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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스타일의 재발견-미셀 생 드니

 

미셸 생 드니의 <스타일의 재발견>


미셸 생 드니 지음


이효원 옮김



1958년 3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섯 번의 비공식적인 강의를 했으며 이 책의 내용은 바로 그때의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첫 번째 미국방문이었다.


줄리어드 음악학교가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유럽과 미국에서의 연극 트레이닝에 대한 연구를 끝낸 뒤, 나를 고문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공연예술을 위한 링컨센터가 계획되었었고 줄리어드 음악학교는 연극예술 분야에 보다 고급의 훈련을 제공할 전위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 동의했었다.


나는 당시 작업하고 있던 스트라스버그에서 록펠러 재단의 대표를 아주 잠깐 동안 만났었는데 그와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왜 나를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교육과 무대를 위한 현대적인 훈련 메소드에 겸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고전적인 연극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그룹씨어터 멤버들과 만난 적도 있었고 또 「The Fervent Years」라는 해롤드 클러만의 책에서 읽었던 것들 덕분에 미국연극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교수법에 바탕하여 다소간 사실주의적(realistic)인 전통을 유지해 왔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미국연극이 단지 ‘방법적’으로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전망에서 그러니까 체질적으로 사실주의적이라고 느꼈다. 주제건 양식이건 간에 몇몇 극작가, 연출가, 비평가들이 표현해왔던 욕구는 각기 다양한 모습이지만 바로 깊이 갈아진 사실주의의 밭에서 출발하였던 것이다.


뉴욕에서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의 분위기 속에 2주를 보내면서 나는 강의를 수정했다. 나의 유럽적인 태도, 즉 전통적인 ‘연극성’(theatricality)과 끊임없이 자라나는 유럽적 사실주의 경향의 혼융에서 나오는 그 태도가, 젊지만 이미 사실주의적 전통에 흠뻑 젖어버린 미국 젊은이들의 틀거리 내에서 제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페스티벌과 플리마우스 연극 아카데미에서 했던 네 개의 강연에서, <고전적인 연극과 현대적 사실주의>라는 제목 하에 나의 이런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했던 테오도르 스펜서 강의는 전통에 힘입어 엄청난 연극적 진화를 이루었던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프랑스 연극을 주내용으로했다.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을 완성하기를 바란다.



제 1 부  고전적인 연극


고전적인 프랑스 전통 : 그 모순과 공헌


신사숙녀 여러분. 저에 앞서 어떤 시인들과 학자들, 연극인들이 이 자리에 섰었던가를 알고 있기에 여러분들이 가슴 깊이 품고 사랑하는 한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최초로 저를 하버드에 초청하여 주신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제 연극경력을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내년이면 제가 연극을 시작한지 40년이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19년에 연극에 첫발을 디뎠지요. 그 이후로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딱 한 번 중단했을 뿐 한 번도 연극에서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두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내게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전쟁이 저를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켰습니다. 아마도 연극의 세계에 갇히는 것, 때로 너무나 세련되어서 인위적이기까지 한 분위기에 감금되는 것에서 저를 구해준 것이 바로 이들 전쟁이 아닌가 합니다.


내가 연극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났었다면, 그것이 한편으로는  프랑스 국적에서 부분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기에 기뻐합니다. 나는 생애의 전성기에 20년 간을 영국에 살면서 영국 연극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고백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나는 언제나 비주류의 조직에서 일해왔습니다. 파리에서는 쟈끄 꼬뽀와 함께 ‘뗴아트르 뷔 콜롱비에’에서 일을 시작했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극단의 리더가 되었을 때 - ‘퀸즈 컴퍼니’(Compagnie des Quinze) - 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지 않는 연극들을 레파토리로 올렸습니다. 나는 세 개의 각기 다른 연극학교를 세웠는데 언제나 학생들에게 창조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새로운 방법과 스타일에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는 해석적인 작업을 향한 접근법을 모색하는데 나와 동참할 것을 역설해 왔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희곡을 연출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요청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외양에도 불구하고 - 왜냐하면 나는 6년간 ‘올드빅’의 일원이었으므로 - 나는 언제나 고전적인 연극보다는 현대적인 연극에 더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40년간의 내 작업은 현실을 무대 위의 가공의 세계로 끌어 올 수 있는 수단을 찾아내려는 실험으로 일관해 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서론이라 하는 것을 끝마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나는 프랑스인입니다. 그것은 절대 불변의 사실입니다. 일반적인 프랑스 사람의 특성을 감상하는 것은 이제 당신의 몫입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여러 다른 생각들을 품고 있지요. 하지만 연극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 특성들은 아주 분명합니다. 설사 사람들이 그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도 말입니다. 한 번은 내가 프랑스 밖에 있었을 때,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이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가까운 과거를 포함하여 과거의 모든 위대한 극작가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어법에 따르자면 입센과 체홉이 ‘고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버나드 쇼와 유진 오닐 역시 고전으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좀 다릅니다. 프랑스인에게 있어서 고전주의는 하나의 정신이며, 철학이자, 형식입니다. 사실상 프랑스 순수주의자라면 프랑스 문화의 한 양상만을 ‘고전적’이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라블레와 몽테뉴의 前고전주의 시대에 태어나서 철학의 데카르트와 파스칼, 회화의 푸쌩, 음악의 륄리, 드라마의 꼬르네이유, 라신느, 몰리에르에게서 꽃피웠던 시기 말입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는 프랑스 고전주의 시대의 진정한 절정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16세기는 제외됩니다. 루이 13세의 스타일, 「삼총사」로 쉽게 기억되는 그것은 지나치게 무겁고 육질이 느껴지죠. 루이 15세의 스타일은 지나치게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데다가 연약합니다. 그러나 루이 14세, 겸손하게도 태양을 자신의 영광의 상징으로 택했던 ‘태양왕’은 고전주의 시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넓게 보아 18세기의 극작가인 레나르와 마리보까지는 포함시킬 수 있지만 이미 그 정신과 형식에서 부패한 보마르셰에게는 문을 열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프랑스 고전주의가 조상을 의식했던 것은 다름아닌 귀속인정받고자 하는 사려깊은 욕구때문이었다. 그리스의 고전적 시기(에스킬러스,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와 로마의 희극(테렌스와 플라우투스),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코미디언들까지도. 그러나 남녘에서 온 그러한 어릿광대들의 작업이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 위해선 몰리에르를 필요로 했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 어린이들을 길러내는 우유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은 고전적인 훈육방침에 따라 교육되었다. 대학과 수많은 아카데미, 문학, 예술, 연극에서도 그 방침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는 이 고전주의적 전통에 끊임없이 반기를 든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기본적인 척도로, 특질의 표준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몰리에르에게서 가장 뚜렷이 구현된다. ‘코메디 프랑세즈’는 ‘몰리에르의 집’이라 불린다.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몰리에르 극단의 전통을 그대로 실어나르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사악한 상상력>을 연기하는 도중에 몰리에르가 죽을 때 앉아있었던 안락의자를 통해 상징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극단은 순회공연을 할 때 이 안락의자를 언제나 가지고 다닌다. 모스크바에 갔을 때도 가지고 갔다. <사악한 상상력>을 공연한 것이 아니었건만, 몰리에르에 대한 상징으로서 가져간 것이었다. 그리고 극예술을 가르치는 공립학교인 프랑스 국립 연극학교에서는 이 ‘몰리에르의 집’의 훌륭한 배우들이 연기를 가르친다. 그들은 진지하게 젊은이들에게 고전적 텍스트를 연기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고전적 양식의 의미를 가르쳐 전한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보수적인 정신을 비웃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고, 특히 그것에 전혀 무지한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우리 프랑스인들 역시 보수적 정신을 비웃는 것의 장점을 파악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그로 인해 고통받아 왔다. 아무도 말 그대로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전통을 전달하여 살아있게 유지시킬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조금이라도 지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리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텍스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써 그 정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고전적이라는 것은 비개인적이고 객관적이 됨을 말한다. 그렇다고 상세한 인물구축을 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세밀하고, 주관적이고, 사실적인 심리를 가진 인물을 창조하되 그것이 객관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것은 균형잡힌 문화 내에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그런 유형을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언어, 대개는 웅변적인 그것은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 귀족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형식 또한 표현에 있어서 귀족적이다. 꼬르네이유는 힘차고 영웅적이며, 라신느는 부드럽고 열정적이며, 몰리에르는 보다 대중적이다. 그리고 라신느와 꼬르네이유의 비극이나 <미산트로페>와 같은 몰리에르의 하이 코미디들의 텍스트는 24각운의 시로 쓰여졌다. 배우들이 이 양식을 취급하기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융통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융통성을 찾아내면서 시의 형식을 유지하는데는 말할 것도 없이 상당한 기술이 요구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문, 몰리에르의 위대한 산문 역시 계산된 것으로, 종국에 가서는 일정한 운율을 갖도록 배치되었다.


당신은 어떤 스타일이 지나치게 정확하면 오히려 지루하고 단조로와진다는 것을 알 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연주의의 반대이다. 아마도 가장 소외된, 그렇지만 동시에 서양연극의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형식인 자연주의의 반대. 그리고 그것은 내 경험에 의하면 앵글로 색슨의 세계에서 가장 동떨어진 것이기도 하다. 런던의 청중들에게 몰리에르를 읽어 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 사람들은 간간이 즐거워 했다. 그러나 라신느를 시도했을 때는, 청중들이 프랑스 문화에 아주 친숙하고 또 고전주의의 형식을 충분히 감상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극적인 사건과 긴장이 풍부한 <페드라>를 읽어주었을 때도 역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한다’, ‘너무 연설조로 딱딱하며 행동이나 삶, 현실이 없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꼬르네이유와 라신느의 스타일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를 찾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며, 그것은 그 양식이 요구하는 고전적인 규준과 방침들이 현대적인 삶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대로 나는 여태껏 ‘코메디 프랑세즈’의 지배에 맞서서 텍스트로부터 새롭게 출발하여 전통을 재창조하는 반항적인 사람들과 함께 일해왔다.


1913년에 나는 샤를르 뒬랭의 몰리에르의 를 보았고, 1922년에 또다시 보았다. 뒬랭은 몇 년전 그가 죽을 때까지도 그 작품을 다시 만들고 있었다. 그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관습적인 전통에 대한 경의가 파괴해버린 생기발랄함을, 즉 현실을 복원시켰다.


1922년에는 코포의 대중 독회를 몇 번 들었다. 그는 아주 뛰어난 낭송자였다. 그가 끼친 영향의 상당부분은 바로 그 읽기로부터 나왔다. 그는 라신느의 희곡 중에서 가장 움직임이 없는 를 읽었는데 그것은 타시투스에서 소재를 따 온 것으로 ‘그 자신도 모르게, 그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은 헤어졌다’로 표현된다. 그것이 전부다. 움직임이라고는 헤어지는 연인들의 동작과 다시 돌아오는 동작 밖에 없다. 거기에 각자의 하인들까지 모두 4명이 나온다. 코포는 항상 그런 연극은 넓은 곳이나 야외에서 하는 대신 나무로 된 작은 오리토리움에서 해야한다고, 즉 텍스트를 읽는 소리가 마치 실내악을 듣는 것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목소리의 톤과 다양한 피치, 인물들의 위치, 극도로 절제된 동작과 짓거리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소리와 드문드문 있는 동작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도록 배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신느는 거의 부동을 요구한다. 모든 행동은 내면의 것으로, 그것이 밖으로 표출될 때는 극도로 민감하게 표현되어야만 한다. 당신은 라신느에게서 매우 정제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920년 코포는 몰리에르의 <스카펭의 간계>를 연출했다. 빈 플랫폼에 세워진 세트에 마치 권투경기장처럼 무자비하게 밟혀진 무대, 그로써 과거의 수고스러운 모조품들없이도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정신을 다시 구현했다.


1923년에는 <미산트로페>를 코포가 연출하고 직접 연기도 했다. 나는 그때 무대감독이었다. 공연은 태피스트리 위에서 행해졌는데 무대 중앙에는 네 개의 팔걸이 의자와 한 개의 발판이 있었다. 소도구들로는 모자 몇 개, 막대기 몇 개, 검 몇자루가 전부였다. 편지도 두어통 있었던 것 같다. 알세스트를 연기했던 코포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무대로 나와서 매일밤 내게 팔걸이 의자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카페트였기 때문에 위치를 표시할 수 없긴 했지만 언제나 정확한 자리에 놓았었다고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코포는 막이 오르기 약 2시간 전부터 알세스트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것은 그렇듯 훌륭한 작품의 스타일을 살려내기 위해 필요한 ‘현실’이었다.


1935년 <부인학교>를 올릴 때는 유명한 베랄르의 세트와 함께 아르놀페 역을 주베가 맡았다.


1949년에는 브라크가 배경그림을 그린 <따르뛰프>를 올리는데 역시 주베가 일했다.


1952년에는 신입자인 장 빌라르가 혁신가로서 인정받았는데, 그것은 서정적인 양식의 비극 <르 시드>에 대한 그의 해석 때문이었다. 로드리고 역을 제라르 필리페가 맡았다.


