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극, 빛과 그림자
거리극, 빛과 그림자
작성자 류 성
"네가 극장에 찾아오지 않는다면, 연극이 너에게 찾아가리."
-1996년 프랑스 거리극 종사자들에 의해 발간된 로슈포럼 자료집의 서문 중-
거리극의 개념
거리극(street theatre)은 말 그대로 거리 혹은 야외에서의 연극을 지칭한다. 그러나 단순한 명칭과는 달리 실상은 단순하지 않다.
첫째, 거리극은 장르적 범주화가 쉽지 않다. 거리극은 서켜스, 퍼레이드, 춤, 마술, 노래, 연주, 영상, 설치미술, 구연, 인형극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과 융합하는 경향을 띄며 넓은 의미에서의 퍼포먼스와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기존 연극의 형식과 미학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실제로 거리극 단체들은 거리나 야외가 아닌 천막, 창고, 주차장, 미술관, 박물관, 체육관 등에서도 공연을 펼치는데 이러한 실내에서의 공연 또한 거리극으로 포함한다. 이는 '거리극'에서 '거리'라는 의미가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거리나 야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실내극장이 아닌 곳'을 지칭하는 것임을 뜻한다.
요약하자면, 사실상 거리극은 '비관습적 공연공간에서의 비관행적 공연을 총괄하는 개념-이화원 교수-'이라고 볼 수 있다.
극단 일토로피의 대표작품인 <색깔있는 사람들>이 공연중이다.
시원과 원천
거리극의 개념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리극의 시원과 원천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연극의 시원인 고대 제의의식, 거리 퍼레이드 및 마임, 소극, 중세의 수레무대 등 연극과 예술은 대개 공공의 공간인 거리 혹은 야외에서 펼쳐졌다. 그러던 것이 르네상스 이후 실내극장이 축조되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실내극장에서의 공연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연극사 전체로 볼때 실내 극장에서의 공연이란 고작해야 몇백년 되지 않은 것이다.
거리극 이론가들은 거리극이 '매표'를 전제로 공연되는 근대 이후의 연극을 거부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삶과 뜨겁게 재회'하려는 의도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거리극은 그 자체로 기계문명과 도시화에 대한 비판적 저항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리란 사회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이자 근대화, 도시화에 의해 소외된 길-비포장 도로-의 개념으로서, 각 개인이 자신만의 영역을 벗어나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공공의 공간으로 기능한다고 역설한다.
프랑스 거리극 이론가들은 프랑스 및 유럽의 거리극에 영감을 제공한 중요한 원천으로 1968년 프랑스의 대규모 학생운동을 꼽는다. 흔히 68혁명 세대라고 지칭되던 이들은 모든 종류의 권위에 도전하고 기성세대의 제도를 거부하며 사회의 각 방면으로 영향을 확장해나갔는데, 이들의 영향이 거리극 부흥의 원천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비단 프랑스 뿐만 아니라 흑인 민권운동 및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 북아일랜드 전쟁 발발 등이 잇달았고, 자연히 국가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불신, 서구문명에 대한 회의, 부의 공평한 분배와 자유에 대한 갈망 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각국에서는 새로운 연극의 경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리빙 씨어터, 빵과 인형극단, 아우구스토 보알 등의 작업은 이러한 맥락에 있으며 이들은 거리극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요컨대 거리극은 이러한 시대 흐름을 타고 부흥했다고 볼 수 있다. 거리극의 부흥은 기존질서에 대한 비판과 저항, 그리고 새로운 대안의 창출이라는 정치적 함의와 깊이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레제앙 뒤 쉬드의 판쵸와 제젤과 산쵸 공연
실종된 정치적 함의
1996년 오리악 축제에서 열린 거리극 시장(거리극 에이전시들과 각국 축제 기획자들에게 작품을 홍보하는 리셉션)에서 한 사나이가 갑자기 테이블 위에 올라가 옷을 한가지씩 벗어던졌다. 그리고 행정당국의 권위를 조소하기 위한 해프닝이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2006년 샬롱 축제에서 진행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산책>이란 거리극은 시의 공무원들과 시장이 싫어하는 거리의 노숙자, 집시들이 자신들을 시 외곽으로 몰아내려는 시 행정에 반감을 표시하는 하나의 시위였다.
