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인천 레지던스 프로그램 보고서
<동암에서 백운까지 예술이 노니는 마을>
레지던스 프로그램 참여작가 류 성 보고서
열우물에서
목차
한 우물에서 - 작업에 들어가며
두 우물에서 - 창작 <노란 머리 아저씨>
세 우물에서 - 창작 <동백거리에서 만난 전태일>
네 우물에서 - 창작 <가로등 밑 리어카>
다섯 우물에서 - 창작 <가을 연작>
여섯 우물에서 - 인터뷰 <000 할머니>
일곱 우물에서 - 창작 <늙은 노래>
여덟 우물에서 - 모임 <연극 동아리 담쟁이>
아홉 우물에서 - 공연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열 우물에서 - 작업을 마치며
한 우물에서
작업에 들어가며
2004년 겨울, 결혼을 하면서 나는 인천에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지만, 나는 인천에서 작업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지금도 서울, 성남, 안산 등 지하철을 타고 수도권을 떠돌며 여러 극단과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인천은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뛰어넘지 못했다.
언젠가 년간 공연 횟수를 따져보니 거의 3, 4일에 한 번꼴로 공연을 했었다. 전국 각지를 떠돌았고 수많은 관객을 만났다. 그런데 공허감이 파고 들었다. 하지만 그 땐 그 공허감의 정체가 뭔지 잘 몰랐다. 공허감을 끌어안은 채 다시 1년이 지나갈 무렵에야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추상적인 관객은 나의 연극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박수와 웃음, 환호의 크기로 나의 예술을 단순하게 평가받는 것은 날이 갈수록 공허했다. 그건 그 순간에 잠깐의 흥분을 가져다 줄 뿐 공허감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었다. 동네 이웃 중에 나의 팬이 있었으면 했고, 매일 지나치는 시장의 아줌마가 내 작품의 비평가가 되었으면 했다.
공연이 끝나면 박수를 받고, 사진 한 장 찍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조명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무대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제발 연극쟁이들끼리만 어울려 술마시러 다니지 말았으면 했고, 삶과 거리를 둔 예술이 아니라 삶과 뒤엉킨 연극이 그리웠다. 인터넷, 관념, 여기에 드라마의 테크닉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나오는 드라마 말고, 생활 속에서 획득한 “리얼”한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 연극의 이상은 변방의 어느 동네 소극장에 있다는 것을.
그러고 보면 나는 호시탐탐 지역에서 활동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문제는 아주 단순하다. 내가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나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연극을 한다는 건 막연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모두 그만두고 몇 달간 인천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면 뭔가 보일게다. 하지만 당장 다음 달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나에게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에 가까운 것이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참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장에 할 수 없다면 차츰차츰 접근하며 스며드는 것이다. 내가 인천에 스며들고, 인천이 내게 스며들 수 있도록.
두 우물에서
노란머리 아저씨
밤 11시
덜커덩 거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긴 채
꾸벅꾸벅 졸던 그 아저씨는
문이 열릴 때마다 화들짝 일어나 역 이름을 확인했다
하품하느라 크게 벌린 입처럼
등에 매달린 가방 자크도 벌어졌다
"아저씨, 가방 열렸네요."
"아, 고맙습니다. 허허허. 4시 반에 일 나가서 이 시간에 집에 가요. 매일매일. 힘들어. 근데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허허."
막노동 하기엔 이제 연세마저 지긋한 그 아저씨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다.
그 사연이야 묻지 않아도 짐작할 듯.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듣기만 했고
아저씨는 얘길 하면서도 깜빡깜빡 졸았다.
작업 중 휴식-인천행 지하철은 밤마다 삶의 고단함을 실어 나른다. 밤이 깊어갈수록 고단함도 깊어간다. 희망이란 TV 광고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일까.
세 우물에서
단막 musical 전태일 대본 작업 中
<태일이 오빠> 여공들의 노래
[화자] 평화시장 옥상에서 보이는 교회 십자가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 바빠서 여기까지 올 시간은 없나 봅니다.
