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물고기-피터 브룩
황금물고기
- The Golden fish -The Open Door 중
피터 브룩(Peter Brook)
박선규 옮김 (연세대 재학)
내가 청중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마다 그것은 하나의 연극적 실험이다. 나는 청중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 이 장소에서 우리가 연극적 상황에 처해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만약 당신과 내가 이 순간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다면 연극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 실험이 조금 더 복잡하다. 나는 처음으로 즉흥적 연설을 하지 않고, 이 글이 출판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연설문을 미리 준비해왔다. 미리 준비된 연설문이 우리의 '과정'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실험을 더 값지게 하는 것이 내 목표이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저자인 "내 자신 : 제 1인"은 무더운 여름날 프랑스 남부 어딘가에 앉아서 교토에 있는 나의 일본 청중들을 상상해본다. 즉 나는 미지의 청중들을 생각한다. 내가 모두가 이해하기 쉽도록 신경을 써서 이글을 준비하더라도, 내 청중들 중에는 번역된 내 글을 듣게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 자신 : 제 1인"인 저자가 사라지고 "내 자신 : 제 2인"인 번역자(발표자)가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만약 이 발표자가 아주 지루하게 학술적인 음성으로 내 글을 청중들에게 읽는다면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열정적으로 쓰고 있는 이 글이 지루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내 자신 : 제 1인"은 "내 자신 : 제 2인"이 내 글을 열정적이고 창조적으로 해석하기를 바라는 극작가와 같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들에게는 발표자의 목소리, 음의 고조, 강약, 박자, 즉 사람들로 하여금 듣고 싶도록 하는 인간적인 차원을 가지는 목소리의 음악적인 성격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인간적 차원이야말로 우리가 과학적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부분이다. 감정, 열정을 부르는 감정, 신념이 있는 열정 -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인간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유일한 영혼적 도구인 신념이 중요하다.
번역된 글을 통해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의 주의를 정신적으로 집중시키는 에너지의 영향을 받는다. 이 에너지는 소리를 통해서 뿐 아니라 몸짓, 손짓을 통해서 발산된다 ; 발표자의 모든 동작, 손짓, 몸짓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사소통의 한 형태이다 - 나는 배우처럼 이 사실을 확실히 이해하고 고려해야한다. 그것은 나의 책임이다. 청중들도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 그들의 침묵은 각자의 내적감정을 내게 전파해서 나의 연설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연극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것들은 곧 연극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출발점에 대해서 확실히 하자. '연극'이라는 단어는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해서 아무런 뜻 없이 사용되거나 각자 연극의 한 부분만을 이해하고 사용하기 때문에 너무나 어지럽게 사용된다. 마치 인생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처럼 '연극'이라는 단어 자체는 확실한 의미를 가지기에는 너무 크다. 연극은 무대, 대본, 배우, 연기 방법이나 형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의 본질은 "현재 이 순간"이라는 신비 속에 있다.
"현재 이 순간"은 놀라운 것이다. 마치 홀로그램hologram의 부서져나간 한 파편처럼 우리를 현혹시킨다. 시간의 핵을 열어 볼 수 있다면 우주 전체가 그 미소한 원자 속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표면적으로 특별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없다 ; 나는 이야기하고 당신은 듣고 있다. 하지만 이 모습이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반영하고 있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틀을 벗어 던지지 못 한다 ; 우리의 선입관, 인간관계, 유치한 코메디와 비극은 잠시 잊혀질 수는 있지만 결국은 무대에 등장차례를 기다리는 배우들과 같다. 그 뿐 아니라 마치 오페라의 코러스처럼 우리의 이야기를 외부세계와 연결시키려는 수많은 단역들이 기다리고 있다. 또한 우리 내면에는 연주되기를 기다리는 거대한 악기처럼,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영적 세계의 진동에 반응할 수 있는 현이 있다.