일견 아직도 저항적 성격을 표출하는 상징적인 행위들이 벌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조차 이미 축제 이벤트의 하나로 편입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리극 부흥 초기에 가진 정치적, 실천적 함의는 사실상 실종된 것이다. 각종 거리극 축제에서 두드러졌던 정치적 성향은 이미 거의 사라지고 오락성을 극대화한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보다 직관적인 이유가 있다. 거리극은 그 특성상 대중들에게 무상으로 공급되는데, 이는 정부와 기업의 협조와 재정지원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권력과 제도의 수혜를 얻으면서 권력과 제도를 부정하는 것은 거리극이 태생적으로 가지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거리극 단체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게 되자, 바야흐로 생존을 위한 경쟁구도에 빠져들게 되었다. 거리극 단체들은 축제에 초청되거나 지원을 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되고 체제순응적인 태도는 강화되어 가는 것이다.
거리극 단체들은 현대에 이르러 축제뿐만이 아니라 소위 도심프로젝트라고 불리우는 활동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삭막한 도시 환경에 예술이 개입하여 문화적 윤기를 더하고 보다 인간 중심으로 개선해나간다는 공공예술의 개념이다. 대개 거리극은 사람들의 생활공간에 개입하여 전개되는데, 이러한 특성은 단조로운 삶에 신선한 자극과 충전의 계기가 되어 줄 수 있으며, 문화적 풍요를 더해 줄 수 있다.
또한 무상으로 공급되는 공공예술적 성격을 가짐으로써 예술이 특정계층의 향유물로 국한되는 현실을 극복하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소외지역을 찾아다니거나 관객참여형의 경우 공공적 의미는 더욱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대개 행정당국의 지원이라는 전제 하에 진행되므로 여전히 국가 제도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거리극 전문단체인 경계없는 예술센터의 <유리벽 남자>.
중흥기의 위기
거리극은 연극의 새로운 중흥기를 열고 있다고 평가할 만큼 최근에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세계 거리극을 선도하고 있다는 프랑스의 경우, 중앙과 지역정부 및 지역기업들은 거리극 축제에 막대한 재정지출을 할뿐만 아니라 거리극 작업장들을 상설하여 거리극 단체들에게 연중 무휴의 거리극 작업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실상은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극단 유니테의 연출가 '자크 리브신'은 2006년 열린 샬롱 거리축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랑스 전역에서 248개의 축제가 열리고 1500개 극단이 존재하는데 29개의 극단과 47개의 프로젝트만이 보조를 받는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일년에 총 5만3천100개의 작품을 만드는데 팔리는 것은 7440개 밖에 안 된다. 그러니 거리 예술인들이 가난할 수 밖에."
최근 거리극은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로 자리잡은 프랑스의 오리악 축제와 샬롱 거리축제, 소트빌 축제, 라몽빌 거리축제 등이 그 증거로 되고 있다. 산간지방의 소도시에 불과한 이 지역들이 거리극 축제로 인해 관광객이 들끓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예술축제가 소모적인 것이 아닌 생산적인 것임을 경제적으로도 입증한 셈이다.
오리악과 살롱 등의 거리극 축제의 성공사례를 따라 세계각지에서 거리극 축제들이 급속도로 늘어났지만 역설적으로 거리극의 위치는 더욱 불안하게 되었다. 많은 축제가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관광객을 끌어들여 수익을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고 거리극은 그 수단으로 전락하기 쉬워졌다. 한쪽에서는 거리극을 대안적 예술로서 추켜세우지만 또다른 한쪽에서는 관광수입을 올릴 수단으로 간주하는 시선도 강화되었다.
오리악의 전경. 이 작은 도시에서 세계 최고의 거리극 축제가 열린다.
애초에 가졌던 정치적 의미를 상실한 채 제도와 자본에 포섭되자 거리극은 크게 두가지의 극단적인 경향성을 띄게 되는 듯 하다. 한쪽 극단은 상업화되는 경향이다. 실제로 몇몇 거리극 단체는 막대한 재정투입을 기초로 정교하고 복잡한 장치와 도구를 활용하여 화려한 볼거리들을 연출해낸다. 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치로 무장한 거리극들도 있으나 이 경우에도 별다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오락적인 기능을 극대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한쪽 극단은 예술지상주의적으로 되는 경향이다. 기존 양식의 해체 등과 같이 무의미한 형식적 실험을 반복할 뿐 역시 별다른 내용은 없다.
