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의 악몽-1
뭐 그리 밝히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국가보안법 사범이다. 구속은 면한데다가, 요즘엔 워낙 도로교통법 수준으로 적용되는 국가보안법이다보니 이젠 사람들에게 별스런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나는 그래서 무섭다. 별스런 일이 아닌 현실이 되어 오히려 더 무섭다. 그래서 이 국가보안법이 아무 논란도 되지 못한 채 계속 유지존속될까봐 무섭다.
2007년 9월 어느 날. 새벽 6시쯤이었다. 누군가 전화가 걸려왔다. 주차하다가 내 차를 긁었으니 나와서 확인하라고. 문을 열자마자 십수명의 사람들이 와락 들이닥쳤다. 너무 놀랐다. 아니 솔직히 무서웠다. 그 짧은 순간에 느낀 공포는 동물적인 본능이다. 생각해보라. 낯선 남자들 열댓명이 갑자기 밀고 들어온다. 게다가 잠든 아내와 아이가 있는데.
압수수색 영장을 힐끔 보여준 그들은 막무가내로 집안 구석구석을 참 꼼꼼하게도 뒤졌다. 그 때 세 살배기 아들 녀석의 반응을 잊을 수가 없다. 자기 장난감들과 책들을 마구 파헤칠때마다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나중엔 화가 난건지 그들을 향해 뭐라고 알 수 없는 고함을 질러댔다. 아내는 급히 아이를 안고 한 쪽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날 아이의 마음속엔 무엇이 새겨졌을까. 그건 언젠가 지워질까.
고맙게도 그 날 그 순간 참 의연하게 대처했지만, 아내도 많이 놀랐다. 그 날 이후 아주 가끔씩이지만, 아내는 내게 말한다. 잡혀가지 않을 정도로만 하라고. 혼자서 애들 키울 자신은 없다고. 작년 말에 진숙아 사랑한다 공연하며 돌아다닐 때라든가, 라디오 반민특위 드라마 작업을 할 때라든가, 반전평화 예술몸빵을 할 때라든가. 특히 요즘처럼 전쟁위기가 고조되었을 땐 집 근처에 경찰차가 보이면 심장이 쿵쾅거린단다.
나도 그렇다. 지금은 많이 극복했지만, 한동안 나는 죽은 듯이 지내고 싶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멀리했고,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저어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혹시 남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두려웠던 걸까. 아직도 새벽이나 밤늦게 걸려오는 전화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택배요”라는 소리조차 의심부터 인다. 그날 단 하루가, 6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국가보안법의 악몽-2
그들은 몇 시간에 걸쳐 집안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안방 서랍장을 열어 속옷 하나하나까지 꺼내 뒤졌다.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건 고역이었다. 극도의 수치심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기묘하게도 죄의식마저 들었다. 무력감에 나 자신이 미워졌다. 애꿎은 아내와 아이에게 고함을 질렀다. 안방에 오지 말라고.
내 고함소리에 내가 자극 받았다. 순식간에 분노가 일었다. 그들에게 호통을 치며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놀란 아내와 아이에게 사과하라. 그 전에는 아무것도 협조하지 않겠다고. 그 중 몇몇은 당황하며 태도를 바꾸어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또 몇몇은 못 들은 척 자기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몇몇은 킬킬거렸다. 즉시 킬킬거리는 자들에게 항의했다. 그 중 한 사람은 끝까지 킬킬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 나중에 조사 받으러 와서도 그렇게 나오는가 보자.”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자의 이죽거리는 웃음, 빈정대는 말투, 너저분한 목소리. 불러내지도 않았는데 무시로 솟아오르는 기억. 참 질기다.
저 자를 내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협조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다른 수사관들이 그를 내보냈다. 나중에 듣고 알았지만, 놀라 뛰어나온 옆집 할아버지가 그에게 항의했단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냐? 옆집 애기아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그러자 그 자가 그랬단다. “말 할 수 없이 크고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다”라고.
슬픈 사연 하나 더 말해야겠다. 아주 훗날 알게 된 사실인데, 집에서 압수수색을 하던 수사관들 중 한 명은 나의 대학 과선배였단다. 그것도 나와 아주 잘 알던 사이라고. 얼굴이 마주칠까봐 한 쪽 구석에서 등을 돌린 채 카피작업만 했단다. 내가 죄인인데, 왜 당신이 죄인처럼 자신을 숨겼을까. 그 날 나는 당신을 정말 몰라 봤을까. 어쩌면 내 무의식이 감춰버린 건 아닐까. 그 날 그 순간이 너무 서글퍼서.