[여공들] 하나님 미안해요 부탁하나 할게요
평화시장 다락방도 와주시면 안 되나요
[시다solo] 누추한 이 곳에도 함께 하옵시며
[여공들] 풀빵처럼 따뜻한 사랑 보여 주세요
[시다] 매일 점심때마다 풀빵 서른개씩 사와서
시다들에게 나눠주는 그 사람.
우리들은 그를 태일이 오빠라고 불렀습니다.
[시다solo] 당신은 풀빵처럼 따뜻한 사람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고마워요
[여공들] 이 풀빵 이 사랑 잊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오빠 우리 태일이 오빠
<바보1> 재단사들의 노래
[재단사2] 그래, 그거 좋다. 이제부터 우린 태일이 말대로 바보다, 바보! 하하하-
[재단사들] 그래 나는 바보다 바보같은 세상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바보가 되련다
[태일solo]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똑바로 걸어 걸어 가자
[재단사들] 힘들고 지친 사람 곁에서 함께 울고 웃자
[재단사들] 바보 바보 진짜 바보 (나는) 바보 바보 진짜 바보 (너는)
바보 바보 진짜 바보 (우리는) 우리는 진짜 바보다
<바보2> 태일 Theme 1
[태일solo] 그래 처음부터 바보 같은 짓이었나봐
저 단단한 벽 어쩔 수 없나봐
“아닌데 이건 아닌데”
고개를 저어 보지만
세상이란 벽 앞에서 울고 있는 나
<결단> 태일 Theme 2
“오늘은 10월 둘째주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 날.
이 시각 나는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태일solo]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내 형제들의 곁으로
나는 꼭 돌아가야 한다 어린 동심의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리라 떠나지 않기 위해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는 내 마음의 고향
[시다] 이거. 글을 몰라서 물어가며 쓰느라. 그 땐 무섭기도 했고. 그런데 너무 늦었죠? 하긴 몇 달이나 지났으니까.
[태일] 아니. 아니야. 안 늦었어. 하나도 안 늦었어.
[시다] 다시 돌아와줘서 고마워요.
[태일]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는 내 마음의 고향
[합창]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는 내 마음의 고향
작업 중 휴식-올해는 전태일 열사 40주기가 되는 해. 전국 노동자 대회에서 올릴 단막 뮤지컬 <전태일> 극작과 연출 작업을 하던 나는 동백거리에서도 전태일을 자주 만났다. 휘황한 교회십자가와 고단한 삶을 보며 가사를 썼고 벌써 사라졌을 법한 영세한 공장길을 지나며 대본을 썼다. 어느 이른 새벽, 동암역 모텔골목을 지나는 중이었다. 모텔 주차장에는 외제차가 즐비했고, 바로 옆에는 인력업체에 ‘노가다’ 뛰러 나온 사람들이 그득했다. 전태일이 말한 인간시장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나는 혹시 노란머리 아저씨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참을 기웃거렸다. 뭐라 할 말도 없으면서.
네 우물에서
가로등 밑 리어카
폐지를 주워 생계를 꾸리는 할머니는 고물상 앞에 세워둔 낡아빠진 리어카를 발견했습니다. 나무는 썩어 흐물거리고, 한쪽 타이어는 바람도 빠졌는데, 할머니는 그 리어카 생각에 잠 못들 지경입니다.
"고물상 주인이 쓰는 건가...저걸 누가 먼저 가져가면 어떡하누...."
날이 갈수록 애가 탑니다. 그리고 며칠 후, 고물상 주인에게 넌지시.
"저 리어카 혹시 자네가 쓰는 건가 모르겄어?"
"아니요"
"그럼 내가 좀 빌려 써도 될라나 모르겄어?"
"저거 못 써요. 버려야 돼."
"그라믄 이거 내가 가져가도 될랑가 모르겄어?"
"이거 끌고 집까지 왔다갔다 하면 힘드실텐-?"
"하나도 안 힘들어!
리어카 끌고 오르막을 올라가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데 마냥 즐거울 뿐입니다. 그런데 집앞에 도착하니 걱정이 생겼습니다.
"....가만 있자....이걸 어디다가 두나?...."
