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강정풍경] 작업 후기

류 성 2012. 12. 30. 21:42

1인극 강정풍경 작업 후기


작품 : 1인극 강정풍경
역할 : 극작 연출 연기
장소 : 2012. 8.28 아트홀 소풍


하지만 인생은 원하는대로 풀리지 않았다. -스콧 피츠제랄드의 머리와 어깨 중에서-
처음부터 1인극을 준비해 볼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적당한 시를 한 편 골라서 연기하듯 낭송하려고 했다. 사실 이런 형식의 공연은 몇차례 해 본 경험이 있었으니 준비하는데 그리 부담될 것 없었다. 게다가 공연의 결과는 대개 안전하다. 약간의 새로움이 있는 형식이니 관객을 집중시키기 좋다. 그럭저럭 잔잔한 감동 정도는 줄 수 있고 감동을 주지 못해도 별로 흠잡힐 것도 없다. 좋은 글만 확보하면 반 이상 준비된 거나 진배없다. 강정마을에 관한 시를 뒤적거리던 행위는 각종 인터뷰 글과 동영상들을 뒤적거리는 행위로 발전했다. 취재 아닌 취재를 하며 나는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었다. 강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스며들어왔다. 그렇게 며칠의 낮과 밤이 흐르고 어느날, 문득 내 마음속엔 어느 촌로의 형상이 떠올랐다. 나는 당황했다. 1인극이라니? 대본은 어떻게 쓸 것이며 연기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1인극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또 얼마나 위험한지를 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내게 1인극은 저 멀리 있는 무엇이고 그래서 동경해야 할 무엇이다. 나는 애초에 생각했던 낭송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생은 원하는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고 창작도 마찬가지다. 마음 속에 떠오른 형상은 머릿속에서 두드린 주판보다 강한 힘을 발휘했다.

기댈 곳은 마음밖에 없었다.
대본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보고 듣고 스크랩해둔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장면이 되고 대사가 되었다. 물론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지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내 마음 속에 떠오른 촌로의 형상을 실물화시켜낼 수 있느냐, 왜곡없이 진실하게 표현해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촌스러운 예술관을 가졌기 때문인지 예술적 진실에 집착하는 편이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적 진실이란 이렇다. 그 형상이 사실에 기초해야 하고 예술가의 기술과 진심이 서로 도와야 이룰 수 있는 것. 강정마을에서 누가 오신다는 얘기까지 들으니 더욱 신경이 쓰였다. 촌로의 형상이야 취재 덕분에 어느 정도 사실과 가깝다고 할 수 있겠으나, 배우로서 나의 기술은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내가 연기 잘 한다는 얘길 듣고 싶은 욕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못 한다는 소릴 듣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릴 때처럼 잘 한다 소리 듣고 싶어 안달복달하지도 않는다. 어릴 땐 잘 한다는 소리에 취해 살았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됐다. 어른이 될 수록 칭찬받기 어렵다는 걸. 그건 좀 슬프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를 칭찬해주는 것이니까. 어른이 되고도 칭찬받는데 집착하는 건 아직 유치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어쨌든 내가 기댈 것은 마음을 다해 준비하는 것 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취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읽고 녹음하고 수정했다. 또 취재하고 또 읽고 녹음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길을 걸어가면서, 잠자리에 누워서도 중얼중얼거렸다. 공연이 올라가는 날에는 일찌감치 극장에 도착하여 몇 번이나 리허설을 했다. 내가 기댈 곳은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이 외로움은 또 무엇인가
몇 차례의 연습을 진행하면서 나는 1인극 연기가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어진 상황과 상대배우에게 집중하면 대사를 잊는 법이 거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발화되는 말은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다. 그런데, 1인극 연기에서 상황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야했고, 발화를 위한 내적 충동을 스스로 재생산해야 했다. 그것도 끊임없이. 여기에 실패하면 어김없이 대사를 잊어버리거나 생동감을 잃어버렸다. 그럴 때, 나는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좌절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려운 일이고, 내 경험은 일천하니 당연한 것 아닌가. 문제는 그 실패가 종종 외로움이 되어 파고 든다는 것이었다. 연습할 때마다 나는 줄곧 외로움과 싸워야 했는데, 그 외로움은 단순히 혼자 있다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혼자서 글을 쓰고, 혼자서 연습을 하는 것이야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이 외로움은 생소한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내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아니면 1인극 연기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무엇인지 고민했지만 답은 알 수 없었고,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지만 결코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참, 그 외로움은 공연하는 그 순간만큼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엔 뭐라 말 할 수 없이 행복했다. 

공연을 마치고
모든 관객의 시선이 오직 내게 집중되어 있다는 건 배우로서 얼마나 굉장한 희열일까. 반면에 그것은 얼마나 굉장한 버거움일까. 역시나 내겐 후자가 더 크게 다가왔다. 분장실 커텐 사이로 강정마을에서 오신 여성위원장님이 보였다. 비록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공연 시간이 다가 올수록 나는 불안했고 긴장되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호흡은 얕아지고 자꾸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무대는 내가 준비되는 걸 기다려 주지 않는다. 몇 차례 집중이 흐트러지는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공연은 그럭저럭 잘 끝났다. 공연이 끝난 후, 강정마을 여성위원장님은 "연극에서 보여준 것이 모두 사실이다"라고 얘기해주셨고, 몇몇 관객들은 내게 "진짜 강정마을에 사는 어르신 같았다."고 얘기해주었다. 배우로서는 최고의 찬사를 받은 셈이다. 소풍에서 마련해 준 정성 가득 담긴 선물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탈진한 듯 쓰러져 잠들었다. 고작해야 십몇분에 불과한 짧은 공연이었는데, 그 동안 소모한 에너지는 꽤 많았던 모양이다. 갑작스럽게 시작한 1인극 작업이었고, 그래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지만 또 많은 걸 배운 듯 하다. 공연 다음날, 나는 노트에 1인극 페이지를 만들고 몇 가지 연구과제, 몇 가지 아이템들을 메모했다. 

**2012년 8월 28일. 아트홀 소풍은 제주해군기지문제를 알리고 강정마을을 지원하고자 '강정 이야기 콘서트'를 기획했다. 아트홀 소풍이 판을 벌이고, 인천지역의 여러 예술가들이 재능기부형태로 참가하며, 공연 수익금은 강정마을에 보내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