1954년에는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빌라르의 <돈 주앙>(몰리에르 작)을 보았는데 그것은 아주 거대한 공연이었다. 마지막에 가서 나는 기립박수를 하며 함성을 질렀다. 돈 주앙과 스가나렐의 관계가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되었는데 그것은 코메디 프랑세즈가 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왔다. 돈 주앙은 바람둥이라기 보다는 무신론자에 가까웠으며 스가나렐은 돈 주앙의 신에 대한 도전을 공포와 경외로 지켜보면서 귀족적인 불신자로 기능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 모든 공연들은 프랑스와 해외의 현대연극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었다. 이 공연들을 일일이 열거한 것은 그것들이 연극사에서 하나의 표석이 되기때문이다. ‘고전’은 현대적 양식에 중요한 기여를 해왔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장 루이 바로가 연출한 마리보의 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모스크바 사람들은 코메디 프랑세즈의 (몰리에르) 공연과, 장 빌라르의 (마리보)의 공연, 그리고 <돈 주앙>(몰리에르)과 <마리 스튜어트>(빅토르 위고) 공연에 갈채를 보냈다. 내가 1957년 3월 모스크바에 갔을 때 러시아인들에게 브레히트와 코메디 프랑세즈와 장 빌라르의 레파토리 가운데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마리보라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스타일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지요. 우리가 브레히트에게서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브레히트 이전부터 우리가 해오던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18세기의 프랑스 희곡들이 요구하는 딕션과 신체적인 우아함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없는, 그래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왜 러시아인들은 그런 연극에 그렇게 민감할까? 왜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할까? 왜 그들은 정기적으로 몰리에르와 셰익스피어를 무대에 올릴까?


프랑스의 규칙, 관습과 어휘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고전이 아니다. 19세기 중반의 빅토르 위고 당시까지는 프랑스인들이 셰익스피어를 야만인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주지의 것이다. 그의 작품은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교양도 없고, 규율도 없다. 그는 희극과 비극을 섞어놓을 만큼 균형감각도 없는 사람이었고, 그런 것은 고전주의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각 스타일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위고와 뮈세 등의 프랑스 낭만주의자들은 셰익스피어를 모방하려 노력했지만, 거의 모든 작품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피상적인 몇가지 특질들만 비슷하긴 했다. 그들은 셰익스피어적인 현실의 정수, 영혼에 육체를 입히는 살과 피와 정열의 그 어떤 것에도 이르지 못했다. 프랑스의 언어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언어 속에 표현된 것들, 그러나 그것들 역시 그 자체의 미묘한 법칙들에 의해 완벽하게 측정된 것이다. 1910년까지 프랑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프랑스 낭만주의적 견지에서 그리고 고전과 낭만의 문학적 전쟁의 견지에서만 바라보았다. 셰익스피어는 낭만주의였고 라신느는 진정한 프랑스 전통의 대표인 고전주의였던 것이다. 이 중간시기 동안, 번역자와 각색자들은 희곡에 질서를 가져오고 자신들을 ‘고전주의화’하려는 방편으로 셰익스피어를 단순화하려 들었다.


그러나 1910년 이후에는 셰익스피어의 영향이 프랑스에서 믿을 수 없을만치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최초의 자연주의자인 앙드레 앙트완느는 셰익스피어를 찾아내어 그의 작품들을 상연하였는데, 예를 들어 <리어왕>에서는 폭풍을 아주 강조해서 말소리가 안들리게 까지 하기도 했다. 잠시 후에 페르맹 제르미에가 서커스에서 스펙타클한 것을 대중적인 쇼로 보여주었다. 코포와 함께 반자연주의적 학파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 - 1913년 이후로 계속해서 - 셰익스피어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시대의 많은 극작가들의 작품이 상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포와 뒬랭, 피토예프의 무대에서도 웹스터, 포드, 토마스 키드, 벤 존슨, 토마스 헤이우드, 보몽과 플래쳐의 작품들이 올려졌다. 뷔 콜롱비에 극장은 1913년 헤이우드의 로 문을 열었다. 1914년 첫 번째 시즌을 <십이야>의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가 1920년 <겨울이야기>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런 경향의 배후에서 한가지 의미심장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의 이 새로운 발전은 프로이드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에 발맞춘 것이다. 보다 덜 제한된 공연과 함께 새로운 번역들은 셰익스피어의 스타일 안에서 여러 변형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의 과격함을 생생하게 표현했으며, 톤과 배치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전쟁까지 이러한 공연들은 일부 교양있는, ‘전위’에 속한 사람들의 특권으로 남아있었다. 셰익스피어와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들은  ‘연극성’과 심오한 의미를 조화시켰기 때문에 공연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34년 런던 극장으로 작업하러 갔을 때, 나는 영국인들에게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셰익스피어를 발견했다. 내가 영국에 건너갔던 것은 윌리엄 포얼과 그랜빌 바커가 단행한 개혁, 즉 최소한의 무대배경으로써 셰익스피어에 적합하게 극장을 만들어 장면들 사이에 불필요한 휴지기를 없앰으로써 원작을 살릴 수 있도록 했던 그 때였다,


당시는 또한 작품에 대한 해석과 공연들이 현대적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 유명한 ‘말의 음악’보다는 인간적인 진실이 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던 때였다. 그 결과 수사학이나 서정적인 것에 대한 열광은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라신느와 꼬르네이유에게서 깨달았던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현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소위 ‘사실적’인 일상생활의 언어보다 시가 얼마나 더 유용한가를 깨닫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정통적인 ‘현실주의’를 위한 통찰력있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스타일이라는 것을.


나는 올드 빅 극장 객석에 여러번 앉아보았다. 그 극장엔 총 400석의 자리가 있는데 당시 한 좌석마다 6펜스에 팔렸다. 매일밤 그 극장은 영국의 노동자들로 가득 찼다. 한 번은 프랑스 친구들 몇몇과 같이 그 곳에 간 적이 있었다. <햄릿>을 전막 공연하는데 네시간이 걸렸다. 객석이 나무로 된 것이어서 좀 딱딱했는데도 관객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민족의 시인이 노래하는 민족의 영웅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인상적이다. 끝에 가서 프랑스 친구가 물었다, ‘저사람들이 이해하는건가?’ ‘무엇을?’, 내가 되물었다. ‘저 작품의 의미, 철학말이네.’ ‘오, 그렇지 않다네. 그들은 그들 앞에서 마치 진짜 역사, 황실의 역사인양 전통을 따라 펼쳐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네. 시와 소리, 리듬에 매혹된 것이지.’ 내 친구는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그걸로 족하단 말인가?’ ‘아마도 어떤 의미를, 그러니까 개인적인 의미를 느끼겠지. 그리고 동시에 말 속에 잠겨드는 걸 즐기는 거지. 그건 일종의 “삼투작용”처럼 신비스런 교환으로, 감각으로는 형식에서 분리해낼 수 없는 다양한 요소들의 혼합이지. 그러니까 그들은 음악의 힘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시의 마법의 힘에 자발적인 희생자가 되는 것이라네.’


여기에 두 개의 봉우리, 두 갈래 - 프랑스 고전주의와 영국의 극적인 시 - 흐름이 있는데, 그것들은 현대연극의 여러 양상들을 거쳐 여기까지 오는 내 여정에서 끊임없이 나와 동무해 주었다.


이 여행은 쉽지 않다. 영국인들에게도 프랑스인에게도. 생각건대 당신들 미국인들에게도 그러하겠지만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에게는 그보다 더 어렵고 힘겨웠다.


나는 연극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가장 불명확하고 어정쩡한 시기를 살아왔다. 그리고 아마도 프랑스인과 영국인은 미국인들이 그러한 것보다 더 이 불확실성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며, 그것은 이전에 우리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는 확실했다.


지금의 우리는 뿌리를 상실했다고 느낀다. 신자나 불신자나, 우리의 마음 속은 카오스 속에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 믿음과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카오스를 관찰한다. 그러나 그 카오스를 멈추거나 조직할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겐 없다. 우리의 최고 이성은 이 분열의 시대를 분석하는데 주어진다.


요즘에 와서 세계는 우리에게 너무나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는 스펙타클을 제공하여, 과연 어떻게 연극이 그에 보조를 맞춰 갈 수 있을지 근심하게 한다. 아마도 이런 근심을 프랑스만큼 많이 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는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무너져 있다. 사실상 프랑스는 1914-18년의 전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며, 1940년 그 패배의 치욕은 이전의 모든 불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우리는 세계만방에 우리가 그 패배로 인해 무너진 것보다는 훨씬 나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이성의 위험한 상태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나는 아직도 회복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한다.


1957-8년의 겨울 동안 북아프리카에서의 어떤 사건들과 관련해서 다른 나라의 저널리스트들과 정치가들이 프랑스인의 어리석음을 비난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좀 새로운 것이었다. 우리는 여태껏 늘 과도한 지성 때문에, 지성주의에 대한 불치의 경도라 불렸을 만큼 비판받아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지성주의는 아직 죽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지성인으로, 그리고 예술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연극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연극은 여러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그 모순들 뒤에 놓여있으면서 그 속에서 여하한 단일성이라도 창조하려는 것은 오직 우리의 전통 뿐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미국의 사실주의를 포함한 현대적 사실주의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여러분들은 미국 극작가들의 작품이 프랑스에서 대거 상연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대중적인 혹은 부르조아 자연주의에 대해 문을 닫아 걸었다. 무대에서 부엌과 침실이 추방되었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에게 그렇게도 친숙한 ‘파리장’ 코미디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간 무대 위에 실제 생활의 사진을 재현하는 것을 어찌나 단호하게 기피했던지 수년간 체홉을 무시하는 실수를 낳기까지 했다. 물론 지난 40년간 체홉을 상연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프랑스 대중들이 체홉을 깊이 그리고 친근하게 느끼게 된 것은 최근의 4-5년 사이일 뿐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체홉을 환영하지만 그를 모방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최근 미국인들은 프랑스에서 오랜 동안 명성을 지켜온 두 극작가의 작품을 따뜻이 환영해 주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죽은 장 지로도와 그보다 젊고 원기왕성한 장 아누이. 그들은 모두 30대에 동시에 무대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한 서로 매우 다른 사람들이다.


지로도는 내가 고전적이라 정의한 전통에 속해 있다. 그리스의 신화적 원천 위에서 아리스토파네스와 라신느를 이어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우아함과 풍자적 재치를 갖고 있으며 스타일이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중요하다. 그에게 생각하는 것과 스타일을 떼어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로 스타일이 약간 더 귀중하긴 해도 말이다.


아누이는 때로 공격적인 사실주의자이며 문제와 언어에 있어 모두 그렇다. 아누이의 스타일을 정의하기란 어렵다. 자연주의로부터 표현주의에까지 다양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언제나 그의 작품들은 현대의 비관주의에 의해 어둡게 색칠되어 있으며 그 상실에 대한 절망감은 추락한 천사의 그것이다. 절대적 완전을 향한 아누이의 열정은 그를 무정부상태로 몰고 갔다. 이 비타협적인 태도, 그를 협상과 타협의 세계로부터 도망하게끔 만든 그 태도는 수많은 욕설과 모욕들로써 자취를 남기고 있다.


여기에 충격적인 대조를 이루는 한 쌍의 극작가들이 있다. 폴 끌로델은 몇 년전에 죽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영향력있는 프랑스 시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위치상 그는 반고전주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극과 셰익스피어를 공부했으며 성서와 다른 경전들을 연구했다. 그는 자기만의 구문과 작시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캐톨릭 시인이기 때문에 그의 대중이 특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끌로델은 언제나 작품 속에서 실제 밖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이제 또다른 극단을 살펴보기로 하자.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자, 우리 시대의 사건과 가치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그리고 알베르 까뮈, 노벨상 수상자로 사르트르의 제자였으나 후에 그에게서 분리해 나왔다. 까뮈의 저작들은 프랑스적 의미에서 점점 더 고전적으로 변해갔다.


이제 좀 더 젊은 사람들 중에 언급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보자. 사실주의자, 꿈과 비전들로 가득 찬 스트린드베르히의 후손으로 보이는 보티에가 있다. 1957년 10월 장 루이 바로가 그의 세 번째 작품을 연출했던, 셰하데(G. Schehade) 또한 장 주네와 피셰뜨(H. Pichette), 두사람 모두 시인이면서 사실주의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가장 중요한 ‘아방가르드’ 삼인방이 있다. 아서 아다모브, 그는 최근작 <파올로 파올리>에서 브레히트에 근접한 것처럼 보인다. 사무엘 베케트, 제임스 조이스와 프루스트에게 영향받았으며 작품으로 보면 카프카와 관련된다. 그의 난해한 현실주의는 현대의 근심, 신에 대한 필요와 그의 부재에서 오는 영혼의 질병을 가장 적합한 형식으로 표현한 것에 가깝다. 외진느 이오네스꼬, 어느 비평가가 표현한 바와 같이 이 ‘지옥에서의 연극’의 세 번째 대표자, 그는 베케트와 같이 창조된 인물들을 활용하고, 세계의 초라한 구역으로부터 일상생활이 완전히 악몽으로 해체되는 리얼리즘을 사용한다. 이러한 해체는 언어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웃게 만든다. 파리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베케트에게 매료된 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희극작가로서 이오네스꼬를 좋아하며 그의 새로운 세계를 보고 웃는데 그 세계의 논리는 이상하게도 현대 관객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진다. 베케트-이오네스꼬 현상은 매우 프랑스적인 것이다. 여기 본래는 외국인인 두명의 작가가 있다. 한명은 아일랜드인이고 다른 한명은 루마니아인이다. 그러나 두사람 모두 프랑스에서 글을 썼으며 그들이 일으킨 반향과 상관없이 상업적 성공을 즐기지 못한 파리장의 분위기 속에서 연극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전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거의 1년 가까이 공연되었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갔을때, 한 그룹이 <고도>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스앤잴레스에 도착해서 한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도 <고도>였다. 당신은 시와 스타일의 세계에 속한 이들 두 극작가들에게서 사실주의의 깊은 한 종류를 보고 있다. 리얼리즘의 심장으로 침투하기 위해, 외피를 지나 그 핵심으로 가기 위해, 그들은 자연주의적인 방식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 무대에서의 모순들 뒤에 지성적인 움직임과 연극의 발전 사이의 기본적인 단일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연극이 프랑스에서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두사람이 현재 프랑스 연극을 이끌어 가고 있다. 장 루이 바로와 장 빌라르. 그들은 모두 코포 극단의 배우이자 그의 수제자인 샤를르 뒬랭의 제자이다.


