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형식-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류 성-
1 가장 유명한 러브 스토리
18세기말에 출간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문화적으로 기이한 현상들을 낳았다. 베르테르의 모델인 예루잘렘의 무덤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유부녀를 사랑하는 청년들이 늘어났다고 했고, 연인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의 자살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는 소문도 있다. 모방작들도 쏟아졌고, 패러디 작품도 나왔으며, 시, 희곡, 오페라, 인형전시 등 2, 3차 창작물도 나왔다. 오죽하면 베르테르 불꽃놀이 대회도 열렸다. 베르테르 장면이 묘사된 도자기도 나왔고, 베르테르 향수, 베르테르 장감, 베르테르 부채도 나왔다. 결혼 후에도 베르테르의 방문을 허용한 로테의 행동에 대한 토론 모임도 열렸다. 나폴레옹도 일곱 번을 읽었다고 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가장 유명한 연애소설 중 하나지만, 편하게 읽기에는 웬지 꺼려진다. 이 소설을 둘러싼 수많은 주제들이 편하게 읽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괴테라는 대문호의 출세작, 독일낭만주의와 질풍노도운동의 특징, 이성주의와 감성주의의 대립, 봉건제적 질서,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 등의 주제들은 흥미롭지만 무겁고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 모든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브 스토리다. 괴테 또한 그러한 주제들을 말하기 위해 러브스토리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그냥 러브 스토리를 쓴 것이다. 때문에 러브 스토리 자체로 읽는 것 또한 정당한 읽기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의 자전적 소설이며, 고백 문학이라고도 불리운다. 괴테는 유부녀인 샤를로테 부프를 짝사랑했다. 알베르트는 샤를로테 부프의 남편인 케스트너가 모델이다. 많은 작품들이 작가의 직간접적 체험에 기초하여 쓰여지지만, 사랑을 다룬 작품들은 유독 작가 자신이 직접 체험을 그대로 풀어낸 경우가 많다. 아마도 상상력만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그 복잡하고 내밀한 정서를 추적하는 것도,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도 어려운 탓이지 않을까. 자살 부분은 그의 친구 카를 빌헬름 예루잘렘의 죽음을 그대로 가져왔다. 베르테르는 예루잘렘의 소식을 듣고 대단히 충격을 받았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다. 그래서일까, 베르테르의 서술 형식으로 진행되던 소설은 마지막 부분에서만 빌헬름의 보고로 서술된다. 괴테는 자신의 창작원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체험한 것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2 첫 눈에 빠지는 사랑
한 친구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적극적인 구애 공세를 펼치더라는 것이다. 친구는 그의 마음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욕이라고 했다. 그 남자의 태도는 춘향의 그네 타는 모습을 보자마자 얼른 방자를 보낸 이몽룡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이몽룡의 마음도 정욕일까. 로테를 만난 그 자리에서 사랑에 빠져버린 베르테르의 마음은 무엇일까.
첫 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현상에 대해 과학자들의 설명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기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과 잘 맞는 상대방인지 아닌지 단 시간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는 본능상 많은 번식을 하는 것이 목표로 설계되었고, 여자는 번식의 양이 아니라 질을 선호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므로 여자에 비해 남자가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남자의 뇌가 여자의 뇌에 비해 시각정보에 민감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들은 주의를 요한다. 사랑을 동물의 짝짓기 행위와 다름없는 차원으로 파악하거나, 지나치게 기계론적으로 접근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남녀 절반 이상이 첫 눈에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결혼에 이르는 비율이 높았고 이혼의 비율은 낮았다고 한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첫 눈에 빠지는 사랑을 옹호하는 입장의 근거로 쓰인다. 그런데 이런 조사결과를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다. 연구자의 가설에 따라 너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국의 어느 연구 집단이 첫눈에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냐고 물었을 때, 1970년대에 조사에는 절반정도가 그렇다고 답변했지만, 1990년대에 조사하자 10%만이 그렇다고 답변했다. 이 조 결과는 사회적 문화적 요인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인간의 마음을 수치화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르겠다.
첫 눈에 빠지는 사랑은 친구의 말처럼 정욕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랑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지속성’이 사랑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인상이 사랑에 빠지는데 커다란 작용을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괴테는 베르테르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한다.
“우리는 첫 번째 인상을 각별하게 받아들이거든. 우리 인간은 가장 신비스러운 것을 쉽게 삼키도록 만들어졌다네. 그와 같은 인상은 금방 확고하게 달라붙지.”
