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진숙아 사랑한다 1 <도산>
<진숙아 사랑한다> 1장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아무래도 우리 공장에 도산이 들어온 모양입니다." "아들 관리를 우째했길래 도산이 들어오노, 도산이!" 아마 나이가 젊은 분들은 "도산"이 무슨 뜻인지 모르실겁니다.
도산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줄임말입니다. 1960-1970년대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에서 도시산업선교회는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참혹한 노동현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양심적인 목회자들은 일반적인 선교활동이 아니라 공장으로 뛰어들어 노동법을 교육하고,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했습니다. 유명했던 동일방직노조의 결성에도 산업선교회의 영향이 컸습니다. 또 그 당시 대학생들만이 아니라 목사님들도 위장취업을 많이 했답니다.
초기에 일부 기업주들은 산업선교회를 환영했답니다. 종교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이 기업에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죠. 그런데 "목수 출신인 예수님도 노동자였다"고 말하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얼마나 눈엣가시였겠습니까. 성경이나 읽어줄 것이지 노동법, 노동조합 얘기를 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산업선교회는 탄압도 많이 받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산선"이라고 불렀지만 정부언론기업은 의도적으로 "도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공장에서 "도산이 들어오면 도산한다!"라는 플랑을 걸고 관제데모를 했습니다. 무시무시했던 보안사,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분들도 많았지요.
첨부한 사진은 도시산업선교회 모임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신문기사입니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진숙아 사랑한다 2 <서점>
작품에는 "서점"이 중요한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노동자인 진숙이는 선교회 모임을 위해, 다방레지인 진숙이는 틈틈히 책을 읽기 위해 서점을 자주 이용합니다. 유인물 뭉치를 들고 있다가 잡힌 대학생 진숙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절, 서점은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유신을 반대하는 모든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민주화 운동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건 체포와 구금의 공포 뿐만은 아닙니다. 독재의 실상을 널리 알려내기도 하고, 뜻있는 사람들이 모임도 해야 하는데 그 자체가 차단당했습니다. 그래서 서점은 좋은 매개가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부산에 있었던 협동서점의 모습입니다. 서점에는 "양서는 양심을 만들고 양심은 좋은 세상을 만든다"란 글귀가 씌어있었다고 합니다. 2층에서는 역사반, 사진반, 독서토론반, 야학 등 각종 소모임이 열렸습니다. 노동자들은 노동법을 공부하며 노조결성의 꿈을 키웠고 대학생들은 시국을 토론하며 뜻을 세웠습니다.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님을 모셔서 대화나누는 시간도 가졌구요.
가판대도 보이실겁니다. 가판대를 열면 비밀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각종 불법(!) 유인물과 금서들이 숨겨져 있었다는군요. 아무래도 서점의 특성상 인쇄소, 제본소와 관계가 밀접하고, 이를 이용해 감시의 눈을 피했던거죠.
이런 서점들 역시 탄압도 많이 받았습니다. 시국사건이 터질때마다 압수수색을 당하거나 서점 주인과 직원들이 끌려가곤 했죠.
1980년대가 되면 대학 주변에 많은 사회과학 서점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약속도 서점을 이용했고 선물도 책을 주고 받는 풍속이 생겼습니다. 민중가요 테잎도 대개 이 곳을 통해 보급되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이 되면 거의 모든 서점들이 문을 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경영난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이 아픕니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진숙아 사랑한다 3 <부마항쟁>
“3일째 되던 날 부산으로 계엄군들이 들어왔습니다. 착검을 한 공수부대하고 탱크 장갑차들이 하루종일 부산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소문에는 죽은 사람도 있고 암매장도 했다던데 우째됐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마 소문이 맞을 겁니다.”
작품은 부마항쟁의 전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합니다. 부마항쟁은 여타의 항쟁들에 비해 그리 많이 알려진 편이 아닙니다. 항쟁이란 이름만 붙었을 뿐,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등은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부마항쟁 특별법이 발의되었지만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지요. 그런 새누리당이 요즘들어 부마항쟁 재단을 만들겠다, 특별법을 만들겠다는 얘길합니다. 믿을래야 믿을수가 있어야지요.
처음엔 대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었는데,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거대한 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실제로 항쟁을 끌고 나간 사람들은 공돌이, 공순이, 구두닦이, 건달, 창녀촌의 아가씨들, 장사치 등 소위 핫바리 인생들이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학생들은 집이나 학교로 돌아갔지만, 핫바리 인생들은 매일 밤을 새워가며 싸웠습니다. 항쟁중에 끌려간 사람들 중 7-80%는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위는 매우 격렬했습니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관공서들을 공격했습니다. 그것들은 유신 억압의 상징적인 기관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빨갱이, 폭도, 배후조종 운운하며 매도하던 기자들도 멱살을 잡히기 일쑤였습니다. 특이한 건 몇몇 부자들의 집도 공격했다는 겁니다. 박정희 경제 신화를 얘기하지만, 실상은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부자들에 대한 분노가 심각했음을 반증합니다.
