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배우의 연기에 대하여-리챠드 니콜슨
한국 연극배우의 연기에 대하여 ...
현대 한국의 사실적 연기에 대하여- 크나 큰 행동을 찾아서
[리챠드 니콜스 교수]
현대의 한국연극은 한국의 전통적 형식과 서구의 비사실적 연극을 접목한 실험적 연극(예컨데 이윤택의 "리어왕")과 전통적 형식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고도의 극장적(theatrical) 공연(극단 자유, 미추, 목화등의 공연에서 보여지는) 그리고 창작 뮤지컬 연극 공연(명성황후가 가장 두드러진 예)등으로 세계의 연극계에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일상생활에 바탕을 둔 사실적 대사와 행동을 담은 희곡들의 공연은 덜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우며 그 이유에 대하여 지금부터 말해보겠다.
2000년 5월부터 나는 서울에서 50편 이상의 연극을 보았으며 그 가운데는 "무의도 기행", "오늘", "유리가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오구", "부자유친"등이 있다. 이 글에 담긴 나의 생각들은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연극들을 보면서 떠오른 것들이지만 주로 2002년 7월 이후에 본 다음의 공연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춤추는 여자"
"가시고기"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세 자매"
"검정 고무신"
"눈나리는 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특히 배우들에게 필요한 관찰과 시각이지만 한국 연극계에서 일하는 연출가를 포함한 모든 연극인들에게도 참고가 되길 바란다. 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들은 서구 사실주의 연극에서 요구되는 일반적인 공연의 문제점들(가령 의상의 착용같은)에서부터 연기술에 대한 세세한 충고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나의 한국연극 및 연극인들에 대한 존중심은 순수하며 깊다. 지금 한국의 연극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도전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며 그 도전들은 여러 가지다. 나의 바람은 다만 나의 의견들이 '자연에 거울을 비추어 주어서'(셰익스피어작 "햄릿"중 햄릿의 대사-역주) 한국의 연극인 및 학도들이 그들의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줌으로서 그들의 진로와 해법을 스스로 찾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전반적 느낌
한국의 연출가들과 배우들은 흔히 사실주의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데 특히 배우와 극중 인물간의 깊은 사적(私的) 연계를 요구하는 세심한 심리와 감정 생활로부터 울어나오는 인물들간의 관계에 서투르다고 본다. 그대신 작위적으로 고함지르기, 내적 동기 없이 자주 움직이기, 극중 인물과 상황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 쏟기, 그리고 공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학적으로 밋밋하고(flatness) 대동소이(sameness)하다는 느낌이다. 배우와 극중 인물들이 '발견의 여정(旅程)'(journey of discovery)에 들어가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어떤 구체적인 '인물과 연관된 목표'(character-related goal)를 향해 애쓰지 않고 막연히 기분(mood)에 취해서 가슴이 없이 얼굴과 목소리로만 연기한다. 따라서 그들의 연기는 정서와 템포와 리듬, 질감, 행위의 변화가 매우 적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의 심도(intensity)를 구축하지 못하고 관객은 변화 없이 굳어진 인간성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실주의적 연극 공연을 위해 잘 훈련된 배우들에 의해 공연되는 잘 쓰여진 사실적 희곡의 발굴을 위한 한국인들의 끈질긴 노력에 대하여는 국내의 훌륭한 학자들과 국외의 박사과정 연구자들에 의해 꾸준히 알려져 왔다. 대학로의 열악한 극장 조건, 제한된 제작 예산, 짧은 공연 기간, 고등학교 과정에서의 연극교육 부재(연극반 말고는), 탄탄한 철학에 바탕을 둔 전문적 연기훈련 과정의 부재, 대학로 젊은 관객들의 미성숙한 관극 취향, 관객과 배우가 수작을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정서, 그리고 휴게시간 없는 공연 등등의 요인들이 한국에서 수준 높은 사실적 희곡과 공연을 발전시키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애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딱 증명할 수는 없으나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느낌에 많은 한국의 연출가들은 희곡의 지적(知的) 측면 곧, 주제나 동기등의 지적 속성들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바로 그 지적인 속성이 관객에게 전달되게 하는 세심하고 유기적인 인간의 행동을 소홀히 여기는 것 같다. 나아가서 배우들은 공연에 적극 개입해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공연을 만드는 창조적 과정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대체로 배우들은 연출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생명력이 없고 흥미를 끌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무대 위의 인물들의 행동은 생명력을 상실해 보인다.
