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간밤에 꾼 꿈을 되새겼다. 감옥에 잡혀 들어가는 꿈. 꿈 속에서 그 상황은 아주 무서웠다. 일상의 소중함, 앞날에 대한 희망 등 모든 것이 야금야금 파괴되는 것은 공포였다.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줄달음쳤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세상의 모순이 나 자신에게 닥쳐왔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싸우기는 커녕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어쩌면 내 삶은 모두 거짓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란 사람은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럽고 어처구니 없고 졸렬하고 멍청하고 비겁한 녀석이었구나.
사실 술 기운에 든 이러저러한 생각은 쉽게 흘러가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스스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하는 방법으로도 흘려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니 이번에는 그 녀석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럽고 어처구니 없고 졸렬하고 멍청하고 비겁한 그 녀석은 여전히 거짓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가면을 벗기고 싶었다. 뭔가 해야 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면을 쓰고 있는 무기력한, 그러나 파괴되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화장실에서 후다닥 뛰쳐나와 종이를 찢고 색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손이 가는대로 아무렇게나 스케치를 했다. 다음 날, 조언을 받아가며 스티로폴을 깎았다.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 작업은 미적 성취가 중요한 작업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찰흙처럼 덧붙이는 방식으로 입체를 만드는 것에 비해 깎아서 입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몇 배로 어려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칼질이 워낙 서툴러 두세군데 베이기도 했다.두 시간 정도 깎고 파내다 보니 그제야 칼질이 익숙해지는 듯 했다.
어느 정도 만들고 나서 확인해보니 생각보다 가면이 너무 컸다. 너무 평면적으로 깎았기 때문이었다. 평평했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깎기를 거듭했더니 크기가 줄어들고 입체감도 조금 더 살아났다. 깎고 다시 스케치하고, 깎고 다시 스케치하기를 반복하다보니 가면의 모양도 차츰 변했다.
4-5시간을 깎아댔더니 그제서야 어느 정도 모양이 나왔다. 가면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속삭이 듯 말을 걸었다.
"널 벗길거야. 그러니 날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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