중지시키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관람하던 노동자들이 격분하여 공연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고 무대에 뛰어올라가 경찰로부터 공연자들을 보호했습니다. 결국 경찰은 물러났고 공연은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평양 중심의 노동자들이 <극단지지 후원회>를 결성해 극단의 활동에 적극적인 도움과 노력을 주었다고 합니다.

<명일극장>의 사례 뿐만이 아니라 여러 이동식 소형극장들이 공연을 할 때 대중들은 스스로 관객들을 동원하고, 무대설치와 의상, 대소도구 등을 지원하는 등 대중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동식 소형극장의 활동이 노동자 농민 대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으며, 대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때만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은 노동자/농민을 직접 찾아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므로 노농대중의 취향과 정서에 맞고 현실적 이해와 직접 관계있는 소재를 취급하였는데 풍자희극과 같은 양식이 많이 선호되었으며 기동성을 갖추기 위해 단막극을 주로 공연했습니다.


대표적인 레파토리의 하나였던 송영의 단막극 <호신술>은 어떠한 호신술로도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막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아 풍자적으로 그려낸 희극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상룡의 가족은 파업에 일어난 노동자들이 쳐들어올까봐 유명한 체육인을 초청해 자신뿐만 아니라 부친, 처, 아들딸들을 모조리 데려다 유도를 가르치는데 허리가 꼬부랑인 부친은 울며 겨자먹기로 흉내를 내다가 뒹굴고, 체육선생이 외아들을 바닥에 메치는 바람에 아들은 기절하여 난장판이 됩니다. 이런 와중에 노동자들이 사나운 기세로 몰려오자 김상룡의 가족들은 허둥대며 서로 자신만의 살 구실을 찾아 몸부림칩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단체들의 공연을 방해하기 위해 일제는 검열과 공연불허라는 탄압을 마구잡이로 구사하여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은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는 효과적인 방편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많은 극단들이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대중들의 지지와 지원을 획득하여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연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성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서울에 위치한 몇 개 극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연극운동에서 탈피하여 해주, 개성, 함흥, 대구, 마산, 통영 등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점은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이 진보적 연극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한계들을 극복하는데 일련의 성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동식 소형극장활동에 참가했던 연극인 추적양은 "책에서 읽은 노농대중들과  실제로 만난 노농대중들은 판이하게 달랐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즉 상업주의적 경향, 지식인적 취향, 비민중성, 이론적 편향과 실천적 성과의 부진 등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일련의 성과를 가져 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대중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문예운동의 대중화와 함께 자기 혁신도 일구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요.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