나는 여기에 연극에 대한 프랑스의 주요 공적이 있다고 본다. 사람들, 그리고 전통. 우리는 고전적 전통의 틀거리 내에서 작업하면서, 계속적으로 그 압력을 받으며 작업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자유로와지려고 투쟁한다. 전통은 안내자라기보다는 지속적인 유인이 되어온 것이다.


나는 영국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보았고,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존경할만한 전통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보기에 현대에 적용하기가 보다 쉬운 것 같다.


수년간 프랑스 전통은 정부에 의해 꽤 합리적인 도움을 받아왔다. 1939년까지 주정부는 공식적인 연극들만을 지원해왔다. 오페라와 오페라 코미끄, 코메디 프랑세즈.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모든 세대들은 과거의 걸작들, 프랑스와 외국의 걸작들, 그리고 최근 30년 간의 중요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때때로 ‘창작’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새로운 작품을 자주 내놓지 않는 것은 치명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메디 프랑세즈는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또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는 젊을 때 언제나 코메디 프랑세즈에 반대한다. 사실상 그것은 자주 시대에 뒤쳐지고 따라서 가끔씩 시대와 발맞추어질 필요가 있다.


1935년까지 모든 비공식적인 연극과 극단들은 사적인 자금에 의해 운영되고 지원받았다. 1936년 ‘대중전선’(popular front)의 출현은 대중교육이라는 가장 하에 주정부로부터 좀 더 후한 지원을 받아냈다. 그러나 19세기 말 당시 프랑스에는 인구 일만명 당 극장 건물이 하나 꼴로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양차대전 사이에 영화상영관으로 바뀌었음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장 루이 바로가 파리에서 활동하는 오늘날, 그는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지원받고 있지 않다. 지속적인 파산의 위협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 연극에 고유한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연극인들이 언제나 그들의 예술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음을 들 것이다. 이것은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연극을 위협하는 여러 요인들, 전쟁과 정치적, 경제적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프랑스에 살아있는 연극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가스회사 직원이었던 앙드레 앙뜨완느가 1887년 ‘자유극장’을 아주 적은 돈으로나마 개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스타니슬라브스키보다 10년 앞선 자연주의의 시작이었다. 1913년 이후로 코포, 뒬랭, 피토예프, 주베, 바티와 같은 사람들은 경제적이고 예술적인 모든 책임들을 스스로 떠맡아왔다. 이것은 절대 민족주의적인 외침이나 프랑스식의 절제할 줄 모르는 과장이 아니다. 피토예프는 쉰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주베와 뒬랭은 64세에 죽었다. 그들 셋 모두 은퇴하지 않았다. 그들은 활동하는 도중에 심장이나 신장의 문제로 숨을 거두었다.


코포와 뒬랭은 그들 극단에 딸린 학교를 두었었는데, 그 학교는 예쁘장한 소녀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한 혹은 한물간 스타배우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그런 학교가 아니었다. 절대로.


바로는 오늘날도 똑같이 영웅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나 주정부가 부분적으로 사적인 자본을 대신하게 되었다. 주정부는 빌라르에게 극장 하나와 일년에 십이만오천 달러의 지원금을 주고 있다. 게다가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지방에서 점차 극장이 사라져가자, 주정부는 프랑스 주요 구역에 다섯 개의 드라마 센터를 세워왔다. 이들 센터에서는 현대적인 것과 고전적인 레퍼토리를 상연한다. 그 센터들은 또한 프랑스에서 극장이 없는 지역의 대학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아마튜어 운동과도 연계를 맺고있다. 각 센터는 보통 40개에서 80개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는데, 작은 마을에서는 한 공연을 하고 좀 규모가 큰 마을에서는 몇 개 이상의 작품을 공연한다. 그렇게 1년에 3-6개의 다른 작품을 대중적인 가격으로 공급한다. 그들의 레퍼토리와 공연의 완성도는 일반적으로 고급하다 할 수 있다. T.N.P(Theatre National Populaire)는 한 좌석당 1달러를 조금 넘는 가격에 공연을 하고 있다.


이들 센터들은 파리의 좀 더 나은 순회극단들과 함께 프랑스의 지역연극을 담보하고 있다. 그 경험을 통해 지방의 심장부에서 살고 일함으로써만 예술가와 테크니션들이 창조적인 충동을 생산해 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또한 주정부가 순회극단들을 보조해 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신 예를 들어, 나와 같은 사람들을 스트라스버그로 보내어 지방사람들 의 자발적인 참여와 도움에 힘입어 한 조직체를 만들게 하는 것이다. 지역에 뿌리를 둔 조직들이야말로 그 지역의 재능들을 발굴해 훈련시키면서 서서히 성장해 갈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10년에서 20년 내에 우리는 이 예술적 첫걸음이 파리가 아닌 프랑스 여러 지역에서 재능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연극의 탈중심화 정책의 목표가 달성되게 될 것이다.


바로와 빌라르 같은 이도 그렇지만 이들 드라마 센터들은 고전보다는 현대의 작품들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를 과거에 경도된 곰팡내나는 사람들로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전적인 훈육방침 속에서 훈련된 것은 사실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현대연극은 더 나아갈 발전을 위한 견고한 기초를 충분히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완벽한 배우도, 극작가도 사진적인 자연주의로부터는 나올 수 없다. 현실의 재현은 변형과 스타일을 요구한다.


오직 하나의 연극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 중국, 일본, 몰리에르와 셰익스피어가 우리의 리얼리즘을 위한 양식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진정한 현실주의자들은 고전의 해석에 위대한 공헌을 해왔다.



제2부 고전적 연극과 현대적 리얼리즘


<스타일과 리얼리티>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연극에서의 리얼리티’에 대해 얘기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내게 강요해 왔던 것이며, 우리 시대는 바로 그 리얼리티에 대한 개념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깊이 뿌리박은 리얼리티가 주는 안락함, 그러니까 양심이 제자리에 있고 교회와 하늘에 신이 있으며 사회계급이 분명하고 선과 악을 나누는 도덕이 분명한 - 그러한 점진적인 변화 속의 질서정연했던 세계는 전쟁과 혁명, 온갖 발견들로 인해 무너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특히 우리 유럽인들에게 보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보다는 물질적, 과학적 진보의 선두주자인 여러분들이 현대의 불안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양심과 인간으로서의 완결성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현상들의 목격자가 되어야하기도 하며 꿈꾸지 않는 것들을 확인해야만 하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가치에 대한 우리의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 찬 현대세계, 그것을 현대의 마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리얼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술가는 두 개의 리얼리티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술가가 의탁하고 있는 초라한 인간적 리얼리티가 그 하나이며, 나머지는 예술가로서 또는 장인으로서의 리얼리티로서, 만일 그가 연극인이라면 그 리얼리티는 그가 대중의 눈에 노출되는 시간만큼 지속됩니다. 그 두 리얼리티 간에는 갈등이 그치지 않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그 누구도 인간이지 않고는 예술가가 될 수도 없고 예술가로 남아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에 대해 잘 모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나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다. 따라서 예술 속에서의 리얼리티를 말하기 전에, 나의 인간적인 리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습니다.


나는 60세입니다. 1900년에서 1913년 사이에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고 지금도 그것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1914년엔 열일곱이 되었고, 1916년 어느 날 프랑스 전선에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공산군과 베사라비아에서 싸우다가 종전을 맞았습니다. 그 때 나는 동유럽과 중동의 대부분을 보았습니다.


22살에는 끔찍한 혼란과 질병, 참상을 목격했습니다.


두 전쟁 사이에 나는 결혼을 몇번 했습니다. 세 아이를 두었는데, 맏아이는 20살도 못넘긴채 알사스에서 죽었습니다. 내가 20살짜리 군인으로 서 있었던 바로 그 산의 정상 아래에서 말입니다.


1940년, 전쟁은 나를 또 한 번 변하게 했습니다. 난 런던에 살고 있었는데, 또 입영통지를 받고서 어쩔 수 없이 군대로 돌아가게 되었고 프랑스 B.B.C팀을 지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활동까지 모두 합해서 7년을 연극 밖에서 지낸 것입니다.


그 이후로 내 딸은 나를 할아버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망스럽게도 난 내가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프랑스에 살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37살 되던 해 영국으로 건너가 1952년까지 18년을 그곳에서 머물렀습니다. 그 이후로는 스트라스버그에 살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습니다. 지난 해에는 러시아 연극을 볼 기회가 있었지요. 그때 러시아 사람들을 알게 되었구요. 캐나다에는 세 번 갔었지만 미국은 이번이 처음 방문입니다. 나는 미국사람들을 알고 싶고, 그래서 이번 달 말까지 가능한대로 많은 지역들을 돌아다닐 예정입니다. 이곳에 온지는 일주일되었는데 아직도 잠을 잘 못자고 있습니다. 이만 내 인간적인 리얼리티에 대한 소개를 줄이고 연극적인 리얼리티로 넘어가겠습니다.


1919년 나는 파리에서 극단 테아트르 뒤 뷔 콜롱비에에 합류했습니다. 쟈끄 코포는 당시 뉴욕의 개릭 씨어터에서 두 시즌을 보내고 막 돌아온 참이었지요. (그는 33세 되던 1913년, 뷔 콜롱비에를 개관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이듬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나는 프랑스 무대를 개혁함으로써 유럽연극에 영향을 끼치고자 했던 그 운동을 처음부터 지켜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운동은 1949년 코포가 죽었을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이런 예술적 혁명을 자극했을까요?


우선 코포의 운동은 앙드레 앙트완느가 프랑스에서 시작한 자연주의에 맞선 싸움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아직도 남아있던 - 특히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 고전 해석에 있어서의 낭만적 수사학적 경향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코포 자신이 1913년 선언문 에서 밝힌 바, 더 깊고 넓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연극의 수많은 양상들에 맞서 코포는 무대에서 거추장스러운 기계들과 과시적인 효과를 몰아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연기법의 개발에 노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과거나 현재를 가리지 않고 진정한 극작가를 찾아냄으로써 ‘시인’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주는데 주력했습니다. 그가 그 유명한 선언문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던 것은 바로 이런 정신에 입각한 것입니다 - 미래의 작업을 위해 무대를 벌거벗게 하자!


1920년 봄, 뷔 콜롱비에에서 코포가 ‘시인’, 샤를르 빌드락의 를 사실주의적으로 연출하여 올렸을 때, 프랑스 자연주의의 아버지이며 당시 비평가가 되어있었던 앙트완느는 그가 무대에서 본 어떤 ‘리얼리티’에 충격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무대바닥은 콘크리트였습니다. 각등도 없는 프로시니엄이었고 따라서 제4의 벽도 없었습니다. 희곡은 작은 항구에 있는 뱃사람들의 싸구려 선술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였습니다. 무대 뒤에 문이 하나 있었고 조명으로 바다를 암시했습니다. 카운터, 탁자 세 개, 의자 열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앙트완느는 쓰기를, ‘거의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분위기가 창조된다… 관객은 이제 한 장의 사진 앞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같은 방에, 그 옆에 있게 된다. 이 특별한 인상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토록 완벽하게 모든 “연극적 요소들”을 제거한 것이 오히려 연기를 디테일하게 완성하는 것에 기여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얼마 후 코포는 몰리에르의 <스카펭의 간계>를 가지고 가장 ‘연극적’인 공연을 합니다. 나무로 벌거벗은 플랫폼을 만들어 콘크리트 무대 위에 썰렁하니 올려놓고서 그 위에 커다란 삼각형을 그리도록 조명을 거칠게 밝혔습니다. 배우들은 그 플랫폼 위에서, 그리고 그 주위에서 연기했습니다. 그러한 배치는 매우 신체적인 연기와 움직임, 속도를 요구했으며 그 벌거벗은 플랫폼 위에 노출된 배우들은 각자의 인물에 진실한 ‘리얼리티’를 부여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30살이 갓 넘은 주베는 늙은 구두쇠 역을 고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창조해 냈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리얼리티는 프랑스 고전의 해석에도 적용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 의해 활성화된 ‘사실적인’ 진실함, 스타일을 가진 리얼리티 말입니다.


1921년 가을, 뷔 콜롱비에의 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 학교의 트레이닝은 아주 특이해서, 그리스와 중국, 일본의 연극 및 코메디아 델 아르테에 익숙한 학생들은 훈련시간의 대부분을 텍스트없이 작업하곤 했으며 가면을 즐겨 썼습니다. 사실 코포는 어린 학생들이 극단의 평범한 배우들에게서 영향받지 않도록 했으며 그 어린이들이 극적 표현의 새로운 형식을 찾아내도록 가르쳤습니다.


