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7 당시 진보연극운동의 극복과제
일제강점기 진보연극운동의 경험-7
당시 진보연극운동의 극복과제
- 류 성 -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에서 진보적인 연극운동을 펼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공연의 허가를 받기가 어려웠고, 다행히 공연을 올렸더라도 그 즉시 공연중지 당하거나 아예 극단자체를 해산 당해야 했으며, 검거와 구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 맞서 진보적 연극인들은 이동식 소형극장 등과 같은 활동방식을 구사했고, 극단이 해산당하면 그 즉시 다른 극단을 건설하여 활동을 이어가는 등 오뚝이 같이 진보적 연극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의 노선에 대한 가치평가를 차치한다면 그들의 활동은 실로 눈물겨운 투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은 매우 힘겹고 어려운 싸움을 전개했으며 이 자체로도 높이 평가를 해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극복해야할 몇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 과제들을 성과적으로 극복했다면 진보적 연극운동은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진보적 연극운동이 극복해야 할 과제의 하나는 재정적 문제를 타개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유층이나 언론, 기업들의 후원을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가난과 착취에 핍박받는 노동자 농민들에게 비싼 공연관람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탄압에 열을 올리던 일제당국이 지원해 줄 리는 만무했습니다.
재정적 어려움은 극단의 존속에도 관계되지만 그에 앞서 공연을 올리느냐 못 올리느냐가 걸려 있는 문제이므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공연을 올리지 못한다면 진보적 연극이 아무 소용이 없을테니까요.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은 대중화를 실현하는 유력한 방도로 제출되었지만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고려된 측면도 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의 후원회, 극장 지지회, 유지권 발행 등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공연 시에 관객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드라마리그’제도(1929년 일본의 ‘좌익극장’에서 시도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극단 소속 단원들이 공연을 올릴때마다 각자 분담금을 차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가지 시도와 노력은 이렇다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재정적 어려움은 진보적 연극운동의 발전을 끊임없이 가로막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탄압을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과 소인극 활성화 등을 통해 진보적 연극을 계속해나간 것도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탄압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극단이 탄압을 받아 해산당하면 그 즉시 다른 극단을 조직하는 전술을 사용하였습니다. 평양의 경우 <마치극장>이 해산당하자 곧 <명일극장>이 조직되었고, <명일극장>이 해산되자 <신세기>가 출현했으며 <신세기가>해산당하자 <신예술좌>가 창단되었습니다. 일단 작품을 검열에서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다가 실제 공연 시에는 검열에 제출한 대본과 다른 식으로 공연하기도 했고 이마저도 불가능 할 때에는 연출적인 기술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부각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필자는 아무래도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습니다. 무산계급의 해방을 기치로 들고 나온 카프에 대해 제국주의 일본이 치밀하게 감시하고 가혹한 탄압을 전개할 것은 너무나 명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자기 정체와 목적을 명칭과 강령 등에 명시하고 신문과 잡지 등에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는 필자가 보기에 실천적이기보다 선언적이라고 보이며, 당시 진보적 연극인들의 조급성과 자기도취적인 사고 그리고 뒤에서 살펴볼 좌경적 경향과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오히려 명칭과 강령은 합법성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해두고 실제 공연활동과 작품은 진보적으로 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불개미극단>은 이름이 주는 강한 집단성과 전투적 어감이 일제 경찰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이로 인해 첫 공연도 올리지 못하고 강제해산 되어 버렸는데 반해 <낭만좌>는 프롤레타리아 연극이라는 말을 구태여 쓰는 것이 그들의 활동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신극을 표방하고 나왔는데 이들의 실제 공연작품은 진보적인 내용의 작품들이었던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좌경적 편향이었습니다.
카프 내에서 진행되었던 이른바 <동반자 작가>에 대한 논쟁을 살펴봅시다. 동반자 작가라는 말은 트로츠키가 혁명적 예술가는 아니지만 혁명의 예술적 동반자라는 뜻으로 처음 쓴 말인데 극좌적인 라프(RAPP)는 <동반자인가 반프롤레타리아 작가인가>라는 글을 통해 이들을 종파로 몰아갔고 종국에는 동반자 작가라는 말이 반혁명과 같은 뜻으로 쓰일 지경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카프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작품활동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지향을 보이는 작가들을 동반자 작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카프내에서도 라프의 논리를 그대로 끌어와 동반자작가를 종파로 몰아가는 좌경적 편향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카프 연극인이었던 김유영은 <이동식 소형극장 공연을 앞두고>라는 글에서 “이데올로기에 밝지 않은 회색극인을 절대 합류시킬 수 없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상적으로 철저히 무장되지 못한 연극인들고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는 발언이며 이 또한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내에 존재했던 좌경적 편향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급기야 연출가 나 웅은 1934년에 이르러 “조직 이외의 프로레타리아적 동반자의 희곡 및 상연을 그 작자와 상연자의 종파적 지위, 소속한 계통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상연이 반동적 단체에 이용된다는 것만을 생각해왔고 그 희곡과 상연이 연극발전의 임의의 단계에서, 계급투쟁의 임의의 단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졌는가를 규명하지 않고 묵살적 태도에 임하는 폐단이 없지 않았다”라고 털어놓게 됩니다.
카프의 좌경적 경향은 조선의 현실에 천착하여 진보적 운동을 펼쳐가지 못하는 비주체적인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어쩌면 카프 결성 초기부터 예정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시 조선은 식민지적 성격과 봉건적 성격이 혼재된 사회였고, 특히 식민지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선차적인 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카프는 이미 혁명에 성공한 소련과 식민지가 아닌 일본, 독일 등의 공산주의 운동이론을 그대로 끌어와 적용시키려 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좌경적 경향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좌경적 경향은 진보적 문예운동 주체의 폭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었 많은 진보적인 예술인들을 망라하지 못하고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었는데 카프가 해산될 때까지도 쉽게 극복되지 못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진보적 연극운동이 극복해야할 과제는 인텔리적 관념성을 버리고 대중 중심의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운동은 인텔리들이 시작할 수도 있고 일정기간동안 주도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대중들이 주인입니다. 예술작품은 대중의 삶과 지향을 진실하게 반영하고, 대중의 정서와 질감으로 표현해야 대중의 열렬한 공감도 일으킬 수 있고 대중이 주인으로 나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가들이 대중 중심의 관점을 획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추적양이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한 글에 “책에서 읽은 대중들과 실제로 만난 대중들은 판이하게 달랐다”라고 언급하는데서도 볼 수 있듯이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 소인극 활동 등은 인텔리적 관념성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시 카프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예술인들은 이를 성과적으로 극복하지는 못했다고 보입니다. 물론 당시의 진보적 작품들이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어 대중의 호응을 받았고,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에 반해 감동이 없는 연설조의 대사가 많은 점, 인물형상에서 구체성이 떨어지고 도식적이고 판에 박힌 인물형상이 많은 점 등도 내외적으로 계속해서 지적되었던 문제입니다. 이는 결국 예술인들이 현실과 대중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관념적으로 창작했을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또, 독일에서 만들어진 슈프레히콜 형식을 도입하여 적극적으로 사용했는데 이 형식은 독일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진보적 연극의 수법이었으나 당시 우리민중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아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또한 당시의 연극인들이 대중에 천착하기보다는 다른 나라의 경험과 이론에 천착하는 등 대중적 관점과 주체적 사고를 온전히 획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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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진보적 연극운동에 대한 연재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매우 주관적인 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보다 필자의 게으름과 얕은 지식에 있기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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