어쩌면 한국의 연극은 서구의 것을 모방한 현대 사실주의 연극의 토착화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구의 모델은 한국인에게 맞지 않으며 한국에 맞는 것은 다른데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학로와 서울지역의 한국연극은 여전히 외국 작품에 상당부분 의존해 오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도 셰익스피어가 보다 많은 관심을 끌고 있으나 프릴(Friel)과 체홉등의 서구 사실주의 계열의 작가들의 작품들도 계속 공연되어지고 있다. 이렇게 서구 사실주의 희곡작품들이 공연자와 관객 모두에게 계속 주된 원천이 된다면 한국의 배우와 연출가들은 그런 희곡들을 효과적으로 공연하는 기법들을 익혀야 할 것이다. 그런 기법들은 공연에 참여하는 모든이들이 세부(detail)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습득되어진다.
숙제를 하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7. 17, 문예회관)
"세 자매"(10. 17, 학전 블루)
1989년에 국민대의 이혜경교수는 당시 미시간대 박사과정에 재학중일 때 다음과 같이 썼다.
"번역 희곡작품의 세계와 그안에 그려진 인물을 이해하는 능력은 극적 상황을 재창조하고 인물들에게 개연성 있는 동기를 부여해야 하는 연출가와 배우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문화적 환경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이는 외국 희곡의 해석은 손쉽게 극적 갈등을 단순화 하고 환경의 의의를 소홀히 해서 작품을 망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한국에서의 서양 연극의 이식, 127쪽)"
사실주의는 입센의 경우처럼 어둡고 투박하거나 윌리암스처럼 시적이거나 간에 경험 과학과 결정론적 행동 심리학과 프로이드의 초기 저작들을 중시하는 운동인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실주의는 자연주의처럼 극장 밖의 실제 인생과 대비하여 그 수준이 판단되지만 다른 점은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들은 보다 낙관적이며 극장 밖의 사회적 악을 무대 위에 올려놓아 현실에서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주의는 '자연을 거울에 비추려면' 무대 위에 진실된 인간의 행동을 촉발하고 지지하는 환경을 꾸며내야 한다.
그러나 그 환경이 꼭 물리적일 필요는 없다. 그 환경은 대본에 내재적이거나 공연의 예술적 관점에서 내면적인 것일 수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공연에서 연출가와 배우들은 희곡과 희곡의 문화적 컨텍스트(context)를 이해하지 못했고 무대 환경은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부적절한 의상,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든 집이라고 보기 어려운 아파트(우선 너무 커서 블랑슈와 스탠리 간의 관계를 특징 짓는 성적인 요인이 배제된), 한국 맥주병, 한국 담배, 스탠리와 그의 친구들이라면 살 능력도 없지만 있다 해도 결코 마시지 않을 술병들, 시대착오적 모자, 바지, 전화등등 헤일 수 없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많은 신호들에 의해서 희곡의 세계로 초대받는다. 그 신호들은 시각적인 것도 있고 청각적인 것도 있으며 추상적인 것도 있을 수 있다. 만일 배우들이 그들이 연기하는 환경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이 공연의 배우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무대 환경속에서 연기한 것이 아니라 무대 장치 안에서 연기했을 뿐이다.)우리 관객들은 어떻게 한 순간이라도 극중 인물에 공감할 수 있겠는가? 제 정신 가진 배우라면 어떤 배우일지라도 자기가 자기 아닌 다른 인물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괜찮은 배우와 훌륭한 배우라면 마치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그 행동은 희곡과 등장인물에 대한 심층적 연구에 토대를 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배우인 것처럼 보이려고 꾸미는(pretend to pretend as actors) 대신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behave as if).
그리고 우리는 희곡과 "그 희곡이 쓰여진 문화적 컨텍스트"를 진정 이해하지 않고서는 상상적 상황 속에서 진실되게 행동할 수 없다. "욕망∼"은 미쳐가는 세상 속에서 정상(sanity)을 찾고자 하는 윌리암스의 외침이며 인간의 내적 관계 속에서 순수와 낭만을 되찾고자 하는 그의 기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전차는 블랑슈가 전차 노선의 끝에 도달했으나 그녀 자신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녀의 행동은 전적으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인간 정신의 여정(旅程)을 그린 것인데 그 여정은 블랑슈가 기대한 피난처로서의 여정이라기보다 그리스인들이 망자(亡者)를 위한 집이라 믿었던 엘리시안 필드(Elysian Fields) 지구내에 위치한 이 아파트로 상징되는 영적 죽음으로의 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공연에 참여한 아무도 이 숙제(작품 연구)를 안 했기 때문에 연출의 선택은 희곡의 핵심을 도려내버렸다. 망자를 위한 꽃을 파는 행상도 등장하지 않고 대본이 요구한 낭만적 varsouviana 대신에 호텔의 피아노 바 음악으로 대체했고 가장 치명적인 것은 대본이 요구한 12세 신문 배달 소년 대신에 25세의 청년을 등장시킨 것이다. 윌리암스가 소년을 등장시킨 것은 블랑슈로 하여금 성적 동물인 스탠리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관능을 배제한 순수한 사랑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소년을 제거하고 성인 남자를 등장시킨 것은 순수에의 갈망이라는 이 작품의 주제를 말살시킨 것이다. 이 작품을 진정 이해한 여배우라면 희곡의 이 대목에서의 블랑슈의 욕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런 배역의 대체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 자매" 또한 갈망에 관한 희곡이며 이 공연에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가 몇군데 있었다. 난 베르쉬닌이 떠나기 직전에 마샤가 그를 포옹하는 장면과 1막에서 안드레이가 뒤뚱거리며 등장하는 장면에서 진실성을 느꼈으나 이 작품에서 인간의 냄새는 충분히 풍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느끼게가 아니라)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난 한국인들이 그들의 어떤 생활 속에서 경우에 따라 목소리가 달라진다는 것을 느껴왔다. 교회에서는 갑자기 엄숙한 목소리로 변하고 아나운서가 심각한 뉴스를 전할 때의 목소리 변화등이다. 그런 목소리는 평상시의 목소리와는 완연히 달라진다.