가뜩이나 좁은 골목길인데 리어카로 막아두었다가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르거든요. 리어카 끌고 골목길을 뺑뺑 돌다가 집에서 한 50미터 떨어진 곳에 세웠습니다. 돌아서는 순간 생각이 스칩니다.
"누가 이 놈을 훔쳐가면 어떡하누...그려. 암만 생각해두, 집 앞에 두는게 제일 낫겄제.
이제 리어카가 사람인 듯 말도 붙입니다.
"그냥 할미 집 앞에 가자잉. 길 막았다고 뭐라카믄 빼주믄 되제. 흐흐."
집 앞에 온 할머니 으슥하고 캄캄한 구석에 세우고 전봇대에다가 노끈으로 꽁꽁 묶어둡니다.
"여긴 사람들 눈에 잘 안 띌거여. 잘 자라잉. 새벽에 보자."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걱정입니다.
"아니지...컴컴허믄 누가 훔쳐가도 안 보일텐디...?"
밖으로 나가서 리어카를 가로등 밑 밝은 곳에 다시 세웁니다.
"창문으로 보믄 누가 훔쳐가는지 안 가는지 금방 보일테니께."
다시 들어가자마자 또 걱정이 됩니다.
"저렇게 잘 보이는데 있으믄 언 놈이 훔쳐가겄지? 안 되겄다."
또 컴컴한데로 가져갑니다. 그런데 또 불안 합니다.
"아니지...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니여."
가로등 밑에다 또 세웁니다. 그리고 노끈으로 꽁꽁 묶으며 리어카에게 말합니다.
"걱정 말어라. 나가 밤새 두 눈 딱 뜨고 보고 있을 것이니께. 괜찮여. 니는 한 숨 푹 자라잉. 새벽 일찍부터 일해야 되니께."
작업 중 휴식-새벽시간, 십정동 어느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그 많은 리어카는 대부분 가로등 밑 밝은 곳에 있을까. 그리고 문득 이야기 하나 떠올랐다.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수첩에다 휘갈겼다. 짧은 이야기지만 뭔가 더 뽑아져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살을 붙여가며 스토리 작업 중이다. 거의 3분의 2는 나온 듯 한데, 아무래도 단편 영화 시나리오로 어울릴 듯 하다. 어느 감독에게 얘기해주었더니 흥미를 보인다. 그런데, 그 감독도 나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웬만해선 뭔가 나오긴 힘들거다.
다섯 우물에서
가을 연작
가을 1 - 미련
꽃잎, 이미 흩날려
사라졌다
여태 바보같다
미련 지울 일만 남았는데
가을 2 - 가난
옆 자리 지쳐 잠든 이
어깨 한 번 빌려 줄 용기 없는 나
가을 깊어도 가난하다
가을 3 - 벗 생각
가을 하늘 높아 문득 멀어진 벗 떠올린다 핸드폰만 만지작거린다 아서라 공중전화 찾아 두리번 두리번 어느새 노을 붉었다
가을 4 - 낙엽
바람 분다고 떨어지는거야 뭐라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함부로 나뒹굴지 마라
못난 놈
작업 중 휴식-백운역 벤치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햇빛은 따가웠다. 조금 서늘한 바람과 함께 숱한 상념이 흘러갔고, 상념은 자꾸만 아픈 기억을 건드렸다. 어쩌면,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즐기고 있었던 걸게다. 그리고 결국엔 이유도 불분명한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말았다. 누가 볼까 부끄러웠지만 웬지 닦고 싶지 않아 그것조차 그냥 두었다. 그 날 나는 심하게 가을을 탔다.
여섯 우물에서
000 할머니
반짝이는 목걸이(만자)가 유난히 눈에 띄어 물어본다.
"절에 다니세요?"
아뿔싸. 실수다.
"성철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하셨습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라는 말씀을 남기셨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산과 물은 합칠 수 없는 것이니 억지로 합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소유라는 말씀의 뜻은 또 뭣이냐? 첫째, 너와 나는 불공평하다. 둘째, 너와 나의 약속은 무효다...."