만약에 갑자기 외부로 우리 내면의 모든 상상과 동작들을 한 순간에 표출한다면 그것은 핵폭발과 같을 것이며 우리가 흡수하기에는 너무나 혼돈스럽고 강한 소용돌이와 같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 이미지, 감정과 정신적 고통의 잠재력의 집합을 표출할 수 있는 연극의 현재적 행위가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억압이야말로 언제나 연극에 가장 크게 경의를 표해 왔다. 독재국가에서는 연극이 독재자들의 가장 큰 경계대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가 많을수록 연극의 모든 행위를 정확히 이해하고 수용해야만 한다. 연극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아주 정확한 규칙들을 따라야한다.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내면의 혼돈스러운 표출물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경험이나 표현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연기자가 표출하는 현실의 관점이 관객들의 내면의 동일한 부분에서의 반응을 불러일으켜서 관객들이 한순간 동안 동일한 인상을 받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연극의 기초가 되는 이야기나 주제는 무엇보다도 관객이 서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줄 수 있는 공동기반common ground을 제공한다.
물론 아무 의미 없는 공동기반을 찾기는 쉽다. 하지만 모두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흥미로와야 한다. 그러면 흥미롭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배우와 관객이 상호작용하는 순간은 마치 포옹하는 것 같으며 그 순간의 농도와 깊이, 즉 그 순간은 질이 중요하다. 그래서 의미 없고 얇은 순간이 있고 반대로 깊은 의미를 가지는 질이 높은 순간이 있다. 여기서 강조하지만, 이 한 순간의 질이 곧 연극 행위를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다.
그러면 이 '순간'에 대해서 살펴보자. 만약 이 '순간'을 철저히 분석하면 매순간은 더 작은 수많은 순간들의 집합체이며 결국 '순간'은 시간도 동작도 없는 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존하는 세계 속에서 한 순간은 그 전 순간과 그 후 순간을 연속적으로 연결시켜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이 연극 행위는 이런 불가항력의 법칙 하에 이루어진다. 연극 공연은 상승하고 하락하는 흐름과 같다. 중요한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통 단계에서 시작해서 격렬하고 의미있는 단계로 상승하고 다시 하락한다. 만약 이 순간들을 처음에는 희미하게 시작해서 찬란하게 빛나고 다시 죽어가는 빛처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적과도 같던 시간도 우리의 동료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어부가 그물을 짜는 것에 비유하면 더 이해가 쉬워진다. 어부는 정성스럽게 실을 짜고 매듭을 지어서 공간에 모양을 준다. 그물의 기능에 대응하는 정확한 모양들이 만들어진다. 그물이 바다로 던져지고 물결에 따라 움직이다 물고기를 잡는다. 때로는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은 고기를 잡고, 악취가 나는 고기를 잡기도 하며, 색깔이 예쁜, 또는 독이 있는 고기를 잡는다. 하지만 운이 좋으면 황금 물고기를 잡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연극과 그물 사이의 미묘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물이 아무리 잘 만들어져도 어떤 고기가 잡힐지는 어부의 운이다. 연극의 경우에는, 궁극적으로 그물에 어떤 순간이 잡히는가 역시 그 그물을 엮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첫 단계는 매우 중요하며 보기보다 힘들지만 놀랍게도 이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은 적다. 관객은 흥미를 가지고 공연의 시작을 기다린다. 이 때 공연의 첫 대사나 소리, 동작이 관객의 내면에서 주제와 관련있는 것을 속삭일 수 있어야만 관객들은 계속 흥미를 가지고 볼 것이다. 이 과정은 지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연극은 지성인들의 토의가 될 수 없다. 연극은 소리, 대사, 색채와 동작의 에너지가 감성을 움직여 지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연기자와 관객이 같이 호흡을 하게 되면 여러가지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단지 관객들이 쉽게 소화할 수 있는 물고기를 잡으려는 연극이 있고 독이 들어있는 물고기를 잡는 포르노 연극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황금 물고기를 잡으려 한다고 가정하자.
황금 물고기는 어디서 오는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한 번도 제대로 탐험되어보지 못한 거대한 바다와 같은 신비스러운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관객 중에 보통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우리 삶의 틀 안에서 극장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그물을 만드는 것은, 보통 때의 우리 자신과, 우리 감각이 훨씬 더 예민해져야만 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다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럼 이 그물은 매듭으로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구멍으로 만들어졌는가? 이 질문은 코안koan(역자주 : 선종禪宗 승려에게 이성理性에 대한 근본적인 의지를 버리도록 훈련하고 갑작스러운 직관적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역설적인 명상법)과 같다.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과 같이 존재해야 한다.