"세 자매"에서 올가의 첫 대사는 "난 지금 매우 불행하며 이 연극은 심각한 연극이에요."라고 알려주는 식의 목소리였다. 이는 연극적 목소리(stage voice)인데 여배우의 내적 삶으로부터 울어나오는 목소리가 아니라 삶에 지치고 불행한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목소리였다. 게다가 그녀는 두 여동생들에게가 아니라 바로 관객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심각하게 보이고 들리도록 함으로서(반대로 나타샤는 천박하게 보이고 들리도록 하듯이) 출연진은 무대 위에서 세심한 인간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관객들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대신에 그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려(indicated)했다. 만약 연극이란 것이 목표를 향한 인간 정신의 운동이라면 인물들 각자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 목표란 단지 모스크바로 가는 것보다 더 깊은 것이다. 배우들이 많은 대사를 토해내지만 어떤 인간적 목표가 담겨 있는가? 대사 곧 말은 인간의 욕구와 생각이 먼저 있은 다음에 나오는 것이지 그 이전이 아니다. 말은 그 말이 암시하는 내면의 행동보다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다. 인간은 먼저 욕구를 가지고 그 다음에 행동한다. 순간 순간의 욕구에 대한 느낌이 이 공연에서는 들어나지 않고 있다.
극의 종반에 이르러 베르쉬닌은 마샤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그것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심정과 아내의 죽음, 그리고 이제 자식들을 돌봐야하는 현실의 중압에서 울어나오는 고뇌의 외침인 것이다. 공연 전체를 통하여 이 클라이맥틱한 대사가 가장 흥미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판소리 효과'라고 이름 붙인 현상, 곧 무대 위의 인물에게 등을 돌리고 관객을 향하여 말하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다. (판소리 효과란 판소리 창자들이 모든 소리를 관객을 향하여 직접 던지는 데서 붙인 이름이다-역주) 문제는 신체 자세의 변화가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 변화이다. 가장 감정이 고조된 순간에서 베르쉬닌은 마샤에게 등을 돌리고 그의 죽은 아내와 남은 자식들에 관해 말한다. "오, 이제 이 아이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며 배우가 마샤에게 등을 돌리고 관객을 향했을 때 그 순간 그의 행동은 진실성을 상실한다. 그는 깊은 내면의 욕구를 가진 등장인물이 아니라 아리아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로 돌변한 것이다. 그 순간 그 배우는 목소리를 높혔고(마샤와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럼으로서 마샤와 소통하기를 멈췄다. 사실주의의 한 증좌는 관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것인데 그 배우는 그 순간에 인생의 어떤 부분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샤와 소통하는 대신에 자기가 맡은 극중 인물이 얼마나 감정에 휩싸여 있는지를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가 관객의 귀에 대고 직접 호소하는 순간 그는 나의 공감을 잃었다.
서양의 연극을 할 때의 문제점 몇가지: 서양의 사실적 희곡들은 서양식 행동거지를 보이는 서양인의 신체를 보여야 한다. "세 자매"의 군인 장교들은 모두 사관학교를 다니면서 독일 교관들에 의해 직업 군인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이 중요한 문화적 측면이 배우들(연출가 포함?)에 의해서 몰각되었다. 배우들은 결코 러시아 장교답게 행동하지 않았고 따라서 체홉이 담은 예술적 의도를 놓쳤다. 모스크바를 갈망하는 여인들을 매료시킨 군인에 대한 '신비한' 이미지와 동시에 외롭고 뿌리를 상실한 그들의 내면의 삶을 병치시키지 못했다.
