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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이야기

명절에 조카들에게...



해마다 추석과 설 등의 명절이 되면 큰집으로 내려갑니다. 차례도 지내고 오랫만에 만난 친척들과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몇 해전부터 자꾸 마음에 안드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절값이라고 돈을 주는 일 말입니다. 집안어른들도, 사촌형님들도 명절때마다 5천원, 만원씩 아이들에게 쥐어줍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어린 마음이지만 어른들에게 절을 할때 건강하시라는 마음만을 온전히 담아서 절을 할 수 있었고, 어른들도 돈을 주는 대신 절값으로 덕담을 해주셨습니다. 말씀해주시는 덕담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참 좋아했구요.

제가 초등학교나 중학교 다닐때, 명절이후에 학교에 돌아가 친구들끼리 이번 명절에 세뱃돈을 얼마 받았다며 자랑할때 저는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어릴때는 좀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철이 좀 들고 나니까 오히려 명절에 돈을 주고 받지 않는 우리 큰집의 분위기가 자랑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자랑스러운 우리 큰집의 분위기가 어느새 점점 사라지더니 아이들에게 돈을 쥐어주는 것이 이젠 관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절을 받으면 덕담대신 지갑을 열고, 아이들도 돈받을 준비를 합니다.

이게 안타까웠던 저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10명에 이르는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적고, 한명한명에게 맞을만한 선물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 녀석은 내년에 중학교를 들어가니까 노트랑 필기구를, 이 녀석은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니까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누구는 동화책을, 누구는 인형을, 누구는 조립식  완구를...

그런데 이게 참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 한명한명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카들과 자주 보고 사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평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하지요.

게다가 아이들 선물은 왜 그렇게도 찾기가 어려운지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1-2시간이면 끝나겠거니 생각했는데 저녁밥도 건너뛸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다 골랐다 싶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한명을 빼먹은 것을 발견했고, 택시를  잡아타고 마침 문을 닫으려는 화방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졸음을 이겨가며 한밤중에 아내와 함께 선물들을 포장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에 어른들이 한명한명에게 들려줄 덕담을 준비하시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겠구나 싶었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걱정이 몰려왔습니다. 사실 힘들게 준비한 선물들이긴 했지만 정작 아이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루종일 고생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고, 우리가 이런다고 이미 관례처럼 굳어진 분위기가 바뀔까 싶기도 했습니다. 돈계산을 해보니 돈으로 줄때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간 것도 조금 속이 상했습니다.

다음날, 시골에서 가족들이 모였고 저는 아내와 함께 조카들에게 돈 대신 선물을 건네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어? 우와~!"하며 흥분된 마음으로 선물 포장지를 뜯어보았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자기가 받은 선물을 아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서로 자기가 받은 선물을 자랑하며 하루종일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니 전날에 고생했던 기억과 걱정스러웠던 마음은 한순간에 모두 풀어지고 흐뭇한 마음만 가득해졌습니다.

다음 명절에도 조카들의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여전히 고생스럽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보람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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