192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이끌고 스타니슬라브스키가 파리로 왔습니다. 그들은 샹젤리제 극장에서 공연했었죠. 우리는 학생들과 함께 그 공연을 보러 갔고 공연도 보기 전에 미리부터 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옛 앙트완느의 라이벌인 그 사실주의자들, 자연주의적인 사람들을 보러갔던 것이니까요! 그날 밤엔 <벚꽃동산>을 상연했는데, 막이 오르자 이내 우리는 웃음을 멈췄습니다. <벚꽃동산>의 1막에는 등장인물들이 밤낮으로 기차에 시달린 탓에 지친 채 파리여행에서 돌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보육원으로 들어선다, 라네브스키 부인은 추억에 잠겨 가만히 서서 그 오래된 방을 찬찬히 감상한다. 그리고 그 보육원에서 자란 17살짜리 딸 아냐가 소파로 뛰어올라 누워서는 피로와 감격이 뒤엉킨 새된 웃음을 웃어제낀다. 그들의 그 대사없는 연기에 그만 이만오천명의 관객들이 갑자기 박수갈채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3막에서는 체홉의 부인, 올가가 연기한 라네브스키 부인이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서 늙은 하인에게서 찻잔을 건네받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손을 떨면서 찻잔을 받다가 뜨거운 찻물에 데어 잔을 떨어뜨렸는데, 거기서 다시한번 박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왜? 연기의 리얼리티가 너무도 완벽하고 멀리서 봐도 전혀 연기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진짜 같았기 때문이죠. 관중이 열광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는 스타니에게 어떻게 그렇게 균형잡히고 설득력있는 리얼리티를 창조할 수 있었는지 물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 너무나 바보같아요. 그녀는 그걸 못했어요. 칠개월이나 연습했는데도 제대로 하질 못했죠. 그래서 어느날은 내가 무대감독에게 찻잔에 끓는 물을 담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한거죠.’ 나는 ‘네, 정말 바보같았군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그건 정말 바보같은 일이었어요. 하지만 연극에서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설사 어리석은 것이라도 감수해야만 하지요.’라고 말했다.


그 공연이 있기 전에 우리는 스타니를 데리고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하는 를 보러 갔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공연이었지만 장 델리라는 늙은 배우가 청년 역을 함으로써 고전적인 소극의 가벼움과 기교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 것인가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의 연기는 젊음에 찬 기교면에서 정말 완벽했습니다.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하지만 스타니는 그런 연기를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았지요.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잘 봤습니다. 우리는 해서는 안될 오래된 연극이라는 점에서 오늘 밤 좋은 보기를 보았습니다.’라고만 했습니다.


스타니와 그 극단의 방문은 내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연극에 대한 우리의 고전적인 태도, 연기에 새로운 리얼리티를 부여하려는 시도, 삶을 치환한 리얼리티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고급한 근대의 리얼리즘, 체홉의 리얼리즘과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타니는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극단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지요. 그것이 러시아 혁명 5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1931년, 코포와 10년 간 공동작업한 후 뷔 콜롱비에에서 독자적인 나의 극단을 시작했다. . 우리 극단은 코포가 충분히 작업을 진행시키지 못했으며 그의 영구적이고 포멀한 무대는 절충을 하기엔 너무도 노골적이라는 전제 하에 무대를 재건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시도한 새로운 천정과 벽에 달린 조명은 모두 훤히 보이는 궁전의 커다란 방처럼 보였다. 고정된 기둥이 여러개 있었지만 그것들이 바다나 강둑, 전쟁터들을 재현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건축적 배치가 보통의 연극적 환영에 대한 우리의 경멸을 강조해 주었다. 사실 그 당시 우리는 모두 연극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으며, 나는 파리에서 커다란 권투장을 빌려서 관객들 한가운데 벌거벗은 플랫폼 위에서 연기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우리는 10년간 하나의 극단으로서 함께 작업하면서 수많은 가능성을 계발했다. 마임과 아크로바트를 했으며 악기를 다루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인물을 창조하고 즉흥연기를 하기도 했지만 사실 우리는 고전이나 현대의 일반적인 레파토리를 연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배우라기보다 몇몇 두드러진 인물들이 있는 코러스였다. 우리는 파리 연극에 특별한 레파토리를 선사했는데 그 작품들의 대부분은 앙드레 오베이라는 한 극작가가 쓴 것이었다. 우리의 작품은 서사적 캐릭터가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그런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광범한 대중적인 주제들을 다루었고 플롯은 인물들의 심리적인 발전과정을 쫓지 않았다. 배우로서 우리들은 성실한 자세로 임했고 무대에서는 자유롭고, 신선하며, 리얼한 인상을 주었다. 파리의 한 비평가는 그 당시 인위적인 연극세계에 우리가 ‘자연’을 되돌려주었다고 쓴 바 있다. 또한 우리는 런던을 사로잡았으며, 아마도 영국이 프랑스인들에게 주었던 것보다 우리가 영국인들에게 준 기쁨이 더 컸을 것이다.


1931~1935년의 기간동안 나는 퀸즈 극단의 작품 모두를 연출했으며 - 거의 열 편 정도를 - 연기도 했다.


런던에서의 대성공 이후 점차적으로 극단이 와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1935년, 나는 그곳에서 다시금 일어설 것을 결심했고 그래서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단일성이나 의미도 없이 그저 사람들을 모아 극단을 차리는 것보다는 훈련과 실험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내가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과 같은 배우를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타이론 거쓰리의 유효적절한 지원과 죠지 디바인과의 절친한 협동, 그리고 로렌스 올리비에, 존 길거드, 글렌 비얌 쇼, 페기 에쉬크로프트, 이디스 이반스, 미첼 레드 그레이브, 알렉 기네스와 ‘모트리’의 신속한 도움과 우정에 힘입어 나의 첫 번째 사설학교인 London Theatre Studio를 열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영국 연극 속에서, 영국인들 속에서, 셰익스피어 속에서 새로운 견습기간을 거쳐야 했지만, 2년 후에는 타이론 거쓰리의 초청으로 올드 빅 극장에서 <에드문톤의 마녀>를 감히 연출하기도 했으며 일년 후에는 또 같은 극장에서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맥베드>를 작업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분위기 속에 살면서 그와 가깝게 지내다 보니 점차로 이전의 프랑스 고전주의 레파토리만을 다룰 때 알고 있던 것보다 무한히 넓은 연출과 해석의 스케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엘리자베스조 무대의 건축역학에 맞춰진 셰익스피어의 극작 메소드에 익숙해져 갔고, 셰익스피어의 대중적인 희극과 소극이 가진 거친 리얼리즘의 영역 뿐 아니라 그의 위대한 시적 순간들의 서정성과 하모니를 이루는 연기양식과도 친숙해져 갔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고생스럽게 시의 운율분석법을 배웠고 또 그 리듬을 감상하는 법을 익혔으며 그러면서 그 언어의 모든 다채로운 변형을 따르게 되었다.


1938년 존 길거드의 극단과 함께 체홉의 <세자매>를 하면서 나의 첫 번째 리얼리즘 체험이 시작되었다.


1945년 전쟁 직후에는 당시 올드빅의 연출자 중 한사람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매우 즐기며 작업했다.


1953년에 드디어 프랑스로 되돌아왔다. 그때 나는 당시 프랑스 고전주의의 전통이 샤를르 뒬랭과 루이 주베와 같은 거장들 뿐 아니라 두사람의 신참, 코포의 제자 뒬랭의 수업을 받은 장 루이 바로와 장 빌라르에 의해 이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또한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알베르 까뮈의 무신론적 인본주의, 그리고 이오네스꼬와 베케트의 난해한 리얼리즘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파리에서 뛰어난 시인이자 장인으로서 점점 영향력을 키워나가면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브레히트를 보았다.


그 가난하고 황폐하던 유럽 속에서 극장건축작업의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었던 나는 행운아였다. 1931년에 나는 앙드레 발작과 함께 뷔 콜롱비에의 무대를 다시 만들었으며, 런던에(1935년과 1947년에) 두 개의 학교를 짓고 시설을 갖추었다. 1950년에는 프랑스 건축가인 피에르 송렐과 함께 올드 빅 극장의 재건축에 참여한 바 있으며, 같은 사람과 1953년과 57년 사이에 800여개의 객석을 갖춘 현대적 극장을 스트라스버그에 지었다. 그 극장은 내 생애 처음으로 완전한 앙상블을 갖추었던 곳으로 작은 연습실들과 워크샵 공간 등을 모두 구비한 곳이었다.


이상 매우 간단하고 빠르게 사실들만을 열거하면서 나의 연극경력을 소개했다. 나는 극장건축과 함께 사실주의와 고전주의 작품의 제작, 그리고 배우훈련에 관련한 작업들을 해왔고 이 세가지는 연극 안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측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여러분은 이야기의 길이로 보아 내 삶이 얼마나 일로만 꽉차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나이들수록 점점 더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다. 연극은 열정만으로도 실행될 수 있다. 그러나 초연함이 없는 열정은 당신을 장님으로 만들고 당신의 삶을 제한할 것이다. 당신이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은 한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나는 학교를 세군데나 세우고 거기서 가르쳐 왔는데, 아마도 그것은 기존의 것에 노예처럼 예속되지 않고 다시 한 번 명료함을 찾고 싶은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다른 무엇보다 선생이라고 해야할까? 어떤 학생들은 때로 내가 가르치는 데 있어서 잔인하다고 하기도 하는데, 내가 만일 그 속뜻을 모른다면 그 때문에 주춤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잔인함’은 바로 염두에 둔 것을 기필코 얻어내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작업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건강이 좋을 때는 집요한 끈기가 나를 사로잡는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뭔가를 보려는 열정, 그리고 이 ‘뭔가’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드는 조건을 창조하려는 열정. 그러나 ‘일어나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그토록 ‘일어나기’ 열망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한 번이라도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 때때로. 그리고 그것이 일어날 때를 나는 절대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아직도 그것을 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데 앞으로의 강연이 할애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다양한 연극적 스타일의 작품들을 가지고 리얼리티로 충만한 무대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


모든 나라들은 저마다의 연극적 스타일과 역사적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민족적 현실은 나라와 그 전통의 특성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때로 서로 다른 나라들이 동시에 어떤 특정한 리얼리티를 공유할 수도 있다. 바로 그러한 일이 요즈음 우리 시대에 벌어지고 있다. 분명히 서로 다른 나라들임에도 불구하고 - 일반적으로 말해서 - 리얼리즘이 전세계에 가장 보편적인 동시대적 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미국과 러시아의 형식이 주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이전 시대에는, 움직임의 예술, 특히 연극예술은 고립된 기념비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그리스 연극, 황금시대의 스페인 연극, 엘리자베스 조의 연극, 코메디아 델 아르테,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 18세기 고전주의 연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 유럽국가들에 공통된 특징이 보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간 우리에게 꾸준히 영향력을 높여오고 있는 극동의 연극은 여기서 제외했다.


유럽의 나라들은 집적된 전통과 연속적 발달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시대적 특성의 결과로 특정한 개별성을 확립해 왔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서로의 유사성 뿐 아니라 차이점을 통해 영향을 주고 받아왔다.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에게는 중심적 전통이 있다. 영국인에게 대중적이고 낭만적인 전통이 있다면, 프랑스인에게는 고전적이고 귀족적인 전통이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다른 줄기찬 전통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로 르네상스에서 기원한 이태리적 전통, 거의 영국과 동시기에 기원한 위대한 스페인적 전통, 조금 후에 발달한 독일의 전통들.


19세기에 여기에 편입된 나라들도 있다 - 러시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20세기에 와서 꽃을 피우게 된 미국의 문명이 그것들이다.


각국의 리얼리티는 지속적으로 다듬어져온 역사적 특성에 의해 형성된다. 연극은 그 리얼리티의 표현에 동참하는데, 그때 오래된 나라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리얼리티를 표현하게 되며 새로운 나라들의 경우에는 비관습적인 리얼리티를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연극은 하나의 예술이다. 그 형식은 건축, 특히 무대와 객석의 관계에 의존하고 또 연기에 달려있으며, 무엇보다도 극작가의 작품에 좌우된다.


연극의 표현수단은 그 극이 씌여지고 공연되는 시대와 함께 과거로부터 쌓여온 것에 의해 규정된다.


각 나라마다 연극은 당대의 대중에게 호소하기 마련이며 결국 그 당대가 후에 ‘시대’가 되는 것이다.


각 시대마다 고유한 스타일이 있으며 설사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스타일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해도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1900, 1910 혹은 1925년의 사진을 볼 때 드는 느낌을 새겨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1925년도를 잘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이 스타일은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삶에 영향을 주며, 우리가 다른 나라들의 여러 시대의 스타일의 해석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우리나라 우리 시대의 스타일에 대한 무의식적 지각과 함께 하는 것이다.


당대로부터 누군가를 분리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는 죽음이 유일할 것이다. 또한 자국의 전통에 영향받지 않고, 그 전통에 기대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한 예술가가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작품에 어떤 해석을 가한다면 그의 해석은 그의 나라와 그의 시대에 속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가 아무리 이해하려 애쓴다해도 낯선 땅에서 살았던 300년 전의 정신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루이 주베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몰리에르라면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가 제작한 몰리에르의 작품을 비난했다. 그 말에 주베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은 그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나보죠?’라고. 그러므로 현대의 예술가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과거를 해석할 수 있으며 그 기초는 그의 태생적 전통이거나 아니면 지나간 시대 다른 나라의 리얼리티에 대한 그의 지식과 느낌, 감상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반면에 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현상은 전세계 모든 나라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변화의 속도와 그 폭력성에 있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연극세계에 관한 한 우리 시대의 공통된 특징은 바로 현대적인 리얼리즘이다.