세 자매들의 의상이 시대를 잘 고증했더라면 앉은 모습, 앉았을 때의 다리의 처리, 손의 사용등 그 시대에 적합한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무대 위에 보다 진실성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배우들이 당대의 회화나, 사진, 건축, 음악, 문학등을 공부하는 '숙제'를 잘 했더라면 그 문화 속에 더 잘 빠져들어가서 육화(肉化)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대사나 외우고 일반적 감정(general emotion)을 연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배우들은 또한 무대 위에서 보다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운 무대 그림(stage picture)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무대에서의 걸음을 연습해야 한다. 무대에서는 관객과 가까운 쪽의 발보다 약간 먼쪽의 발에 무게 중심을 두고 서야 한다. 이 자세로 서야 배우의 앞면이 관객에게 더 열리며 배우의 얼굴이 보인다. 이동(cross)을 할 때에는 항상 관객으로부터 먼 쪽의 발부터 내딛어야 하고 이동은 타원을 그려야 하며 목표 지점에 도착했을 때에는 상대 배우보다 약간 무대 뒷쪽(upstage)에 서야 한다. 무대에서 직선 이동은 매력적이지 못하며 배우들로 하여금 서로 옆면(profile)으로 마주 서게 해서 많은 관객들은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의자에 앉을 때에는 머리 윗 부분이 절대 관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만약에 어떤 배우가 할 수 없이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이 든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 인물에 품격과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도록 애쓰며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허리를 구부리지 말아야 한다. 난 한국에서 많은 노인들을 봤지만 95%는 허리가 굽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한국에서 본 모든 공연에 등장한 노인들은 믿을 수 없을만큼 허리가 굽었다. 이는 "세 자매"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영감과 노파가 똑같은 각도로 허리가 굽었는데 러시아 노인들은 허리가 굽지 않은 사람이 한명도 없을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 노역 인물을 연구하되 결코 손쉬운 해결책을 찾아서는 안된다.
한가지 더. 요즘 한국에서는 서양 인물로 출연하는 배우에게는 굽 높은 구두를 신게 하는 것이 유행처럼 보인다. 베르쉬닌은 말을 타고 전투하는 군인이다. 그는 이런 구두를 신고서는 말을 탈 수 없으며 그 역을 맡은 배우는 무릎을 구부리고 끄는 듯이 걸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이 작품과는 전혀 맞지 않는 신체적 표현이다. 아주 작은 세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사실적 희곡의 공연에는 치명적이다.
연기는 듣고 반응하는 것이다 - 이처럼 쉽고도 어려운 것이다
"춤추는 여자" (9.4, 동숭무대)
내가 발견한 한국의 연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많은 배우들이 대사를 할 때는 지나칠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대사가 없을 때에는 '아무것도 안하는 상태'(a state of non-action)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들은 들을 줄을 모른다. 그들은 듣는척 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얼굴 표정을 쓰거나 손으로 턱을 고이면서 생각에 빠진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듣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다음에 자기가 대사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아무 중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진실로 듣지 않고 다만 듣는 척 할 뿐이다. 진실로 들으면서 관객의 주의를 끌 수 있는 중요하고 흥미 있는 행동을 한다면 이것이 훨씬 더 쉽고 또 관객에게도 흥미를 주지 않을까?
"춤추는 여자"에 출연하는 젊은 여배우들은 무대 위에서의 진실된 행동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실증해 보였다. 그들 연기의 절정은 효과적인 듣기와 반응하기였다. 인생에서나 무대 위에서나 소통은 충동과 메씨지의 발신과 수신, 수신자의 반응, 메씨지의 효과에 대한 해석 그리고 원 메씨지의 내용과 힘에 유기적으로 바탕을 둔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의 반응을 요구한다. 이 과정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지만 매우 복잡하다. 배우는 대사를 공간을 통과하여 의도된 목표에 도달하는 에너지의 분자(分子)들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목표물에서와 마찬가지로 배우는 내보낸 분자들이 목표물에 도달했는지의 여부와 다음 분자들을 발사하기 전에 그 결과가 어땠는지에 대해 주의를 모아야 한다.
이같은 소통은 인간의 대화에서 '작동하는 말'(operative word)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여기서 '작동하는 말'이란 우리의 말에서 정서적, 지적으로 감응하는 말을 가리키며 우리가 말할 때의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말하며 우리가 들을 때 우리로 하여금 반응하도록 하는 말을 가리킨다. 이것은 대사의 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작동하는 말'은 큐보다 훨씬 이전에 올 수도 있으며 그 효과는 우리의 내면의 삶을 일깨우며 진실되고 자연스러운 대화로 안내하여 인물들이 사적인 욕구에서 울어난 대화를 나누며 그때의 소통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도록 한다. 이런 행동에서 발생하는 대화는 살아있고, 변화하며 흥미 있다. 왜냐하면 이런 대화는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어조와 말씨까지 달달 외운 대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최초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매 공연마다 마치 이것이 처음인양 듣고 반응하는 것, 이것처럼 연기는 쉬운 것이며 또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이기기 위하여 연기하라!