국가보안법의 악몽-3
몇 개월 후, 수사기관에서 보낸 등기가 날아왔다. 이건 또 뭔가. 확인도 하기 전에 세포가 먼저 반응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돋았다. 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나에 대해 일정한 기간에 걸쳐 통신제한조치를 취했다는 것. 기간을 총합해보니 만 3년에 가까웠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1. 당신의 핸드폰 통화와 문자에 대한 도감청, 위치추적을 했다.
2. 당신이 수발신한 모든 우편물을 들여다 봤다.
3. 당신의 이메일을 비롯한 컴퓨터 인터넷 패킷 감청을 했다. 패킷감청이란 쉽게 말하자면 이런 거다. 내가 인터넷을 사용하면, 수사기관에서도 그 화면을 그대로 보고 있다는 걸 말한다.
이미 돋아오른 소름이 이젠 터져나갈 듯 했다. 나는 만 3년 동안 그들의 감시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누구와 무슨 통화를 하는지, 누구와 어떤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어떤 사이트를 들락거리는지, 내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나는 투명 아크릴판 속에 갇힌 모르모트와 다름없는 신세로 살아왔던 거다.
베트남 전쟁 당시, 어느 악명 높은 지하 감옥이 있었다. 그 곳에 갇힌 사람들 중 대다수는 미쳐버렸다. 그 중 또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 원인은 감옥의 구조에 있었다. 천장이 뻥 뚫려있는 지하감옥. 간수들은 24시간 내내 갇힌 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위에서 내려다 보았다. 모든 것이 노출된 상태. 감시를 피할 수 없는 구조. 그래서 사람들은 미치거나 죽어갔다.
그리고 내겐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옆이나 뒤를 힐끔힐끔 돌아본다든가, 갑자기 전화를 잘 받지 않거나 걸지 않는다든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갑자기 경색하며 거리를 둔다든가. 일종의 반항심리라고 할까, 모순적인 습관도 생겼다. 술에 취하면 마구잡이로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댄다든가, 엄청난 시간동안 각종 사이트를 마구잡이로 들락거린다던가.
나는 이 끔찍한 등기서류를 아내에게 보여주지 않고 책장 어딘가에 숨겨버렸다. 하얗게 질린 채 좀처럼 혈색이 돌아오지 않는 내 얼굴. 아내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묻지 말라고 했다. 그 서류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국가보안법의 악몽-4
거실바닥에 압수물품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깔렸다. 엄청난 양이었다. 그렇게 보니 내가 봐도 정말 커다란 죄를 저지른 것 같았다. 압수목록을 확인했다. 문득문득 실소가 터져나왔다. 김광석 CD(정품)를 굳이 증거물로 압수해야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짚이는 게 있긴 했다. 하필 ‘김광석’이란 세 글자는 한자로 씌어있었다. 한자로 읽으면 ‘금광석’이 된다. 그러니까 암호명 ‘금강석’ 뭐 이렇게 잘 못 본 거다.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영화 ‘접속’ OST도 마찬가지일거다. ‘접속’이란 글자를 ‘접선’으로 잘 못 봤겠지.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품목들이다. 자기들도 바쁘고 힘드니까 얼른 얼른 끝내고 싶었을테고 그러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다. 인간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만약 실수가 아니라면. 그조차 증거로 둔갑할 수 있다면?
너무 심한 논리비약이다. 그래, 나도 안다. 그러나 아래의 링크를 확인해 보시라. 며칠 전 국가보안법으로 압수수색하며 벌어진 일이다. 종북으로 찍힌 이유가 결혼 안 했고 지메일 쓰기 때문이란다. 밖에서 보면 코미디 같지만, 직접 당하면 지옥이다.
내 이메일에는 북한연극에 관한 여러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북한대학원 교수님이 작성한 수업 자료를 스크랩한 것도 있었다. 검찰은 이것을 내 이적행위의 증거로 들이댔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교수는 교수니까 연구의 목적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교수가 아니므로 연구목적이 아니라 이적행위의 목적이라는 거다. 게다가 어느 뉴라이트 교수의 감정서까지 첨부해서 이적행위로 몰아댔다.
다행히 재판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내 손을 들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 자료를 일부 이용하여 ‘북한연극의 서사적 특징’이란 연구글을 작성해 블로그에 연재했고, 그 글의 말미에는 참고자료와 주석 등을 명기해두었으며, 스크랩의 출처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증거자료로 정리해서 제출했다.
그런데 이건 그야말로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자료수집만 했고 연구글을 미처 작성하지 못했다면, 또는 주석과 참고자료를 명기해두지 않았다면, 수집한 자료들의 출처를 하나하나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면, 나는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법학을 전공했으니 그나마 진실을 다툴 수 있었지, 그게 아니라면 나는 재판장에서 ‘아니에요 억울해요’란 얘기만 반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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