이 리얼리즘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회의와 불확정성으로 인해 엄청나게 고통받고 있다. 동시에 현대의 발견들은 과학의 발전을 가져옴으로써 우리 속에 보다 정확한 지식에 대한 욕구와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열망을 창출하였다. 이같은 엄격한 태도가 현재의 엄격한 리얼리즘의 본질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마다의 민족적 색채를 띠고 있는 현대 리얼리즘과 전통적 고전주의는 서로 충돌하지만 반면 그 사이에는 강한 상호작용이 있기도 하며 때로는 일치의 가능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과거의 작품을 해석함에 있어서 현재를 비평할 때와 같은 선명함, 같은 엄정함으로 접근하곤 한다. 그렇게 과학적 정확성으로써 리얼리티를 검증하면서, 또 그 리얼리티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하면서, 우리는 분명히 구별되는 두 종류의 리얼리티가 있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한편에는 삶의 의미와 그 표면 아래에서 일어나는 것들,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고 표현하는 심층적인 리얼리즘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21세기 초미에 ‘자연주의’라 불리웠던 외면적이고 피상적인 현실의 재현에 만족하는 리얼리즘이 있다. 가능한다면 나는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리얼리즘’과 졸라, 입센, 스트린드베르히, 앙트완느, 스타니 등의 시대에 속하는 단명했던 한 예술형식으로서의 ‘자연주의’를 구별하고자 한다.


현대의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과거의 어떤 시대들은 다른 시대들보다도 오히려 현재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셰익스피어에게서 꽃피운 영국의 대중적 전통은 라신느의 희곡에서 그 정점을 볼 수 있는 17세기 프랑스의 귀족적 예술에 비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가까우며 그것은 프랑스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조의 극작가들이 1920년 이후 프랑스에서 인기를 누려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현대의 광기와 엘리자베스조의 ‘광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현실을 드러냄에 있어서 그러한 옛 시대들은 우리 시대의 관습에 모순되는 표현수단을 사용했다. 때문에 우리는 연극에서 시가 대부분의 희곡에서 쓰이는 일상회화의 파괴된 산문보다 현실을 파고 들어가는데는 무딘 도구가 아닌가 의심해 왔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타일은 현실의 외면적 형식을 벗겨냄으로써 그 자체가 하나의 현실이 된다는 것, 즉 보다 심층적인 세계를 대표하게 됨을 말이다. 예술에서는 스타일의 리얼리티가 존중되고 향수될 수 있어야 하며, 절대 그것을 무시하거나 파괴해선 안된다. 책이나 희곡은 성당이나 조각상에 비해 덜 구체적이고 물질적이지도 않지만 리얼함에 있어서는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그와 동일하다. 따라서 고전적인 희곡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한 그 스타일의 리얼리티 안에서 형상화해야 한다. 오늘날의 언어와 스타일의 관점으로 과거를 해석해서는 안되며 대신 현대적 관점에서 과거 스타일의 리얼리티를 동화시켜야 할 것이다. 현대적인 연극세계와 고전적인 연극세계, 이렇게 별개의 두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가 오직 하나인 것처럼 연극도 오직 하나이며, 다만 고대로부터 현대의 스타일로 천천히 변화발전해가는 연속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고전적 전통 속에서 길러진 배우라면 현대의 리얼리즘이 그 표현과 주제면에서 더욱 깊어질수록 연극의 현대적 형식에 보다 더 준비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실주의적 접근법은 고전 작품의 해석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고전의 훈련과 연습은 자칫 감상적이고 감각적이거나 공허해져 버릴 수 있는 리얼리즘에 영감을 주고 그것을 풍부하게 만드는데 필수적이다.


러시아 이야기로 이 단락을 맺어야겠다. 1957년 6월, 나를 비롯한 다섯명의 프랑스 연출가와 배우들이 공식초청을 받고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러시아연극을 보러 갔었다. 보름 동안 열네편의 공연을 관람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연출과 제작, 연기방식에 대단히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더욱 흥분시켰던 것은 그나라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이며, 그러면서 그들이 사는 환경을 이해하고 그들의 ‘인간적 리얼리티’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일반인들과 그 가운데서도 특히 연극인들이 외부세계와의 접촉욕구를 공공연히 피력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발전을 원했다. 사석에서나 공석에서 ‘우리 연극은 30년이 뒤져있다.’고 말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왜?


너무나 오랫동안 러시아인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이름 하에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독점적인 예술적 신조로 실천하도록 강요받았고, 급기야 30년대에 가서는 그것이 공식적인 신조가 되었다. 예술적 문제에 있어서 시스템은 분명히 위험한 것이다. 스타니는 자신의 작업방식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불리워지는 것을 누구보다 꺼렸을 것이다. 그는 지적인 광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그에게서는 따스함과 선함과 열정이 풍겼다. 그는 당대 연극의 거장이었고 한 번도 자신을 ‘자연주의’라는 협소한 한계 안에 두려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시스템을 거부하라고 가르친, 그러니까 우리 시대와 나라에 유용한 것을 취하고 나머지는 주저없이 버리길 요구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믿는다.


내가 러시아에서 본 바의 리얼리즘은 학구적이고, 편안하며, 부르조아적으로 변질된 것이었다. 단편에는 감탄할만한 것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식어버린 사체였다.


이번에 나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세자매>와 또 같은 극단의 레닌그라드 순회공연 작품이었던 고골의 <죽은 영혼>을 보았다. <세자매>는 러시아인들이 ‘새로운 프로덕션’이라 부르는, 그러니까 1940년 네미르비치 단첸코에 의해 제작된 것이었다. 몇몇 훌륭한 배우들이 있었지만 자매들을 연기했던 여배우들은 사실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들은 각각 48, 50, 52세 였다.) 전체적으로 매우 고급한 수준의 작품이었으나 체홉을 스타일과 의미면에서 모두 단순화시켰다. 마지막 장의 실외세트를 모두 단순화한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었지만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극은 템포가 빨라졌다. 체홉의 유명한 포즈들은 삭제되거나 단축되어 결국 ‘정취있는’ 잡음들이 훨씬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보다 낙천적이고 보다 건설적인 의미가 찾아진 대신 시적인 가치는 손상되었다. 향수에 젖은 멜랑콜리가 적극적인 선언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이삼백년’ 안에 일어날 것들에 대한 베르쉬닌의 대사마저 정말 예언적인 의미로 행해졌다. 러시아인들은 그에 대해 관객들이 체홉을 싫증내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그것을 새롭게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고골은 그보다 훨씬 나았다. 그 공연은 오리지널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방식으로 상연되었다. 세트를 사실적으로 세부묘사하지 않고 그저 스케치만 해놓았을 만큼 장면전환이 빠르고 잦았다. 깊은 목소리의 건장한 배우들이 극을 맛깔스럽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만 한가지의 전형적인 오점이 공연 전체를 깍아내렸다. 극중에 폭풍장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 존경할만 했다! 그 천둥소리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가 절정에 이르자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무대 오른쪽에 있는 창을 통해서 너무도 충실하게 모든 단계를 다 거치면서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엔 급하게 쏟아지다가 점점 느려지더니 끝에 가서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비까지. 그 비는 소리뿐 아니라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실주의적 스타일로 씌여지지 않은 그 극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을 만큼 선명하게 말이다.


그런데 고골이 체홉보다 오랜 시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무엇때문일까?


체홉에 대한 나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는 아마도 고골이 스타일면에서 체홉보다 객관적이고 보다 ‘씌여지고’ 또 보다 고전적이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고골을 모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이 틀림없다. 그러나 체홉이 어디에서나 모방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런던과 뉴욕에서 체홉을 이류로 끌어내린 것들만해도 놀랄만큼 많으며, 그것들은 언제나 소위 ‘삶’이라 불리는 둔탁한 평범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연극은 삶이 아니다. 연극은 삶으로부터 나오지만 연극은 연극인 것이다. 연극 속의 삶은 극작과 스타일면에서 연극적 변형을 요한다.


다음 부분에서 나는 극장건축, 연출, 디자인과 배우훈련의 측면에서 이것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일 것이다.


<스타일과 양식화>


앞 장의 제목은 ‘스타일과 리얼리티’였다. 거기서 나는 인간적 리얼리티와 예술적 리얼리티를 이야기했고, 마지막 부분에서 ‘연극은 삶이 아니며, 연극은 연극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거기에 연극은 하나의 드러냄(revelation)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무대예술이라 불리는 그 예술을 통한 구체적이고, 지적이며,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삶의 드러냄.


여기서 나는 ‘삶을 드러내기 위해서 연극은 삶 자체의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 연극은 연극의 수단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말하려 한다.


앞서도 ‘연극은 변형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곧 ‘쓰기(writing)’를 이른다. 현실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스타일’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이제부터 이것이 극장의 관점에서, 연기와 연출과 디자인과 훈련의 측면에서 어떻게 실행될 수 있는지를 제시해 볼 것이다. 오늘날 나는 우리가 스타일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이고 또 그것이 양식화라는 개념 - 정말 무서운 말이다 - 과 혼동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밝히는데 힘 쓸 것이다.


이제 ‘리얼리즘’은 뒤죽박죽되고 케케묵은 개념이 되었다. 오직 인간적 리얼리티를 드러낼 때에만 ‘리얼리즘’은 이전의 권위를 되찾아 최상의 도구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며 그와 동시에 ‘자연주의’는 쇠퇴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되살아난 리얼리즘의 필요조건들은 무엇일까?


건축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무엇보다 극장은 극이 보여지고 들릴 수 있도록 관객과 배우를 각자의 위치로 배치하는 구조물로서 연출가와 디자이너들은 모든 측면에서 현실감(a feeling of reality)이 창출될 수 있도록 무대를 꾸미게 된다.


그렇지만 미학적 고려만으로 적절한 조건을 창조할 수는 없다. 우리가 진정 가치있는 연극적 건축을 성취하려 한다면, 미학적 기술적 고려들만큼 연극적 지식과 경험을 중히 여겨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연극과 객석 안에서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되며 그 정신으로 말미암아 현대 연극 뿐 아니라 과거의 역작들 역시 동시대적 의미에서의 생기를 얻을 것이다.


나는 ‘동시대적 의미에서’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많은 작업들이 이런 방향에서 행해져왔음을 책을 통해 알고 있다. 나는 Norman Bel Geddes와 Robert Edmund Jones의 디자인들을 보아왔다. 하지만 그 극장건물을 본 적은 없었다. 대부분 유럽국가들의 극장 객석은 시대에 뒤쳐져 있다. 물론 독일과 러시아의 현대적 극장들은 여기서 제외된다. 무대와 객석의 관계는 아직도 이전 사회를 지배했던 사회적 차별, 특히 18세기의 그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객석은 대개 두 개 내지 네 개의 층으로 엄연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에 비해 영화관과 스포츠 경기장과 같은 현대적인 공간에서는, 관중이 훨씬 격차가 적은 그룹으로 묶여지기 때문에 공통의 기호와 강한 성벽을 획득하게 된다. 유럽의 오래된 극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무대에서 너무 먼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영화와 텔레비전의 영향 탓으로 관객들은 보다 생생하게 보고 듣기를 원하고 있다. 이제 관객의 주요 관심사는 편안함 뿐 아니라 무대가 ‘손에 잡힐 만큼’의 그런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공연의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므로 무대와 객석이 보다 가까와질 필요가 있다. 한편 오늘날의 관객, 젊은 관객들은 기계적인 장관의 연출이나 동화적 환영을 즐기지 않는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소외되어 있기는 배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객석으로부터 차단된 채 관객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배우들 역시 관객을 향한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위치에 놓여질 필요가 있다.


나는 ‘과거의 작품을 동시대적 개념으로 되살리기’라고 말했다. ‘과거의 작품에 생명을 주는 것’이 ‘재건’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과거의 재건은 죽었다. 과거를 모방할 수도 없다. 과거는 동시대적 견지에서 재창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극의 현실은 무엇보다 그것이 씌여진 시간과 장소, 즉 시대와 나라에서 비롯된다. 예술의 관점에서 극의 공연은 극이 자연스럽게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는 본래의 장면배치에 의존한다. 과거 연극들의 장면배치는 오늘날의 무대가 현대의 관객들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한 리얼리티를 제공했다. 오케스트라를 갖추었던 그리스의 무대를 생각해보자. 스페인의 안마당, 이태리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플랫폼, 엘리자베스조 연극의 피트와 플랫폼, 고전주의 프랑스의 형식주의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잠시 중국연극이나 노 공연을 위한 연극적 배치에 눈을 돌려보자.


각각의 경우마다 희곡의 형식과 무대의 가시적 형태 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대와 객석의 관계는 연대와 분명한 분리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무대는 진짜 재료로 만들어진다. 희랍의 무대는 돌로, 스페인과 이태리는 나무와 둘러친 커튼으로, 엘리자베스조의 영국은 채색한 나무와 인테리어 장식으로, 프랑스는 돌, 나무장식, 휘장과 샹들리에로.