"가시고기" (9. 15, 산울림소극장)
위대한 연극은 무대 위에서건 밖에서건 크나큰 감정에 휩싸인 행위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크나큰 행위를 연기하는 것이다. (대빗 마멧, "진짜와 가짜"<True and False>에서)
세계를 통털어 용감한 남녀가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했으되 그들의 투쟁은 문화사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 이야기들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와 품위와 열정을 잃치 않은 그들을 존경한다. 한국의 배우들과 연출가들은 이런 이야기들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연극의 주인공이 극중에서 투쟁에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주인공은 이기기 위하여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진정 극적인 것은 바로 이 투쟁 속에 있다. 투쟁 없는 패배는 관객으로부터 값싼 눈물만 쥐어 짜낼 뿐이다.
연극을 보면서 실컷 우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실상 근래에 미국에는 눈물을 쥐어짜는 연극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것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삶에 대한 이해를 심어주기보다 단지 값싼 동정심과 슬픔에 잠기게 하는 것들이다. 이런 연극들은 먹을 때 맛은 있지만 결코 영혼을 살찌우지 못하는 음식과도 같다. 로버트 버스틴은 이런 연극들이 미국 연극의 질을 떨어트리고 있다고 매도한 바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최근에 영국과 미국에서 인기를 끈 "윗트"(Wit)는 감상적이기를 거부하고 죽음 앞에서 인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하여 의연한 투쟁을 하는 암 환자를 그려보여 우리 관객들에게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하여 모범을 보인 훌륭한 연극이었다.
공연중 어느 대목에서건 눈물을 흘리지 않은 관객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연극은 눈물에 관한 연극은 아니다. 이 연극은 죽어감의 경험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결연한 투쟁에 관한 연극이다. 죽어가는 암 환자는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 싸우며 한 사람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품위와 엄숙함을 유지한 채 죽음을 마지하기 위하여 싸운다.
"가시고기"는 그런 드높은 목표가 없어 보인다. 산울림의 공연은 단지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관객들에게 실컷 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첫 등장 때부터 이 공연은 감정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품위를 지키기 위한 의미 있는 투쟁 따윈 없어 보인다. 구부정한 몸에 처량한 음성부터가 아버지는 이미 패배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비정하고 불평만 늘어놓는 어머니는 평면적이고 희화적인 인물로 일관하여 삶에 관한 가치에 대하여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 그들의 유일한 기능은 단지 못되게 구는 것일 뿐 그들의 연기에 있어서 건질 것이 없다.
이는 "욕망∼"의 공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여배우의 꾸며낸 목소리와 가련해 보이는 걸음걸이는 감정을 들어내 보이려는 기도일 뿐 무엇을 이루려는 행동은 아니다. 첫 등장부터 그 여배우는 블랑슈를 패배자로 연기했으며 더 이상 보여주지 못했다. 블랑슈는 잠시동안 동생집에 머물고(그녀의 생각은) 마침내는 다시 두발로 일어서겠다는 투지를 가진 인물이지 엘리시안 필드에 패배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것은 아니다.
무대 위에서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애쓰는 대신 단지 감정을 연기(playing emotion)하는 데서 오는 근본적인 위험은 연기가 감정에만 휩싸여 행동이 단조롭고 따라서 리듬과 템포의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배우들은 때로 분노에 차거나 고통에 차서 소리를 칠 수도 있지만 그 외침 때문에 행동의 변화가 오지는 않는다. 무대의 매 순간은 동일한 정서적 가치를 지닐 뿐이다. 연극 연기는 명암의 대조를 표현해서 복합적인 색상과 각기 다른 붓놀림과 질감으로 눈과 정신을 매료시키는 키아로스큐로(chiaroscuro) 기법을 사용하는 위대한 회화와 같아야 한다. 연극적 키아로스큐로가 없다면 희곡은 정서적 동일성에 함몰해 버릴 것이다. 최상의 연극은 극중 인물과 따라서 관객을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 만일 등장인물이 위의 아버지와 블랑슈처럼 극의 시작 부분에서 이미 패배했다면 관객은 연극의 나머지를 보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가시고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흐느끼는 관객들을 보았는데 우리 연극 예술인들은 이런 눈물 몇방울보다는 더 고양된 무엇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하지 않겠는가?