셰익스피어 연극의 구조가 이 패러독스를 잘 나타낸다. 본질적으로 그의 연극은 종교적이며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우리가 아는 구체적인 세계의 형태와 행위 속으로 불러온다. 세익스피어는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영적세계를 단순화시키지도, 인간의 추악하고 폭력적이며 어리석고 우스운 면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그 둘 사이를 거리낌 없이 오가면서 그의 연극은 관객들의 모든 저항감을 없애고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는 한 순간을 맛보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진실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진리는 잡을 수도 정의할 수도 없다. 단지 연극은 모든 참여자들에게 진리의 한 관점을 보여주는 기계이다 ; 연극은 의미의 척도를 오르내리는 기계이다.
이제 정말 힘든 일이 남았다. 진리의 순간을 잡기 위해서는 배우, 연출가, 극작가, 스텝 모두의 노력이 한 방향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한 공연에 대립되는 목표가 있으면 안 된다. 예술의 기술은 영국시인 테드 휴즈Ted Hughes가 말했듯이 우리의 평범한 단계와 숨겨져 있는 신비로운 단계의 '협상'이다. 이 '협상'은 공연이 행해지고 있는 계속적으로 변하는 표면적인 세계와 불변의 세계를 결합하는 것이다. 이 표면의 세계와는 매 순간 접촉하지만 영혼의 세계는 우리의 감각능력이 인지할 수 없기에, 늘 존재하지만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계를 우리의 직관을 통해 접할 수 있다. 모든 영적인 실험은 현상계에서 탈피하여 침묵과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 보이지 않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지만 연극은 영적 수양은 아니다. 연극은 영적 세계의 외부에 있는 동료로 우리의 모든 세계를 침투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잠시나마 살짝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형태가 없으며 우리가 이해하듯이 변하지 않는다. 보이는 세상은 계속 변하는 유동성을 가지며 그 안에 있는 형태들은 생명이 있고 죽는다. 이 형태들 중 가장 복잡한 존재인 인간은 살고 죽는다. 마찬가지로 언어, 형태, 사상, 구조, 감정 모든 것은 태어나고 죽는다. 역사 속의 몇몇 예술가들은 역사적으로 영원히 남을 훌륭한 예술 작품들 - 사원건물, 그림, 음악, 글 등등 - 을 통해 두 세계를 성공적으로 결합하며 만들어냈다. 하지만 '영원'도 결코 영원하지는 못하다. 언젠가는 영원도 사라진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전통적인 연극형태는 연극인들 각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 20세기의 예술가들은 창조력과 이해력의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전통적 의식이나, 신화적 요소들은 곧 문door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문이 아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문이며,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이 '문'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자가 가장 강하게 확실하게 이 '문'을 통과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을 쉽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 목적을 위해서 전통적 의식이나 상징들을 훔쳐 이용한다면 본질과 의미가 없는 껍데기 뿐인 반짝거리는 장식품만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늘 진리를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아직 살아있는 전통적 형태가 있는 반면에 오히려 연극의 중요한 경험에 방해가 되는 인습도 많다. 우리는 단순히 변화 자체를 위한 변화를 따르지 말아야하고 동시에 일반적으로 인정된 길을 거부할 줄 알아야한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형태에 관한 것이 된다. 즉 정확한 형태, 적합한 형태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고대 인도 철학에서 나오는 'Sphota'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이 단어는 잔잔한 수면 위에 갑자기 생기는 잔물결, 맑은 하늘에 나타나는 구름을 의미하는 단어로 곧 실제의 표현인 형상, 육체를 가지는 영혼, 첫 음, 우주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인도, 아프리카, 중동, 일본의 연극인들은 오늘날 연극의 적합한 형태를 찾고 있다.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확실한 해답을 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두 가지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뉴욕, 파리, 런던과 같은 서양의 위대한 문화적 도시들의 연극형태를 마치 후진국들이 선진국의 기술과 문명을 습득하듯이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반면에 서양문화를 아무런 분별없이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걱정해 서양의 것을 배척하고 전통과 뿌리를 다시 찾는 제3세계 예술인들이 있다. 위 두 해답은 우리 세대를 반영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 외부로의 통일을 위한 움직임과 내부로의 분열을 향하는 움직임.