이와같은 극장의 형태와 그 무대를 만드는 재료의 현실성은 공개적이고, 자유로우며, 솔직한 컨벤션에 어울린다. 배우들은 모두가 무대임을 의식하고 있는 무대 위에서 고안된 행동을 선보였으며 환영 혹은 더나아가 리얼리티가 바로 배우에 의해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7세기와 특히 18세기 기계장치가 도입된 이후 점차적으로 지금의 현대적 무대로 발달해 왔으며 그리하여 19세기말 자연주의의 도구가 되었던 마술적 환영을 동반한 기계적 무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전기는 이미 현대적인 재료들의 사용으로 변형되기 시작한 이 정교한 기계장치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드라마에 관련된 바, 그것은 주로 실제 삶의 외양을 완벽하게 재생해 내는 것이다. 자연주의 연극의 필요조건은 오페라의 그것과 잘 어울린다. 마술과 마찬가지로 핍진성 또한 거리를 요한다. 양자 모두 관객과 무대 사이의 물리적 분리 위에 기초하는 것이다. 배우에 의해 공개적으로 창조되는 환영은 이제 삶 자체, 실제 삶, ‘삶의 한 단편’에 의해 대치되고 사라져버렸다.


현대의 무대는 비어있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갖고있지 않다. 해가 기울 무렵 무대를 들여다보면 어두운 구멍만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밤이되면 그 어두운 구멍은 실제 삶과 같은 한없이 다채로운 세트들로 치장한 다음 각등으로 고립되고 프레임으로 잘려진 멀리 떨어진 그림을 만들게 될 것이다. 이 다소 충실한 실제 삶의 사진은 새로운 환영을 창조하여 믿을 수 없을만큼 오랜 시간동안 관객을 속여왔다. 환영이 사라진 환영으로써 말이다.


지역 간 약간의 편차가 있긴 하지만 자연주의는 모든 곳에서 여전히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질문을 하는 것은 아직 유효하다. 자연주의적 관습이 인간적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가장 충격적인 방식인가?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자연주의로부터 상속받은 무대가 우리의 현대적 리얼리즘의 최상의 도구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프랑스 고전주의의 필요들로부터 그다지 멀리 벗어나 있지 않은, 우리의 현대적 무대가 과거 모든 스타일들의 필요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현대적 건축은 과거의 극들이 태생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본래의 연극적 배치와 상당히 다르다. 사진틀 무대는 희랍의 모든 극과 혹은 스페인과 셰익스피어 시대의 모든 전통들을 왜곡시키며 그것들의 참된 현실성을 앗아간다.



연기, 연출, 디자인에서의 스타일


연극 안에서 연출가의 위상은 때로 과장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축소되기도 하지만, 제작자나 매니저가 극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기대는 것은 여전히 연출가의 역할이다. 물론 제작자는 스타 배우에게도 의존한다. 그러나 그것도 연출가에게 만큼은 아니다. 연극의 제작과정은 연출가에게 재능과 인성, 상상력, 매력, 배우와 작업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에 대한 권위를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끌어 낼 수 있는 자신감을 원한다. 그러므로 연출가는 조직의 핵심이자 그 어느 때보다 전문화되어 서로 분리되고 있는 현대의 연극작업 과정에 연루된 제 요소들을 연결하는 끈이라 하겠다. 연출가는 작업의 단일성을 상징하는 지성과 효율성과 품격의 보증수표인 것이다.


지난 50여년 간의 연극환경은 연출가의 지위를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올려놓았다. 미움받다가, 아첨받다가, 사랑받기로 옮아오면서 연출가는 이제 섣불리 언급할 수도 없을 만큼의 많은 특권들을 누리고 있다.


금세기의 앞선 절반동안은 극작가보다 연출가가 연극에 창조적인 기여를 해왔다고들 한다.


실상 극문학에 있어서 금세기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했으며, 희곡이 무대를 혐오하는 일종의 문학으로 쓰여졌고, 극작가들 역시 사람보다는 관념에 더 이끌렸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무대 현실의 한가운데 살면서 작업하는 연출가가 승리의 열쇠를 거머쥐게 되기에 이른 것이다.


논쟁의 소지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19세기말 이후로 연극을 바꾸어왔던 개혁과 변화들은 입센, 스트린드베르히, 체홉, 쇼와 피란델로, 끌로델, 지로도, 오닐과 같은 이들보다는 앙뜨완느, 스타니슬라브스키, 고든 크레이그, 아돌프 아피아, 그랜빌 바커, 막스 라인하르트, 쟈끄 꼬뽀에게 1차적으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연출가는 ‘개혁자’였다. 그들은 연극의 모든 측면을 다루었으며 작업 속에서 연극의 형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뮤직홀의 공헌과 20세기 러시아인들의 실험, 포크너와 세르반테스와 너트 햄슨의 작품을 각색한 장 루이 바로의 발견들, 그리고 극작가이면서 시인이었던 예이츠의 상상력 넘치는 사상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뮤지컬 코메디의 발전과 마르셀 마르소의 성공, 그리고 너무 가까운 탓에 그의 진정한 기여의 본질을 뚜렷이 밝히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개혁자임에 틀림없는 브레히트의 작품들을 또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연출가가 작가를 거의 대신해버린 영화의 성취들을 목도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연출자들의 영향력과 그 중요성을 입증하는 증거이며, 이제 그것들은 연극의 역사가 되어 책 속에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얘기되지 않은 것, 그리고 내가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은 중서유럽에서 연출가의 독점시대가 지나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에서는 현재 연출가가 소위 창조적 예술가임을 부정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그러한 경향을 런던에서도 보고 있다. 런던의 활동적인 연극단체인 로얄 코트 씨어터(Royal Court Theatre)의 방침은 단호하게 극작가에게 첫 번째 자리를 내주고 있다. 그 극단은 가능한 한 현대 희곡을 많이 생산하여 그것들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단순히 무대화함으로써 그 품격을 높이고자 한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젊은 극작가들과 만나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비평을 나눈다.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희곡을 읽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극작가 극단(Playwright’s Company)이 세워진 것을 볼 때 여러분들도 같은 필요를 느끼고 있다고 짐작한다.


그렇다면 이같은 경향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시계추의 왕복운동인가? 이미 강조한 바 있듯이 우리 시대는 현실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오락의 한 형식으로서의 연극이 지속될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은 언제나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오락’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가 이제와서는 상당부분 바뀌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희곡의 의미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고 있다. 미국 논문에서 연극 목록을 보았을 때 나는 오프 브로드웨이 쇼의 성장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브로드웨이 쇼에서도...... 그 희곡들의 의미가 언제나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거기엔 의미가 있었고 심지어 뮤지컬 대본들까지도 강조점을 의미에 두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며 가장 흥미롭다고 할 댄스 부분조차 의미를 갖고 있다. 양차 대전 이후로 사람들은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의 지위를 다루는 동시대 작품들을 목마르게 기다려 왔으며, 이러한 경향은 영국과 프랑스 연극에서도 뚜렷하게 관찰된다.


그것이 인간적이건, 도덕적, 사회적, 형이상학적이건 간에 의미에 대한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럽게 리얼리즘, 곧 모든 측면에서의 리얼리티에 대한 선호와 맞물리게 된다. 그리고 그 리얼리티에 대한 선호는 천박한 전시주의와 오락을 위한 오락에 역하는 것이자 동시에 스펙타클을 중시하는 연출가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뭔가 할 말이 있는 희곡을 요한다.


연극에서 뭔가를 효율적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있어야 한다 - 내용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들. 우리의 덧없는 연극에서 극작가가 건축가와도 같은 존재라면 무대 디자이너들과 연출가는 모두 형식들, 변형의 방법론, 스타일을 연구하는 이들이다.


그렇다 하면 희곡이 가장 선두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연출가의 작업 이전에 희곡의 전개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적 리얼리티의 복합성을 표현하려면 반드시 새로운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의 과거를 심도있게 연구하고 새로운 이론과 선언들을 발표해야 할 것이다. 화가와 조각가들은 이미 우리를 앞질러 갔다 - 연극은 항상 끝에 나온다 - 그렇지만 이제 드디어 우리는 그 모든 영향력들에 열려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 큰 영향력은 극동의 그것이다. 시적인 목적을 위해 중국과 일본의 연극은 회전하는 무대와 객석으로 뻗어나간 놀라운 다리를 창안하였다. 그것들은 실용적인 리얼리즘과는 전혀 상관없으며 공간을 시간의 흐름에 상관시키기 위한 도구이다.


일본에서 우리는 노오와 노오 연기자들, 그리고 삼면이 객석으로 둘러싸인 무대, 마치 건축물처럼 배우들을 에워싸고 있는 의상을 본다. 그리고 거기서 가수와 음악가들로 구성된 코러스와 영원성의 느낌까지를 본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뒤를 잇는 현대 연극은 ‘서사적’이라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만큼 그 단어는 유럽에서 상당한 반향을 얻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극동연극의 영향 하에 시작된 전세계적 움직임의 한 양상에 불과하다. 그 방면에서는 오히려 예이츠를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손톤 와일더도 <우리읍내>와 같은 희곡을 썼을 때 벌써 브레히트를 예고했다. 그뿐 아니라 , 와 같이 앙드레 오베이가 퀸즈 극단을 위해 썼던 희곡들 대부분 역시 ‘서사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같은 관점에서 우리만의 고전들을 살펴 볼 때가 되었다.


물론 우리의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단순한 복고주의적 발상이 아니며 옛 것에 대한 존경심으로 화석화되기를 원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그리스 시대와 스페인 시대와 엘리자베스 조와 셰익스피어를 살펴봄으로써 거기서 우리의 현대 세계, 현대 예술, 현대 연극을 위한 내용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와 구성(construction)과 작곡(composition)의 비밀, 그리고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다시 찾아내려 애쓰고 있다. 그 노력의 근거는 현대의 리얼리즘이 그 리얼리티의 핵심부에 가닿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구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데 있다. 우리는 리얼리즘을 사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발전을 원한다. 연극은 오직 하나이며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적인 변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모든 고전을 연기할 수는 없다. 셰익스피어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적으로 올리겠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모험이 될 것이며, 그보다는 그러한 고전들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와 관계있는 것들을 골라서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이러한 과거 역작으로 회귀는 비단 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지식과 식견 뿐 아니라 매니저와 연출가 모두의 확신과 기술이 요구된다.


이제 연출가와 연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연출자가 작업을 할 때 맞닥뜨리는 첫 번째 문제는 희곡을 고르는 것이다. 선택은 중요하며 반드시 그 뒤에는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가끔씩 나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경우를 보곤 한다. 한 연출자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그는 연출의뢰를 받는다. 희곡을 읽어 본 연출자는 별로 내키지 않지만 그러마고 승낙한다. 그러면서 그는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하는 것이 투철한 직업정신이라고 생각한다.(마치 애정의 부재가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듯) 그렇지만 최초의 충격이 없는 작업은 미지근하고 확신이 결여된 것일 수 밖에 없다.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희곡을 통독하고 나서 연출가가 받은 충격에 작품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믿는다. 그 무엇도 이 최초의 계시를 대신할 수는 없다. 혼란스럽고 미궁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연출가는 맨처음 충격을 길라잡이 삼아 언제나 그것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최초의 충격은 연출가에게 있어서 동인이자 동시에 제동장치로서 기능한다. 연출작업의 어려움은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이 아니라 - 연출가의 상상력은 일반적으로 풍부하다 - 그 아이디어들을 점검해 가는 데 있다. 인물을 너무 빨리 파악해버린 배우처럼 연출가가 아이디어에 편승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현상이다. 그렇게 되면 희곡의 어느 일면만 보게 되기 쉬우며 작품 전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도식화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희곡이 당신에게 다가오게 하라. 읽고 또 읽되 부분부분 읽지는 말라. 처음에는 전체적인 느낌을 위해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도록 한다. 그런 다음에는 희곡이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전체 사건의 순서와 텍스트의 주요 동선과 연결부분들이 일목요연하게 머리 속에 그려지기까지, 어떤 부분이 가장 강렬하고 가장 미약한가를 뚜렷이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읽고 또 읽어라. 그리고 공연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할 수 있는 한 뒤로 미뤄라.


나는 형상화(production)를 정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여러 차례 그런 시도들이 있어오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연출가의 수 만큼이나 많은 연출방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험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인 것이다.


나의 목적은 거대한 고전 희곡을 우리에게서 동떨어진, 그러니까 셰익스피어 시대나 그리스의 스타일로 형상화하는 것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형상화의 문제들이 극대화되고 가장 민감하게 다가오며 또한 동시에 그것은 연출가에게 가장 당황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위대한 작품의 스타일 문제에 직면할 때 연출가는 순종적이면서 동시에 창조적이어야만 하는 복합적인 상황에 놓여지게 된다. 다른 말로 해서 진정으로 작품에 충실하기를 원한다면 연출가가 죽은 극작가를 대신해서 희곡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희곡에 순응하면서 생기있고, 창조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방법을 찾아내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순응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기성의 것을 답습한다거나 현학적인 태도를 이르는 것은 아니다.


또 역으로 창조가 곧 환상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상상력을 풀어헤쳐 놓는 것,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것, 특정인의 기호를 따르는 것은 진정한 창조로 귀결되지 않는 개인적인 사상과 태도의 전시이자 강요일 뿐이다. 그것이 아무리 독창적이고 반짝인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현대 의상을 입은 햄릿의 시대, 심리학적으로 푼 외디푸스의 시대, 여러 스타일들의 충격적인 대립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고 믿는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한여름밤의 꿈> 공연이 논의되고 있다. “19세기 의상을 입고 공연하는 게 재밌지 않을까요?”라고 연출자가 말한다. “날으는 요정들의 코러스에 멘델스존의 아름다운 음악을 곁들이는 거예요.” 그런 식의 양식화와 환상화(fantastication)들은 이제 한물 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경박한 접근보다 극작가의 작품에 보다 가까이, 깊게 다가가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현대의 인간에게 느껴지는 의미, 의미의 핵심과 전에 말한 바 있듯이 그 의미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스타일의 리얼리티 간의 결합인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일의 리얼리티는 어떤 요소들로 이뤄지는가?