인상적인 이야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위가 한참일 때 어떤 사람이 “김영삼! 김영삼!”하고 외쳤답니다. (그 당시에 김영삼은 야당인 신민당 총재였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조용히 해라! 시바, 우리가 지금 영삼이 때매 데모하나!” 또 한가지 이야기는 경찰서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경찰서를 습격한 시위대가 박정희 사진을 떼어 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이어 옆에 걸린 태극기마저 떼서 던지려는 순간 “야, 임마! 태극기는 놔뚜라!”
추신. 팟캐스트 라디오 반민특위 37회 "응답하라 10.26"에서 부마항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순서인 라디오 드라마에는 부마항쟁 이야기가 극화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진숙아 사랑한다 1장의 번외편이라고 하더군요. 예. 맞습니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진숙아 사랑한다 4 <김경숙>
노동자 진숙이를 구상하고 쓸 때, 모티브가 된 인물이 있습니다. YH사건의 김경숙이라는 여성노동자입니다.
1970년대 대한민국 최대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은 회사를 폐업해버립니다. ‘수출경기 둔화로 인한 경영난’을 이유로 들었지만 그건 핑계였습니다. 그 동안 사장은 막대한 회사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게다가 노동조합의 적극적인 활동을 파괴하려는 것이 폐업의 본질적인 이유였습니다. 노동자들은 회사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기업과 정부는 이를 무시해버립니다. 현재의 쌍용자동차와 흡사하지요.
모든 출로가 막힌 노동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알선으로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정부는 전투경찰을 투입하여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치고, 이 와중에 한 여성 노동자가 옥상에서 추락하여 사망합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여성 노동자는 스물 한 살, 이름은 김경숙입니다. 노동조합 집행부를 했었지요. 그녀의 일기 몇 부분을 들춰봅니다.
...펜벗을 통해 알게 된 모르는 사람과의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하여 만난다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아쉬움에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한 번 사방을 둘러봤다. 나의 기대보다 실망이 커서 차마 만나지는 못하고 발길을 돌리고 튀김집에 들어가 튀김을 즐겁게 먹고 숙소로 돌아올때, 나는 정말 나쁘다. -78년 1월 8일
요즘말로 ‘소개팅’을 하러 나간 모양입니다. 펜팔로 알게 된 사이라 얼굴은 몰랐죠.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나가긴 했는데, 그 사람 외모가 영 아니었나 봅니다. 바람을 맞히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런 자신을 자책합니다. 연애하고픈 스무살 처녀의 설레임, 그리고 깨끗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수고의 값을 받은 월급날을 맞이하여 힘과 피와 땀이 스며들은 월급을 받았을 때 나는 과연 돈을 소비하는데 무엇에 썼는가... 나 자신이 보다 돈을 응용했을 때 한 푼을 쓰더라도 용모 있고 나에게 보람되게 느낄 수 있도록 검소한 생활속에 점점 늘어나는 통장을 바라볼 때 모든 고통이 사라지기도 한다. 77년도 결근을 하지 않아 월차 수당이 나와서 고향에 보내줄 돈을 걱정하였으나 안심이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나의 행복감. 희망의 빛. -78년 3월 14일”
그 시절 대다수의 여공들의 삶의 보람, 목적이 이것입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고향에 돈을 보내는 것. 김경숙도 이것이야 말로 행복이고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문장의 힘과 피와 땀이라는 구절에서는 열악하고 힘든 노동환경이 스며있는 듯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글 한 자라도 깨우치며, 시간의 여유를 갖지 않고 주어진 시간속에 지내고 있지만 하나의 꿈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구나.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의 어려움을 이기며 굳굳하게 힘을 잃지 않고 힘차게 살아간다.-78년 4월 17일”
당시에 김경숙은 야학에 다닌 모양입니다. 문장구조와 어법, 철자 등이 군데군데 어색한 걸 보면 중등, 고등학교를 못 다닌 게 아닐까 합니다. 당시 대부분 여성들이 그랬습니다. 초등학교만 다니고 집에서 농사 일 돕다가, 열여섯쯤 되면 공장에 취직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오빠, 남동생의 공부 뒷바라지 했죠. 배우고 싶은 열망으로 야학에 다니긴 했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여공들은 하루 열두시간, 열여섯시간씩 일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김경숙에게 격변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현장에서 같은 동료들이 사직하는 바람에 어수선하고 울적한 마음이었다. 그동안 마음의 갈피를 잡을 길이 없어 헛된 길을 생각하였으나 야학에 다니며 한없이 배우고 싶고 글을 바라볼때 열심히 하고 싶다. 야학에 가지 않고 대의원들과 친목을 도모하며 새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모르고 있었던 일, 임금착취 시키기 위해 휴가를 주며 자진사퇴할 때 내 마음은 아팠다. 이런 일이 있지 않도록 토론을 하며 싸워야 한다. 개개인을 생각하지 않고 뭉쳐서 인원 감소를 막고 나의 권리와 인격을 찾아야 한다. 이전 관계로 마음의 안전을 오늘의 이 시간을 이용하여 찾았다. “본 공장을 돌려라”, “고용 안전 찾차” “단결, 권리, 뭉침, 싸움, 비평,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78년 5월 2일“
이 시기쯤, 회사는 폐업을 시작했고, 사직서를 강요하면서 공장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헛된 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싸울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노동조합활동을 시작하며 그녀의 의식은 격변합니다. 그녀는 ‘내가 모르고 있었던 일’을 알게 됩니다. 착취, 토론, 비평, 고용안전, 노동운동, 단결, 권리, 싸움, 인격 등 그 전에 쓰지 않던 단어들을 쏟아내는 걸 보십시오. 그 후 어느 날, 김경숙은 다음과 같은 글을 씁니다.