처음엔 무슨 말씀인지 알듯도 하다는 웬 근거없는 자만심이 있었으나 이거 시간이 흐를수록 완전히 좌절 모드로 빠진다. 어쩌랴. 당장의 사사로운 희노애락에 만족하며 사는 범인인 내가 큰스님들의 전 생에 걸친 총화 한마디를 그 자리에서 깨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쨌든 알 수 없는 강의를 계속 듣고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 한다. 감기기운에 헤롱거리는 정신상태를 핑계로 불쑥 용기를 내 본다.
"근데 경상도 분이세요?"
술술 청산유수로 할머니의 과거사가 나온다. 얼마나 줄줄 흘러나오는지, 수첩을 꺼낼 틈도 없다. 일단 머리 속에 꽉꽉 쟁여두자.
"내 원래 고향은 합천 가야면입니다. 유서 깊은 해인사가 거기 있지예. 합천 해인사 알지요? 우리 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대단했습니다. 동네 사람들 중에 아버지 땅 밟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지금도 예순 넘은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 함자를 대면 다 압니더.
아버지가 2대 독자라서, 애는 생기는 대로 다 낳자, 그래 하시가꼬 아들 딸들이 9남맵니더. 9남매. 어릴 때는 그래 유복하게 살았는데, 마 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가세가 기우는기라. 우리 오빠들은 돈을 쓸 줄만 알았지 굴릴 줄은 몰랐던 기라예. 딱 3년. 3년만에 재산 다 날리고 우리 9남매가 전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그렇습디다. 재산이라카는 거, 그거는 흘러가는 물결과 같습니더. 아무것도 아닙니더.
우리 아저씨는 군인출신인데, 오빠가 중매를 해서 결혼했습니더. 남편이 군인이니까 저 강원도에 가서도 살았지예. 자세한 속 사정은 마 얘기 못하겠고, 어쨌든 간에 내가 집을 나왔습니더. 금반지하고 패물들 모아가 파니까 그 때 한 4-5만원 되데예. 그 돈으로 집을 나와 버렸습니더. 양쪽에 두 딸 손 잡고, 다섯 달 짜리 막내딸 뒤에 업고 도망치 나왔습니더. 내가 그 때 무슨 용기로 그랬는가는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십니더. 그래 나와가꼬 용산역까지 와가 오갈데 없어서 있는데, 수소문 끝에 고모를 만났지예. 그래가꼬 인천에 왔다 아입니꺼.내가 지금 일흔 하나 묵었는데, 벌써 삼십육년 전 일입니더.
요 옆에 약사사 안 있습니꺼. 내가 약사사를 다니믄서 절에 일을 많이 했십니다. 사람들을 모아가꼬 합창단도 만들었습니다. 내가 만들었지요, 내가. 한 마흔 예닐곱명을 모아가 합창단을 만들었는기라. 찬불가 부르기가 대단히 어렵십니더. 대중가요는 잘 불러도 찬불가 불러보면 정말 힘이 듭니더. 대중가요도 아니고 뭐도 아닌 것이 하여튼 진짜 어렵거든예. 내가 그 합창단을 18년인가 운영을 했는데, 중간에 마 내가 나왔습니다. 근데 내가 그만두니까네 자기도 따라서 나와 버린 사람도 많아서. 그 일 때문에 사람들이 내를 오해를 하고 안 좋은 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다 풀맀지만.
애는 아들은 없고, 딸만 셋입니더. 전부 시집 보냈고. 우리 아저씨는 막내가 6개월 됐을 때 죽었십니더. 내 혼자 그 아들 셋을 다 키우고, 학교 보내고, 돈도 벌어야지, 절에 일도 해야지, 엄청나게 바빴십니더. 누구는 내 얼굴을 보고 저 할매 편하게 살았겠다 그런 소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진짜로 정신없이 힘들게 살았십니더. 그래 고생고생하믄서 살았는데 인자 와서 보니까 남은 거는 딱 두가지 있더라. 그 두가지가 뭐이냐믄, 하나는 골병이고 하나는 나이라.
지금은 요 광명 빌라에서 내 혼자 삽니더. 죽을 때까지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살라믄 뭐라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내 적성에 맞는 일이 참 없네요."
