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도로시의 대모험 작업후기

류 성 2012. 3. 30. 15:29

<도로시의 대모험> 작업후기

공연명: 뮤지컬 <도로시의 대모험>
역할 : 극작, 액팅코치, 플레이닥터, 무대감독
공연장 : CTS아트홀, 교총회관
공연기간 : 2012.3.20-29

1.
판타지 장르는 관객집단의 특성과 공연환경의 특성에 따라 자칫 유치하거나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물론, 빤한 내용을 식상하지 않게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기점은 예술가들의 준비정도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문제는 예술가들의 준비정도를 간과한 것이다. 곤란은 역시 대본창작에서부터 발생했다. 작가의 경험과 재능, 취향과 기호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장르였다. 대본에서부터 발생한 곤란은 안타깝게도 연출과 연기에까지 이르러 버렸다. 사실 판타지는 정교한 기술과 화려한 스펙터클에 의존하는 측면이 크다. 뮤지컬 <라이언킹>의 경우 플롯은 단순하지만 기술적 수준이 완벽하고 시청각적 스펙터클이 눈과 귀를 매혹한다. 그렇다고 모든 판타지 작품이 반드시 그런 공식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판의 미로>는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난 슬프고 잔혹한 성인용 판타지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판타지 형식을 차용했더라도 통상의 스타일을 흉내낼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할만큼 충분히 준비돠지 못했고 결국엔 아동극 스타일로 빠져버렸다. 드라마의 유치함에 기술의 유치함이 결합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규칙에 어느 정도 정통할 때에만 그 규칙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예정된 결과였다.

2.
어쩌면 이 작품은 고도로 양식화되거나 정교하게 디자인된 연기술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식화, 디자인의 한계를 제외하고서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연기, 즉 연극적 행동은 양식과 디자인의 유무와 상관없이 갖춰야할 요건이 있다. 연극적 행동은 설득력과 놀라움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 논리적이면서 흥미로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진부하고 평이한 연기행동에 갇혀버렸다. 이것은 배우들의 능력부족, 혹은 연습시간 부족 등의 탓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에게 작업과 작품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점에서 발생했다.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에 대한 신뢰, 자기 작품에 대한 신뢰는 집단작업인 연극예술에서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행동을 자극하지 못하는 대사,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디렉팅, 구체적 성과없이 진행되는 연습 등은 배우들을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작업과 작품에 대한 불안과 혼란은 배우들이 연기의 주체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게다가 시간부족을 핑계삼은 기계적인 연기코치는 배우의 자유로운 표현마저 가로막았다. 주체가 되지 못한 배우들은 작업과정에서 의존적이고 소극적인 작업태도에 빠져버렸고, 이는 실제 공연에서 대단히 위축된 연기 혹은 쥐어짜내는 듯한 연기로 나타났다. 극히 다행스러운 것은 공연 중반 이후에 배우들의 힘에 의해 상당한 수준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3.
연극은 쉬워야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심오해야 한다. 이는 스토리, 캐릭터, 연기, 무대미술 등 연극의 모든 요소들에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지만 특히 주제에 많은 관련성을 가진다. 작품의 주제는 하나지만 다수의 의미망을 포함할 수 있다. 좋은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은 보면 볼수록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렇게 발견된 새로운 의미들은 모두 작품의 주제와 서로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품에 심어진 다수의 의미망이 하나의 주제에 의해 '중층적으로' 조직되어 있음을 뜻한다. 우리의 작품은 그렇지 못했다. 주제는 명확하지 못했는데 여러가지 의미망이 각기 흩어진 채 따로 놀고 있었다. 어렵다, 난해하다는 등의 관객평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업에 참가한 예술가들조차 주제를 정리하지 못하거나 또는 함께 공유하지 못했으니까. 기획단계에서 보건측의 요구는 모호했고 창작단계에서 작가 또한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결국 여러가지 의미들이 난삽하게 나열된 대본이 나와버렸다. 원작대본의 문제는 각색을 거치며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복잡해졌고, 연습과정에서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채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4.
작업이 언제나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잘 풀릴 때도 있고 잘 안 풀릴 때도 있다. 이번 경우는 후자의 경우다.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는 잘 안 풀린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모두들 불안해도 웃었고 불만이 있어도 인내했다.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분위기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서로 배려했다. 우리는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 했다. 그런데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러 버렸다. 우리는 '인간적 최선'에 한참동안 머물렀고 '예술적 최선'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가지 못했다. 곤란에 빠진 작업을 돌파하려는 의지, 작품의 한계를 끝까지 개선해 보려는 치열함 대신 우리는 한동안 다음과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정도 한 것도 다행이다, 문제는 보이지만 내가 해결할 수는 없어,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일단은 그냥 가야지, 막연하지만 어쨌든 열심히는 해야지, 시간도 없고 더 뭘 하려고 해봐야 무리야, 뭐 하다보면 좋아질 수도 있겠지. 그렇게 주저하거나 미루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악어처럼 물고 늘어지는 투지를 발휘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공연 중반 이후 배우들에 의해 이뤄진 전환은 대단히 의미있는 변화였다. 하지만 그 변화는 좀 더 일찍 시작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