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무방비도시 --잘 못 설정된 인물의 목표
<무방비도시>-잘 못 설정된 인물의 목표
-류 성 -
그런데 이러한 설정은 진부함에 빠지기 쉬운 위험한 설정이기도 합니다. 즉, 매력적인 범죄자와 형사의 잘못된 만남, 그 사이에 있는 어머니의 갈등이라는 도식으로 쉽게 빠질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대부분의 범죄영화들은 매우 도식적인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플롯을 무엇으로 잡고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영화가 될 수 있지요. 그러니 이야기 자체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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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방비도시는 범죄영화의 흔한 도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로 갑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등을 이을 범죄영화를 기대했던 많은 분들이 <무방비도시>가 화려한 범죄액션으로 시작하더니 엉뚱하게도 신파멜로가 되어 버렸다고 지적합니다. 그 분들의 지적에 저도 동감하는 편입니다.
<무방비도시>가 원래 표방했던 범죄영화가 되려면 경쟁조직들을 접수하고 서울을 장악하려는 백장미와 광역수사대의 베테랑 형사인 조대영의 이야기가 중심축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초반부는 그런 기대를 한껏 심어줍니다. 그런데 감독의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조대영과 강만옥의 이야기가 중심축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신파멜로의 길로 달려가 버립니다.
저는 이것이 감독의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범죄와 액션에 빠질 것이 아니라 모자지간의 정을 다루는 것이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만약 제가 감독이었다면 그런 의도는 부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아무도 시켜주진 않겠지만 ㅠㅠ)
감독의 의도가 잘 관철되었다면 그 의도가 좋았다, 나빴다로 평가하면 끝날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신파멜로로 빠져버린 것이 감독이 애초에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면? 만약 그렇다면 이야기는 왜 그렇게 흘러가버렸을까요?
영화나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각 인물의 뚜렷한 목표에 따라 필연적인 행동을 낳고 이 행동들이 충돌하면서 갈등이 발생하고 이야기가 구축됩니다. 즉, 영화난 연극 등 극예술의 핵심은 <등장인물의 목표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갈등의
주인공들의 목표를 살펴봅시다.
백장미는 “삼성파를 키워 서울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로 설정되었습니다. 백장미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조대영에게 잠깐 반할 수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면 안 되지요. 조대영을 자기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결국에는 이용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만약 조대영과 사랑에 빠진다거나, 강만옥에 대한 동정에 빠지면 백장미라는 캐릭터는 팜므파탈이 될 수 없겠지요.
강만옥은 “아들인 조대영에게 용서를 받는 것”이 목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더라도 소매치기단에서 벗어나 새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백장미의 회유와 협박이 장만옥의 목표를 방해하고 장만옥은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극중 가장 중심인물이라고 할 조대영의 목표는 매우 모호합니다.
“소매치기단을 일망타진하고 말겠다”는 것도 아니고, “백장미와의 사랑”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싸움 잘 하는 베테랑 수사관이지만 사명감이 투철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소매치기 전담반에 들어가긴 하지만 강한 집념이 보이지는 않지요. 백장미와의 사랑에 빠지는 것도 강렬하지 않고 미적지근합니다. 사
실 조대영의 경우 <소매치기단을 잡는다>와 <백장미와의 사랑>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 하는 인물입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결코 동시에 실현될 수 없기에 긴장을 유발합니다.
그런데 조대영이라는 인물의 목표는 엉뚱한데서 강렬하게 나타납니다. 바로 “결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겠다”입니다.
여기에서 조대영의 목표는 백장미의 목표와 충돌하기 어려우며 강만옥의 목표와 충돌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백장미와 조대영의 ‘위험한 관계’는 조금도 위험해보이지 않을 뿐더러 흥미도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조대영과 강만옥의 이야기는 한없이 강화되어버립니다.
<소매치기 팜므파탈과 광역수사대 베테랑 형사와의 위험한 관계>는 <형사 아들과 범죄자 어머니의 이야기>에 묻혀버리게 되는 거죠.
백장미와 조대영의 장면을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소용없습니다. 장면수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갈등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