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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서양연극사 연구2-고대 로마의연극

서양연극사 연구2-

-류 성-

고대 로마1)의 연극



1) 개괄

 
로마는 기원전 146년 그리스를 정복했고 이후 점차 그리스 세계 전역을 흡수했다. 이로써 로마의 예술과 문학은 상당 부분 그리스적인 것과 융합했다.

 로마 또한 많은 축제가 있었고 축제에서 다양한 종류의 오락(음악, 춤, 소극, 마차경주, 권투 등)이 행해졌다. 기원전 240년 경, 그리스의 드라마가 로마에 소개되었고 그 후 로마의 축제에 정규극2)도 첨가되었다. 그러나 정규극보다 아텔라 소극, 마임, 판토마임 등의 공연이 더 인기가 많았으며, 제국시대에는 마차경주, 검투사 시합, 해상전투 등의 오락이 더 인기가 높았다.

 사실상 로마에서 그리스적 연극은 미미했다고 볼 수 있다.


2) 제작과 관객

 축제를 맡은 행정장관이 극단의 운영자와 계약을 맺었다. 중개인도 있었다고 한다. 축제에서는 여러 극단이 극을 올려 경연을 했다. 상을 타기 위해 고용된 박수갈채꾼도 있었고 관객들이나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스처럼 각각의 극은 중간휴식 없이 공연되었고 극과 극 사이에는 짧은 마임 등으로 채워져 연속적이었다.

 입장은 무료였고 모든 계급에 입장이 허용되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여성, 노예, 보모, 매춘부들이 객석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밀치는 일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관객은 공연도중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으며, 공연 중인 배우들에게 환호하거나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축제에는 연극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오락들도 동시에 올려졌고, 많은 관객들은 주로 오락에 흥미를 가졌다. 테렌스의 <장모>는 첫번째 공연에서 관객이 줄타기를 보러 몰려가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고, 두번째 공연에서도 관객들이 검투사 시합을 보러 객석을 떠나버려 실패했다.


3) 웅장한 극장

 로마제국시기 1000여 곳의 도시 대부분이 극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극장은 영구적이든 가설극장이든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어느 극장은 지름이 150m, 무대넓이가 100m에 달했다. 대리석, 유리, 도금된 목재, 수천 개의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개울 위로 부는 바람에 기초한 냉방체계를 갖추기도 했고, 관객을 태양으로부터 보호하는 차양이 도입되기도 했다.

 극장 외에도 마차경주를 위한 원형 대경기장, 검투사 시합과 베나티오네스, 나우마키아 등을 위해 원형극장도 많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대개 8-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4) 정규극

 고대 그리스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로마는 제국말까지 여전히 고대 그리스의 드라마에 관심을 기울였다3).

 로마시대에도 그리스적 희극과 비극이 계속해서 공연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로마의 희극은 플라우투스와 테렌스의 작품만 현존하며 비극은 세네카의 작품만 남아있다. 세네카의 비극작품들은 실제 공연되었는지조차 불확실하며, 레제드라마일 가능성조차 있다. 테렌스와 세네카 등 로마 작가들의 정규극 작품들이 당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르네상스 시기의 연극에는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기할 사항은 로마의 희곡이 대개 그리스 작품을 각색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5) 정규극이 아닌 연극들

 정규극인 희극과 비극에 비해 아텔라 소극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텔라 소극은 그리스 시대의 사튀로스극처럼 본 연극 뒤에 공연된 짧고 익살맞은 촌극을 말한다. 사기, 폭식, 싸움, 섹스 등을 주제로 하고 전원적 배경과 인물, 대사를 강조했다4).

 아텔라 소극의 인기가 시들자 마임이 융성했다. 마임은 짧은 연극, 모방춤, 동물과 새의 흉내, 노래, 곡예, 마술 등 모든 종류의 연극적 오락을 통칭한 것이다. 로마의 마임은 화려한 볼거리와 많은 배우들을 이용했으며, 음란하고 폭력적인 내용이 흔했다고 알려진다5).

 목소리를 내지 않는 무용수의 행동과 음악반주로 이루어지는 판토마임도 인기가 있었다. 희극적 형식도 있었지만 진지한 판토마임 형식이 주가 되었다. 평민들에게는 마임의 인기보다 못했지만 황제와 귀족들은 종종 자신들만의 판토마임 연기자를 소유하고 서로 경쟁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6)


6) 연극이 아닌 오락들

 마차경주는 가장 오래되고 인기를 끈 오락이었다. 로마권력에 관련된 4개의 주요파벌들이 치열한 경쟁을 했다.