* 구성과 작곡. 작곡은 음악용어다. 구성은 여러 부분들과 그것들이 연결된 방식을 말한다.


* 리듬. 서로 다른 리듬들 간의 관계


* 언어의 톤과 색깔, 텍스트 전체의 톤이 어떻게 변해가는가


희곡에 있어서 스타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의미나 심리학적 구성이란 있을 수 없다. 한끝은 필연적으로 다른 한끝을 포함한다. 스타일은 그 자체에 의미를 담고 있다. 의미와 심리학적 분석은 반드시 텍스트와 스타일을 통해서, 그것과 별도가 아니라 그를 통해서 이뤄져야만 한다. 프로이드적 혹은 신화적 햄릿은 자칫하면 산문적이거나 아니면 붕뜨기 쉽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은 희곡의 스타일의 리얼리티와 상관없이 연출자의 머리 속에 그냥 떠오른 것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단순화되거나 도식화된 해석은 배우가 텍스트의 다양한 요구조건들과 그 마법적인 힘에 조화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힘을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 효과를 창출한다. 그것이 현대의 배우들과 어떤 식으로든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현대의 배우들과 연출자들이 풀어내야만 하는 가장 스릴넘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며 그 해결책에 공연의 강도와 깊이가 달려있다.


연출자는 텍스트를 독자적으로 공부하고, 반복해서 읽고, 희곡의 작곡과 톤과 색깔과 리듬을 분석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천천히 희곡을 어떻게 빚어가야할지 깨닫게 될것이다. 배우의 기질, 표정, 신장, 특히 고전희곡에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의 특성과 강도, 그리고 배우들 간의 본질적인 대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점차적으로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거대한 고전 작품의 캐스팅과 오페라 캐스팅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프랑스 고전연극의 전통을 따르는 코메디 프랑세즈는 지금까지도 배우들을 그 유형과 기질, 목소리의 능력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어 ‘emploi’ 또는 ‘emplois’라는 프랑스 말에는 아버지, 청소년, 하녀, 첫 번째와 두 번째 하인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관습이 ‘인간적 리얼리티’에는 과하게 반할 수도 있지만 ‘예술적 리얼리티’와는 자연스럽게 일치된다.


작업의 초기 단계에서는 무대상의 배치까지가 연출자에게 세워지면 된다. 첫 번째, 전체적인 레이아웃, 어떤 장면이 어디서, 뒤에서, 앞, 옆에서 일어나야 할까. 그것은 일종의 지형학으로 인물들의 주요 움직임과 등퇴장을 보여주는 계획의 형식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교통정리 계획. 그러나 희곡의 거대한 건축물을 무대에 옮겨놓는 이 초기과정이 처음부터 너무 상세하게, 심리학적인 동기요인을 가지고 제한되어선 안된다. 희곡은 반드시 자유스럽게 호흡해야 하며 그 흐름을 현대 무대에 무작정 구겨넣어 덧입혀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현대 무대는 더 이상 그것이 태생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마치 얼어붙은 음악과도 같은 건축물’인 엘리자베스 조의 무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희곡 알아가기, 장면들의 지형학, ‘교통정리’, 이들 세가지 필수요소로 출발하여 디자이너들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주요 전환과 함께 세트의 레이아웃이 점차적으로 만들어진다. 아직 배경그림을 디자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간을 어떻게 운용할 지를 계획하는 것이다. 물론 이내 형태와 색깔의 선택에 대해서도 논의하게 될테지만, 그 선택들은 장식적인 면보다 극적이고 정서적인 실용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선택의 성패는 디자이너와 예술가가 균형을 이루어가며 협업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연출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고, 디자이너의 재능과 효용성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완벽한 의견교환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분명히 훌륭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공연의 균형을 깨뜨리고 배우들을 묻히게 할 자극적인 의상과 배경을 위해 디자이너를 찾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연들이 디자이너에 의해 간접적으로 연출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배경그림이라면 그림의 형식과 색깔로써 희곡에 배경과 행동을 위한 발판만 제공하면 된다. 그 나머지는 ‘잘 차려입은’ 배우들의 몫이다.


의상 디자인은 가장 첨예한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의상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특히 고전적인 작품의 경우 의상은 어떤 쓰임새를 갖는가?


나는 장면배경과 의상을 와토 스타일로 처리한 <뜻대로 하세요> 공연을 보고 무척 놀란 적이 있었다. 내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그 상상력 풍부한 연출가는 “<뜻대로 하세요>를 18세기 스타일로 해보면 재밌지 않을까?” 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과는 재미있는 것 이상이었다. 주연 여배우의 다리는 완벽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으며, 한마디로 ‘저들은 와토 스타일 뒤에 묻혀질 지어다’ 그 자체였다.


여기서 <뜻대로 하세요>와 18세기 스타일의 적합성 여부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그건 정말 시시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이 경우에서 보여지듯이 희곡의 스타일이 다른 시대 뿐 아니라 당대의 유명한 화가의 개인적 취향에까지 종속되는 사태의 위험성이다. 물론 한 시대의 스타일, 그리고 특정 화가의 스타일에서도 필요한 영감을 얻어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위대한 걸작의 복사품을 무대 위로 가져오는 순간, 시각적 효과가 거창할 수는 있겠지만 십중팔구 극적 생생함(리얼리티)는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 창조하는 대신 복사했기에. 그것은 극장을 박물관으로 바꾸는 짓이다. 어떻게 그런 가짜 의상이 특정한 희곡에 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배우들은 의상을 입는 게 아니라 가장을 하는 것이다. 그 복고주의만도 충격적인데 게다가 그것은 진품도 아니지 않은가? 우스울 따름이다. 그런 허세 속에도 나름대로의 계시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어떻게 셰익스피어 희곡의 심장부에 깔려 있는 비밀스런 스타일과 맞아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의상은 무엇보다 배우가 입는 것이다. 따라서 의상은 배우에게 인물을 덧씌우려 하기 보다 배우가 신체적으로 잘 연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배우는 의상에 갇히는 꼴이 되고 만다. 디자이너는 배우가 어떤 의상을 입고 싶어 하는지와 그가 그것을 입고 무대에서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유념해야 할 것이다. 좋은 의상은 배우를 더 자유롭게 하면서 인물에게 더 다가가게 한다. 이에 덧붙여 의상은 세트와 배경의 형태와 색깔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가볍게 디자인된 세트와 의상은 배우와 관객들이 인물 전체와 공연의 정서적 충격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 준다.


조명에 관해서도 의문이 있겠지만 여기서 다루기에 그것은 좀 복잡한 주제다. 고전 작품을 올릴 때는 배경이 자주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조명이 첫째로 중요하다. 조명은 때로 다른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서도 분위기와 장소의 전환을 나타내 줄 수 있다.


이제 나머지는 연기와 연출가의 독창적인 컨셉의 강도에 달려 있다. 연출가가 작업을 할 때 필수적으로 견지해야 하는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연기에 있어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출가의 자유, 디자이너의 자유, 배우의 자유. 이중 어느 하나만 빠져도 모두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 이 공동의 자유없이는 내가 보건대 완벽한 리얼리티는 성취될 수가 없다.


내가 말하는 자유가 방만한 태도는 아니다. 자유를 얻는 것은 필생의 과업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 자신이 자유롭게 되는 느낌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공연은 우리들 기억 속에 찬란한 기념비로 살아 있다. 마지막 드레스 리허설 때 다음날 공연이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 속에서 전혀 긴장하지 않았던 경험을 나는 일생을 통틀어 딱 네 번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자유는 바로 통어력을 뜻한다.


현재 연극의 상황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바는 이러한 자유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뭔가 친숙하고 낯익은 그런 느낌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극적 리얼리티의 성취에 필수불가결한 이 자유를 창출하는데 꼭 필요한 제1의 조건은 희곡의 스타일을 무대 위에서도 유지하는 것이다. 자연주의와 리얼리즘의 특정 형식들 그리고 일부 고전작품까지, 그러니까 다소간 삶의 환영을 필요로 하는 작품들에는 사진틀 무대가 어울린다. 그러나 그 나머지에는 우리가 지난번 강의에서 언급했던 자유롭고, 솔직하게 콘벤션적인, 연극이 연극으로서 보여지고, 배우가 배우로 존재하며, 관객이 믿도록 만들어진 극적행동과 고안들이 있는 그런 무대가 필요하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면 어떤 자유도 있기 힘들다. 예술적 리얼리티에서 떼어 낼 수 없는 인간적 리얼리티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공연의 단일성과 질은, 특히 희곡이 하나의 스타일로 된 경우라면,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해당 연극집단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하는 특질과 단일성에 의존한다고 믿는다. 주지하다시피 연출가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작품을 현실화(realization)할 요소들과 희곡에 생명을 불어넣을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공동작업자들, 특히 배우들 뿐 아니라 무대 뒤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가장 비중이 적은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사람들 모두를 알고 있어야 한다. 작업의 힘이 자유로이 샘솟아나고 예술적 개념이 굳게 뿌리내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앎과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로부터다.


여기서 나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살지도 모른다. 지금은 있지도 않은 켸켸묵은 연극으로 사람들을 훈련시킨다고 비난받은 적도 여러번 있다. 나는 웨스트 앤드, 파리지안 대로, 브로드웨이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대한 패밀리를 이루고 있으며 서로들 전부 아는 사이라고 들었다 - 배우들은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우리도 그것이 어느 선까지는 사실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기도 하다. 그들의 ‘눈물겨운’ 인간적 리얼리티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패밀리가 건드릴 수 있는 유일한 스타일은 사실주의적인 것이다. 하지만 스타니슬라브스키를 보아라. 아메리칸 그룹 씨어터를 보아라. 그들은 리얼리즘 자체에 새로운 것을 가져오지 않았던가? 영속성을 향한 시도에 기반을 두었기에 그들의 이름은 연극사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스타일의 단일성은 오직 함께 작업하는 것과 그러면서 서로의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에 익숙해지는 것으로 밖에 얻을 수 없다. 천재적인 연출가와 배우들은 악조건을 극복한 성취에서 더 큰 기쁨을 얻기 마련이지만, 고정적인 배우집단을 중심으로 잘 조직된 협력자 그룹을 결합시키고 또 그것을 매년 부분적으로 새롭게 바꿔나가지 않는 한 예술원칙은 세워질 수 없다. 아무리 재미있는 레파토리가 많아도 배우들의 지속성없이 연출가의 재능만으로 예술원칙을 훌륭하게 표현해 내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다시말해서 연극집단은 그들의 정신이 깃드는 처소라 할 것이다. 관객은 그들의 눈으로 육체를 확인할 수 있는 남자와 여자, 인간들에게 애착을 갖는다.


이상은 여담이었고 결론을 내리기 위해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배우와 연출가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늘 두가지 반대되는 태도 사이에서 갈등해 왔다. 한편에는 공연에 어떤 인공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형태지우려는 경향, 또 한편으로는 배우들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경향.


세트의 레이아웃, 배우들의 상관적인 위치와 움직임, 태도, 몸의 표정, 목소리들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계시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리스와 극동의 연극형식을 연구해 왔고 그래서 비극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으며 그것은 내 작품이 공식적인 가치를 가지기 바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무대 위 공간의 사용은 내게 있어 엄격한 의미를 가지며, 오른쪽으로 두 발짝, 왼쪽으로 두 발짝의 작은 움직임조차 의미로 충일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배우를 강제하는 것까지가 그리 멀지 않다는 데 있다. 연출가는 배우가 그런 작은 움직임의 밀도를 느낄 수 있도록 적정한 순간에 적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 설사 연출가를 100% 신뢰하는 사람에게라도 말이다.


그와 또다른 방향에서 나는 가끔씩 이태리인들이 ‘alla improvisare’라 부르는 방식으로 연습하고 연기하는 즉흥을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주어진 틀거리 안에서 배우들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게 된다. 연출가는 배우에게 연출지시를 내리고서 앞에서 일종의 거울처럼 행동하면서 ‘충고’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무대에서 경험한 이런 자유는 내게 있어 가장 해방적인 경험이었다.


어떻게 이 두가지 접근방식을 화해시킬 것인가? 그러니까 공연에 표현적인 형태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배우들의 창조적 자유를 길러내는 길은 무엇인가? 거기에 바로 연극예술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해결책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했다.