“성숙해져버린 몸과 귀, 그리고 사상과 이념. 어느 누가 이토록 우리를 성장시켰을까?”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진숙아 사랑한다 5 <국기에 대한 맹세>
극을 시작하면 국기에 대한 맹세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길을 가던 사림들 모두 발길을 멈추고 경례를 합니다. 엄숙하고 경건하게. 그런데, 그 틈바구니에서 오직 진숙이만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30대 이상은 대부분 기억할 겁니다. 5시만 되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 나오고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가슴에 손을 얹고 경례를 했던 그 풍경. 법적 강제는 없었다지만, 경례를 하지 않으면 종종 빨갱이 소리를 듣기도 했죠. 애국가 부르지 않는다고 종북낙인을 찍어대는 요즘이 서글플 따름입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시대별로 다릅니다. 68년에 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 할 것을 다짐합니다.”
평화통일인지 북진통일인지 몰라도 어 쨌든 이때만 해도 통일은 경제발전과 함께 지상최대의 과제였습니다. 정의와 진실로서란 구절은 모순적입니다. 그 시절 박정희 정권은 정의롭지 못했고 온갖 조작을 일삼았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에겐 정의와 진실을 강조하며 충성하라고 한 겁니다.
1972년이 되자 맹세문은 한 차례 수정됩니다. 수정된 맹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 을 굳게 다짐합니다.”
통일과 번영이란 말이 빠지고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말로 교체됩니다. 게다가 정의와 진실이란 구절 대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라고 합니다. 유신과 함께 국민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라고 강요했던 겁니다.
2007년에 맹세문은 또 한 번 수정됩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 합니다.”
세월이 흘러 615공동선언, 10.4 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통일"에 대한 언급은 빠져 있습니다. "민족"이란 단어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민족이 단합하고 단결하여 평화 통일을 이루어야할진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대신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했는데, "자유"와 "정의"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싸움을 거쳐 민주주의는 조금이나마 전진했습니다만, 국가보안법과 노동탄압이 공공연한 현재를 두고 자유와 정의를 말하긴 힘들어 보입니다.
참. 빠뜨릴 뻔 했습니다. 아래는 일제시대 맹세문입니다.
일제시대 맹세문 (성인용) 1.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2.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우리 황국신민 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아동용 1.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2.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진숙아 사랑한다6 <최갑순, 옥정애>
작품의 3장에는 대학생 진숙이가 등장하며, 배경은 취조실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모티브는 최갑순, 옥정애 선생님의 증언이었습니다. 당시 경남대 학생이었던 두 선생님께서는 부마항쟁 와중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다음의 뉴스 기사로 갈음합니다.
-오마이뉴스 2012년 12월 12일 기사-
"박근혜 언니 들으세요!" 한 중년 여성은 이렇게 외치면서 내내 눈물을 쏟아냈다. 몸을 떨었고, 주먹을 쥐고 단상까지 내리쳤다. 옆에 있던 여성들이 그녀를 부축했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13일 경상남도의회 브리핑룸. 경남지역 여성계 인사 1219명이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여성대통령'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제목으로 '유권자 호소문'을 발표했는데, 최갑순(54) 경남여성회 부설 여성인권상담소장이 발언했던 것이다.
부마민주항쟁 피해자인 최 소장은 최근에 결성된 '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 회장으로 있다. 경남대 3학년으로 재학하던 1979년, 최 소장은 그해 10월 16~20일 부산·마산에서 일어났던 부마항쟁에 가담했다. 여대생이었던 최 소장은 군인·경찰로부터 온갖 성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최 소장은 이날 발언 내용을 A4용지 넉 장에 자필로 써왔다. 제목은 "박근혜 언니 들으세요"다. 박근혜 대선후보에 대해 '언니'라고 했던 이유부터 설명했다.
