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배우 최현미

류 성 2010. 7. 30. 12:46


배우 최현미. 그에게 또다른 많은 수식어를 붙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배우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수식어를 찾지 못한다. 이건 어쩌면 주제넘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안지도 얼마 안되었고, 함께 작업해 본 경험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객관성은 부족하다.

그러나 시간을 뛰어넘고 객관과 주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어떤 강렬한 느낌이란 것이 있다. 나는 그 느낌을 신뢰하므로 말할 수 있다. 최현미는 배우다.

그는 작품을 읽어낼 줄 안다. 물론 작품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 배우들은 많지만, 주체적 입장으로 읽어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그렇게 읽어낸다. 그 결과가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울 때도 있고, 불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연기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남다르다.

작품이 잘 안 풀릴 때 배우들은 괴롭다. 무대에 몸뚱아리 전체를 내던져야 하는 배우에게 그보다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는 남들보다 수십배는 더 괴로워한다.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일만큼 괴로워하니 동료들이 쉽게 수용하기 힘들다. 어쩌랴. 천상 배우라서 그런 것을.

무대위에 서는 사람들은 대개 무대 뒤의 일에 게으르고 서툴지만, 그는 무대 뒤의 일에도 날래고 능숙하다. 남들보다 경험이 많거나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다. 일복을 타고 났다고 말하는 것은 모욕에 가깝다. 그가 날래고 능숙한 것은 어디까지나 마인드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제 갓 서른이 된 그는 그 세월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 쉽게 견디기 힘든 일을 겪었고,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잃었다. 아마도 많이 아팠을거다.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그 정도 고통은 누구나 겪는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못 이긴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냉혹하지만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굳이 그런 충고를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어린애처럼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핑계삼아 삶과 예술에 게으르지 않으니까. 그러니 풍파와 상처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료가 될 것이고, 잃은게 아니라 더 크게 채워지기 위해 비워 놓은 셈이다. 그런데 무슨 충고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는 또다시 떠났다. 방황인가? 아니다. 머물지 못해 떠난 것이 아니라 길을 찾기 위해 떠났다. 나처럼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쉽게 길을 떠나지도 못한다. 그러니 길을 찾기 위해 떠난 것을 방황이라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배우인 그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건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단지 무대와 함께 가고 있느냐 아니냐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배우 최현미는 무대와 함께 가고 있다. 그러니 가슴 아플 필요는 없고 단지 응원하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