 검투사 시합은 원래 장례식의 의식으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 국가축제의 일부가 되었다. 검투사를 훈련시키는 특별학교도 있었으며 서기 109년에는 참가한 검투사가 5000쌍에 이르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포로들이 동원되었다. 검투사 시합이 변형된 베나티오네스는 야생동물과 검투사의 싸움으로 맹수사냥, 혹은 인간사냥으로 구성되었다.7)

 가장 커다란 스펙타클은 나우마키아라고 불린 모의해상전투인데, 호수를 파거나 원형경기장에 물을 채워 진행했다. 서기25년에 열린 나우마키아는 2만 명이 동원되었고, 다수가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이러한 오락들은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고, 특정한 배경적 요소들을 사용하고, 여러 기계장치들을 이용하는 등 복잡하고 정교한 무대효과를 연출해냈다.8) 연극은 이런 오락들과 경쟁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9)


7) 배우와 연기

 자신이 쓰고 직접 연기까지 했던 그리스 시대의 극작가들과는 달리 로마시대 극작가들은 직업 제작자에게 제작을 맡겼다. 그러나 직업배우가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배우의 사회적 위치는 다양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낮았다. 특히 정규극 배우가 아닌 마임배우들은 거의 모두가 노예였다.

 정규극의 배우는 모두 남성이었고 연기양식과 관습에서 그리스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마임무대에서는 여성도 등장했다. 로마후기에 가장 인기 있는 배우들은 줄타기, 그네묘기, 요술, 검 삼키기, 불먹기, 무용을 전문으로 하는 마임배우와 판토마임 배우였다.

 정규극은 가면을 사용했지만, 마임은 가면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표정연기가 중요했고, 즉흥에 강한 배우가 성공했을 것이다. 판토마임 배우들은 입이 닫힌 가면을 사용했다. 아텔라 소극은 유형인물에 따라 고유한 가면과 의상이 정해져 있었다.


8) 로마연극의 쇠퇴

 로마 연극은 기독교의 성장, 제국의 붕괴 등과 함께 쇠퇴했다. 로마는 기독교를 박해했으나 기독교의 힘은 점차 증대되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324-337)황제는 기독교를 합법화했고 393년 기독교외의 다른 종교를 불법이라고 공언했다.

 이후 국가는 배우들의 시민권을 부인했고, 종종 연극공연을 금지하려 들었다. 종교회의는 기독교인의 연극관람을 금지했고, 전문연예인과 결혼한 자를 교회에서 추방했다.10) 또한 로마제국이 내분과 외침 속에 몰락을 시작하자 국가는 공연에 대한 승인과 보조를 중지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마의 비극작가인 세네카의 석고상



 

1)로마의 역사는 대개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기원전 509년-27년에 이르는 로마 공화정 시대와 기원전 27년-서기 476년에 이르는 제국시대로 나눌 수 있다.


2)그리스 비극과 희극을 번역하거나 혹은 모방한 것을 정규극이라 불렀다. 정규극에는 마임, 소극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3)로마인들은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온 다른 민족의 사상과 관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민족이 숭배하던 신들도 모두 받아들였다. 특히 그리스의 유산과 문화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기독교 이외의 종교가 불법으로 선포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리스 유산과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4)아텔라 소극은 허풍선이, 노인, 바보, 꼽추의 네 가지 유형적 인물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이러한 점에서 아텔라 소극을 16세기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기원이라고 보기도 한다.


5)마임은 종종 기독교인들의 성찬식과 종교적 신념을 조롱하고 풍자했고, 이로 인해 기독교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래서 마임의 타락에 대해 과장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6)판토마임은 현대발레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7)로마가 피에 굶주렸다는 후대의 인상은 대부분 검투사 시합과 베나티오네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8)산, 나무, 언덕, 시냇물, 숲, 염소, 절벽 등의 배경을 실제로 재현했다. 바닥이 열리고, 승강기가 올라왔으며,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장치도 있었다. 서기100년경에는 스펙터클을 담당하는 특별내각이 창설되기까지 했을 정도로 로마오락의 스펙터클은 굉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9)오락들은 종종 연극적 요소를 취했다. 오르페우스역할을 담당한 범법자가 지옥에서 올라오듯 경기장 아래에 등장했다. 그가 음악을 연주하자 바위와 나무는 길을 비켜섰고 동물들은 그의 발치에서 몸을 구부렸다. 이러한 장면이 끝나자 곰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반면, 연극도 오락에서 사용했던 스펙타클적 요소들을 차용했다.


10)연극(마임과 소극을 포함)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교회의 표적이 되었다. 첫째, 이교적 신들의 축제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둘째, 기독교의 도덕의식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셋째, 종종 기독교 관습을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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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시합을 비롯한 각종 오락이 열렸던 콜로세움 경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