하지만 둘 다 바람직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많은 제3세계 연극인들은 브레히트나 사르트르 같은 서양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서양 작가들이 그들이 속해 있던 환경과 시대 속의 독특한 의사 소통과정을 사용해서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작품은 완전히 다른 문맥에서 그 의미를 잃는다. 60년대 서양 아방가르드적 실험의 모방이 이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3세계의 연극인들은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를 찾기 위해서 자신들의 전통적 의식이나 형태를 현대화하려고 하지만 이 시도도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가져오는 실패를 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현재에 충실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나는 포르투갈, 체코, 루마니아를 여행했다. 서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포르투갈에서 사람들이 더 이상 극장이나 영화관을 찾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지만 포르투갈 사람이 말하기로는 오히려 더 가난했을 때는 영화관과 극장이 붐볐고, 지금은 경제가 조금씩 나아지고 사람들이 주머니에 여유가 생기자 돈과 시간을 비디오, CD, 고급식당, 여행, 옷과 같은 곳에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시장중심체제의 서유럽에서 프라하와 부카레스트로 향했다. 이곳에서도 폴란드와 러시아와 같은 모든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와 같은 절망을 접하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극장을 꽉 채웠지만 요즘은 극장 객석의 1/4도 못 채운다. 완전히 다른 사회적 상황 속에서 연극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현상을 또 한 번 직면하게 되었다.
전체주의 탄압을 받았을 때에는 연극은 잠시동안이나마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좀더 낭만적이거나 시적인 존재로 도피를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관객이라는 익명성에 숨어서 당국을 비판하는 연극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행위 속에서 결합하게 해 주었다. 많은 고전 작품들은 배우들에게 보통 때에는 너무 위험하지만 작품을 조금 다르게 해석해서 정부를 비판하고 관객과 은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이런 필요성이 없어지자 연극은 과거에 사람들이 연극에 가졌던 큰 관심이 진정한 연극적 경험과는 무관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유럽의 상황을 다시 한번 보자. 독일로부터 광활한 러시아 대륙을 포함한 동유럽, 또 서쪽의 이탈리아, 스페인, 푸르투갈은 모두 독재국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모든 독재 정권의 특징은 억압된 문화다. 그 문화가 무슨 형태이든지 더 이상 생명이 없고 자연의 법칙을 따라 변하지 못한다. 어떤 한도 내의 문화 형태들은 인정되고 관행화되지만 그 밖의 모든 형태는 거부되고 탄압된다. 20, 30년대 유럽은 연극의 활성기였다. 중요 기술 혁신들은 - 회전무대, 오픈 스테이지, 조명효과, 영사기, 추상적 배경, 기능적 무대 - 모두 이 시기에 태어났다. 연기 스타일, 관객과의 관계, 연출의 위치, 디자이너의 중요성이 모두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 그들은 그들 시대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 뒤로 거대한 사회적 변혁, 전쟁, 대학살, 혁명, 반혁명, 환멸, 전통의 거부, 새로운 자극의 갈망, 새롭고 다른 것에 대한 매력이 뒤따랐다. 오늘날에는 이 모든 것들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극은 완고하게 옛 모습만을 고집하면서 변하지 않았다. 연극은 시대에 뒤떨어졌다. 그래서 전 세대의 연극은 위기에 처했다. 이것은 아주 잘된 일이다. 필연적인 것이다.
연극과 연극 사조를 구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조는 상자다. 봉투가 편지가 아니듯이 상자는 내용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의 크기와 길이에 따라 봉투를 선택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비교는 여기서 끝난다. 봉투를 불 속에 던져버리기는 쉽지만 건물을 버리기는 어렵다. 특히 아름다운 건물은 아무리 더 이상 쓸모없다고 느껴도 버리기는 더욱 어렵다. 우리 마음에 각인된 문화적 습성과 미적 가치와 전통을 버리는 것은 더 어렵다. 하지만 연극은 우리의 본질적인 필요인 반면에 사조는 단지 일시적이며 대치될 수 있는 상자들이다.
