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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서양연극사연구1-고대 그리스 연극

서양 연극사 연구1
 

-류 성-

1. 고대 그리스 연극1)


1) 개괄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수립되면서 과거 경쟁관계의 근원이 되었던 가문의식을 없애기 위해 아티카의 모든 거주자들은 10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졌다. 부족들은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2) 에서 열띤 경연대회를 펼쳤다. 새로 만들어진 부족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 등을 자극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경연대회의 종목은 초기에는 디티람보스라는 춤과 노래로 이루어진 합창곡이었다. 이후 디티람보스가 연극으로 발전3)함에 따라 경연대회의 주 종목은 연극경연대회로 되었다. 며칠에 걸쳐 지속된 축제에서 가장 절정의 순간은 연극 시상식이었다. 그만큼 연극은 가장 인기 있는 예술형식이었다.4)


2) 제작과 관람

 축제에서 자신의 희곡이 공연되기를 원하는 극작가는 집정관(아르콘)에게 의뢰했고, 희곡이 선정되면 집정관은 코레고스를 선택했다. 코레고스는 아테네의 ‘부유한 시민’으로 시민적 의무감, 명예 등의 이유로 극의 제작에 필요한 대부분의 비용과 의상, 소품 등을 책임졌다.5)

 극장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관람기금제도가 있었을 만큼 시민들 모두에게 열려있었지만 노예와 여성들도 관람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루에 3편의 비극6)과 1편의 사튀로스극7)이 연속으로 공연되었다. 공연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으므로 극장 내에서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는 일도 상당했을 것이다.

 관객은 공연 중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표현하며 반응했으며, 이따금 배우들에게 야유를 보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이스퀼루스는 공연 중 관객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제단으로 대피한 일도 있었다.


3) 연출가

 당시 거의 모든 작가들은 작품에 직접 출연했고, 코러스를 훈련시켰고, 음악을 작곡하고 안무도 했으며, 공연의 모든 부분을 감독했다.8) 그리하여 통일성의 주된 근원은 작가 겸 연출가였으며 그의 작업은 오늘날의 연출처럼 복잡했을 것이다.

 작가 겸 연출가는 디다스칼로스라고도 불렸다. 디다스칼로스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배우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공연을 통해 관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연극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평가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4) 배우와 연기

 비극작가는 최대 3명의 배우만 이용할 수 있었다. 그 3명은 일인 다역으로 여러 명의 역할을 연기했으며, 남성이 여성의 역할까지 맡아 연기했다.

 아마도 그리스 배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발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발성의 아름다움과 분위기, 등장인물에 따라 발성법을 바꾸는 능력이 배우를 평가하는 기준이었을 것이다. 배우들은 나이나 성과 관련된 특징보다 적절한 감정이 실린 음성을 발산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게다가 극은 배우에게 대사뿐만 아니라 노래도 요구했으므로 배우들은 오늘날의 오페라 가수처럼 음성을 많이 훈련했고 연습했을 것이다.

 그리스 배우들은 가면9)을 썼기에 표정연기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군중이 몰린 거대한 극장에서 관객들을 사로잡아야 했기에 비극에서 몸짓과 동작은 단순화되고 컸으며, 희극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방향으로 과장했을 것이다. 대사의 전달 또한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웅변적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350년경이 되면 그리스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스타급 배우들도 출현했다고 한다.


5) 코러스

 초기에는 배우1명과 코러스10)로 연극이 진행되었기에 코러스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러나  점차 코러스의 역할 비중은 줄어들었다. 코러스의 규모 또한 50명에서 15명, 3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

 대개 코러스는 프롤로그 다음에 장엄한 행진과 함께 입장하여 극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코러스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으며, 등장인물과 대사를 주고 받기도 했다. 비극공연에서 각 코러스는 한 작가에게 소속되어 3편의 비극과 1편의 사튀로스극 공연에 춤과 노래를 모두 익혀야 했고 각 공연에 필요한 각기 다른 의상을 입었다. 

 상당히 많은 춤과 노래를 익혀야 했고, 극 중 코러스의 역할이 중요했으므로 코러스의 연습에는 장기간이 소요되었다. 코레고스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가장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 바로 코러스를 연습시키는 것이었다. 운동선수의 훈련처럼 길고 힘든 것이었는데, 코러스들은 연습 외에도 식이요법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

 코러스들은 원래 비전문인들이었으나, 기원전 350년경에 이르면 전문트레이너에 의해 훈련받은 전문가수 겸 무용수가 비전문적인 코러스를 대체하였다.


6) 환영주의와 관습주의

 무대배경에서 환영주의보다 관습주의가 지배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떤 학자들은 환영을 줄 수 있는 세트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하고, 어떤 학자들은 상징적 소품으로 해결했다고 하며, 또 다른 이들은 대사로 암시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배우들이 무대를 떠났다가 돌아오거나, 한 바퀴 도는 식으로 장소의 변화를 표현했을 수도 있다.
 
피나케스11), 페리악토이12)와 같은 무대장치, 엑키클레마13)와 마키나14) 같은 무대기계를 사용했던 기록은 있다. 마차, 관, 램프, 가구 등 소품과 장치들이 사용되었음이 분명하지만 환영의 목적은 아니며 일부 장면의 극적인 행동을 위한 것이었다.

 의상과 가면도 확실히 관습화되었는데, 예를 들어 노예는 빨간 머리카락, 매춘부들은 노란색이었다.


7) 희곡의 특징

 그리스 희곡에 관한 정보는 거의 전적으로 4명에 의존한다.

