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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2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일제강점기 진보연극문예의 경험-2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류 성-



카프(KAPF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의 약칭으로 1925년 8월에 결성된 진보적 문예운동단체로서 "우리는 단결로서 여명기에 있는 무산계급 문화의 수립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내걸었는데 여기에는 1922년 결성된 <염군사>라는 단체와 1923년 결성된 <파스큘라>라는 단체가 통합하고 여기에 진보적 문학예술운동을 지향하는 개별 예술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연합전선체적 성격의 조직인 카프가 결성되면서 문학, 영화, 연극, 음악, 미술 분야 등에서 진보적 문예운동이 전에 없이 활발히 전개됩니다. 카프 이전의 진보적 문예운동은 개별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분산적으로 진행되었기에 그 힘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카프의 결성과 함께 진보적 문예운동은 조직적이고, 목적의식적이며, 대중적으로 전개됨으로써 커다란 힘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강령의 첫머리에 있는 ‘단결’이라는 글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목표를 실현하는 방도를 다른 무엇도 아닌 “단결”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카프를 결성한 진보적 예술인들이 “단결”이란 과제를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카프를 결성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들도 있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프의 결성에서 아쉬운 것은 식민지적 모순의 해결, 즉 조국의 독립을 자기 목표로 설정하고 광범위한 진보적 예술인들을 망라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갈라져 서로 배척하던 당시 국내 진보운동의 한계와도 연관되는 것이겠지요.

만약 카프가 노농대중의 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진보적인 예술가 모두가 망라되는 조직으로 건설되었다면, 일제강점기 진보적 문예운동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고 상상해봅니다.


결성 이후 조직적으로 진보적 문예운동을 펼쳤던 카프는 1935년 말 해산되고 마는데 카프가 해산된 주요인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습니다. 애초부터 검열과 공연불허 등으로 탄압했던 일제는 1930년대에 이르러 카프의 진보적 문예운동이 활발해지고 반일성격이 뚜렷해져가자 2차에 걸친 대규모 검거사건을 일으키는 등 실로 폭압적인 탄압을 자행합니다.


일제는 1931년에 제작된 <지하촌>이라는 영화를 불온영화로 규정하고 시나리오와 연출을 담당한 강호가 카프 소속이라는 구실로 카프작가들을 모조리 검거하는데 이것이 1차 검거입니다. 이후 1934년 카프 소속의 연극단체인 신건설(新建設)에서 제작한 ‘불온정치삐라’를 가진 학생이 전라북도 금산에서 검거되었다며 무려 80여명의 카프소속 예술인들을 검거하여 투옥하는데 이것이 2차 검거입니다.

검거된 예술인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으며 전향을 강요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위 ‘신건설 사건’이 일제경찰에 의해 만들어진 자작극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진보운동을 말살시키려는 제국주의의 교활함과 야만적 폭력성에 섬뜩함마저 느끼게 됩니다.


카프가 해산된 것은 외부적 요인인 일제의 폭압도 있었지만 카프 내부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2차 검거사건을 계기로 카프 내에서는 카프를 해산하자는 ‘해소파’와 이에 반대하는 ‘비해소파’로 분열되어 양자간에 심각한 대립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1935년 5월 10년에 걸쳐 진보적인 문예운동을 해왔던 카프는 해산됩니다.
 
‘해소파’가 옳았느냐 ‘비해소파’가 옳았느냐에 대해서 필자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카프가 내부에서 분열되어버림으로써 일제의 탄압을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카프의 내부분열은 1, 2차검거 이후에 불거진 것이 아니라 결성 이후부터 계속해서 진행되어왔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소위 '방향전환'을 계기로 시작된 카프 내부의 이론투쟁은 소속 예술인들끼리의 과도한 논쟁과 비난으로 비화되는 경향이 지속됩니다. 물론 이렇게 전개된 이론투쟁은 카프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논쟁은 매우 공격적이었으며 주도권 싸움의 모습까지 드러내며 분열의 양상을 띄었다는데 있습니다. 게다가 논쟁이 실천을 통해 대중적으로 검증되는 과정이 아니라 '지식인들끼리의 이론싸움'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2차에 걸친 일제의 대량검거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집행유예로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카프가 맥없이 해소되고 말았던 것은 카프 내부의 분열도 주요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만약 카프 내부의 논의가 실천을 중심에 두고 단결을 촉진하는 방향에서 진행되었다면 카프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논의와 논쟁이 내부의 분열로 연결되고 종국에는 카프가 무너지는 한 원인이 된 것을 보면 오늘날에도 생각되는 바가 많습니다. 이론투쟁과 비판은 진보운동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할때도 있지만 그 중심을 '단결'에 놓고 진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가 사무치게 다가옵니다.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