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술 이야기

서양연극사 연구3-중세의 연극

서양연극사 연구 3-

-류 성-


중세의 연극


1) 개괄


로마제국이 와해되었지만 유럽 전역에 축제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축제는 기독교가 아닌 이교의식에서 성장한 것이었으나 교회는 강제로 축제를 금지시키지는 않았다1). 대신 기독교 축제로 전환시키거나2) 종교적 의미가 없는 축제로 전환시켜 나갔다.

 이러한 축제에서 유랑집단들이 소극과 마임 등의 연극을 지속한 것으로 보이지만,  교회에 의해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연극을 탄압했던 교회가 다시 연극을 부활시켰다는 사실인데, 10세기부터 예배극을 도입한 것이었다. 중세후기(14세기)가 되자 성사극이라고 불리는 대중공연이 시작됐고 비로소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교회, 국가, 시민 등 전 지역 사회의 재원을 끌어오게 되었다.3)


2) 예배극


 처음에는 몇몇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행해졌으나 얼마 후 성당 내에서 대중교육을 위해 공연되었다. 초기의 예배극은 길이가 아주 짧고 단순했지만 점차 길고 복잡해졌다.


 건물의 복도와 구조를 이용했는데, 성가대 위층은 천국을 재현하는데 사용되었고 본당 바닥 밑에 있는 지하실은 지옥을 재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성당 곳곳에는 한 개 혹은 수개의 맨션4)이 세워졌다. 배우들은 맨션을 이동하면서 공연했다.

 성직자와 합창대 소년들이 연기를 했으며 대사는 라틴어로 된 노래였다. 연기는 사실적이기보다는 도식적이었을 것이다.


3) 성사극


 12세기에 종교적 주제의 연극이 교회 밖 광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했고, 14세기에 자국어로 된 성사극이 생겨났다. 예배극이 교회 밖으로 나오면서 성사극으로 되었다는 학설도 있지만, 예배극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전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성사극은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5)

 성사극은 성경의 내용을 다루었으며 극의 길이는 아주 다양했으나 길게는 한 번 공연하는데 40일이 걸리기도 했다. 극 전체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이어 붙인 것이라 각 극 사이에 인과관계는 없었으며 느슨한 구조를 가졌다6).


대사와 연기, 무대배경 등은 도식적이었지만 기적과 같은 특정장면을 연출하는데서는 사실주의적인 환영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다.7) 환영과 공포 등을 통해 종교적 믿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성서를 무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악마, 악인, 광대가 나오는 희극적 장면이 많이 있었다는 특징도 빼놓을 수 없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대사가 라틴어에서 자국어로 바뀌었고8), 배우는 성직자에서 일반인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4) 제작과 공연

 교회가 대본을 승인하면 의회는 각각의 길드 특성에 맞게 극을 배분했다. 노아에 관한 극은 조선공, 뱃사공, 어부에게 주어졌고, 동방박사에 관한 극은 금 세공인에게, 최후의 만찬을 보여주는 극은 제빵업자에게 주어지는 식이었다. 길드는 수레, 무대장치, 의상, 소품, 특수효과, 배우, 연출을 공급할 책임을 졌다.

 때로는 배역이 300명에 달했고 복잡한 특수효과 등이 필요했으므로 '축제의 지도자'라고 불리는 연출가들이 고용되었다9). 길드 조합원 혹은 일반시민들을 상대로 연기자들을 모집했고 때로는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공연 전까지 2번에서 5번의 정기 리허설이 진행되었고 후원회가 연기자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제공했다. 공연에 임박하면 포스터가 붙고, 연기자들이 의상을 갖추고 도시를 행진했다.

 성사극의 길이가 다양한 만큼 공연시간도 매우 다양하여 새벽4시에 시작하거나, 오전 7시부터 시작하거나, 오후공연만 하거나, 12시간동안 쉬지 않고 공연하는 경우도 있었다.

 입장료는 대부분 무료였지만 유료인 경우도 있었다. 관객이 너무 무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나 감시인도 이용되었다.


5) 연기자와 연기

 성사극 중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5-10명 정도의 연기자가 필요했지만 전체 총 연기자의 숫자는 매우 많았다. <사도행전>공연에서는 494개의 역할이 300명의 연기자에게 배분되었다.
 

 연기자 모집에 성직자나 귀족, 여성이나 소녀도 가끔 참가했지만 대부분은 성인 남성들과 소년들이었다.  보수를 지급받는 경우도 있었으며 리허설을 놓치거나 규칙을 어기는 것에 관해 벌금도 물어야 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면  의상과 소품을 연기자 자신이 마련해야 했다.

 일반인들이었으므로 연기력과 연기양식 등은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야외광장에서 하는 공연이므로 역시 발성이 좋은 연기자가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몇 안 되는 감정(찬양, 기쁨, 분노, 슬픔)으로 정형화되어 있었기에 섬세한 연기력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6) 세속극


중세시기에 예배극과 성사극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주제를 다룬 극도 존재했으며 성사극의 발달과 더불어 서서히 힘을 얻어갔다. 마임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세속극은 유럽전역에서 존재했다.

 그 중 소극은 설교적이면서도 풍자적인 성향이 강했다. 대표작인 <유랑하는 학자와 무당>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학생은 어떤 남자에게 악마를 불러낼 수 있다고 납득시킨다. 이어 한 성직자에게는 그 남자의 부인과 간통한 죄를 감춰주는 대가로 악마로 분장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남자에게는 악마를 불러내는 대가를, 성직자와 부인에게는 그들의 간통에 침묵을 지켜주는 대가를 받는다.>.