작업 중 휴식-절에 합창단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뭔가 흥미로웠다. ‘교회 오빠’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절 오빠’는 뭔가 이상하고 재미있지 않은가. 절 합창단을 검색해보다가, 희한한 사연도 하나 읽었다. 성가대가 찬불가를, 절 합창단이 성가를 부른 사연이 있었다. 따뜻하고 재밌는 얘기 하나 나올 듯한 예감. 그 후로도 할머니 몇 번 더 만났다. 합창단 얘길 더 듣고 싶었는데 정작 그 얘긴 안 해주신다. 어디 사시는지 알고 있으니, 걱정은 없다.
일곱 우물에서
늙은 노래
구성진 노래가 울려 퍼진다
연둣빛 스웨터속에 파묻힌 늙은이의
쩌억 벌린 입
몇 안 되는 누런 이를 뚫고 토해내는 저 노래는
아직 흙 냄새 채 가시지 못한 칡덩이를 씹는 맛처럼
향그럽고 서늘하다
제 빈 속도 한번 봐달라며 흔들흔들
아가리 벌린 깡통의 경망스런 춤사위
구구한 사연이야 다는 몰라도
이 보다 진실한 노래를 언제 또 들어보겠나
주머니 속 동전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우리 시대에 진실한 노래가
이렇게라도 살아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늙은 노래가 멀어져 간다
작업 중 휴식-발가벗은 듯 솔직한 그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부끄러웠다. 저렇게 발가벗을 용기가 없어 덕지덕지 꾸며대고, 의도를 몰래 숨겨두고, 뭔가 있는 척하고, 기술적으로 포장하기 바쁜 나의 비겁한 예술이 부끄러웠다.
여덟 우물에서
연극 동아리
10월에서 11월까지 2주에 1번꼴로 연극동아리 준비모임을 갖다.
작업 중 휴식-레지던스 프로그램 시작과 함께, 나는 시민문화예술센터의 놀이터에서 연극 동아리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하기로 했다. 두 달 동안 2주에 한 번 꼴로 모여 동아리 준비모임을 진행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뭔가를 하지는 못했다. 장소가 없어 동암역 주변의 술집에서만 만났고, 아주 열심히 술을 먹어댔다. 참, 이름은 정했다. 담쟁이. 3차의 모임 끝에 탄생한 이름이다. 그런데, 정작 그 이름을 제안한 사람은 동아리 회원이 아니라 술자리에 끼어든 구경꾼이 지어준 이름이다. 지금 와서 새삼 의심스러운 게 있다. 정말 담쟁이란 이름이 좋아서 모두 동의했을까, 3차에 걸쳐 논의하다보니 너무 피곤해서였을까. 아무렴, 어떠랴. 자꾸 부르다보면 좋아지게 이름 아닌가.준비모임은 이제 끝났고 12월부터는 장소도 마련되고 일주일에 한 번 씩 모임을 갖는다. 이제 본격적인 출발인 셈이다. 가만. 연극이 직업인 내가 다른 동아리도 아니고 연극동아리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강사가 아닌 회원으로 참가한다니. 아주 단순하고 중요한 이유다. 1-2년 전부터 가졌던 의문을 풀기 위해서다. 연극이 직업이 되면서 나는 연극에 관해 무언가 잃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문득 10여년 전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직업으로 삼지 말아라.”
