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성의 예술편지-4 영감(靈感)의 비밀
<류 성의 예술편지-4>
영감(靈感)의 비밀
-류 성-
한 달 전, 돌아가신 스승의 장례식에서 나는 상주(常主)가 건네주는 두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중 한 통은 내 앞으로 보낸 스승의 편지였는데, 3년 전에 갑작스럽게 실종된 그를 꼭 찾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머지 한통은 그의 것이었습니다. 스승은 놀랍게도 눈을 감는 날까지 그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승이 남긴 편지는 그의 실종과 함께 묻어버렸던 나의 옛 감정을 다시금 불러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 또한 스승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심 스승이 그를 더욱 아끼고 신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했고, 그에 대해 묘한 질투심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질투심은 단지 스승의 사랑을 나보다 많이 받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화가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의 재능에 수없이 좌절감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인정했다시피 그는 대단한 예술적 재능을 소유한 화가였습니다. 그는 나처럼 다작(多作)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나는 그 작품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나는 그의 예술적 영감에 매료되었고 마음 속 깊이 좌절했습니다.
되살아난 옛 감정 때문에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禮)로 생각하고 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3년 전에 실종된 그를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실종되기 몇 해 전부터 방랑(放浪)과 기행(奇行)을 일삼았기에 그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을 찾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보름간의 수소문 끝에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기거했던 여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여관 주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약물에 중독된 상태로 경찰에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나는 마침내 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와의 면회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여관주인이 내게 건네준 그의 노트를 훑어보았습니다. 노트에는 대부분 휘갈긴 글씨와 알 수 없는 그림들로 가득했지만, 그 중 몇 부분 또렷한 글도 있었습니다.
“...영감(靈感)이란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가 과학자이건, 노동자이건, 철학자이건 사람들은 모두가 창조적인 상상력과 강한 열정이 치솟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영감의 순간이다. 영감의 순간, 사람은 자기 능력의 최고치를 발휘하게 되며, 이 경험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을 선물해준다. 예술적 영감은 더욱 그러하다.... ”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에디슨의 말은 영감보다 노력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는데, 이러한 해석은 당시 에디슨을 취재한 기자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에디슨은 99%의 노력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1%의 영감을 강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디슨은 훗날 ‘1%의 영감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모두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감이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영감의 존재와 힘을 부정하는 예술가는 없으리라. 영감을 신의 계시로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은 분명 어떠한 방법을 통해 영감의 상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언제나 영감을 갈구했고, 그 중 많은 예술가들은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해 왔다...”
면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 노트를 재빨리 덮어버리지 못했습니다. 퀭한 두 눈에 수척한 그는 희미한 웃음을 흘렸고, 마치 병든 늙은이 같은 잔걸음으로 내게 걸어왔습니다. 이윽고 그의 눈은 내 손에 들려있는, 아직 펼쳐져 있는 자신의 노트에게로 향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흘리는 그의 입술만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후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 혹시 압셍트라는 술을 아는가? 19세기에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술인데, 중독성이 아주 강하지. 중독이 되면 심한 환각, 환청, 착시 현상에 빠지게 돼. 마술적인 영감으로 가득 찬 작품들을 창작했던 보들레르, 랭보, 고흐 등이 압셍트의 대표적인 중독자들인데, 그들은 하나같이 이 술이 자신들에게 영감을 가져다준다고 격찬했다네. 내가 보기에도 그들의 작품과 압셍트 중독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심하게 말하면, 그들은 압셍트 중독에 의한 환각을 시로, 그림으로 표현했단 말이야. 흐흐흐... 이보게. 그러니까 나를 너무 책망하지는 말라는 이야기야. 나도 그들처럼 길을 잘 못 든 것뿐이니까.”
나는 불현듯 언젠가 스승이 그의 작품을 보고는 불같이 화를 내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의 스승은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낼 줄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스승은 그가 잘못되어도 한참을 잘못되고 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뭔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인식한 나는 황급히 작업실로 뛰어갔습니다. 스승은 그의 작품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타는 불길에 스승의 붉게 상기된 얼굴이 비쳤습니다. 스승의 두 눈에는 눈물마저 맺혀 있었지요. 다음 날 새벽까지 잠 못 든 채 가슴을 치며 울고 있는 스승에게 그는 절을 올렸습니다. 짐을 들고 작업실을 떠나던 그는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내게 말했습니다.
“지금껏 나는 영감이 오지 않는다며 괴로워하는 한심한 예술가들 중의 한 명이었어. 나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면서, 아주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있는 어리석은 예술가였지.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 나는 영감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찾고 말테니까.”
그의 기침소리에 나는 옛 기억에서 깨어났습니다. 나는 그의 기침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스승의 부음(訃音)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크게 놀라지도, 그렇다고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입가에 흘리던 희미한 웃음이 사라진 것만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스승이 남긴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읽었고, 나는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두 손을 응시할 뿐이었습니다. 얼마 후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흐르는 눈물을 구태여 닦지 않고 있었습니다.
헤어지기 전, 그는 자기가 받은 스승의 편지를 내게 돌려 주며 입원 치료가 끝나면 찾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시 늙은이 같은 잔걸음을 걸으며 입원실로 돌아갔습니다.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시외버스에 올라탄 나는 스승이 그에게 준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최君이 말했듯 영감은 창조적 상상력과 강한 열정에 휩싸인 위대한 순간이네. 그러나 생활과 이성을 떠난 상상력과 열정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생활의 형상과 이성의 힘에 기초하지 않은 상상력이란 예술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걸세. 영감이란 예술가의 탐구와 노력의 결과라느니 하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겠네. 그러나 이 늙은이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게. 생활을 떠나지 말게. 이성을 버리지 말게...”
“...나 또한 평생 동안 예술적 영감을 갈망해왔고 그 비밀을 탐구했다네. 그리고 과연 예술가가 영감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임종을 앞둔 지금도 확신하지 못한다네. 그래. 영감을 필요할 때 자유자재로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네. 그러나 이 늙은이는 평생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자네는 비록 영감의 주인은 될 수 없을지라도, 영감을 맞이할 준비에 최선을 다 할 수는 있어. 그 때 영감은 결코 자네를 피해가지 않는다네...”
“최君. 자네의 그림을 불태웠던 그 순간에도 자네를 사랑했네. 나는 언제나 자네를 사랑했네.”
나는 격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버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유리창에 비친 한 남자도 흐르는 눈물을 구태여 닦지 않고 있었습니다.
<끝>
***편지형식이지만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쓴 글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