3 사랑과 우정 사이에
스텐버그의 이론에 따르면 사랑은 친밀감, 열정, 책임이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한다. 세 요소들이 각각 홀로 또는 둘이 결합함으로써 각각 다른 유형의 사랑이 나타난다. 예컨대 열정만 있는 사랑, 혹은 친밀감과 열정이 결합된 사랑, 또는 친밀감과 책임이 결합된 사랑 등 6가지 사랑의 유형이 나타난다. 세 가지 요소가 모두 고루 갖추어졌을 때,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느 하나도 존재하지 않을 때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게 된다. 스텐버그의 이론을 끌어들여 각 인물들의 사랑을 설명해보자.
“해와 달과 별들은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나는 때가 낮인지 밤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이 사라진 것만 같다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사랑은 친밀감과 열정이 결합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지배적인 것은 열정이라는 요소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격렬하게 타오르며 사랑 이외에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 쉽다. 또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고 이상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버나드 쇼의 정의처럼 “사랑이란 한 사람과 다른 모든 사람 사이의 차이점을 과장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같은 정도로 도취되어 있지 않을 때 발생한다. 본인은 심한 감정적 기복을 겪으며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상대방은 그의 사랑에 불편해 질 수 있다. 그러므로 종종 외로움, 비애, 질투, 두려움 등 부수적 감정에 시달리게 된다. 상대방과 결합하려는 강렬한 바램이 충족되지 못하면서 발생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적 고통은 오히려 그의 사랑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베르테르를 향한 로테의 사랑은 친밀감이 지배적인 사랑이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열정과는 달리 친밀감의 형성에는 시간이 걸린다. 또한 감정적 기복이 거의 없고 안정적이다. 이런 사랑은 아주 친한 친구들에게 느끼는 깊고 오랜 우정과도 같다. 로테는 베르테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베르테르는 소위 정서적 코드가 맞는 사람이다. 그러다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자기 친구들을 한 번 쭉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뭔가 부족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소개해 줄 만한 친구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는 뭐라고 뚜렷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를 자기 사람으로 간직하는 것이 그녀의 은밀한 마음속 요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로테와 알베르트가 나누는 사랑은 책임이라는 요소가 지배적이다. 전사는 알 수 없으나 로테와 알베르트 간에는 서로를 향한 뜨거운 열정 같은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두 사람은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부분 또한 약해 보인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사실 신뢰하기는 어렵다. 전적으로 베르테르 혼자만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두 사람이 배우자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결혼생활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의지는 매우 확고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사랑은 약속이며, 의지이며, 헌신이다.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이 돌아와 곁에 있다는 생각은 그녀의 마음속에 새로운 인상을 각인시켰습니다. 고귀한 그의 성품과 그의 사랑, 그리고 그의 착한 마음씨를 떠올리자 그녀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그를 잘 받들어야겠다는 깊은 마음의 움직임을 느꼈습니다.”
4 베르테르, 소중한 사람
“내가 사람들을 끄는 어떤 매력 같은 것을 지녔는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따른다네.”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르테르는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자신의 성격을 사랑하며,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자신의 모습을 즐겼다. 베르테르는 “괜히 내 멋대로 내 분위기에 빠져 비유와 장광설을 늘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고,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열린 자세가 없고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한다. 그런데 그의 편지에서는 강한 자기도취적 경향도 함께 읽을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어디로 흐르는지 겸손한 마음으로 깨달은 사람, 행복한 시민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정원을 낙원으로 예쁘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불행한 사람도 무거운 짐을 지고 헐떡대면서도 꿋꿋이 힘겨운 자신의 길을 따라가고 있으며, 누구나 햇살을 일분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그렇지! 그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세계를 만들어내고 행복해한다네. 그 역시 인간이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아무리 속박을 받고 있다고 해도 가슴속으로는 늘 자유의 달콤한 감정을 맛 볼 걸세.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이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말일세.”
나르시시스트들은 타인의 처지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을 관찰, 타인을 재단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기 자신이 남보다 잘나거나 잘하는 점이 있으면 극도로 자신에 대한 과시와 자긍심에 넘쳐난다. 그러나 남보다 열등하거나 뒤쳐진 점이 있으면 지나치게 풀이 죽거나 자기비하를 한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도 어떤 계기를 만나면 순식간에 자신이 아무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베르테르에게 찾아온 첫 번째 계기는 연적인 알베르트의 등장이다. 하필 그는 대단히 멋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더 없이 훌륭하고 고상한 사람이어서 내 비록 어느 면으로 보나 내가 그보다 더 열등함을 인정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다 해도 내 눈으로 그토록 많은 완벽함을 다 차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일세. 차지하고 있다고! 그래, 빌헬름. 그녀의 약혼자가 왔네!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점잖고 다정한 남자일세.”