나보다 거의 스무살 아래이며 파리 국립 민중 극단(Theatre Nationale Populaire, 이하 TNP)의 단장으로 있는 장 빌라르는 암중모색과도 같은 나의 이 탐구에 자극을 주어왔다. 그는 내가 오늘날 프랑스 극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며 지금은 해마다 열리는 주요행사가 된 아비뇽 페스티벌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면에서 최고인 공동협력자들과 고정적인 극단의 강력한 연극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그의 극장, Palais de Chaillot는 그리 좋은 극장은 아니지만 2500개의 객석을 구비하고 있다. 빌라르는 이 비정상적 크기의 극장을 이용하여 연극 관람료를 대중적인 수준으로 낮추고, 또 그가 아비뇽에서 찾아낸 열려있고 자유로운 환경을 실내로 들여왔다. 오케스트라 피트 너머까지를 앞무대로 확장함으로써 무대와 객석을 연결시켰으며, 각등을 없애고 객석에 설치된 스폿만 가지고 무대를 밝히고 절대 객석과 무대 사이에 커튼을 드리우지 않았다. 내가 처음 그의 공연을 보았을 때 나는 그의 과감한 공간 사용과 조명을 이용한 공간제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경그림은 그에게 단지 배경일 뿐이었다. 의상은 일반적으로 무대디자이너가 아닌 화가들이 디자인했는데, 그들은 불필요한 세부를 없애고 강한 색의 블록으로 배우들을 강화했다. 그는 또한 소리와 음악을 상당히 신중하게 사용한다. TNP에 부임하기 전 10년간 그는 스트린드베르히, 피란델로, 체홉 및 현대희곡 다수를 연출했다. 그는 샤를르 뒬랭의 학교에서 고전적인 훈련을 받았지만, 지중해변에서 태어난 라틴 리얼리스트로서의 태생을 함께 갖고 있다. 그는 현실주의적 태도와 고전적 스타일의 어려운 융합에 심심찮게 성공함으로 해서 나의 흥미를 자극하고 어지럽게 한다. 나를 어지럽게 하는데는 로렌스 올리비에도 한몫한다. <리차드 3세>와 <리어왕>에서의 그의 연기를 보아라 - 그러나 프랑스의 전통이 영국의 그것보다 좀 더 엄격하긴 하다.


빌라르의 전체 작업, 그의 형상화, 무대화는 자유의 인상, 스타일이 자유롭다는 느낌을 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가 연습하는 걸 본 적은 없지만 가끔씩 그의 배우들이 내게 연습이 충분치 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무대감독도 그가 세트를 신중하게 충분히 연구하지 않는다며 불평하기도 했다. 그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거기에는 어떤 방만함이나 느슨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정작 내가 본 매번의 공연들은 완벽한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절대 기계적이지 않았으며 늘 의미로 충만하고 스타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어떤 창조적인 예술가도 늘 범할 수 있는 몇몇의 실패는 있었지만.


여기 미국땅까지 배를 타고 오면서 나는 빌라르가 쓴 책을 읽었다 - <연극의 전통>이라는 제목의. 그러는 동안 나는 그 작은 책이 가진 밀도와 집중, 사유의 깊이에 충격을 받았다. 그 책은 명료하고, 단순하며, 정확하되 절대 애매모호하거나 철학적이거나 젠체하지 않는다.


빌라르는 거기에서 사람들이 늘 너무 빨리 무대에 올라오거나 아니면 소위 ‘동작선 긋기’라는 것과 씨름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 너무 늦게 무대로 올라오는 경향이 있다고 쓰고 있다  - 단 그가 이 말을 할 때는 재능있고 잘 훈련된 배우들의 고정적인 집단을 전제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또 “연출가는 배우에게 자신감을 주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자신을 가져야 한다. 연출가는 그의 직업적인 지성과 감수성에 아무리 자신감을 가져도 지나치지 않다. 연습기간의 ⅓은 말 연습에 할애해야 한다. 배우를 너무 빨리 무대에 올리면 신체적 반응이 지나치게 성급하게 자극된다.”


또 “배우의 깊은 감수성은 연출이 이끄는 바에 따라 천천히 적절한 수준으로 이끌어져야 한다. 인물화(chracterizatoin)될 필요가 없는 부분은 한군데도 없다. 또 인물화없이 좋은 연기(impersonation)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매우 간명하다. 빌라르는 어떤 것도 캐리커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스타일은 매우 명쾌하다. 그는 이어서 말하길, “동작선 긋기와 신체적 표현은 진정으로 프로다운 배우에 의해 상대적으로 빨리 이뤄져야 한다. 전체 40회의 연습 중 15회 정도를 할애해서”라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나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연출가의 기술은 강요가 아닌 제안이다. 무엇보다도 연출가는 거칠어선 안된다. 배우의 정신은 시인의 정신과도 같다. 거칠게 대하는 것으로는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없다. 희곡을 훌륭하게 해석하는가의 여부는 배우의 정서적 특질보다 그의 마음에 더 의존한다. 연출가가 가장 많이 관여하게 되는 연습기간 후반에 어떻게 작업에 투신해야 할지 모르는 연출가는 형편없는 기능공에 불과하다. 통찰력도 잃어버리고 연극이 무엇보다 놀이라는 것, 땀이나 발작적 분노보다는 영감과 어린아이같은 황홀경이 더 중요한 일종의 놀이임을 잊어버린 가엾은 기능공 말이다.”


나는 그의 그런 태도를 좋아하고 거기 동의한다. 다만 그의 말은 잘 훈련된 극단, 소리와 몸과 스타일을 매일같이 훈련하는 사람들의 고정적인 집단에 적용되는 것임을 잊어선 안된다.


이 모든 것들은 최고의 기예없이는 얻어질 수 없는 자유와 상관된다.


나는 이 자유가 바로 자신이 이완되고 자연스러울 수 있기 전까지는 자기 예술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예술가의 지상목표라고 믿는다. 고전적 예술은 이 자유를 향한 험난한 도정에서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터치의 가벼움을 얻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자연주의의 진창에서 끄집어냄으로써 당신을 당신의 작업 이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나는 고전적 지침들이 당신을 보다 예민한 도구로 무장시켜 리얼리즘의 심층으로 침투해 들어갈 수 있게 하리라 믿는다.


고전적 실천에 따라붙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여러분은 넓고 훌륭한 배경과 오랜 동안의 훈련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이러한 훈련에 관한 것 몇 가지와 올드 빅 학교에서의 작업경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연극을 위한 훈련 - 올드 빅 연극 학교


연극학교는 많은 사람들, 특히 연극인들에게 일종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그들은 학교가 위험하다고 한다. 학교는 죽은 전통을 영구화시키는 관습적이고 학구적인 곳이거나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독단적이어서 히스테리컬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분히 비밀스럽고 이론적이고 협소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천재적이고 다양한 낭만적 예술가들이 학교와 전혀 상관없이도 잘 배출된다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관여한 학교들이 우리 시대의 연극이 직면한 몇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기여하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희망이기도 하다. 특정한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강력한 고전적 전통과 끊임없이 형성 중에 있는 현대 리얼리즘의 주목할만한 위업 사이를 지속적으로 오가는 것.


나는 런던 씨어터 스튜디오(1935-1939), 올드 빅 연극 학교(1946-1952), 스트라스버그 극예술학교(1954년 시작), 이렇게 세군데 연극학교를 세우고 연출해왔다. 영국의 두 학교는 현재 폐교되었지만 다른 이름을 내건 세 개의 학교로 이어졌다. 내 아내, 수리아 마기토가 연출한 스트라스버그 학교는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그 학교는 나머지 두 학교보다는 ‘압력’을 덜 받고 있다. 스트라스버그는 유럽의 수도라 할 만한 곳이지만 그 곳도 다 되어가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폭넓은 대중적 호소력을 가져온 자랑스런 명성에 의거하여 올드 빅 학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그 학교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거기에는 내가 영국 연극에서 만난 최고의 스탭들이 있었고, 또 내 오래된 친구인 조지 디바인과 글렌 비얌 쇼의 이례적인 도움이 있었다. 우리들 셋이 그 학교에서 가르쳤다.


이들 세 학교는 학교를 위한 학교가 아니었으며 공통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 - 연극 제분야의 인재들을 양성함으로써 극예술의 심층적인 발전을 도모하려는 것.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모든 표현수단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말하기 위해 그 방법론으로서 고전적인 지침들의 교수에 바탕을 두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현대연극을 살찌우는 것이었다.


세 학교의 실제적 목적은 첫 번째 학교 - 런던 연극 스튜디오(L.T.S.)라 불리웠던 - 가 배우들의 새로운 극단을 만들려 했던 사실로써도 입증된다. 그 극단의 멤버들은 전전에 올드 빅과 웨스트 엔드에서 내가 했던 주요 작품에 참여했으며, 조지 디바인의 지도 하에 활동해 오면서 최근에는 레파토리와 연극적 입장면에서 모두 현대적이라 평가받는 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글렌 비얌이 4년간 스트랫포드 메모리얼 시어터(Stratford Memorial Theatre)를 연출했다는 점도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이들 세 학교의 주요 특징은 무엇이었나?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ensemblier’는 ‘전체적 효과의 단일성을 목표로 하는 예술가’라고 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앙상블리어’였다. 개인적 특성을 앙상블로 동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각 사람의 창의성, 자유, 책임감을 계발하려 했다.


학생수는 가능한 한 소수로 제한했다.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지도 않았다. 현대적 관점에서 고전들을 보면서 우리는 예술적 과정이 매우 복합적인 것임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매년 여름 스탭들과 졸업생 중 뛰어난 사람들과 긴밀히 협의하여 우리의 작업방식을 재검토하고 수정해 나갔다. 차근차근 살아있는 완벽한 연극조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스탭과 학생들이 작업에 대해 항시 창의적 태도를 유지하도록 독려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창발성과 상상을 격려했다. 학교는 언제나 부분적으로 실험적이다. 그러나 자만심과 허영을 피하기 위해 우리 직업의 실제적 목적이 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석에 복무하는 것임을 주지시켰고, 중요한 희곡을 다룸에 있어서도 오직 작가만이 유일하게 완전히 창조적인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 바르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연출가, 디자이너, 배우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에 복무해야만 한다.


과정은 연기와 기술 코스로 나뉘었다. 연기 코스는 17-23세의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고 거기에 이미 프로로 진출해 있는 젊은 배우들도 포함시켰다. 기술 코스의 대상 연령은 이보다 훨씬 높았으며 과정이 이론적이거나 미학적 사상들을 토론하는 것이기에 앞서 구체적이고 몸을 쓰는 체험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기술적’이라는 겸손한 표현을 선택했다.


테크닉이 소위 진실이라는 것을 방해하고 창발성을 지배하거나 앞지르지 않게끔 또다른 기본원칙을 적용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또 강력하게 발달된 테크닉 없이는 절대 그 진실을 연극적 스타일로 표현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이들에게 확실히 심어주었다.


내 작업에서는 언제나 고정극단과 협연하는 스타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과의 작업에 최선을 다해왔다. 하지만 학교의 목적은 속성으로 어떤 결과를 도모하는게 아니므로 학생들의 정상적인 발달을 뒤로하고 몇몇 스타를 키우려는 것을 경계했다.


세 학교의 공통된 주요원칙 또 한가지는 뛰어난 학생들에게 좋은 직업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학교를 졸업만 하면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는 취업알선기관 쯤으로 취급하게 하지는 않았다.


해석적 작업을 위해 개별 장면보다는 희곡 전체나 막 단위 연습을 즐겨했고 그럼으로써 학생들이 다른 배우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법과 작품의 각기 다른 부분들 간의 상대적 가치를 배우도록 했다. 언어와 텍스트의 스타일에 대한 세세한 작업을 위한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희곡에서 장면들을 따와 사용했다.


학생들은 그룹으로 작업했으며 각 그룹은 남녀동수의 소규모 극단과 같았다. 각 그룹은 해가 바뀌어도 저마다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영국의 초보자 연기과정은 2년이었고 스트라스버그에서는 3년간의 기초 연기과정을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 주정부와 지방정부에서 영국에서보다 훨씬 많은 지원금을 받은 덕분에. 내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연기과정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3년이 필요한데 그것은 목소리와 언어면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훈련하려면 자연히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러시아에서는 연기코스가 4년임을 밝혀둔다.


기술과정은 기본 1년으로 잡았다. 1년은 무대감독보를 훈련시키기에 적당한 시간이며, 그 과정에서 몇몇 학생들을 뽑아 연출과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짝을 이루어 1-2년간 더 훈련받는 숙련자 코스로 나아가게 했다. 그런 다음에는 학교에서 조교수가 되거나 학교 졸업생들이 만든 극단에서 무대감독과 무대매니저가 되어 견습기간을 치를 수 있게 했다. 러시아에서는 연출과 디자인 수학과정이 5년이다.


우리는 학교의 발전과 전체로서의 단일성에 도움을 준다고 판명된 코스들을 다양하게 지속적으로 개설하도록 했다.


해마다의 훈련은 공개공연으로 끝을 맺었다. 런던에서는 다양한 스타일을 익히고 배우들에게도 많은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단막극이나 장막극 가운데 한 막을 골라 두 편씩 올렸고, 두 번째 작품 끝에는 학생들이 직접 쓴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우리는 음악, 말, 그리고 집단 표현 간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실험했고 그런 방식으로 오펜바하의 <파리지엔느의 삶>과 , 쿠르트 바일의 <계곡 아래>, 세계 창조에 관한 핀란드의 전설을 이야기한 의 각색본 등의 다양한 작품들을 다루었다.


런던에서는 이런 졸업공연을 입장료를 받고 2주씩 공연했다. 매표에서부터 조명까지를 모두 학생들이 맡아 진행했고 연출은 조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교수들이 했다. 의상 및 무대 디자인과 제작은 숙련자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맡았고 연기과정 1학년들은 공연을 위한 수공업적 준비에 참여했다. 그러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코스 중 짧은 기간을 손으로 뭔가 하면서 보낸다고 해서 그것이 예술가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스트라스버그에서는 학교에서 한 작품당 한 번씩 공연하고 나서는 3주간 순회를 다녔다. 매번 다른 관객과 접하는 것 그리고 하룻밤새 뒤바뀌는 환경이 우리가 고안해 낸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학생들을 악조건 속에서도 연극적 환영을 만들어내는데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사실 학생들은 2년차가 되자마자 관객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진실에 대한 느낌과 집중을 사적인 교실작업에서 끌어내어 제4의 벽이 있는 대중공연으로 바꾸어내도록 요구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