연출가들에 대한 고언: 암전은 비 연극적인 것이다! 공연을 암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연극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연극이 시작하기도 전에 2∼3분에 걸친 비 연극적인 나레이션을 들어야 한다면 더더욱 아니다. "가시고시"에서 사용된 암전들은 실제 공연시간에 최소한 15분을 보탰으며 관객의 느낌으로는 30분 이상이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전환을 하면서 작품에 연관된 시각적 자극을 주고 배우들이 극의 진전을 돕는다면 관객과 공연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처리가 "세 자매"의 경우에도 효과적인 선택이 되었으리라 믿는데 여기서도 느린 암전이 극의 진전을 방해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당시의 복장을 한 무대 종사원들이 장치를 전환한다면 관객은 공연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기는 감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유 있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9. 27, 국립극단)
"세가지 근본적인 원리는 너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너의 목적을 아는 것이고 필요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 열쇠이다. (대빗 레이놀즈박사, <흐르는 물위에서 경기하기>에서) "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는 매우 기대되는 시작을 보였다. 흥미있는 음악과 시각적 분위기 속에 매력 있는 한 젊은이가 마치 윌리암스의 "유리 동물원"의 톰이 누이에 대해서 할 말이 있듯이 등장하여 어머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데 윌리암스의 톰의 기능은 그 자신의 인생에서 악령을 추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작품은 고뇌로부터 시작해서 무엇인가 끝났다는 느낌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이다. 극의 종반에 이르러 톰은 그 자신의 이해에 도달하여 의미 있는 여정을 마쳤고 우리 관객도 인간 행위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배웠다.
불행히도 이 작품의 주인공인 작가는 그의 연기에 여정의 느낌을 주지 못했다. 그는 연극이 시작했을 때나 끝났을 때 달라진 것이 없다. 왜 그는 연극 도중에 어느 대목에서 관객에게 직접 말을 했을까? 어떤 그의 욕구가 전달되었는가? 그가 말을 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는 관객에게 말을 했을까?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매 장면들의 극적 기능은 무엇인가? 방금 끝난 장면에서 그가 경험한 것이 어떻게 그를 달라지게 했는가? 그의 생애를 재현해 냄으로 해서 그는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떤 대가를 지불했는가? 그의 연기를 통해서 이같은 질문들(그런 질문들이 던져진 것 같지도 않치만)에 대한 대답은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 굳이 보여주지 않았으면 차라리 나았을 뻔한 장면을 두 장면이나 주인공에게 할애하고 있다. 하나는 엉성하게 편집한 가벼운 포르노 영상이고 또 하나는 끔찍하게 지겹고 불필요한 나이트클럽 장면이다. 그러나 배우라면 대본에서 별 의미가 없는 장면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의미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포르노 장면에서도 단지 기분에 취하는 대신에 어떤 행동을 추구했더라면 무엇인가는 건져낼 수 있지 않았을까. 술에 취하는 장면에서도 단지 꼴보기 흉할 정도로 취한 모습만을 보여주기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의 절망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배우들에 대한 충고 한마디: 결코 취한것처럼 연기하지 말라! 그보다는 항상 취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도록 애써라!)
감정 상태를 연기해 보이는데 주력한 이 공연은 감정적으로 평면적이고 지적으로 공허하다는 인상만 남겼다. 주역 배우는 매력적으로 보였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특히 그가 때때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엿보였을 때는 더욱 그렇다.
배우들에게: 우리의 임무는 보이고 들리는 것이다.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잘 들리지도 않는다. 주연 배우의 머리가 너무 길어서 계속 얼굴이 가려졌고 그래서 그는 계속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겨야 했다. 이 동작을 난 스무번까지 헤아리다가 포기했다. 그 자신의 개인적 문제로 극중 인물에 관객의 주의를 끄는 배우는 바보짓을 하는 것이다. 배우로서 우리는 희곡과 공연에 봉사해야 한다. 이 배우의 머리털은 그러지 못했으며 다만 그 자신의 직업의식의 결여만을 노출시켰을 뿐이다.
덜 하는 것이 더 하는 것보다 낫다
"검정 고무신" (10. 25, 알과핵 소극장)
중국의 무술인 다이치(tai chi ch'uan)를 배우는 수련생들에게 주어지는 격언이 있다. 곧 '세게 잡아당기면 비단 실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이 격언은 누에 실을 뽑는 과정에 빗댄 것인데 불필요한 힘을 쓰면 흐름과 통일성과 연속성을 잃는다는 뜻이다. 내가 유럽과 영국과 동양과 동남아의 배우들을 관찰하면서 능숙하고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운 연기에는 다음 세가지의 자질들이 담겨 있음을 보았다.
1. 거기에는 동작의 경제성이 있다. 능숙한 배우는 한번으로 족한 제스츄어를 두 번 세 번 쓰지 않는다.