아홉 우물에서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공연명 :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작/연출 : 류 성
출연 : 김태현, 김건호, 강동효, 안진영, 오세혁, 최현미
무대 : 박정길
조명 : 류 성
음향 : 김대권
제작 : 극단 걸판
공연 장소 : 인천 아트홀 소풍
공연 일시 : 10월 27일 4시, 8시 11월 22일 8시, 11월 24일 8시
작업 중 휴식-레지던스 기간 동안 동백거리를 쏘다니며 어설픈 문학가 흉내만 내고 있을 뻔 했는데, 다행히 내 본분에 맞게 연극 공연도 올릴 수 있었다. 아예 연습을 동백 거리 어느 야외 혹은 통유리로 된 빈 점포에서 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다. 레지던스 참가하기 전, 탐사 중에 얻은 아이디어로 대본도 쓰고 그걸 공연으로까지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그야말로 허황된 생각이다. 1인극이면 혹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 공연이라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동네 이웃들의 이야기니 프로그램의 성격과도 잘 맞는다. 몇몇 관객들의 평을 들어보니 마을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라던데, 작/연출자로서는 그저 감사한 해석이다. 이 작품은 기존에 내가 작업한 작품들과는 달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소위 말하는 ‘극적인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래도 굳이 ‘극적인 사건’을 찾자면, 옆집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것 밖에 없다. 사실 요즘 도시에서 옆집에 가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 흔하지 않은 일, 그러니까 극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다. 둘째, 못된 사람이 없다. 극중 인물들은 모두 뭔가 결핍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 위기와 절정 그리고 극적인 해결 등은 이 작품과 거리가 멀다. 그저 결핍되어 있는 인물들이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의 결핍을 채워간다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도 있겠다. 셋째, 여러 차례의 공연경험을 통해 확인된 바,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각자의 시선과 재미를 가지고 관람한다. 극중 인물들의 연령대가 다양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실제로 동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이고, 자신의 동네 사람 누군가가 떠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보다 ‘리얼’한 이야기가 주는 힘이라고 할까. 다음은 관객들 후기들 중 몇 가지다.
-뜻밖의 행운처럼 큰 기대 없이 왔었어요. 배우들의 연기와 뛰어난 노래실력에 감탄했고, 내용에 감동했어요. 이웃과 가족에 대한 사람과 관심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이웃과 함께 따뜻한 차 한 잔 밥 한 끼 하며 이야기꽃을 피워야겠어요. 좋은 연극 감사합니다. (김경숙님)
-우연히 넘 근사한 공연을 봤습니다. 극 구성이나 무대, 배우들의 연기가 완성도가 높았고 특히 주변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느끼는 게 많은 공연이었습니다. 좋은 작품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구요 특히 낼 생일인데 근사한 선물이 됐습니다.^^ (정미선님)
-이웃간의 정겨운 모습의 연극관람을 보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삭막한 사회에 훈훈한 이웃의 정을, 글구 소재 역시 모두 공감 할 수 있는 거라 더 재미있게 관람했습니다. 종종 이런 기회가 있음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영희님)
-현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많은 사람들이 이웃과의 예전 같은 친밀함을 갖기 어려운데 잘 풍자해 주셔서 이웃에 대해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를 주는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감동적인 공연 감사합니다. 고생 하셨습니다. (이소진님)
-재미있었어염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고, 착한 연극였네욤. 인물들 애기가 마음에 와 닿았고 할머니 돌아가신 대목에서는 많이 울었어염. 아들도 잘 풀리기를 바라고 계속 화목한 이웃이 되기를 기원해염. (강광철님)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청소년을 통하여 우리 기성세대들이 노력하고 부모와 자식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감사함니다. 홧팅. (임지수님)
-오늘 공연을 보면서 감동받았고 가슴도 뭉클해 졌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오신 할아버지 한사람으로 동네가 화목해지고 훈훈해졌네요! 앞으로도 재밌고 좋은 공연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김연지님)
-평소에 바로 옆에 사는 사람한테도 무관심 했었고,심지어는 가족들에게도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하지 못한 저로서는 이번 공연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앞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관심도 기울이고 친절하게 대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ㅋㅋ (조광훈님)
-소중한 작품을 만났습니다. 이웃끼리 부대끼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요즘이지만 여러 이의 이야기들에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갑자기 울게 만드는 장면에서 무척 당황 했어요^^; (유승완님)
-우리 반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어했어요. 어떤 아이는 노래가 노래 부를 때 눈물이 났다고 하더군요. 오늘이 되었네... 오늘은 제가 출장이라 아이들을 볼 수 없어 못 물어보지만 금요일경에 소감문을 한번 작성토록 해 볼 생각입니다. 꼭 올려 볼께요. (아시타카님)
열 우물에서
작업을 마치며 (평가)
1. 연극, 사진, 음악, 영상 등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로 구성한 것은 의도가 분명하다. 장르간 협업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참, 그렇다고 센터에서 이를 굳이 강제하려 들 의사는 없어 보였다. 참가자들의 자유의사에 맡긴 것은 한 편으로는 좋은 마인드지만, 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여기에는 참가자들끼리 서로 일면식조차 없다는 점, 참가자들의 소극성 등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엇보다 큰 문제는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있다. 사실 동네에 적응이 좀 될 만하고 참가자 간의 친밀감이 생기자마자 끝나버리는 짧은 기간이었던 것이다.