그러면 우리가 객석이 텅 비어있는 연극의 문제로 되돌아가보면, 그 문제의 해답이 옛것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인 개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극형태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한, 해답은 형식적일 것이며 실제에서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가 형태에 대해서 너무 많이 이야기 하고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해답을 가져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 연극형태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현대화가 옛술을 새병에 담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 한계를 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만약 오늘날의 연출가, 디자이너, 배우가 형태를 이미지의 재생산으로 이해한다면 TV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다.
현재의 연극은 그 시대에 발을 맞추어야 한다. 마치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가 무턱대고 독창성을 찾기 보다는 그의 창조력을 유동적인 인생의 흐름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연극은 일상적인 면을 담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므로 줄거리, 상황, 주제는 이해되어야 한다. 연극은 본질과 의미를 가져야한다. 본질은 인간 경험의 밀도이다. 진정한 의미를 가져오는 본질을 모든 예술가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작품 속에 담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예술가는 의미란 보통 때 자신의 한계로 볼 수 없는 근원과 접촉을 시도함으로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술이란 우리가 정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한 점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바퀴와 같다.
그러면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구조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연극은 인간 존재의 모든 면을 반영한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형태는 타당하고 모든 형태는 연극적 표현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형태는 단어와 같다 ; 올바르게 사용되어야만 의미를 갖는다. 가장 모호한 철학적 용어와 가장 노골적인 외설을 결합해서 사용할 줄 알았던 셰익스피어는 생애 25,000개의 어휘를 사용, 영국 시인으로는 가장 많은 단어를 사용했다. 단순한 단어들 보다 연극에서는 관객과 의사소통을 성립하고 이루어나가는데 훨씬 더 많은 언어들이 사용된다. 몸의 언어, 소리의 언어, 리듬의 언어, 색채의 언어, 의상의 언어, 장면의 언어, 빛의 언어가 25,000개의 유용한 단어들에 덧붙여 사용된다. 삶의 모든 요소는 광범위한 어휘 중 한 단어 같다. 과거의 이미지, 오늘의 이미지, 달나라로 가는 로켓, 연발 권총, 욕설, 벽돌더미, 불꽃, 가슴 위의 손, 비명소리, 목소리의 무한한 음악적 요소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새로운 문구를 만들 때 사용할 수 있는 명사나 형용사 같다. 우리가 이것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이것들이 필요한가.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좀더 생생하게, 좀 더 통렬하게, 좀 더 역동적으로, 좀 더 정제되고 진실되게 만드는 도구인가?
오늘날 세계는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광대한 인간의 어휘력은 과거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요소들로 인해 더 커지고 있다. 각 인종 각 문화는 인류의 연합을 위한 문고에 그들만의 단어들을 가져올 수 있다. 세계 연극 문화에서 각기 다른 인종, 다른 배경을 지닌 예술가들이 함께 일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다른 전통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우선 장벽이 생긴다. 열정적인 작업을 통해서 공동 목표가 생기면 이 장벽이 사라진다.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에 각자의 목소리와 몸짓은 관객과 함께 표현하는 진실의 언어의 일부가 된다. 이 순간이 모든 연극의 목표다. 이 형태들은 옛것이나 새것일 수 있고 일상적일 수도, 색다를 수도, 정교하거나 단순할 수도 있으며 세련되거나 아닐 수도 있다. 이것들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올 수도 있고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상호 배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만약 스타일의 통일성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오히려 건강하고 의미 있을 수 있다.
연극은 지루하면 안 된다. 관습적이어서도 안 된다. 연극은 예기치 않은 것이어야 한다. 연극은 놀라움, 흥분, 게임, 즐거움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야 한다.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일부가 되게 하고 평소 우리를 포위했던 것들로부터 거리를 갖게 하며 우리와 보통 멀리 떨어져 있던 것들을 가까이 해준다. 오늘 신문기사보다 다른 세계, 다른 시간 속의 이야기가 갑자기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올 수 있다. 관객과 배우가 하나가 될 때만 나타나는 절대적인 믿음, 그 순간의 진리가 중요한 것이다. 이 경험은 일시적인 형태들이 그 기능을 다해서, '문'이 열리고 시각이 변하는 다시는 반복되지 못할 한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었을 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