 도덕극은 성경에 기초한 도덕적 교훈을 주는 내용이었다. 대표작인 <만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인은 죽음의 신의 부름을 받고 도망가려 노력하나 마침내 운명에 자신을 맡긴다. 죽음에 함께할 동반자를 찾지만 이전의 친구들인 친절, 재물, 우정으로부터 버림받는다. 마침내 오직 선행만이 그를 따라 무덤으로 들어간다.> 도덕극은 점점 더 종교적 주제에서 벗어났는데 <연회의 저주>라는 작품은 과식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소극과 도덕극 등의 세속극 들은 성경의 인물과 사건으로부터 벗어나 보통 사람으로의 전환을 가져왔고, 르네상스 작품의 토대가 되었다.


7) 중세 성사극의 종말

 16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성사극은 급속히 쇠퇴하여 1600년에 이르면 거의 사라졌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교회는 내부알력싸움으로 분열을 겪었고, 흑사병이 유행했고10), 사람들은 교회의 능력을 의심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교회의 분열이었다. 교회의 분열에 따라 연극은 종종 특정한 교리를 공격하거나 보호하는 무기로 이용되었다.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각국의 통치자들과 종교회의 는 연극을 논쟁의 불씨로 간주하여 금지시켰다. 당연히 연극에 대한 보조와 지원도 없어졌다. 금지에도 불구하고 연극자체는 중단되지 않았으나 종교적 주제는 소멸했다.

 이는 다른 변화를 낳았다.
첫째, 극작가들은 종교적 주제를 떠나 세속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르네상스로 부활된 그리스와 로마연극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고전과 중세유산의 결합이 이루어지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연극이 탄생했다.
둘째, 라틴어 대신 자국어를 쓰면서 붕괴하기 시작했던 국제적 연극의 토대는, 연극이 종교적 주제를 포기함으로써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 결과 각국의 드라마가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발전하게 되었다.
셋째, 교회, 시의회, 길드 등의 보조와 지원이 중단됨으로써 이제 연극은 완전히 상업적인 토양에서 자라나야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세시대의 미술작품
 

1)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개종되거나 지도자가 개종할 때 함께 기독교인으로 등록된 명목상의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2)원래는 예수의 생일이 12월 25일로 확정되지 않았지만, 이날 전후로 밀집한 이교의 겨울축제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3)이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전시켜왔던 연극의 부활이나 계승은 아니었다. 연극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연극의 부활과 계승은 중세이후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4)무대배경이 되는 가설구조물을 말하며 천국이나 지옥이 아닌 세속적 장소를 상징했다. 그러나  어느 장소를 나타내는지 명확하지는 않았기에 말로 소개되거나 이름표를 걸어두었다. 크기와 모양은 상징하는 바에 따라 다양했다. 예배극에서 사용된 맨션을 이용한 일련의 공연관습들은 중세 연극의 표준이 되었다


5)이 시기, 교회의 지배적인 위치는 사실상 줄어들기 시작했다. 도시는 성장을 거듭하며 자치적으로 운영되었고, 그 권력은 주로 길드에 있었다. 대학들은 비종교적 학문에 대해 탐구할 수 있었다. 연극 공연도 교회의 완전한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대본은 여전히 성직자들이 수용할 수 있을만한 것이었고 공연은 역시 종교축제에서 행해졌다. 여전히 연극의 내용은 종교적인 내용이었고 주요 연극적 관습도 교회에서 행해졌던 것이었다.


6)중세인들에게 모든 사건은 하느님의 뜻대로 발생했기에 인과관계는 문제시 되지 않았다.


7)천국은 도금, 숨겨진 횃불 등을 사용해 빛나게 했으며 기계장치를 이용해 천사들을 날아다니게 했다. 지옥은 괴물의 입으로 상징되어 그곳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삼키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불, 연기, 소음, 울음소리, 비명 등이 새어나왔다. 바닥에 장치된 함정문을 사용하여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거나 사라지게 했고, 5분간 비 내리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잦은 고문과 사형장면에서는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사람과 인형을 몰래 바꿔치기 했다. 화형장면에서 실제로 사람 타는 냄새가 나게 하려고 인형 안에 동물의 뼈와 내장을 채워 넣기도 했다. 건물이 불타는 장면을 위해 구조물에 실제로 불을 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들로 인해 유다역의 배우가 교수형 장면에서 거의 죽을 뻔 했고, 사탄역할의 배우는 의상에 불이 붙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지옥장면에서 대포나 다른 장치 때문에 종종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8)라틴어 대신 자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유럽공통의 드라마보다는 각국 고유의 드라마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9)프랑스의 장 부쉐는 '축제의 지도자'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무대, 배경, 기계장비의 설치를 감독한다. 무대배경을 세우고 도색작업을 할 사람과 객석을 만들 사람을 구해야 한다. 배달된 물자의 양과 질이 적절한지 확실히 해야 한다. 배역을 정하고 리허설을 해야 한다. 배우를 훈련시키고 규칙을 어긴 자의 벌금을 정해야 한다. 자신이 몇몇 역할을 연기할 수도 있다. 입장료를 받을 사람을 정해야 한다. 극이 시작할 때 관객에게 인사말을 하고 막간 휴식마다 이전에 진행된 사항을 요약하며 곧 이어 더 기적 같은 일이 있음을 약속한다.


10)전염병이 돌 때, 많은 군중들이 모이는 연극 등은 열리지 못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세시대 교회 내부의 모습