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야기

암호명 <금강석>과 <접선>?

류 성 2008. 10. 13. 14:25
지난달, 그러니까 9월 27일 새벽 6시 20분이었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멍한 채로 받았다. "제가 주차하다가 선생님 차를 받았습니다. 잠깐 내려와보세요."
참 양심적인 사람이구나. 이 시간에 아무도 못봤을텐데. 비몽사몽간에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자그마치 열여덟명이 그 작은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얼레? 이게 무슨 일이래?
이 사람들, 남의 집에 마구 들어와서는 집을 뒤지기 시작한다.

한 명을 잡고 뭐하는 짓인지 물어보니 내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가 있어 우리집을 압수수색하겠단다.
여전히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이건 영화나 뉴스에서만 보던 일인데...

그러니까 이사람들은 자기들이 국가정보원 요원들이라는데 나는 영 믿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 보던 요원들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였다.
검은 양복, 검은 선그라스도 없고, 배도 나오고...게다가 자기들도 잠에서 덜 깬 듯 하다.ㅋㅋㅋ
<요원>들을 다룬 그 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은 다 폐기처분해야 한다.
전혀 사실적이지 않거든.

그런데 우리집에 있던 책이랑 CD, 종이류들을 바닥에 깔아놓고 사진을 찍어댄다.
이건 또 뭐야? 불현듯 익숙한 뉴스의 한 장면이 머리를 스친다.
흉악한 범죄무기들과 관련 증거들을 바닥에 깔아놓은 그 장면...

헉! 그제야 잠이 깬다. 이거 실제 상황이다!
몇 시간 동안 난리를 치던 분들이 돌아갔다. 아래와 같은 압수목록 한부 던져주고
.



무시무시하다.
내 생전에 국가정보원 요원님들을 만나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젠장! 앞으로 맨인블랙 같은 영화는 쳐다 보지도 않을 것 같다.
끔찍하다.

그 요원님들은 압수목록에 있는 물품들을 대부분 바닥에 깔아놓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우리집에서 어떤 증거물이 나왔는지 궁금해서 찬찬히 확인해봤다.

자그마치 86개 품목!
근데 확인해 볼 수록 좀 이상하다.


1번 : 제목은 <1945년 8.15>이고 <작가들>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서점에서 나온 합법적인 책인데.
책제목 글씨가 붉은 색이라 의심하셨나보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좋은 날 아닌가? 이게 위험한 날인가?

2번 : 호치민 평전. 도서출판 자인. 신혼여행지를 베트남, 캄보디아로 갔는데 여행가기전에 앙코르와트 책, 베트남 여행가이드북과 함께 샀다. 이것도 이상하다.
이건 미국사람이 쓴 책인데 왜? 서점에서 샀는데? 왜?

3번 : 조선 교육사. 이건 출판사가 평양이다. 그렇다고 평양에 가서 직접 샀겠나. 우리 색시가 일본 총련계 학교에 <합법적인 연수>를 간 적이 있다. 그때 구입한 거다.
이게 문제가 되면 연수 허가 내준 당국은 뭐고 들여올때 검사하고 통과시켜 준 건 다 뭐냐?


은행 통장들도 싹 가져갔다. 너무하시네... 몇푼 들어있지도 않을텐데.

은행 통장을 가져가는 이유는 뻔하다. 어디서 돈이 들어왔고 어디로 돈이 나가는지를 확인하려는 거니까.
아마 누군가에게서 공작금이 들어오지 않았나 확인하시려는 거겠지.
나도 영화 좀 봤다.ㅋㅋㅋ

생각이 이에 미치자 걱정이 확 밀려왔다! 큰일났다! 내 통장에는 가끔씩 누군가에게서 돈이 들어온다.
학교 동아리 동기, 선배, 후배들이 1-2만원씩 모아서 후원금을 보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혹시 무슨 <공작금>을 받은 증거? 불안하다. 후덜덜....


62번 천리마 2집...지금은 없어진 학생 노래패 중의 하나인데...
옛날에 이 팀이 국가보안법에 걸려든 적이 있었는데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들었다.
아마 이 팀은 이름 때문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젠장...버릴 걸...잘 듣지도 않는데...

63번 공씨디...아깝다...36장...근데.... 공씨디를 왜 가져가나요? 공씨디인 거 다 확인하셨으면서!
혹시 불법 음반복제를 막으려고? 이것도 국가정보원에서 하는 일인가?

64번...부산대 졸업기념 CD를 가져갔다. 역시! 공작금의 출처를 파헤치는게 확실하다.
아니 혹시  부산대 졸업동기들을 다 조사하려는 걸까? 그게 아니면 졸업 CD만든 업자를 조사하려는 걸까?
어쩌면 이 졸업CD에 내가 모르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그게 뭘까?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이 가장 충격적인 것은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사실 처음에는 이걸 보고 기가 막혀 웃음만 나왔다
.

 
 
65번 김광석 클래식, 67번 접속 영화음악.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인데...
그래도 그냥 웃기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요원들이 장난을 치거나 실수를 하실 리 없지 않은가!

그래서....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얻었다.

65번 김광석 클래식은 <김광석>을 <금강석>으로 보신거다.
암호명 금강석. 그럴 듯 하다.

그렇다면 67번 <접속> 영화음악은 왜? 이건 좀 잘 안풀렸는데...겨우 결론을 내렸다.
<접속>이란 두 글자를 <접선>으로 보신 거다.

뉴스를 보니 확실하다. 실천연대를 간첩단으로 만들려고 난리다. 북한에서 무슨 지령을 받았대나 뭐래나...
이명박 대통령은 재향군인회 임원들을 청와대에 초청해서 "친북좌파세력들을 솎아내야..."라고 하셨댄다.

이런! 그럼 나도 "간첩, 지령, 친북세력..." 뭐 그런 건가?
압수목록을 다시 펼쳐 보니 내가 봐도 정말 그런 것 같다.
평양에서 출판된 책, 공작금 들어있는 은행통장, 암호명 <금강석> 클래식, 영화음악 <접선>까지...
각종 증거물이 너무 확실하게 증명해준다. 역시 요원님들은 대단하시다.
배는 좀 나왔지만 치밀하다.

며칠 전, 결국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국가보안법 7조 1항, 5항 위반 혐의로 조사하겠단다.
아...무섭다. 영화에서처럼 마구 패고 물고문하면 어떡하지?

그런데...
한석규 전도연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이 포스터...갑자기 무서워 보인다. 붉은 톤이라서 그런가 보다.
광고 문구도 이상하게 보인다.

"언젠가 만날 것 같은 요원...
2008년 새로운 감수성의 공안스토리
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