 비극은 아이스퀼루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쓴 작품들만 남아있다. 남아있는 극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극의 구조는 <프롤로그-파라도스-에피소드(3-6개)-엑소도스>를 가진다. 공격점이 늦어 상당한 분량의 발단을 가진다. 죽음과 폭력 등은 무대 밖에서 행해진다. 행동의 시간은 지속적이고, 대부분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모두 신화나 역사에 근거한 이야기15)이며, 인물묘사에서 심리적 특성을 강조했다.

 (구)희극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의 희곡은 그 시대의 사회, 정치, 전쟁 등에 관한 풍자를 담고 있으며 기발한 착상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헬레니즘 시기 (신)희극은 메난드로스의 작품만 전해지며 가정사, 사랑 등과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경향이 강했다.

 원래는 비극이 인기가 높았지만 기원전 4세기부터 희극이 비극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8) 헬레니즘 시대의 변화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인도와 이집트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이 시기에 그리스 연극은 지중해 동부 전 지역과 인도까지 퍼졌다. 이 시기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른다.

 알렉산더를 비롯하여 그 이후 통치자들은 승리를 기념하고 자신의 명예 등을 목적으로 수많은 축제를 확립했다. 모두 종교적 의미가 담긴 축제들이었지만 종교적 효과는 거의 사라졌으며 공연의 내용도 점점 더 세속화되었다.

 축제가 급속도로 팽창하자 전문연기자들이 출현했고 그 결과 헬레니즘 시대 연극은 완전히 전문화되어 유명배우들은 그리스 전 지역을 순회 공연했다.

 이 시기에 <디오니소스의 예술가들>이란 조합이 만들어져 축제들에서 공연될 극을 제작했다. 조합에는 시인, 배우, 코러스, 트레이너, 음악인, 의상제작자들 등이 가입되어 있었다.  헬레니즘 세계가 수많은 국가로 분열되어 전쟁을 할 때조차 조합원의 안전을 위한 국제협정이 맺어졌다고 한다.


9) 고대 그리스 사상과 연극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 인간의 지혜와 힘을 능가하는 신적 힘에 대해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신을 불행의 근원으로 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에우리피데스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신들의 정의감에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상이 깔려 있다.

 피타고라스가 "인간은 모든 사물의 척도다"라고 공언했을 만큼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성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 그리스인들은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높았다. 신을 인정했지만 신을 오히려 인간과 같이 인식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변덕스럽고,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화를 내거나 원한을 품기도 하고, 신들끼리 종종 의견이 달라 다투기도 한다. 


10) 신빙성의 문제

 사실 고대 그리스 연극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신빙성이 없다. 가장 확실한 증거물인 희곡조차 서기 10세기, 즉 처음 공연된 이후 1500년이 지난 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손으로 써 내려 왔을 복사본들이 정확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비극의 경우, 5세기에 씌어진 1000편이 넘는 희곡 중 고작 31편만 남아있으며, 희극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만 남아있다. 헬레니즘 시기에는 64명의 희극작가들이 있었고 1400편이 넘는 작품이 공연되었지만 남아있는 것은 메난드로스의 <불평꾼>이란 한 작품 밖에 없다. 그것조차 1957년에야 발견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 연극의 특징을 일반화시키는데 상당한 무리가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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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 그리스 연극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기원전 6세기에서 로마제국 발흥까지 사이에, 그리스의 아테네 등지에서 상연된 연극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5세기의 연극을 가리킨다. 

2)5세기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3일은 연극경연대회(매일 4편 가량), 2일은 디티람보스 경연대회가, 하루는 성인 코러스 팀의 경연대회, 하루는 소년 코러스 팀의 경연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3)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디티람보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디티람보스는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합창곡이다. 풍요, 술, 환락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의식은 초기에 만취, 난교, (인간을 포함한) 살육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특성은 점차 사라졌다.

4)아티카에서는 매년 디오니소스를 위한 네 번의 정기적인 축제가 있었다.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 시골 디오니시아 축제, 레나이아 축제, 안테스테리아 축제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에서만 연극이 공연되었으나 5세기 후반에 이르면 다른 축제들에서도 연극이 중요한 행사로 되었다.


5)코레고스는 작가와 공동으로 수상했고 이는 커다란 명예를 뜻했다. 어떤 상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연극경연대회는 국가적인 행사였으므로 국가는 우승자를 기록했다.

6)희극은 도시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공식승인과 재정지원을 받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받아들여졌다.


7)사튀로스극은 비극이 끝나면 올려지는 익살맞은 촌극으로 알려져 있을 뿐 구체적 형식을 알 수는 없다. 경연대회에 참가한 비극작가는 3편의 비극 외에도 1편의 사튀로스극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했다.

8)비극작가는 거의 모두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출했으나 희극작가는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 맡겼다.


9)그리스 연극에서는 플룻 연주자를 제외한 모든 출연자들이 가면을 썼다.


10)기존의 집단적인 춤과 노래였던 디티람보스에 테스피스가 배우를 도입함으로써 배우1인과 코러스로 변화되었다. 이후 아이스퀼루스가 제2의 배우를 도입했고, 소포클레스가 제3의 배우를 도입했다. 집단적인 춤과 노래로 이루어진 디티람보스는 이렇게 연극으로 변화했다.


11)피나케스 : 그림이 그려진 화판


12)페리악토이 : 삼면에 각각 다른 그림이 그려진 삼각형의 각기둥


13)엑키클레마 : 스케네의 문을 통해 어떤 장면이나 장치가 회전하면서 나오는 장치


14)마키나 : 신들의 등퇴장, 하늘을 나는 장면 등에 사용된 기중기 같은 기계장치.


15)각 작가는 신화에는 없는 등장인물도 만들어내는 등 자유롭게 각색할 수 있었으므로 같은 이야기에서 출발했어도 다양한 해석이 담긴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또한 당시 극을 관람하는 재미 중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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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연극을 재현한 공연의 한 장면
코러스들이 춤과 노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