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 글은 우리나라 5집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는 아니다. 우리나라 5집을 3일 동안 들으며 횡으로 종으로 내달린 내 상념의 기록일 뿐이다.
첫째 날 듣기-변화는 저항의 극복이다
모두에게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내게 있어서 변화란 기분 좋은 일이다. 조그만 틈이라도 있으면 쉽게 정체에 빠지는 것이 삶이고, 정체된 삶은 내일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오늘의 오후처럼 지겹기 짝이 없다. 그러니 변화란 그 방향성과 정당성, 당위성 기타 등등을 떠나 그 자체가 내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체에 익숙하며 변화가 두렵다. 변화가 두려운 것은 변화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변화를 반대하는 저항과 싸워야 한다. 변화란 저항의 극복이라고 했을 때, 내겐 저항을 극복할 전략도 없지만 무엇보다 그 지난한 과정을 감당할 용기가 없다.
변화를 기도할 때, 변화의 주체는 두 가지의 저항과 싸워야 한다.
첫째는 외부에서 오는 저항, 즉 외적 저항이다. 가령, 헤어스타일을 바꿔 보려는데 주변사람들이 보내는 부정적 반응이다. 부정적 반응은 적극적 반대, 그리고 거부감의 표현 등만 아니라 ‘무시’도 포함된다. 변화의 주체는 외적저항의 힘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저항하는 그들은 싸워야할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적 저항의 힘이 클수록 변화의 주체는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 두려워진다. 외적 저항은 변화를 모색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외적저항을 극복할 수 없다면 변화는 포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두 번째는 내부에서 오는 저항, 즉 내적 저항이다. 변화 자체에 대해, 혹은 변화의 방향에 대한 주체 스스로의 부정적 반응이다. 개인이 아니라 여러 개인들이 모인 단체라면 내적 저항은 더 복잡해진다. ‘그러한 변화는 옳지 않다’, ‘실현이 불가능하다’ 등등 부정적 반응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모르겠음’, 혹은 ‘입장 없음’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적 저항은 외적 저항에 비해 변화를 모색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외적 저항은 내적 저항이 어떠하냐에 따라 거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내적 저항은 외적 저항의 힘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 외적 저항의 힘이 크다면 내적 저항은 비례해서 커질 가능성이 많다. 만약, 내적 저항을 극복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변화는 포기된다.
우리나라 5집이 민중가요 노래패 우리나라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면, 그 변화에는 외적 저항과 내적 저항을 극복해낸 수준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5집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이었다면 실패겠지만, 그게 아니라 성공적인 변화를 모색한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외적 저항과 내적 저항을 어느 정도 잘 극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번 5집을 통해 보여준 우리나라의 변화에 대한 외적 저항의 힘은 애초부터 그리 크지 않았다. 즉, 대중들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만한 변화인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나라는 5집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표된 우리나라의 모든 앨범과 인터넷상에서 발표한 노래들을 통해 외적 저항을 최소화시켜왔다. 한마디로 이미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우리나라 5집을 아주 도발적이거나 충격적인 변화로 느끼고 저항하기보다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의 연속선상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활동방식과 존재방식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음악작업은 1집 이후 자꾸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 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낮은 곳을 주목하고 그들 속에서 노래 부르려고 한다. 여기에 변화가 있다면 더 넓은 곳을 다니려할 뿐 낮은 곳을 배반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내적 저항은 어떠했으며 어느 정도로 극복했을까? 앞서 지적했다시피 일단 5집이라는 결과물이 나왔으므로 변화에 대한 내적 저항을 어느 정도 극복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내적 저항을 극복하는 힘은 생각보다 다양할 수 있다. 예술단체라고 극복하는 힘이 ‘예술에 대한 지향의 통일’로만 한정되진 않는데, 예를 들어 계약서와 돈으로 극복해내는 경우도 있고, 어떤 명분이나 혹은 의리로 극복해내는 경우도 있으며, 이미 예정된 시간표 등으로 극복해내는 경우도 있다. 식구가 아닌 이상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또한 ‘예술에 대한 지향이 통일’되는 것으로만 내적 저항을 극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며, 다양한 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저항은 변화를 하고 난 이후에 더 심하게 부각되며 극복을 위한 과정은 그때부터 본격화된다. 우리나라의 변화에 대한 외적 저항과 내적 저항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우리나라는 이 둘을 어떻게 극복해 갈지 궁금한 첫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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