2. 처음 얼마간은 동네탐사를 할 때마다 꼬박꼬박 카메라를 챙겼다. 사진을 찍고, 글을 올렸다. 얼마 후, 그것이 정말 쓸모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나는 시각예술가도 아니고, 기록자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가? 전혀 예술적이지도, 전혀 기록적이지도 않은 그 사진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굳이 사진을 찍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보고서 때문이었다. 단지 레지던스 보고를 위한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는 행위라는 점을 깨닫는 순간, 나는 사진 찍기를 포기해버렸다. 생색내기를 포기하는 대신 동백거리의 풍경과 삶을 즐기기로 했다. 그저 거리를 거닐고, 골목을 산책했다. 걸을 때만 보이는 풍경이 있었고, 자전거를 타야만 보이는 풍경도 있었고, 자동차에서만 보이는 풍경도 있었다.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짜장면집을 가고, 아트센터 구경을 했고, 낙엽 떨어지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3. 예술가의 눈으로 일상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흥미롭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백거리가 낯설고 어색한 곳이었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동백거리 골목은 영등포 역사 뒷켠의 어느 주택가 골목 혹은 안산 구도심의 어느 주택가 골목과 별다른 차이를 갖지 못했다. 사실 산업화와 함께 획일화된 도시의 골목은 어느 곳이든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공간적 풍경뿐만이 아니라 삶의 풍경 또한 그러하다. 출근길 덕분에 분주한 아침, 늙은이와 아이들이 간혹 눈에 띄는 지루한 오후, 소녀들의 재잘거림으로 떠들썩한 저녁. 노란 가로등 불빛과 드문 인적의 새벽.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게다가 삶 자체를 완전히 끌어안지 못하는 타자의 시선으로는 굳이 그 속으로 침습해 들어가야 할 이유를 느낄 수 없었다.
4. 연극을 하는 내가 미술이나 사진 장르 사람들이 주로 한다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작가로 참여한 거고, 그러면 대본 한 편 써 내면 되겠지 싶은 생각에 머물러 버렸다. 작가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로막는 족쇄로 작용했던 거다. 좀 더 다른 상상력을 가지고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했어야 했다. 주민 연극 강좌를 열거나 동네놀이터 순회공연을 하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 백운역, 동암역에서 갑자기 출몰하는 거리극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굳이 공연의 형태가 아니라도 좋다. 통유리로 개방된 빈 점포에서 연기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래, 나는 동백거리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고 있을 게 아니라 동백거리 어느 곳에서 뭔가 연극작업을 했어야 했다. 만약, 극단 전체, 혹은 연극인 3-5명이 팀을 이루어 참가한다면, 그리고 6개월 혹은 1년 이상의 프로젝트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운영된다면, 전혀 다른 방식의 작업이 가능하다. 거주기간 동안 대본 1-2편 써내는 것보다 훨씬 바쁘고 힘든 작업이겠지만, 예술가들과 지역주민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프로필
류 성
극작도 하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한다. 연극 교육도 하고 연기 트레이너도 한다. 급하면 조명도 만진다. 잡다하게 일을 하니 딱히 뭘 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냥 ‘연극 한다’고 말한다. 이 극단, 저 극단을 오가며 일하다 보니 어디 소속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냥 ‘연극 한다’고 말한다. 수십편의 작품을 쓰거나 연출했고 수백회의 공연을 했지만 대박친 작품이 없다. 그래서 그냥 ‘연극 한다’고 말한다. 다른 생계수단 없이 연극만 하면서 버틸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소인배. 그리고 잘 때만 천사인 아이 둘의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