베르테르가 알베르트에게 느끼는 감정은 질투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질투와 시기를 같은 것으로 보는데, 굳이 양자를 구분하자면 질투는 세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으로써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 없음’이다. 시기심은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으로써 ‘상대방이 가진 것이 내게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일종의 불만상태이며, 그러므로 분노로 표출되기 쉽다. 시기심이 소극적으로 표출될 때는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부러움과 칭찬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강해지면 헐뜯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질투와 시기심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면 약탈, 강도, 살인 등과 같은 파괴적인 것으로 표출된다. 베르테르 또한 파괴적인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이 가졌던 끔찍한 생각을 털어놓는다.
“나의 소중한 그대여! 나의 이 찢어진 가슴속에는 늘 미친 듯이 날뛰며 맴도는 생각이 있었소. 그것은 바로 당신의 남편을 죽이고 싶다는 것! 혹은 당신을! 혹은 나를 말이오!”
질투와 시기심의 밑바닥에는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열등감이 에너지의 원천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잘 못 다루게 되면 자학과 우울증, 무력감 등으로 빠질 수도 있다. 특히 삼각관계의 사랑에서 패배함으로써 발생하는 열등감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사랑에서 패배한 베르테르는 발하임에서 떠나 공사관에서 일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더 큰 시련을 겪는다. 여전히 완고한 귀족사회로부터 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사랑에서의 패배와 사회로부터의 소외는 베르테르의 자존감을 완전히 짓밟게 된다. ‘지난 날 행복에 겨워 이리저리 산책을 하며 발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낙원을 느끼고 온 세상을 사랑으로 감쌀 만한 가슴을 지녔던’ 베르테르는 더 이상 자신을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상처가 나도록 숲속을 헤치고 다니고, 자기 신세를 비웃고, 술에 절고,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짓을 한다. 그는 우울증에 빠지고 극도로 무력해진다.
“지난 날 실생활을 하면서 겪은 불쾌했던 모든 일들, 공사관에 있을 때 겪은 굴욕적인 일들, 실패했거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들이 이제 그의 마음속을 휘저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대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모든 전망으로부터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상생활을 이어갈 힘도 없고요.”
앞서 지적했듯 질투와 시기는 인간과 사회의 발전을 추동하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사회는 이 점을 극단적으로 조장하고 이용하려 든다. 사회 구성원들 간에 질투와 시기를 고도로 조장함으로써 경쟁을 유발시키는데, ‘성공 신화’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 불평등을 극단적으로 제도화하는 것 등은 대표적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극도의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어느 조사 결과에 의하면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70%이상이 열등감을 느낀다고 답했는데,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베르테르처럼 스스로를 살해할지도 모른다.
5 이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베르테르의 변덕스럽고 극단적인 성격에 공감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괴테는 편지라는 형식의 서술을 사용함으로써 절묘한 효과를 거둔다. 편지 형식의 서술은 거리두기와 몰입이라는 두 가지의 효과를 동시에 달성한다. 독자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을 때 느끼는 공감은 베르테르에 대한 동일시 효과가 아니라 편지를 받는 빌헬름과의 동일시 효과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종종 비난받고 소외당하는 베르테르라는 친구가 오직 나에게만, 유일하게 나에게만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다 털어놓는다. 소설의 도입부, 베르테르는 이렇게 말하며 독자의 마음을 열어버린다.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자네에게 이 말을 꼭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근심에 잠겼다가는 이내 기뻐 날뛰고, 달콤한 우수에 취했다가는 이내 치명적인 격정을 터뜨리는 나의 모습을 보는 수고를 그리도 자주 짊어졌던 자네에게 말일세. 나 역시 나의 가슴을 마치 병든 아이처럼 대한다네. 무슨 짓을 하고 싶어하든 그냥 내버려 둔다네.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지 말게나. 나의 이런 모습을 삐딱하게 볼 사람들도 있을테니.”
베르테르의 사랑은 개인의 개성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사랑의 형식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베르테르처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을 환자로 여겼다. 중세시대에는 결혼은 가문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한 정략적인 제도였다. 연애란 일종의 유희이며, 장기간 열정을 쏟아부을 만한 일로 생각되지 않았다고 한다. 시대가 멀리 전진했지만, 베르테르의 시대는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이성의 시대였다. 동시에 감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낭만주의가 존재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 신드롬을 낳을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반면에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몇몇 지역에서는 아예 금서가 되기도 했다.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강렬한 사랑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험한 것이었다.
베르테르라는 인물은 괴테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괴테도, 베르테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들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사랑이라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 자신의 사랑에 대한 변호이자, 상관의 부인을 사랑하다가 베르테르처럼 자살로 생을 마친 친구 예루잘렘의 사랑에 대한 변호이다. 세상은 그와 같은 사랑을 금기시 하지만, 이런 사랑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이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해달라고.
“이와 같은 사랑, 이와 같은 지조, 이와 같은 열정은 결코 문학적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네. 이런 사랑은 살아 있네...사랑하는 친구여.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번 생각해 주게. 이 이야기는 또한 자네 친구의 이야기임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