혹자는 기존 예술의 관행을 깨뜨리는 그 자체가 저항적인 성격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소문뿐인 세익스피어>라는 거리극의 사례를 보자. 이 공연은 공공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홍보가 된다. 그리고 관객들이 공연장에 착석하자 화재경보가 울리며 대피하라는 안내가 이어진다. 허둥지둥하며 밖으로 빠져나온 관객들 앞에서 공연은 실외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전개된다. 공연은 세익스피어의 희곡들의 일부를 자르고 편집하여 구성되었다.
이 공연은 세익스피어란 최고의 작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공연장이란 관행을 거부하고 있는 셈인데, 그러나 도대체 이러한 공연이 어떤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며, 오히려 무의미한 형식적 실험을 과도한 정치적,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여 포장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로얄 뒤 뤽스 극단의 <술탄의 코끼리>. 실로 엄청난 규모의 공연이다.
대안과 새로운 도전
거리극은 연극의 새로운 대안으로도 주목 받고 있다. 연극의 새로운 대안이 요구되는 것은 앞서 지적한 실내극장의 전통을 거부하고 공공의 장소인 거리로 귀환하려는 사고와 더불어 영상매체와의 경쟁이라는 측면도 있다. 현대에 이르러 영상매체가 급속한 발달을 이루자 연극의 변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학적 측면에서나 제작과 보급의 측면에서나 도대체 경쟁이 되지 않으로 연극은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창출해햐 하며, 그 전략의 핵심은 바로 현장성을 극대화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관객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교류를 생명으로 하는 거리극이야말로 영상매체로 인해 코너로 몰린 연극이 부활할 수 있는 모범적 사례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영상매체의 발달을 과도하게 위협적으로 인식하는 사고가 깔려 있다고 보여진다. 단적으로 영상매체가 혁명을 거듭하며 21세기를 맞았지만 그렇다고 극장을 중심으로 한 연극예술이 몰락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거리극이 기존의 일반적인 연극과는 다른 공연양식과 미학적 특성을 창출하고 있고, 관객에게도 색다른 예술적 체험을 선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다시 실내극장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연극과 소통하고 피드백 되어 연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거리극이 기존 연극의 부정이 아니라 기존연극을 극복하는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드라마의 포기'라는 경향을 해결해야 한다. 많은 거리극들이 의도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드라마'를 포기한다. 그런데, 드라마가 포기된 극을 어떻게 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거리극이 '드라마의 포기'라는 경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심화해나간다면, 거리극은 거리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질 뿐, 연극의 대안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거리극이 가지는 공연양식과 미학적 특성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연출가들에게 거리라는 환경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실내극장과는 달리 여러가지 제약 요인들이 뒤따르지만 그 대신 공연환경이 다양하기 때문에 오히려 실내극보다 연출적 상상력이 발휘될 소지가 넓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거리극으로 인해 일상적 공간이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변화하는 것은 실내극장의 작업에서는 느낄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준다.
거리극은 특히 배우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많은 거리극은 작가에 의해 완성된 희곡과 장면, 대사가 없다. 게다가 공연의 상황은 예측불가능하므로 미리 정형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배우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배우는 미리 완성된 희곡과 정해진 장면이 없으므로 예측불가능한 현장의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연기를 해내야 한다. 또한 극장이 아닌 야외, 거리라는 조건은 배우에게 말보다는 몸의 움직임을 극대화한 연기, 그리고 다양한 기예와 예술매체들을 활용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거리극은 배우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반면, 예술가로서 배우의 존재를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 많은 거리극에서 배우는 역할을 연기하는 사람의 의미보다는 어떠한 미션의 수행자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 때 사실상 거리극의 배우들은 연기예술을 펼쳐보이는 연기자로서의 역할은 거의 무의미하게 된다. 예술가로서의 배우가 아니라 하나의 매개체로서, 혹은 디자인적 구성요소로서, 혹은 진행자로 역할하는 것이다.
안산 거리극 축제의 모습.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