"저는 당신이 고아가 된 계기인 부마항쟁의 피해 당사자입니다. 그때 당신은 26세(만)로 퍼스트레이디였고, 구국청년봉사단을 꾸려 아버지의 독재정권을 뒷받침하면서 온갖 영화를 누렸을 때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아홉 번째로 태어나 서울 가서 오빠들 뒷바라지 하느라 공부할 시간도 체력도 안돼 겨우 예비고사 붙어 지방대인 경남대 국어교육과 3학년이었습니다."
최 소장은 자신이 다녔던 경남대에 대해 "아시다시피 경남대학은 '유신을 지지하는 대학'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마항쟁에 가담하게 된 계기부터 설명했다.
"부끄러운 여학생 둘이서(옥정애 포함) 남학생들을 설득하여 4․19정신을 상징하는 3․5의거탑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려 하다가 붙잡혀 속옷이 드러난 채 머리채가 질질 끌려 시멘트 포장길에 피를 뿌리며 잡혀 갔습니다. 그 후 경남 전역에서 다 소집된 경찰, 위수령도 내리기 전에 들어온 군인들에게 수십 차례, 어쩌면 100차례도 넘게 성희롱, 성추행, 성고문을 당했습니다.
문학소설을 탐독하던 그 여학생들은 구경도 못한 '사제총을 아느냐'고 짓밟히고,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관련된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면 풀어주겠다'는 회유에 넘어가지 않자 지하실로 끌고 가 안대를 채우고, 옷을 벗기고 강간한다고 협박하면서 거짓 자백을 강요했습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언급한 최 소장은 "그러다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보다 어린 여성들과 연희를 배푸는 도중 부하에 의해 참변을 겪은 뒤에는, 그 모진 고문이 중지되었고, 음식물도 제대로 제공되었다"면서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아부까지 했다"고 기억을 전했다.
"22살 나이에 못 볼 꼴 많이도 보았고, 그 이후 당신의 아버지가 아끼던 부하 전두환 시절에도 이 동네 저 동네 이사를 다녔습니다. 통반장까지 우리를 감시했으니까요."
최 소장은 이때부터 여성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최 소장은 "그때부터 저는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성폭력상담소를 만들고, 탁아입법과 가족법 개정 등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소개했다.
"어린 아기를 엎고 성폭력특별법 제정과 매맞는 여성을 위해 뛰어 다녔습니다. 1995년 여성정치 세력화를 위해 온 몸을 던지기도 했고, 먹고 살기 위해 책장사도 했습니다. 남성들은 '왜 여성운동만 하느냐'며 욕하기도 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쥔 최 소장은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칭하며 "도적질 하지 마십시오. 태극기가 무섭지 않습니까. 더 이상 태극기 흔들지 마십시오. 그것이 당신이 더 이상 역사에 누를 끼치지 않는 길입니다"고 외쳤다.
"당신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대통령 후보조차 되어서는 안됩니다. 제발 조용히 사라져 주세요. 당신을 보면 그때 그 시절이 떠올라 살이 떨립니다. 당신의 지지율은 아버지가 18년 동안 국민을 세뇌시킨 결과입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때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물은 최 소장은 "상식적으로 부모의 빚은 유산상속됩니다. 빚이 싫으면 상속을 포기해야지요"라고 외쳤다.
"당신은 진술의 일관성도 모르는 사람입니까? 좋은 것은 챙기고, 불리하면 역사에 맡기자고요? 당신이 저지르는 죄는 엄청납니다. 유관순 언니가 비장하게 품고 펼친 태극기를 일본군 장교의 딸이 선거운동에 흔들 수 있습니까?"
박근혜 후보가 내세우는 '여성대통령'을 언급했다. 최 소장은 "어디서 여성 대통령 운운하고 다니나요. 당신이 여성성의 진정함을 알기나 하나요"라고 외쳤다.
"당신이 유신의 퍼스트레이디 시절에 사망한 분들과 고문 당하고, 특히 성고문까지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한다고 한 마디 한 다음 날 그 동지들을 기망하여 당신을 지지하는 명단에 올리는 것이 여성성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여성, 싫습니다."
'예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년 한 작업 (0) | 2012.12.26 |
---|---|
진숙아 사랑한다 작업후기 (0) | 2012.12.21 |
진숙아 사랑한다 작업일지 (0) | 2012.12.15 |
배우와 연기 14 긴장의 극복 (0) | 2012.04.11 |
배우와 연기 13 연기는 배우의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온다 (0) | 2012.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