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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이란 무엇인가? - 아서 밀러

류 성 2008. 7. 10. 10:56
 


비극이란 무엇인가?


아서 밀러 씀, 오화섭 옮김




 비극의 본질을 다룬 여러 책들이 있다. 이처럼 많은 필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그 주제에 대해서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곧 비극의 개념은 계속 변하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정의를 내릴수 없다는 부분적인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론을 세울 시간도 없고 또 그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비평가와 독자들은 때로 그말을 명사로 사용하지 않고 형용사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어떤 근본적인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 비극이 어떤 결과를 남기는가를 좀더 정확히 인식하므로써 우리는 일반적으로 희곡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고, 한편 그것은 우리 연극의 수준을 끌어 올려 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흔히 범하기 쉬운 혼란은 비극적인 것과 감상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정당성을 갖는 어떤 이야기라 할지라도 부담을 남기기 마련이다. 분명 그 갈등은 가장 저급하고 가장 초보적인 상태의 것이다.순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이런 갈등은 멜로드라마에서나 필요한 것이고 자연 그것은 신체적 폭력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갈등이 멜로드라마를 규정짖는다.


비극의 위계질서에 있어서의 다음단계를 이루는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 될 뿐 아니라, 동시에 결투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되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게 되는 경우 나는 멜로드라마틱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어째서 그것을 행동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하게 되는 경우 나는 굵직한 사건을 꾸미게 된다. 이런 것이 보다 고급스러운 이유는 무었일까? 그 이유인즉 그것이 인간행위의 실제적인 과정을 보다 면밀히 반영해 준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살아있는 인물을 창조해 내는 일 없이도 좋은 멜로드라마는 쓸 수 있다. 사실상 변덕스럽고 모순되는 성격묘사가 실제 이루어지는 경우 멜로드라마는 산만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물을 창조하지 않고 드라마나 비극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떤 한 사람이 행동할 때 그 이유는 무엇이며 -- 정직하게 행동한다고 가정할 경우--그 행동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일단 규명하고 나면, 매우 무리하고 독단적인 형태의 멜로드라마로서는 그 행동을 포섭하는 것이 극히 곤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드라마의 이런 원리 위에 서서 비극을 향해 나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비극은 관객의 마음 속에서 어떤 종류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드라마와 멜로드라마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전자는 또한 후자보다 고차원적이다. 그러나 드라마와 멜로드라마를 시리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한--보다 고차원적인 드라마는 각 인물의 내면적 갈등을 남기는 것이니까--전적으로 감상적인 것과 비극을 구별하는 것은 더욱 더 힘들게 된다. 여기에 사회적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에 더욱 힘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싶다. B씨가 거리로 걸어가다가 떨어지는 피아노에 머리를 부딪쳐 죽게 될 때 신문은 이 사건을 비극이라 부른다. 물론 이 사건은 사실상 B씨의 슬픈 종말에 불과하다. 그것은 단지 그의 죽음의 성격이 우발적인 탓만은 아니고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애처롭고 슬픈 것은 다만 우리의 동정과 비애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고,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동일감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B씨의 죽음은 비극적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극과 감상성으니 근본적이면서도 정확한 차이는 비극이 우리에게 비애와 동정, 동일감과 두려움 뿐 아니라, 연민의 정하고는 달리 우리에게 지식이나 교화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지식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과 관계되는 지식인 것이다. B씨의 죽음과도 같은 그런 종류의 죽음은 어떤 생활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그런 것은 못된다. 요컨데 그의 죽음에는 윤리적인 조명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모두 같이 놓고 설명함에 있어서 우리가 좀처럼 비극을 만들어 낼 수 있을뿐 아니라 비극적인 것과 감상적인 것을 혼동하게 되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 그것은 많은 작가들이 바른생활의원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이고, 둘째 그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소재와 만족을 주는 생활방식에 대한 공인된 어떤 신념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문학은 고통을 주기는 해도 인간을 보다 행복한 상태로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실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암시적 자세로 가득차 있다. 영혼이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행동주의의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한 방법은 단순히 불행의 요인을 분석해 내고자 하는 예술가에게 있어서나 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미리 정해진 미로를 뚫고 그 피할 수 없는 집을 향하여 움직여 가고 있는 말 못하는 동물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개념으로써는 감상성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생을 어쩔 수 없는 불행한 사실로 보는 그런 개념 속에서는 교화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비극을 보다 숭고한 종류의 의식이라 일컫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그 인물이 이럴 수 있으리라는 개연성을 인식시켜 주기 때문이다.


한 작가 하나가 인간이 이럴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거나 강렬하게 암시하려면, 건전한 근거 위에서 인간의 위대한 가능성을 완전히 믿는 그런 이상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이 시인이 역사가보다 위대한 것은 있는 사실만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것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행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할 때 우리는 문학을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비극은 인간에 관계되는 어떤 겸손한 희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슬픔을 감상적인 데서 비극적인 데로 끌어올리는 것은 바로 이런 찬란한 가능성을 일별하는데 있는 것이다.그러나 다시 말하건데 슬픈 이야기를 끄집어내 가지고 그 속에 묻혀있는 희망을 찾아내는 데에는 관계된 인물들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동기가 박약한 낙관주의 만큼 문학에 있어서의 리얼리티를 파괴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알고 그 특성을 설명하게 될 때, 또 그의 무대 위에서의 생활을 이야기의 구조와 목적 이상으로 하도록 해줄 때, 비록 희미하다 할지라도 생활 속에 나타나는 그대로 희망은 그 모습을 그의 모습 속에서 나타내 보이게 되리라는 것이 나의 견해인 동시에 또 나의 편견이다. 옛말에도 있듯이, 우리들의 최악 속에 어떤 선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시민들 중에서는 가장 슬픈 자라고 생각되는 비극 작가는 이런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고, 언제나 악에 굴복되는 대신 그 선 자체가 표현되어질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세계를 가정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비극을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을 것 이라는 말로써 이 글을 시작했었다. 이젠 그 정의를 여러분에게 제시하면서 끝내려 한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최종적인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것은 단순한 감상성을 몰아내는 효력을 갖게된다.


인물들의 리얼리티에 대한 여러분의 신념이 거의 완전할 정도로 그 인물들이 완전하고도 강렬하게 묘사될 때 여러분은 비로소 비극을 보게된다. 그 인물들과 관계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어째서 그들이 슬픔으로 끝을 맺는가 하는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개성을 그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이야기여야 한다.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태도가 하도 엄숙하여서 여러분은 마치 여러분 자신에 대한 것인 것처럼 관계된 사람들에 대하여 철저한 두려움의 싱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의 감각을 확대시켜 주고 여러분의 性線을 자극시켜 줄 뿐아니라, 여러분이 방금전에 묘사되는 것을 보면 그 인간이 그의 강렬한 노력과 욕망에 의해 이 지상에서도 번영할 수 있다는 지식을가지고 떠날 수 있게 된다.


비극은 우리가 기쁨을 이루지 못한 사람 앞에 있을 때 생긴다. 그러나 기쁨이 비극 속에 있어야 하고 바른 생활원리에 대한 기대도 거기에 있어야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감성이 지배하게 되고 무한히 무의하고 근본적으로 진실치 못한 인간상이 창조되어, 사람은 떨어지는 피아노 밑에서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본질상 너무나 적대적이어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우주 속에서 완전히 파멸되고 만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극은 행복을 찾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을 가장 정확하고 조화있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은 비극을 최고로 존중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까닭에 다른 문학 양식과 혼동해서 비극을 감소시켜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누구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또 우리가 마땅히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을 제시해 주는 가장 완전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