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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야기

놀이패 걸판 상임협력연출 후기

 

놀이패 걸판 상임협력연출 후기


-류 성-

일시 :  2008년 7월 - 2009년 1월까지 6개월 간


08년 7월 즈음이었다. 안산에 사무실을 둔 놀이패 걸판 식구들과 안산 한양대학교 부근에서 술을 마셨다. 낮술이었던 탓에 밖은 아직 환했다. 맥주 몇 병을 사들고 학교 교정으로 들어가 2차를 했다. 이 자리에서 걸판 단장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걸판의 상임연출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상임연출이란 제안을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걸판과 함께 작업을 해보자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걸판의 극작과 연출을 맡고 있는 오세혁군도 함께 작업할 동지가 필요로 했던 듯 하다. 어쩌면 그보다 내가 극단이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는 처지가 마음에 걸렸을지 모른다.


나로서는 고맙기도 하고 욕심도 나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덥썩 받아 물기에는 내 스스로 몇 가지 걸리는 것들이 있었기에 협의를 했다. 그 결과 상임협력연출이라는 길고 이상한 직책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 나는 걸판에 자주 들락거리며 작업을 함께 했다.


나는 매주 화요일마다 정기적으로 걸판을 방문했는데, 오후 4시간 동안의 연습운영을 맡았다. 나는 1시간 가량을 이론교육시간으로, 3시간은 작품 워크샵 시간으로 배분하여 운영했다.


예술가들에게 이론 및 지식의 습득이란 중요한 것이다. 현장경험이 늘어나더라도 이론적 뒷받침이 없으면 한계를 많이 느끼게 되고, 급기야 자신이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나 공연준비과 일상업무를 소화하면서 공부를 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이 걸판 또한 예술이론에 대한 공부는 개인의 몫이 되어 있었다.


나는 여러가지 현황을 고려하여 걸판의 일정에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하며 가능한 쉽게 접근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참가하는 사람들의 준비가 많이 필요한 세미나 형식이 아니라 강의형식으로 진행했으며, 내용도 기초개념을 잡는 것을 중심에 두고 평이한 수준으로 준비했다.


이론교육은 크게 4가지의 파트로 구분하여 커리큘럼을 구성했는데, <문예운동>, <작품분석>, <연극이론 기초>, <공연을 위한 상식>이 주요내용이었다. 각 분야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순서대로 진행되지는 않았음)


-01 연극작품으로 보는 간략한 예술사

-02 문예운동의 개념

-03 일제강점기 진보적 연극운동의 경험

-04 플롯의 분석

-05 인물의 분석

-06 작품분석실제

-07 꼬메디아 델 아르테

-08 스타니슬랍스키와 브레히트

-09 연극 윤리에 대하여

-10 공연을 위한 음향상식

-11 공연을 위한 조명상식

-12 텍스트의 분석과 배우들의 태도


1시간 가량의 이론 교육이 끝나고 나면 작품 워크샵을 2-3시간동안 진행했다. 내가 작품 워크샵에서 중점을 둔 것은 기존 걸판의 연출 및 연기와는 다른 스타일을 시도해보는 것이었다.


걸판은 희극과 야외공연을 주로 하게 되므로 제시적인 스타일의 연기를 한다. 다년간 수많은 공연경험을 통해 기존 스타일이 어느 정도 구축되어 있으므로, 다른 스타일을 시도한다고 실이 많을 것 같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득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걸판 식구들도 나의 제안을 믿고 전적으로 따라 주었다.


여러 가지 텍스트를 물망에 올려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내가 쓴 작품인 "나의 소원"을 선택했다. 단막극인 이유도 있었고, 등장인물의 수가 걸판 단원들의 수와 일치했다는 점도 작용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작품의 연출 작업에 그다지 신경을 빼앗기지 않고 연기에만 집중하여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작품 워크샵에서 중점을 둔 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작품의 분석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 둘째, 연기에 대한 지도는 답을 주지 말고 질문을 자꾸 던지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 셋째, 관객을 의식하지 말고 연기하도록 주문할 것. 넷째, 제시하려고 들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 충분히 집중하라고 독려할 것.


그러나 작품 워크샵은 충분한 성과를 내올 정도로 진행되지 못했다. 걸판의 많은 공연일정들로 인해 워크샵 시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웠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거의 격주 혹은 3주에 한번 꼴로 진행되다보니 연속성도 떨어졌다. 작품이 아니라 몇 개의 장면을 선정하여 워크샵을 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매주 화요일에 진행한 이론교육과 워크샵외에 걸판의 기존 작품 중 일부인 <기적소리>, <시간을 돌려다오>, <국보를 살립시다> 등의 작품에 대해 연출작업도 진행했다. 기존에 공연을 했던 작품들이었기에 연출과 연기가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는데, 나는  때때로 연습을 직접 운영하며 몇 가지 수정을 해주었다. 또는 연출자가 잘 안 풀리는 부분에 대해 조언을 주기도 했다.


사실 이런 작업은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작업이다. 연출자가 두 명인 셈이므로 연출자들끼리 의견이 충돌할 소지도 많고, 배우들에게 혼란을 줄 위험도 있는 것이다. 하기에 나는 매우 조심스러웠고, 최대한 연출자의 연출의도를 존중하는 입장을 취하려고 애썼고, 나는 협력일 뿐 최종판단의 권한은 언제나 연출가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분초를 다투는데다가 즉흥적인 창조성이 중요한 연극작업의 특성으로 인해 모든 것을 사전에 조율하고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걸판 식구들 덕택에 있을 수 있는 위험은 모두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맡길 때 전적으로 맡겨주었고, 최대한 나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작품에 대한 연출 작업은 정기공연인 <그와 그녀의 옷장(2009.1.17~18 안산예술의전당)>으로 이어졌고, 걸판 식구들만큼은 아니겠지만 내 작품처럼 애정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다. 대본작업, 연출작업, 극장에서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내 나름의 열의를 가지고 도왔다. 나는 도왔으나 걸판 식구들은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식구로 대해 주었고, 또 한 명의 연출가로, 선배로 대해 주었다.


걸판의 상임협력연출은 정기공연을 끝으로 정지했다. 6개월간 진행한 셈이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시즌1 개념으로 정기공연까지라고 설정했기 때문이다. 잠깐 숨을 고르고 내 나름대로의 고민에 집중해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끝낸 것이 아니라 정지라고 한 것은 향후를 생각하기 때문인데,시즌 2를 계속 진행한다면 좀 더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의 역할이 걸판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많은 성과가 있었다. 작업과정에서 걸판 식구들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며, 연출/배우와 연기/연극예술에 대해 더 깊은 사색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좋은 동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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