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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10.4선언 1돌 통일문화제 연출작업 후기


 

2008년 10.4선언 첫돌기념 통일문화제 연출작업 후기


-류 성-


일시 및 장소 : 08년 10월 4일 서울역



2008년 9월 중순경, 10.4 선언 첫돌 기념 통일문화제의 연출제안을 받았다.


2주밖에 남지 않은 기간만 보더라도 쉽지 않은 과정이 될 것이라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행사 연출을 몇 번 해본 나로서는 넘어야할 수많은 걸림돌이 눈에 선했다. 게다가 2주밖에 남지 않은 시간은 연출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가능성과 노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재미없고 고생스러운 작업이 될 것이 확실한 것이다.


잠깐동안 망설였지만 그래도 맡기로 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나는 우리민족과 통일을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죄책감을 내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에서 면피해보려는 의도는 그리 순수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그렇게라도 면피하고 싶었다.


10.4 통일문화제를 준비하는 작업도 역시나 예산이 애를 먹였다. 민족민주진영에서 주최하는 대부분의 행사마다 발생하는 고질적인 문제다. 부족한 예산도 문제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꾸 줄어들거나 그마저도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번에도 회의 때마다 바뀌는 예산안에 따라 연출안을 몇 번이고 다시 써야 했다.


출연진을 섭외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기껏해야 열흘 남겨두고 섭외를 해야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연출안도 작성되지 못한 채로 일단 섭외부터 해놓는 식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막판까지 요동치는 예산안 때문에 섭외한 출연진들 중 일부를 취소하는 실례도 범해야 했다.


또한 연출적으로 새로운 지점을 보여주기 힘들다는 것도 문제였다. 대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615, 815에 이어 10.4까지 두달에 한번꼴로 통일행사에 참가하는 셈이다. 그런데 행사들이 제목과 행사장소만 다를 뿐 비슷비슷하다면 무슨 재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통일이라는 당위를 앞세워 행사에 동원하는 꼴이 되지 않으려면   매 행사마다 연출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그러나 2주밖에 남지 않은 시간은 짜집기라는 기술외에는 새로운 시도의 가능성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조건은 좋지 않았으나 그래도 잘해보고 싶었다.  당시 정부는 615와 104를 무시하는 발언을 거듭하며 이제껏 전진해온 통일의 흐름을 되돌리려고 했고, 금강산 총격사건으로 남북관계는 극도로 경색되었으며, 반북세력들은 폭언을 서슴치 않았는데, 급기야 실천연대를 비롯한 통일운동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전개되었다. 나 또한 10.4 문화제를 준비하는 기간에 국정원에서 새벽에 집으로 쳐들어와 압수수색을 했는데 이러한 조건은 나에게 하나의 자극제로 작용했다.


엄중한 정세 때문에 때문에 범민련과 같은 통일운동단체는 10.4 통일문화제에 대한 열의가 매우 높았다. 예산이 급기야 반이상 줄어들어 행사자체를 매우 왜소하게 치러야할 지경에 처하게 되자 범민련에서 몇백만원의 큰돈을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민주노총 방송차량으로 진행할뻔한 행사가 그나마 무대와 조명, 음향이라도 갖추고 진행하게 된 것은 범민련의 결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범민련이라고 무슨 돈이 있었으랴. 아마도 하반기에 쓰려고 계획했던 재정을 쏟아붓고, 지역에 모금을 하고, 거기에다 선생님들께서 추가로 어떻게든 마련해 볼 생각인 듯 했다. 행사를 마친 그날 밤, 범민련 선생님 한 분이 두꺼운 봉투를 기획단장에게 전해주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역 광장에서 열리는 행사이기에 통일운동대오들도, 주변의 시민들도 함께 할 수 있는 행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세가 엄중하니 마냥 가볍고 즐겁게만 연출할 수도 없었다. 잘못하다간 어느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행사가 되기 십상이었다.


처음엔 나는 오후시간에는 시민들과 함께 하는 거리 예술제를 만들고, 저녁에는 임진각에서 돌아오는 대오가 참가하는 짧고 굵은 정치문화행사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예산이 줄어들면서 이 안은 결국 페기되었다. 대신 낮에는 그림공장의 야외 전시회를 진행하고, 저녁에 하는 문화제의 덩치를 키우는 것으로 다시 짰다.


그림공장의 많은 작품들은 오후의 서울역 광장을 통일거리로 만들어주었다. 서울역 광장은 사람들의 이동이 빨랐지만 그럭저럭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구경을 했다. 애초의 계획대로 공연마당까지 배치되었으면 좋았을거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전시와 무대의 설치, 행사진행 등에 이르기까지  대학생 자봉단이 많은 수고를 했다.


문화제 연출안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걸판의 역할이었다. 걸판의 작품 중 '이 연사 외칩니다'라는 기동선전극이 있는데 이를 부분부분 쪼개어 배치함으로써 전체 행사를 이끌어가도록 했다. 딱딱한 연설조의 사회자가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걸판의 배우들이 코믹하게 진행함으로써 시민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하며 동시에 내용도 담보해내려는 의도였다.


전체 행사는 논리적 흐름보다는 되도록 정서적인 흐름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성했다. 공연팀의 색깔과 특성을 고려하여 순서를 배치했고 각 공연과 공연의 사이에는 틈이 없고 연속적으로 진행되도록 했다.


걸판 배우들은 자칫 무겁고 엄중하기 쉬운 내용을 날카롭게 짚어내면서도 모두가 웃을 수 있도록 코믹하게 풀어냈다. 청춘의 영상들도 내용을 잘 전달하면서도 다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전체 흐름을 이어주었다.


노래패 우리나라와 아름다운 청년은 모호한 연출의도를 구체적으로 소화해주면서 관객들과 무대의 일체감을 형성해주었다. 대학생 율동패의 공연도 발랄했으며, 특히 노동자 통선대의 율동공연은 폭발적인 환호를 받았다.


행사에는 조금 낯선 팀도 무대에 올랐는데 ‘춤을추는사람들’이라는 무용단체다. 예술감독님과 대표님은 턱없는 출연료도 아랑곳 없이 열과 성의를 다해 작품을 준비해주었다. 웅장한 아리랑 환타지 음악에 십여명에 이르는 춤꾼들이 추는 춤은 그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을 충분히 사로잡았다.


행사는 잘 마무리되었고 후일 들었던 평가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범민련을 비롯한 참가단체들의 결의와 출연진들의 수고 덕택이었다. 2주간의 악전고투를 겪었고, 연출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못해 썩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면피를 할 수 있었던 나는 그 날 뒷풀이에서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화제라는 행사의 연출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남는다. 매년 몇차례씩 진행되는 비슷비슷한 문화제에 대중들은 식상해하고 예술가들도 관성적으로 임하게  된 지 꽤 오래되었다. 그것조차 벼락치기식으로 준비되는 경향이 더 심화되고 있어서 도대체 예술행사인지 집회에 공연을 좀 많이 넣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혁신이 시급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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