2. 거기에는 동작의 효율성이 있다. 어떤 동작을 할 때 꼭 필요한만큼의 에너지만을 사용한다. 어떤 동작도 억지가 없고 그 직전의 동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울어나온다.
3. 거기에는 동작의 보편성이 있다. 곧 특정 배우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동작은 없고 극중 인물에 알맞고 인간적인 것으로 식별이 가능한 동작을 한다.
난 전에 한번 한국의 여배우로부터 내가 한국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연기를 비평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었다. 내 대답은 두가지였다. 첫째, 말은 말 뒤에 감추어진 행동보다 덜 중요할 때가 많으며 둘째, 어떤 행동들은 문화권마다 틀릴 수 있으나 진실로 느낀 순수한 감정은 말을 모르더라도 다른 문화권의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배우에 의해 표현된 인간성이 극의 상황에 충실하고 진실되며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검정 고무신"은 멜로드라마적 연기를 요구하는 희곡이다. 극의 마지막에 남자 주인공이 사망하는 것은 작위적이며 관객들의 동정을 사기 위하여 꾸며진 것이다. 이같은 희곡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아마도 연출의 해석력에 힘입었겠지만 "정신이 열 발자욱을 나갈 때 몸은 고작 한 발자욱만 나감"으로서 멜로드라마에 빠질 위험을 피해 나갔다. 일본의 '노'극에서 유래한 이 은유는 모든 나라의 배우들이 반드시 새겨야 할 말이다. "검정 고무신"의 배우들은 서로의 마음에 대고 말을 했지 서로의 귀에 대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과 영혼이 무대 위의 행동에 빠져들어서 대학로에서 흔히 보여지는 가짜 목소리와 얼굴 표정 따위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서너번의 노래를 부르는 대목에서도 그들의 행동은 진실성이 있어서 나 역시 공연에 빠져들 수 있었다.
지난 몇 달동안에 나는 세 번의 술 취한 장면을 보았다. "욕망∼"과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그리고 탁월하게 연기된 "검정 고무신"등이었다. 정충구의 연기는 통제되었고 절제되었으며 최소한의 신체적 동작만을 보여주었다. 그가 다른 두 공연에서처럼 징징대며 술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은 개인적으로 극심한 불안에 휩싸인 극중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 배우의 정신은 열 발자욱을 딛었으나 그의 몸은 한 발만 내딛음으로서 그의 연기가 단지 감정의 전시(emotional exhibitionism)에 떨어지지 않고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내게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강태기와 반민정이 보여준 장면이었다. 심대한 감정적 고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이 둘은 나란히 앉아 있을 뿐 허둥대지도 외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반대의 전략을 썼다. 대부분의 장면을 속삭이는 투로 말함으로서 극의 긴장도를 높혔다. 음량의 증대가 감정의 강도와 비례하지는 않는다. 이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적은 음량이 오히려 악에 대항하여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감정의 강도를 높여 주었다.
최상의 작품을 골라 연기하라
"눈나리는 밤" (10. 25, 인간소극장)
선수의 능력은 우수한 상대 선수와 겨룰 때 향상된다는 것은 스포츠 세계에서는 상식이다. 이것은 배우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배우의 연기 역량은 최상의 작품을 선택하여 출연했을 때 향상된다. 난 이 "눈나리는 밤"이 50년전에 이미 공연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신흥 후암극단이 무슨 이득(경제적인 것 말고)을 기대하고 이 작품을 공연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재도 낡았고 인물들은 평면적이고 지적이고 정신적인 내용은 눈 씼고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작품이다. 결과적으로 연기는 딱 한 대목의 감동적인 순간을 제외하고는 최악의 가짜 연기를 보여주었다. 신빙성이 결여되고 대사의 트릭과 진부한 동작과 감정 과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오랜 세월 고통받아온 어머니와 두 명의 착하고 근면한 아이들의 재회는 아무 음미할 여지없이 그저 또 한번 눈물을 쥐어짜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공연에서 단 한군데 빛나는 곳은 품위를 갖춘 원희옥이 부른 노래였다. 어쩌면 그녀의 나이 탓인지 아니면 그녀가 노랫말을 너무 잘 소화해서인지 아니면 두 가지를 합해서인지 그녀만이 진실성과 단순성을 보여준 유일한 배우였다. 그 지루하게 긴 공연에서 그녀만이 외로운 보석이었다.
배우들에게: 하다 보면 질 낮은 작품에 출연할 기회가 있을 수 있다. 결코 작품 수준에 맞추어서 질 낮은 연기를 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방향을 찾아서 노력하면 작품이 그나마 나아 보인다.
연출가와 디자이너들에게: 음량은 강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음향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종이를 찢어서 씹은 뒤에 귀마개를 했고 그도 부족해서 손으로 틀어막았다. 대학로의 음향 디자이너들은 연극을 록 콘서트로 착각하고 있지 않나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음향의 디자인에 있어서 좀처럼 섬세함과 톤의 대조, 색깔과 모양을 느낄 수 없다. 음향의 디자인에 있어서도 덜 하는 것이 더 하는 것보다 낫다. 지난 2년간 내가 보아온 연극에서 음향이 공연을 도와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몇 가지 맺음 말
지난 2년간 내가 서울에서 본 연극들은 열정적이고 에너지에 넘치고 강열하며 목적이 뚜렷했다. 이중 최상급의 공연 4∼5편은 어느 나라의 공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최하급의 공연은 미성숙하며 과장되고 기교도 미흡하여 제대로 된 공연이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보기에 현 단계에 있어서 한국의 공연은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 신체적 강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가장 선호하는 것 같다. 잘 조절된 행동은 아직 낯선 관념인 듯 싶다. 선(禪) 화가들은 오래 전에 이미 보여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일부의 배우들은 신체적으로 차분한 가운데 정신의 움직임에 도달하고 조용한 가운데 감정적 힘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아가고 있는 듯 한데 다른 배우들도 이들을 본받기를 바란다.
한국의 연출가들은 특히 세부(細部)에 대하여 무관심한 듯 보이며 연기에 대하여도 둔감한 듯 한데 여타 분야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그동안 내가 관찰해온 많은 부정확한 사례들 가운데 극히 몇가지만 나열해 보겠다.
▶헬렌 켈러의 가방 속에서 20세기 후반의 브래이저가 나오는데 그녀는 결코 그런 종류의 것을 걸치지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그것이 남들에게 보이게 하는 짓은 결단코 안 했을 것이다.
▶1945년에 일어나는 사건에서 20세기 후반의 시계를 사용하는 것.
▶광주항쟁 장면에서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쓴 여자가 등장하는데 1980년대에는 미국에서 아 무도 모자를 거꾸로 쓰지 않았으며 한국의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초의 러시아 작품에서 서울의 신문을 읽는 것.
▶카메라의 플래시 전구가 발명되기 이전인 시대의 작품에서 플래시를 사용하는 것.
▶1940년대 미국 작품에서 잠옷 속에 보석 장신구를 걸치는 것. 그 인물은 그런 보석을 살 능력도 없으며 더구나 그것을 잠옷 속에 걸치지는 않는다.
▶1945년의 작품에서 요즘의 분첩을 사용하는 것.
이런 것들이 관객들에게는 거슬리지 않을지 모르나 배우들에게는 거슬린다. 왜냐하면 미국의 위대한 여배우인 스텔라 아들러가 말했듯이 "무대 위의 모든 것은 네가 그것을 진실되게 만들기 전에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희곡 대본을 무대화하기까지 다음의 단계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 작품 속에 있는 것을 찾아라. 없는 것을 집어넣치 말라.
2. 진실의 환상(illusion of truth)을 보여주는데 익숙해지라.
3. 너 자신과 사회를 이해하라.
4. 너 자신과 극중 인물의 차잇점을 이해하라.
5. 네가 맡은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역을 맡은 배우를 이해하라.
6. 네가 무대 위에서 하는 행동을 통해서 희곡의 주제에 대한 이해를 들어내 보여라.
(스텔라 아들러, <아들러와 함께 연기를>에서)
아들러는 평생을 연기에 대하여 연구하며 연기를 통해서 인생을 풍부히 살찌우고자 했다. 배우란 현대의 무당으로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한다. 한국의 무당들처럼 배우들에게도 이 두 세계를 이을 수 있는 재능은 훈련을 요하며 또한 심중한 책임이 뒤따른다. 배우로서 존경받을만한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스타니슬랍스키가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안의 예술을 사랑해야지 예술 속의 우리를 사랑해서는 안된다'(love the Art in us and not ourselves in Art).
배우들에게: 우리 모두 아다시피 배우란 연극에서 유일하게 필수 불가결한 예술가임을 기억하라. 관객들이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은 다른 누구의 작업보다도 배우의 작업을 보기 위함이다. 따라서 너 자신에게 가장 높은 기준을 부여하고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희생을 각오하라. 네가 해야할 숙제를 반드시 하고 남들도 그러리라고 기대하라. 정확한 의상과 소품을 요구하며 네 자신에게 정직과 정확을 요구하고 함께 연기하는 동료에게도 똑같은 것을 요구하라. 이런 것들을 잘 해내면 결국 한국의 연극과 관객들이 수혜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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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챠드 니콜스(Richard Nichols, Ph. D.) 약력
미국, 펜실바니아 주립 대학교(Penn State University) 연극과 교수
풀브라이트(Fullbright) 수석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